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45화 (245/1,132)

< -- 245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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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신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군요."

비엔 5번 행성의 델루지 종가 테라스에 유난히 큰 체격의 두 남자가 작은 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큰 키에 다부지고 균형 잡힌 몸매, 짤막한 붉은빛 머리칼을 가진 미남자는 그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듯 한 자그만 찻잔을 입술에 기울이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뒤뜰의 정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남성호르몬이 느껴질 듯한 강인한 구릿빛 얼굴 위로는 초록색으로 번득이는 큰 눈동자,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코와 턱의 짧은 수염이 그 오랜 기간 제국을 사실상 좌지우지해온 이 근위대장 베흔의 매력적이기까지 한 외모를 결정짓고 있었다.

"하긴, 어머니 계셨을 때만 해도 1년에 한두 번씩은 왔었지?"

방금 전 황제령에서 베흔과 함께 도착한 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은 간만에 돌아온 고향 비엔의 밤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키며 느긋하게 웃음을 지었다.

"6번 행성 쪽 준비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베흔의 질문에 제롬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특수부대 정예병 50놈 이미 보내놨어. 가디언들 보낼까 했다가 그 녀석들은 워낙 검색이 쉽게 되어서......플라칼 가 정규군 놈들 동부하고 붙느라 다 빠져나가서 어차피 우리 정규군들이 거기 진주해있었으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지. 플라칼 가 놈들 몇 놈 구워삶는 것 정도야......"

"플라칼 가가 눈치채지 못하게 처리하셔야 할겁니다."

"지깟 놈들이 눈치채 봤자지. 알아도 어쩌겠어?"

제롬이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딸기 한 알을 입에 집어넣었다.

평소 취향대로 사과를 씹으며 베흔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 일로 망신을 당할 당사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칼받이로 써먹으시려면 잘 달래고 비위도 맞춰 줘야죠. 친척 사이에 괜히 이런 일로 감정 상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알았어, 알았다니까."

제롬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 습관처럼 귀찮은 듯한 태도로 대꾸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어제인가 그 미치광이 유학자 놈하고 샤드니 놈이 주페 태자 무덤 앞에서 제례에 참석하겠다고 온 카렐 녀석을 죽이려고 설쳐댔다고 합니다. 그 잘난 놈이 유학자들 앞에서 피떡이 되어서 도망쳤다니까 이제 동기는 완벽해졌죠. 조용하게 저지르는 것보다는 요란스럽게 터뜨리는 것이 더 좋겠죠?"

"푸훗,"

제롬이 찻잔의 남은 차를 훌쩍 들이마시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타이밍이 절묘하니 이제 일을 저질러도 우리 쪽을 의심하는 녀석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최고제후께선 오셨나?"

집 안쪽에서 웬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롬 공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에게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하지만 사뭇 매서운 표정의 이 여인은 자신을 맞아주는 남편을 곱지 않은 눈으로 말없이 째려보고만 있었다.

흑인종 혈통을 물씬 풍기는 이 미녀의 도톰한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추려던 제롬은 그가 내질러온 매서운 따귀 한 대에 기겁을 하며 무안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왜요? 이 지겨운 정실부인보다는 세호 가에서 온다는 그 어린 계집의 보들보들한 입술이 더 먹고싶지 않으신가요?"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이 사뭇 쌀쌀맞은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순간 당혹한 제롬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내 오늘 말해줄 참이었다오......내 신분이 신분이니 소실 한둘 정도는 있는 편이......"

"그랬나요? 나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각오는 하고 있었죠. 그런데, 언제 내게, 아니 처가인 우리 가문과 상의 한번 했나요? 이미 그쪽 가문하고 멋대로 약혼까지 다 하셨더군요? 오호, 지참금까지 거셨고요? 한 두 푼도 아니고 1억 골드나 된다면서요? 정말 까무러칠 일이군요? 돈 쓸데가 그리 없으셨나요? 어떻게 정실부인 맞으면서 주고받은 선물 액수보다 일개 첩실 들이는데 주는 지참금이 더 클 수가 있죠?"

"그건......"

