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49화 (249/1,132)

< -- 249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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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하심은 도저히 도로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산지대의 희박한 산소에 그의 머리와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잠시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코리온을 지고 걸어가는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차라리 함께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학장을 두고 혼자 떠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일단은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업혀있는 코리온이 행여 의식을 잃을까, 아니 그의 존재에 마지막 의지력을 기대고 있는 스스로에 힘을 주기 위해서라도 계속 말을 건넸다.

"학장님 가벼우실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체중이 꽤 나가시는군요?"

"키가 있으니......"

코리온이 희미하게 대답했다.

"옛날에 주페 태자저하께서 학장님 한 팔로 번쩍 안아 드시는 거 보고 무지하게 가벼우시겠다 생각했었는데,"

"그분은 무장이 되려 하셨던 분이라 워낙에 기운이 좋으셨지......"

코리온은 문득 옛 생각이 드는지 이 지독한 고통의 와중에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글쎄......아픈 지도 모르겠다......"

코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보라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지만 살갗을 파고드는 차고 매서운 바람은 여전했다.

휘청거리며 힘든 걸음을 내딛던 하심의 발이 결국 옆으로 미끄러져 버린 건 그때였다.

"이쿠!"

눈 덮인 가파른 설사면을 정신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한 하심은 그 와중에도 코리온을 꼭 붙든 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아악!"

가속이 붙으면서 미끄러지는 속도는 내려갈수록 조금씩 빨라져가고 있었다. 하심은 이러다가 행여 산사태나 절벽, 아니면 크레바스라도 만나는 것이 아닌가 눈앞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하심이 코리온의 벨트를 있는 힘을 다해 움켜잡으며 외쳤다.

"학장님! 저 여기 있습니다! 여기요! 걱정 마십시오! 세울 수 있습니다!"

큰소리는 쳤지만 하심으로서도 다리를 산 아래쪽으로 돌리며 최대한 저항하는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온 하심이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설사면 거의 끝자락의 비교적 완만한 곳에 도착해서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한참동안 설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온 하심은 그 충격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바닥에 꼼짝없이 쓰러져 있어야 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코리온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로 반대편 사면인 모양이다......"

"그나마 더 멀어졌군요."

얼떨떨한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은 채 한숨을 내쉬던 하심이 지독한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숨쉬기는 훨씬 편해졌습니다. 족히 10스타디아는 넘게 내려온 모양이네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은빛 능선을 잠시 바라보던 하심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하심이 눈 위에 쓰러져있는 코리온을 일으켜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린넨을 찢어 코리온의 다리를 묶어준 하심은 그의 몸에 직접 찬 눈이 닿지 않도록 무릎 위에 눕혀준 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방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눈벌판 혹은 올려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까마득하게 높은 산맥 정도가 고작이었다.

"여긴 눈이 적어서 걸을 만 하겠군요......그런데......이제 어디로 가죠?"

흰 눈송이가 가득 날리는 황량한 산허리에 선 하심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직 초저녁시간이니 기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곤두박질 칠 것이 확실했다.

"어차피 둘 다 살수는 없네, 예킨터스 교수."

코리온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날 여기 놔두고 가게나. 성한 자네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학장님."

하심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코리온을 등에 다시 업은 그는 눈이 거의 쌓이지 않은 낮은 바위절벽 밑으로 일단 몸을 움직였다.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코리온을 무릎 위에 눕힌 하심은 차갑게 얼어붙어 가는 몸을 연신 부비는 정도로 이 추위에 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드가 폐쇄되면서 먹통이 되어버린 할룩스를 꺼내든 코리온은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이미 다 주입이 끝난 약품 앰플을 팔에서 뽑아내 산산이 분해하고는 그 부품들을 바닥에 흩어놓았다. 코리온의 이상한 행동에 하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하십니까?"

"서부에서 생산된 모든 할룩스에는 고유코드 인식 불능시에 중계소와 비상접속을 위한 2차코드 하나씩을 가지고있다네."

