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8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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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효과를 보이면서 의식이 조금씩 맑아져오는지 코리온의 흐려졌던 눈동자에도 조금씩 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두딘카 시까지 멀지 않으니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생명엔 지장 없다고 합니다. 안심하십시오."
하심이 코리온의 손을 꼭 잡으며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병원?"
눈을 부릅뜨며 차안을 둘러본 코리온이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왜 차에 타고 있는 거지? 셔틀이 아니고?"
코리온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의사까지도 사뭇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다못한 하심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날씨가 험해서 안된다면서 경비대장이 이걸 수배해서......"
"차 세워!"
차창을 통해 눈발이 날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코리온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예?"
코리온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기사가 급히 차를 정지시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코리온이 할룩스를 급히 집어들며 말했다.
"나 학장이다......당장......뭐냐......왜 불통인 거지?"
코리온의 갈색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할룩스코드가 폐쇄됐다....."
코리온이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의사를 홱 째려보았다. 그는 가슴을 엄습하는 엄청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놈도 한패거리냐! 이 정도 날씨는 셔틀이 못 뜰 정도가 아니다! 왜 날 차에 태워 가는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의사 역시도 이 뜻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코리온이 1급 면허를 가지고있는 셔틀 조종사이며 의학박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네놈 할룩스 내놓아봐라!"
"그게.......아까 급히 나올 때 보니 없어져서......이봐! 자넨 있나?"
의사의 질문에 기사 역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나올 때 보니 없던데요? 아, 차에 달린 걸로 연락하면 될 겁니다."
응급차량이 길 한중간에서 뜬금없이 멈춰 서자 옆을 함께 달리던 병력수송차량에서 십여 명의 병사들이 내려서서 차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멈추셨습니까?"
눈을 부릅뜬 코리온이 차문을 두들기는 그들 병사들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슴을 움켜쥐며 기사를 바라본 코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학교로 돌아가. 당장."
"하지만 병원은......"
"당장! 최고속도로 가란 말이다! 저놈들도......으, 윽"
코리온이 기를 쓰며 외친 고함소리에 기사가 마지못해 차를 되돌려 콜로니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차에 달린 통신장치도 먹통입니다!"
당황한 기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코리온을 향해 외쳤다.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하심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저 여우같은 놈!"
코리온을 실은 차가 방향을 돌려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누마가 바닥을 쾅 치며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차를 돌린 곳 바로 10스타디아 전방에는 기습조가 이미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병력수송차 팀은 어쩌죠?"
휘하 비장의 물음에 누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일단 뒤쫓아오라고 해, 우리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어쨌든 녀석 차는 두 팀 중간에 끼어있는 거니까."
"녀석 차는 어떻게 세우고 말씀이십니까? 저희에겐 장애물로 쓸 것이......"
잠시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던 누마가 차를 몰던 병사에게 소리쳤다.
"안되겠다. 우리가 직접 해결한다. 이봐! 충돌방지장치 해제해!"
"예에?.......아 알겠습니다,"
"차를 들이받아서라도 멈춰 세워야 한다!"
"지금 속도는?"
코리온이 숨을 헐떡이며 기사에게 물었다. 그가 탄 차는 해발 40스타디아가 넘는 거대한 능선 사이로 난 계곡의 좁은 도로를 무섭게 질주해 나아갔다.
"분당 10스타디아정도입니다. 날씨도 궂고 눈도 많이 쌓여서 수동운전으로는 이 이상 높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먼 거리가 아니니 몇 분 후면 도착할겁니다."
"느려도 좋으니 학교로 돌아가는 다른 길 있으면 우회해라. 난 아직 참을 만 하다."
"이곳은 산악이어서 다른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이 양옆 산사면은 크레바스 지역이라 자칫하면 낭패를 겪게 됩니다."
"이, 이......,"
코리온이 이를 악물었다. 낮은 기압 때문인지 그의 베인 가슴에 붙인 테이핑 사이로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눈발이 날리던 정도의 날씨는 조금씩 험악해져서 어느새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의 눈보라로 변해가던 차였다. 양쪽 산사면에서 계곡을 향해 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함께 날아드는 가는 은빛 눈가루로 시야까지 갈수록 불량해져 바쁜 길을 가로막았다.