부인에게 얻어맞은 뺨을 움켜쥔 제롬이 식은땀을 흘리며 차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베흔 역시 놀란 표정으로 오르테 부인과 제롬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지난번 솔이라는 그 계집......"

"근위대장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난처해진 제롬이 엉뚱한 베흔에게 버럭 신경질을 부렸다. 오르테 부인의 신경질은 계속되었다.

"그년이 그렇게 미인이라고요? 그런데, 페로 그 망할 놈 전 부인이 가디언하고 바람피워 낳은 년이라면서요? 최고제후 체면에 귀족도 아니고 그런 천박스런 사생아를 명색이 첫째 소실로 맞고 싶으신가요? 가문 후계자인 딸아이 볼 면목은 있으세요?"

"내가 설명하겠어요, 그건......"

"설명 따위 필요 없어요. 당신은 소실을 맞으면서 내게 말도 않고 숨겼고, 가문의 종장으로서 한 두 푼도 아닌 1억 골드나 되는 거금을 계집 하나 사들이는데 쓰려 했죠? 가문을 어지럽히고 정실인 나를 철저히 무시했으니 나도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요. 시어머님 역시 찬성하지 않으실 거예요."

뒤로 휙 돌아선 오르테 부인은 씩씩거리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성난 부인의 모습에 난감해진 제롬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페티 부인을 '시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큰소리를 쳤던 오르테 부인이 이번엔 솔 문제로 그 시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려는 모양이었다.

제롬이 테라스 난간에 발길질로 괜한 화풀이를 퍼부으며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제기랄!"

"북부 출신, 하급귀족. 블리크 시어리. 내일 저녁에 출발하는 4번 행성 행 편도 티켓 하나."

신분증과 함께 매표 창구에 많지 않은 돈을 내민 카렐은 안쪽 터미널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치안군 병사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창구 직원이 카렐에게 티켓을 내주며 장난처럼 중얼거렸다.

"학회인지 머시긴지 때문에 분위기도 시끌시끌하고......뭔 놈의 군인들은 종일 여기 죽치고 앉았는지."

"내일쯤이면 좀 조용해지겠죠?"

"아마도."

표를 사 쥔 카렐은 어깨에 뒤집어쓴 순록털 망토 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의 짧은 낮 시간 동안 해가 희미하나마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관 옆 푸주간 앞을 지나던 카렐은 오전 11시가 넘어간 지금까지도 가게문이 열려있지 않자 내심 불안한 기분이 덜컥 들었다. 가게 앞을 잠시 기웃거리던 카렐은 결국 청년이 묵는 판잣집으로 다가갔다. 그는 이 안에서 얼어죽어 있는 어린 청년의 모습을 비롯해 오만가지 흉측한 상상을 잠시나마 떠올렸지만 다행히도 안에서는 '산 사람'의 느낌이 오고 있었다.

카렐은 이 집이랄 수도 없는 판자 무더기 중에 도대체 무어가 문인지 잠시 헤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곳이나 똑똑 두들긴 카렐은 안에서 들려오는 하품 소리와 기지개켜는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잠이 덜 깬 표정의 어제 그 청년이 판자 조각 하나를 쓱 밀며 모습을 나타냈다.

"누구세요....."

카렐은 그제서야 이 판자 무더기 안의 자그만 공간을 볼 수 있었다. 한두 사람 가까스로 누울만한 작은 안에는 변변한 난방장치 하나 없었고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듯한 낡은 담요 무더기가 고작이었다.

"고기 좀 사러 왔는데.......시간이 11시인데 아직 가게문 안 연 건가?"

"예에? 11시라구요?"

그제서야 눈을 휘둥그래 뜨며 벌떡 일어난 노예 청년은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가게문을 열었다.

"이걸 어째, 주인님한테 걸리면 맞아죽을텐데......어떡해....."

"내가 마수걸이로구먼."

카렐이 어깨를 으쓱 했다.

"정말 죄송해요, 추워서 새벽 내내 잠을 설쳤어요......겨울이라서 해도 안 뜨고......시간도 까맣게 몰랐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왜 나한테 그러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가게로 따라 들어간 카렐은 가게 안쪽에 큼직하게 붙어있는 주인의 연락처 코드와, 노예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부정행위를 하면 즉시 연락해달라는 살벌한 문구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추운 곳에서 가까스로 잠을 자고 난 청년의 손끝과 얼굴이 파랗게 변해 있었지만 청년은 행여 이 앞의 손님이 신고나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추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싶었다.