"그래......서요?"

"남부에서 생산되는 할룩스는 물론이고 남부중계소는 2차 코드를 별도로 인식하는 시스템을 가지고있지 않으니.....그것 자체를 일반 고유코드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

학장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심의 지식으로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할룩스를 살릴 방도가 있다는 정도로는 해석되고 있었다.

혈액 앰플에서 끌러낸 부품들로 할룩스 내용물을 분해해놓은 코리온은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기계에 눈을 바싹 들이댔다. 온 신경을 집중한 그는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피묻은 바늘로 무언가를 열심히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부품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코드를 일단 점프시켰지만 오래 쓰지는 못할지도 모르네. 중계소에서 코드 무단이용으로 곧 적발해 폐쇄할지 모르지만 아마 그 프로세스가 몇 분은 걸릴게야. 그 동안 모든 걸 알려야 하네."

"교수들에게 철수를 명하실 겁니까?"

"아니."

코리온이 고통에 겨운 호흡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코리온이 점점 기운을 잃어 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심이 그런 학장의 몸을 품에 꼭 껴안았지만 이미 코리온의 얼굴은 파랗게 혈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 한 명만을 노리고있는 듯 하니......일부러라도 학회는 이어가야겠지. 플라칼 가는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당장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하지만.......학장님 할룩스가 폐쇄된 것으로 보아 통신 쪽에도 녀석들이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저희학교 참가자들 전원의 통신이 도감청되고있을지도 모릅니다. 들은 바로는 플라칼 가에서는 내부통화도 도감청을......"

하심은 이곳에 들어올 때 카렐에게 들었던 말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렇겠지......"

손질을 끝낸 할룩스의 뚜껑을 닫으며 코리온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에 할룩스를 쥐고도 정작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코리온은 어느덧 눈보라도 잦아져 이젠 '그냥 눈'이 쏟아지고 있는 밤하늘을 멍 하니 올려보았다. 하심의 품에 일단 얼굴을 묻고는 있었지만 이 끔찍한 추위 속에서 조금씩 식어 가는 스스로의 몸은 그의 천재적인 머리로서도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자네 혹시 이곳에 아는 사람 있나?"

"아뇨.....없습니다."

하심의 대답에 코리온이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이 날씨에서 시간을 끌수록 죽음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이대로 얼어죽으나, 적들에게 잡혀죽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저승사자가 올지......구원자가 올지......"

할룩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코리온은 결국 함께 온 교수 중 가장 믿을만한 부학장의 코드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너무나 반가운 푸른빛과 함께 검은 무명포 차림의 한 늙은 유학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코리온의 모습에 너무나 놀랐는지 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학장님! 무사히 계셨군요!"

"그래......아직은 살아있네......내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 빨리 이쪽으로 데리러 와 주게나. 정확히 어딘지는 잘 모르겠고......그곳에서 시내로 가는 도로 왼편의 크레바스가 있는 산 능선 반대편일세. 반드시 교수들끼리 오게. 코드 무단사용이니 빨리 끊어야겠군."

"예, 알겠습니다!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급히 통신을 끊은 코리온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코리온은 의식이 다시 희미해지는지 반쯤 눈을 감으며 힘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델루지 가나 플라칼 가가 의심스럽다는 얘기는 왜 안하셨습니까?"

"플라칼 가가 아직은 저들과 손잡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야지......"

"'아직은' 이라뇨?"

하심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지만 코리온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엉뚱한 대답을 할뿐이었다.

"일단 아무 데나 몸을 숨겨야겠네. 구조대가......"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또 한번 거친 숨을 토해내며 코리온이 결국 고개를 뒤로 떨구고 말았다. 지금껏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어오던 코리온이었지만 수하와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결국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하심이 코리온을 힘껏 껴안았다.

"학장님의 목숨을 이런 모험에 내맡기지는 않겠습니다."