운전하던 기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어, 맞은편에 웬 차량이 오고있습니다."
"무슨 차냐?"
"모르겠습니다. 시야가 나빠서 분간이....."
"속도를 3분의 1로 낮춰라. 지나갈 때까지 안심하면 안된다."
코리온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안고 있는 하심의 얼굴을 문득 올려보았다. 하심이 피가 배어나오는 코리온의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긴장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괜찮습니다, 제가 끝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학장님. 괜찮습니다."
하심이 코리온의 손을 꼭 붙들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하심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은빛 눈보라 속에서 돌진해온 시커먼 병력수송차가 바로 코앞까지 접근 한 건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차라면 비켜가야 할 옆 도로가 아닌, 바로 이쪽 차 코앞이었다.
"아익!"
온몸을 덮치는 충격에 아찔해진 하심이 코리온을 몸으로 급히 덮쳤다.
"아악!"
중심을 잃고 코리온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하심이 그를 꽉 껴안은 채 그에게 가해질 충격을 자신의 몸으로 모두 받아냈다. 충돌방지장치와 완충장치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방향을 잃은 차가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정신없이 맴돌았다.
"헉, 헉,"
반쯤 넋이 나간 듯 얼떨떨한 얼굴의 하심이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한 이마를 싸쥐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채 정지한 육중한 병력수송차와, 한쪽이 산산 조각난 채 멈춰선 응급차량이 마치 서로 노려보듯 이 호젓한 산악도로 한중간의 '사고현장'에 침묵과 함께 놓여져 있었다.
"내려! 다 죽여버려!"
이 조용함을 깨뜨리며 제일 먼저 뛰어내린 누마가 뒤따라내리는 부하들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플라칼 가 경비병 복장의 이 병사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무기들을 손에 쥔 채 괴성을 지르며 응급차량에 달려들어왔다.
"문을 부숴!"
거대한 말렛으로 앞쪽 차창을 산산조각 낸 그들은 충돌의 충격에 아직 멍해져있는 기사의 머리를 단 한방에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앞좌석은 기사의 조각난 머리에서 터져 나온 끈적한 뇌수로 참혹하게 물들었다.
"뭐, 뭐 하는 짓이요! 이건......"
환자를 몸으로 막아서려던 의사 역시 누마의 칼에 얼굴이 동강나며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제일 뒤에 쓰러져있던 코리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말렛으로 부서진 차창 위에 큰 검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던 누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휴우, 별것도 아니군."
피식 웃음 지은 누마가 그를 향해 서슴없이 칼을 치켜들었다.
"이놈을......"
힘을 주어 칼을 내리치려던 누마는 발 밑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잠시 움찔 했다.
"으악!"
튕겨 나가듯 갑자기 출발하는 차 위에서 중심을 잃은 누마가 칼을 놓치며 공중으로 붕 솟구쳤다. 얼어붙은 땅바닥에 이마부터 나동그라진 그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썅! 뭐야!
정신을 차린 누마가 고개를 들었을 때, 기사도 이미 죽어버린 그 차는 크레바스가 있는 산사면을 향해 미친 듯 폭주하고 있었다.
"뭐, 뭐야! 당장 쫓아가!"
"꽉 잡고 계십시오! 학장님!"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기사의 발 밑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 무작정 차를 출발시킨 하심이 깨진 차창 사이로 몰아쳐 오는 엄청난 찬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앞을 가로막은 괴한들의 차를 피해 도로 옆 크레바스 지역으로 뛰어든 차는 가파른 도로 옆 사면을 달리며 부서질 듯 심하게 요동을 쳤다.
"제발, 제발,"
죽은 기사의 피와 뇌수로 뒤범벅이 되어 보이지도 않는 차량용 스캐너 화면을 급히 맨손으로 닦아낸 하심은 자신이 도로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가파른 사면에서 가속이 붙은 차는 거의 제어가 되지를 않았다.
"저 망할 놈들!"