"순록 뱃살로.......한 관만 주게나."

"예, 예, 기다리세요,"

허둥지둥 고개를 꺼내들었던 청년은 보관고 앞에 붙어있는 작은 메모지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청년의 비명에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에 손이 갔던 카렐은 갑자기 그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도대체......"

"12시까지 양고기 저민 거를 20관이나 식당에 배달해주기로 되어있었는데.....이걸 어째요......"

"지금 하면 되지 뭘 그러나?"

"20관을 언제 다 써냐구요.......가뜩이나 칼질도 서툰데......서너 시간은 걸릴텐데 이제 30분 남았으니......"

청년이 눈물을 훔치며 일단 양고기 덩어리를 꺼내놓고 있었다.

"일단......손님 꺼부터 해 드릴께요,"

청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렐이 주문한 순록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그는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자락으로 닦아내며 공포와 걱정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그의 손등에 남아있는 선명한 채찍 흔적과 울먹이는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며 카렐은 괜히 이유 없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여기요,"

순록 고기 한 관을 거의 10분이나 걸려가며 가까스로 썬 청년은 카렐로부터 2골드의 돈을 넘겨받기가 무섭게 얼른 양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 빗나가는 칼은 넓적하고 보기 좋은 조각은 고사하고 부스러기만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다못한 카렐이 질문을 던졌다.

"환장하겠네. 어디 쓸건데?"

"케, 케밥에 쓸거라고......"

"그런 부스러기 고기로?"

카렐의 퉁명스런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청년의 크고 검은 눈에서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 손은 나름대로 고기를 썰어보려 꽤 애쓰고 있었다.

"에이 씨, 못 봐주겠네. 비켜 봐,"

청년을 거칠게 밀어낸 카렐이 부스러기 고기를 한쪽으로 치워놓으며 그의 칼을 빼앗아 들었다.

"봐, 칼을 코앞에 바싹 붙이고 칼질을 하면 그게 힘이 들어가냐고! 각도를 이렇게 잡고! 두께 얼마?"

"10장 붙이면 한 치 나올 정도......"

"알았다."

갑자기 타타탁하며 나기 시작한 칼질 소리에 청년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소, 손이......"

"10분 안에 해야된다며!"

눈 깜짝할 새 양 한 마리 분의 등심살을 다 썰은 카렐은 청년이 내민 큰 봉투에 확 쏟아 넣었다.

"다음 꺼!"

"예, 예."

신기에 가까운 빠른 칼놀림에 반쯤 넋이 나간 청년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고기를 토막내고 있는 칼날과 카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혹시......고기 다루세요?"

"고기 쪽은 아니지만......뭐, 아주 관계없다고도 할 수는 없겠지."

또 한 무더기의 저민 고기를 봉투에 쏟아 넣으며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면 스무 관 맞아?"

몇 덩어리의 등심 덩어리를 순식간에 종잇장 무더기로 만들어놓은 카렐이 손을 털며 물었다. 채 5분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썰어놓은 20관의 고기가 손수레에 가득히 담겨있었다.

"예, 맞네요,"

청년이 저울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부터 당장 칼질 연습이나 죽어라 해. 알았어?"

"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을 닦은 카렐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청년을 뒤로하고 방금 산 순록 고기 봉투를 든 채 다시 여관을 향했다.

발 가 종가에서 기다리던 제네르는 '지원 병력'을 직접 이끌고 온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슬레이프니르 단장에 선임된 이후 단 한번도 영내를 떠나지 않고 부하들과 숙식까지 함께 하며 훈련과 팀웍 다지기에만 열중하던 그가 전장을 벗어나 이 먼 서부까지 찾아온 건 그로서도 꽤나 뜻밖의 일이었다.