쓰러져있던 코리온의 떨리는 시선이 하심을 올려보았다. 코리온을 다시 등에 업고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하심은 절벽 사이의 좁은 바위틈새로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코리온의 손에 힘없이 쥐여있는 할룩스를 급히 빼앗아들었다.

"뭐하는 짓인가, 예킨터스 교수,"

코리온을 절벽 틈새에 밀어넣은 하심은 그의 몸에 린넨을 꼼꼼하게 덮어주고는 만일을 대비해 틈새 입구에 큰 돌들까지 쌓아 엉성하게나마 그 앞을 막았다. 마치 돌무덤 같은 그 형상에 하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만큼 완벽하게 그의 학장을 가려줄 방법은 없었다.

"이게 지금......"

조그만 돌 틈새로 자신을 처절하게 바라보는 코리온에게 하심이 짐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여긴 바람이 불지 않으니......진짜 구조대라면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아니라면.....제가 시간이라도 끌어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뒤로 휙 돌아서서 언덕을 뛰어내려가는 하심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존경하는 학장을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었다. 코리온이 있는 절벽에서 한참을 달려내려와 눈에 잘 띄는 눈밭 한중간에 우뚝 선 하심은 숨을 헐떡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응?"

조용히 '운명'을 기다리던 하심의 머리에 카렐에게 빼앗긴 자신의 할룩스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아직도......그 사람이 갖고있으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심은 갑자기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건 감시받고 있지 않을텐데.......어쩌면......"

눈 때문에 셔틀이 연착된다는 방송에 한 시간째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기만 하고 있던 카렐은 셔틀에 탑승하라는 방송에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요란스럽던 눈보라도 방금 전보다는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큰 하품을 한 카렐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야 떠나는군. 제길할."

막 승강장에 들어서려던 카렐은 터미널 입구로 몰려들어오는 수십의 인기척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갑자기 터미널 밖에서 벌떼처럼 몰려들어온 한 무리의 치안군 병사들이었다.

"엥?"

기겁을 한 카렐이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신분이 들통났던가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음에 틀림없었다. 승강장 입구들을 갑자기 모두 막아선 병사들은 탑승하는 승객들 하나하나의 신분과 탑승권을 꼼꼼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젠장할,"

몸은 물론이고 소지품, 옷 속까지 샅샅들이 검사하는 그 모습에 카렐의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찜찜한 소지품은 물론 없었지만 녀석들이 손목의 브레이서 밑을 들춘다면 파란색의 팔찌가 '가디언 카렐'이라는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낼 터였다.

"제기랄, 재수 옴 붙었네.'

당황한 카렐이 뒤를 돌아보았다. 셔틀 탑승을 포기하고 터미널에서 빨리 도망치는 게 일단은 최고의 선택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탑승행렬에 함께 서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치 도착승객인 양 자연스럽게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카렐이 가지고 있던 하심의 할룩스가 갑자기 신호를 보낸 건 막 문을 나서서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카렐은 이 '남의 할룩스'를 최대한 뻔뻔스럽게 받아들었다.

"아하, 아가씨, 오랜만이요, 그새 무고하셨소? 난 지금 막 두딘카에 도착했소."

카렐의 얼토당토않은 '혼잣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린 하심이 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이상한 무리들한테 기습당했어요, 이대로 얼어죽기 일보직전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금 도망쳐온데가......"

자기의 헛소리만큼이나 황당한 하심의 애원에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 지긋지긋한 치안군 녀석들이 몰려온 것도 그렇고, 자신과 희한하게 자꾸만 얽혀드는 저 어지간히 운 없는 여자가 이전엔 누군가에 기습당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여봐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댁이 무슨 날 끌어들여 무슨 짓을 하려는 꿍꿍이인지 내 잘 모르겠지만....."

카렐의 불평에 이미 얼어붙어있던 얼굴이 그나마 더 창백해진 하심이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대로 얼어죽던지 괴한들에게 사냥 당해 죽어야 되겠어요!!!"