스캐너 화면을 바라본 하심이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들이받았던 차뿐만이 아니고 일행을 뒤쫓아오던 또 한대의 병력수송차까지 어느새 합류하면서 이제 뒤를 추적하는 차는 2대로 늘어나 있었다. 도로 측면을 잠시 가파르게 내리꽂히던 차는 계곡 바닥에 요란스레 부딪히고는 다시 사면 위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놈들은 또 뭐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육안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구분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얼굴을 때리는 거센 눈보라는 운전하는 하심을 거의 장님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차가 언제든 크레바스에 빠질 수 있다는 공포 따위는 바로 옆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기사의 처참한 시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때, 슉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차 밑으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뭐죠!"
"작은 크레바스일 거다. 속도가 느리면 빠졌을 거다."
뒷자리의 코리온이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말했다. 도로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지만 뒤를 맹렬히 쫓아오는 두 대의 무장차량 때문에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다. 하심의 차와, 뒤를 쫓는 두 대의 병력수송차는 어디에 크레바스가 숨겨져 있을지 모를 눈 덮인 가파른 산사면을 눈보라를 가로질러 미친 듯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숨이, 숨이....."
고도가 높아지면서 현기증과 호흡곤란을 느낀 하심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던 하심은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크레바스에 놀라 급히 방향을 틀었다. 관성에 차가 밀려가면서 뿌연 눈바람이 가득 일었다.
"으, 으악!"
차 꽁무니가 주저앉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란 하심이 비명소리와 함께 차를 급정지시켰다. 미끄러져 간 차 뒤쪽이 시커멓게 입을 벌린 크레바스 모퉁이에 위험천만하게 걸려있었다. 조종간을 쥔 하심의 숨소리가 마치 그의 숨소리와 박자를 맞추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못 움직입니다....."
하심이 계기판을 두들기며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이 눈 속의 목숨을 건 질주극도 이제 이것으로 끝이었다.
"차에서 내리게.....예킨터스 교수,"
코리온의 침착한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은 하심이 뒤를 돌아보았다. 중상을 입은 코리온이 한쪽 팔꿈치로 힘겹게 기어 그에게 다가왔다.
"걸어서 도망가게.....자넨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혼자는 죽어도 못 갑니다."
하심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찌그러든 차문을 걷어 차 열었다.
"빨리 나오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심이 쓰러져있던 코리온을 있는 힘껏 차에서 끄집어냈다. 매서운 눈보라에 둘의 무명포자락이 요란스럽게 퍼덕거렸다. 병상에 있던 흰 린넨 천을 끄집어내 코리온의 몸을 급히 감싸준 하심은 그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하심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일어난 코리온이 이 충성스런 교수의 팔을 억지로 떨궈내며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렸다.
"나, 난 걷지 못하네......자네 혼자 가게나."
"가슴상처 정도로는 충분히 걸으실 수 있습니다!"
"다리를 다쳤네. 난 안되니....."
"예에?"
코리온의 다리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는 꽤 많은 피를 그제서야 발견한 하심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방금 전 누마를 차에서 떨어뜨렸을 때 녀석이 떨군 칼이 피가 묻은 채 코리온이 있던 곳 옆에 뒹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힘있게 대답한 하심은 크레바스에 걸쳐있던 차를 온 힘껏 뒤로 밀어버렸다. 크레바스 구멍 한쪽에 위태롭게 걸쳐있던 차는 귀청을 찢는 마찰음과 함께 까마득하게 깊은 크레바스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망할 추적자들이 이 둘이 차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 잠시라도 넘겨짚어 준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빨리, 빨리 가야 됩니다."
코리온을 등에 힘껏 업은 하심은 더 이상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다리를 옆구리에 꽉 붙였다. 자신보다 키나 체격이 훨씬 큰 코리온을 가까스로 업은 하심은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로 마구 헤쳐 지워버리고는 뒤뚱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거친 눈보라 속에서 적들의 차가 어디쯤 있는지도 육안으로는 전혀 식별이 되지 않았다.
방향조차 분간키 어려운 이 짙은 눈보라를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하심이 힘겨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이 둘은 더 이상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크레바스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헤헤헤, 역시 북부 분들 잘 노시는 거 하나는 정말 알아드려야 된다니까요."