제네르 스스로는 라마단 학회 참석 문제까지 엉켜있는 데다가 지난 마랄루의 전투에서 다친 몸 때문에 '구출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는 무리인 상황이었다. 전사단에 자신을 대신할 '지휘관급' 한 명을 함께 보내달라 요구했던 제네르는 생각보다 훨씬 쓸만한 사람이 오자 나름대로 안도하고 있었다.

"부대는 어쩌고?"

"도비치 부단장이 맡고있으니 괜찮습니다. 작전 개시는 언젭니까?"

"지금 당장 출발하게나. 나는 곧 학회가 개회될 테니 이곳에 머물겠네."

"알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한 베아트릭스는 함께 온 시로, 킵, 헨지와 4명의 페로 가디언들을 돌아보았다.

"전하로부터 아직 연락 없습니까?"

"전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베아트릭스는 그대로 휙 돌아서서는 투창 한 꾸러미가 든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불끈 둘러메고는 말없이 객사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네르는 베아트릭스가 사라진 객사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베아트릭스가 왜 그리 급하게 뒤로 돌아섰는지, 서둘러 객사로 사라지던 그의 눈꼬리에 왜 작은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제네르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저렇게까지.......숨기고싶을까?"

"헨지 저 녀석 바위 타는 기술 하나는 정말 일품이라니까."

한밤의 어둠 속에서도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헨지의 뒷모습을 올려보며 킵이 혀를 내둘렀다. 위장포를 입은 채 잠깐 새 거의 꼭대기에 도달한 헨지는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헨지의 수화를 확인한 킵이 베아트릭스에게 보고했다.

"경비병 22명, 가디언 4명이라고 합니다."

"가디언들은 위장포를 입은 모양이군. 그냥 덮쳤으면 낭패볼 뻔했는걸."

'보병 22명'이라고 나타나고 있는 스캐너를 탁 닫으며 베아트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안가 절벽 위에 마치 혹처럼 비죽이 솟아올라와 있는 저곳과 저택 사이에는 언제든 외부 침입을 차단할 수 있는 좁은 구름다리 하나가 걸쳐져있을 따름이었다. 저 정도의 안가라면 엔간한 강심장의 용사가 아니라면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천혜의 유배지였다.

'도마뱀 사촌' 카렐을 제외하면 제국에서도 가장 절벽을 잘 탄다는 헨지 역시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들과 미끄러운 바위 때문에 몇 번이나 낭패를 치르며 겨우 올라간 터였다.

"케이블을 남, 서, 북쪽에 1개씩 설치해라."

베아트릭스의 명령을 받은 헨지가 매달린 절벽을 빙 돌아가며 긴 케이블을 설치해 절벽 아래에 내던졌다. 만일을 대비해 밑에 남아 지킬 두 명의 페로 가디언을 남겨두고 7명의 가디언이 헨지가 던져준 케이블을 의지해 일제히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진입하지 말고 대기해라. 내가 추진기를 작동시키면 적 스캐너가 반응해서 비상 경보가 울릴 테니 그때 기습해라. 다시 확인하지만 라마단 기간이니 살상은 안 된다. 기절시키거나 부상만 입혀라."

5개 정도의 투창이 든 퀴버를 등에 짊어지며 베아트릭스와 자이납이 주먹만한 간이 추진기 3개씩을 몸을 감싼 하네스에 단단히 채웠다. 7명의 가디언들이 절벽 꼭대기도 도착해 준비 완료의 신호를 보내자 큰 숨을 한 번 내쉰 베아트릭스가 추진기를 작동시켰다.

"뭐지?"

지난번 탈출 시도 이후로 내내 독방에 갇혀있던 아메스가 갑자기 울린 비상벨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안가 밖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들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기! 여기!"

절벽 밑에서 뛰쳐 올라오는 킵과 다른 페로 가디언의 모습에 아메스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흥분한 아메스는 창을 두들기며 소리를 있는 대로 질렀지만 이 단단한 창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문이 홱 열리며 세 명의 경비병들이 뛰쳐 들어와 아메스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는 다짜고짜로 끌어 내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 썅!"

아메스의 옆방에 함께 갇혀있던 조종사 베네루스 역시 버둥거리며 두 명의 경비병 손에 끌려나오고 있었다. 아메스가 그에게 악을 쓰며 물었다.

"솔! 솔은 어딨어!"

"저도 몰라요!"

병사들에게 팔이 비틀린 베네루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 둘을 끌어낸 병사들은 안가 옥상으로 서둘러 향하고 있었다. 안가 주변 마당에서는 7명의 페로 가디언들과 세호 가 경비병, 경비 가디언들간에 난투극이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아메스가 옥상을 향해 다가오는 아르다가 셔틀을 보고는 대뜸 욕을 내뱉었다. 저들이 자신을 구하기 전에 아예 다른 곳으로 빼돌려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옥상에서 기다리던 장교가 셔틀 안에서 머리를 내민 동료에게 악을 쓰며 외쳤다.

"종가로 데려가! 빨리!"

"썅! 놔! 놓으란 말이야!"

아메스는 단 일초라도 시간을 더 끌어보려 자신을 잡아끄는 경비병들에게 최대한 발버둥치고 있었다. 보다못한 덩치 큰 경비병이 아메스를 어깨에 불끈 둘러멨다. 하지만 그를 지고 셔틀 안에 들어서려던 그 병사는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쿠!"

넘어지는 병사의 어깨에서 턱부터 나동그라진 아메스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묵직한 자리드에 다리를 관통 당한 병사가 무엇에 얻어맞은 듯 바닥에 나뒹굴며 공중에 피를 흩뿌렸다. 추진기를 풀어버린 베아트릭스는 바닥에 떨어진 아메스를 붙들려던 병사를 향해 또 한발의 강력한 투창을 내질렀다.

"악!"

가슴 위로 두 번째 병사가 쓰러지자 그 충격에 아메스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두 명의 병사에 깔린 채 버둥거리던 그의 눈앞에 막 올라선 자이납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어허, 그럭저럭 괜찮네?"

시미터를 움켜쥔 자이납이 아메스의 손을 묶은 수갑을 힘껏 잘라내고는 앞을 가로막는 병사 두 병을 때려눕히며 문이 닫히려는 셔틀 안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제서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메스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칼을 집어들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썅놈의 새끼들! 이제 맛 좀 봐라!"

칼을 치켜들며 경비병들에게 미친 듯 달려들려는 아메스의 옷자락을 베아트릭스가 덥석 붙들었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쓰러져있던 베네루스에게서 수갑을 잘라낸 베아트릭스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아메스를 셔틀 쪽으로 억지로 잡아끌었다. 억류에서 풀려난 베네루스가 셔틀 안에 뛰쳐 들며 간만에 이 정든 조종석에 다시 앉았다.

"푸헤헤, 너희들 다 끝이다,"

셔틀 안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새 제압한 자이납이 후다닥 달려나와 베아트릭스의 앞을 막아섰다. 4명의 병사들은 함부로 덤벼들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셔틀 입구를 지키십시오!"

아메스에게 있을 자리를 지시한 베아트릭스는 제일 먼저 돌진해 들어가는 자이납의 등뒤에서 힘있는 엄호 사격을 날렸다. 그 육중한 사격에 병사 한 명이 다리를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한 베아트릭스는 곧바로 퀴버를 내던지고는 세이버를 뽑아들고 직접 싸움에 뛰어들었다.

세 명의 정규군 병사와 자이납, 베아트릭스의 대결은 그다지 오래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는 병사를 발길질 한 방에 기절시킨 자이납은 나머지 병사의 얼굴도 칼자루로 힘껏 후려쳐 그자리에 쓰러뜨려 버렸다.

"휴!"

마지막 병사를 쓰러뜨리고 허벅지를 힘껏 찌른 베아트릭스가 얼굴에 튀어 오른 선혈을 옷자락으로 닦아냈다. 그는 아직까지 밑에서 싸움 중인 가디언들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지시했다.

"셔틀 탈환하고 옥상 장악했다. 모두 옥상으로 올라오도록!"

베아트릭스의 명령에 마당에서 난투극을 벌이던 7명의 가디언들이 일제히 집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자이센 부장과 베네루스는 찾았으니 솔을 찾아!"