여관의 여주인이 체크아웃하는 카렐에게 갑자기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카렐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댄 주인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눈가에 묘한 웃음을 잔뜩 지은 얼굴로 물었다.
"어젯밤에 어땠수? 덩치 큰 시어리 씨 상대하긴 쬐끔 작아 보이긴 하던데......그래도 이쁘장한 게 귀여운 맛은 있잖수?"
주인의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카렐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난 미소년은 관심 없는데. 난 페로 자이센 총리같이 크고 야성미 넘치는 미남자가 더 좋은데 어쩔까나?"
"에에이, 빼시긴......얼토당토않게 페로 경은 왜 나온대요, 끝내주는 미남자란 소문은 들었소만 웬만하면 될 소리를 좀 하시구려. 근데, 그 노예녀석 아침에 나갈 때 보니까 얼굴이 훤해졌던데, 히히, 얼마나 주셨수? 불쌍한 놈이니 용돈이라도 두둑이 쥐여주시지. 같은 여자니 묻는 거지만.....녀석 밤일은 잘 해요?"
여주인의 말도 안되는 상상에 제대로 대답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카렐이 그다지 성의 없는 한마디로 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댁이나 고기 좀 많이 사서 도와주시구려."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여관을 나선 카렐은 공용 터미널을 향해 기분 좋게 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그리 좋아하는 생간을 실컷 먹어 속도 든든했고 목에 난 크고 깊은 상처를 빼면 발목이나 손목의 상처도 이제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카렐과 한방에서 자고 난 후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연발하며 아침 일찍 방을 나선 라스는 대목 시간대인 지금은 고기 파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터미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카렐은 가게 안에서 여전히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고기를 썰고 있는 라스를 문득 쳐다보았다.
"실력이 한결 나아졌네."
가게 안에 들어선 카렐에게 라스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시어리 씨, 어젯밤엔 너무 고마웠어요."
"지금 터미널로 가는 길이야. 참, 가다가 먹게 양 생 간 큼직한 거 두개만 좀 싸주겠나?"
"어휴, 식성이 참 특이하시네요, 생간을 먹는 지역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요,"
피로 젖은 생간을 정성 들여 썰어주며 라스가 농담처럼 입을 열었다.
"저어기......북부엔 노예가 없다면서요?"
"없지는 않아. 다른 곳보다 적을 뿐이지."
"그래도 북부 사람들은......노예를 서부나 남부처럼 대하지는 않는다고....."
라스가 더 이상 말을 잇기가 부담스러운지 그대로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말았다.
다 썬 간 조각을 챙겨든 라스는 보통은 봉투에 담아주는 고기를 오늘은 작은 종이상자에 조금씩 나누어 담아 내주었다.
"이편이 드시기 편할 거예요. 좋은 여행 하시구요, 나중에 여기 다시 오시거든 한번 찾아주세요. 그리고요 혹시 노예가 필요......아니예요."
어두워진 얼굴로 카렐의 얼굴을 문득 올려본 라스는 뭐라 더 하려던 말을 그대로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의 뒤로 고기를 사려는 손님 한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네."
라스의 어깨를 탁탁 두들겨준 카렐은 조금은 우울해진 기분으로 푸주간을 나섰다.
카렐의 예상대로 시내의 치안군들은 어제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델루지 가 영지를 통해 황제령으로 가는 여객셔틀만 타면 만사 다 해결되는 셈이었다.
"날씨가 왜이래?"
갑자기 거세지기 시작한 눈바람에 카렐이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이런 고산지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카렐은 단 1분이라도 이곳을 빨리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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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Crevasse) : 한대, 혹은 고산의 빙하지대에 형성되는 깊은 균열로, 주로 경사진 산사면혹은 골짜기에서 상부와 하부의 이동속도차이, 불균형한 동결팽창으로 형성됩니다.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든 작은 크레바스부터 큰 다리를 놓아야 건널 수 있는 거대한 크레바스까지 다양합니다.
고산의 크레바스 지역은 대개 경사진 평원으로, 얼핏 통행에 대단히 용이한 곳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가장 위험한 마의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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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약 게시판에 주말동안 36분께서 신청하셨습니다. 판타지에서 처음 시도하는 개인지이니만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