베아트릭스의 명령에 시로와 킵을 비롯한 7명의 가디언들이 이 크지 않은 안가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솔을 찾았지만 경비병들 외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솔은 이곳에 없는 듯 합니다! 경비병 말이 낮에 어디론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시로의 보고에 베아트릭스의 머릿속이 아찔 해왔다. 지난번 자신의 실수 아닌 실수로 포로가 되고 만 솔을 자기 손으로 다시 구한다는 건 그에게는 단순한 작전 성공 이상으로 중요한 명제였다.

하지만 구름다리 너머에서 이곳으로 몰려오는 적 경비병들을 발견한 베아트릭스는 이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퇴각한다! 모두 옥상으로 올라와! 모두 퇴각한다!"

안가 기습을 마친 페로 가디언들을 다시 태운 아르다가 셔틀은 그 동안 억류되어있던 이 지긋지긋한 안가를 떠나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이 절반뿐인 성공에 사뭇 굳어버린 표정의 베아트릭스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기쁨의 웃음을 지어 보일 수는 없었다.

여관방 안에서 목의 상처를 들쳐보고 있던 카렐은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칼을 덥석 움켜잡았다.

"누구요?"

"저, 어......푸주간에서 왔는데요......"

급히 옷을 챙겨 입은 카렐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푸주간에서 고기를 팔던 노예 청년이 손에 봉지를 들고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주인 아저씨한테 여쭈었더니 여기라고 하셔서....."

"들어와."

카렐이 청년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낮 시간 내내 추운 곳에서 고기를 팔아서 그런지 얼굴과 손이 발갛게 부어 올라 있었다.

"저어, 아까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경황이 없어서 답례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청년이 손에 들고 온 봉지를 카렐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런 거 드실지 모르겠는데......혹시나 해서......좋은 고기 드리고 싶지만 그건 제가 맘대로 빼돌릴 수도 없고 해서......."

청년이 내민 봉지에는 피가 질척질척한 큼직한 간과 염통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진 카렐이 큭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안 드실 거면 그냥 가져가구요.......그냥 북부 분이시라길래 혹시나 드실까 하고......"

"정말 고맙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카렐은 주머니에서 1골드 동전을 꺼내 청년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청년은 돈을 내미는 카렐의 손을 한사코 뿌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아휴, 아니예요. 돈 받을려고 가져온 거 아니예요. 그냥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요. 여관 주인님 말씀이 북부에서 오신 귀족분이시라고.....사람들이 북부 사람들 크고 사납고 무섭다고 그래서 정말로 다 그런 줄 알았어요."

"풋,"

웃음 지은 카렐은 청년이 가져온 간 덩어리를 꺼내 큰그릇에 옮겨놓았다.

"뭐, 크긴 좀 크시지만......"

카렐을 올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이는 청년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피부가 많이 상하긴 했지만 갸름하고 앳되어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티없이 선한 인상을 풍기는 젊은이였다. 카렐이 잔에 주스를 담아 그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라스요. 원래 이름은 라쿠니어스인데 그냥 다 라스라고 불러요."

"나이는?"

"31살이요."

"아직 어리네."

같은 나이의 아메스를 떠올린 카렐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 앞으로 고기 필요하시면 직접 와서 기다리지 마시구요 할룩스로 연락 주세요. 한밤중이어도 괜찮구요, 언제든 배달해 드릴께요. 뭐, 여기 아니어도 괜찮구요."

라스가 서툰 글씨로 더듬더듬 써온 쪽지를 카렐에게 내놓으며 또 한번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라스의 할룩스 코드가 적혀있는 쪽지를 잠시 바라보던 카렐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난 내일 저녁에 여기 떠나는데....."

순간 얼굴이 굳어버린 라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또 안 오시구요?"

"아마도."

시무룩해진 표정의 라스가 카렐에게 다시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잠깐,"

"예?"

"자네 묵는 데 많이 추운 것 같던데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가게나. 저 옆에 보조 침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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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용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내용도 이 편으로 끝이군요. ^^

이틀동안 기다리신 독자분들을 위해 오늘은 제 주특기인 스크롤압박신공(마공?)을 발휘해보았습니다. ^^ 원래는 어제 밤에 올리려다가 서버증설 예고문 때문에 지금 올립니다. 그런데 서버증설 되기는 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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