하심의 큰 목소리에 기겁을 한 카렐이 얼른 사람이 없는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거, 참 이 여자가 미쳤나, 누구 들통나 죽게 만들려고."

"제발, 제발 빨리 와주세요, 안그러면 죽어요."

이미 얼굴과 손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하심이 온몸을 연신 비비며 처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조금 진지해진 카렐은 하심의 몸 곳곳에 난 상처는 물론이고 이미 얼어 동상이 생긴 듯한 얼굴과 공포에 질린 그의 표정을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았다.

"젠장, 이번 라마단엔 도대체 뭐 되는 일이 없구만."

카렐은 터미널을 빙 둘러보았다. 지금 분위기 같아서는 오늘밤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어차피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근데, 거기가 어디요?

"라스! 라스!"

한참 고기 써는 연습을 하고있던 라스는 이곳을 떠난다며 방금 전 배웅까지 했던 카렐이 또다시 나타나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시어리 씨? 셔틀 타러 가신다면서요?"

라스의 질문은 아랑곳없이 카렐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지도, 지도 있어? 이 일대 지도 말이야!"

"배달할 때 보려고 얻어 논 게 있긴 한데......별 쓸 일도 없어서....."

"빨리! 줘봐!"

라스에게서 거의 빼앗다시피 지도를 받아든 카렐은 콜로니 아카데미와의 연결도로 부근을 최대한 확대시켜 지형을 살폈다. 이런 것을 볼 줄 알 턱이 없는 라스는 이 북부 귀족의 희한한 행동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도에서 어딘가를 발견한 카렐이 라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지도 좀 팔아! 이 돈이면 또 살 수 있을 테니!"

라스의 눈앞에 5골드의 돈을 무작정 올려놓은 카렐은 지도를 주머니에 우겨 넣고는 인사말도 없이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옷가게가 있는 상가 앞을 달려 지나치던 카렐은 알량한 무명포만 걸친 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있던 하심의 모습을 문득 머리에 떠올렸다.

"제기랄! 도움이 안되는 여자라니까!"

모양 따위는 별로 볼 것도 없이 무조건 따뜻해 보이는 털망토와 외상약, 동상약를 서둘러 사든 카렐은 또다시 후다닥 달려 어느새 '도시'의 최외곽까지 도달해 있었다.

두딘카 시 경계를 벗어난 그의 눈앞으로 하얗고 황량하기까지 한 눈벌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칠흑 같은 어둠에 감히 나설 엄두도 못 냈을 공간이었겠지만 낮이나 밤이나 시야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카렐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칼에 베였던 왼쪽 발목을 한 번 어루만진 카렐은 당장은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리온의 말대로 무단코드를 이용하던 할룩스는 몇 분 못가 다시 폐쇄되어버렸다. 카렐에게 제대로 된 위치도 다 설명해주지 못한 채 끊어져버린 할룩스는 이제 무용지물일 따름이었다. 하심으로서도 이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제발......버티어주셔야 될텐데......"

코리온을 감춰둔 절벽을 내내 응시하며 하심이 걱정섞인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얼굴은 감각이 거의 없어진지 오래였고 손발도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혼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던 하심이 할 수 있는 건 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쭈그려 앉으며 조금이라도 추위를 피해보려 마지막 발악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참동안을 추위와, 그리고 스스로와 씨름하던 하심은 산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앗!"

그것들의 선두에 제발 반가운 얼굴이 있기를 고대하며 비탈을 정신없이 달려 내려가던 하심은 그 낯익은 형태---방금 전 응급차량과 정면충돌했던 그 흔적이 선명한---에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결국은......"

자리에 멈춰선 채 망연함 속에서 잠시 추위조차도 잊었던 하심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를 조금씩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심의 앞에 멈춰선 검은색 병력수송차에서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누마를 선두로 조금 전 운전기사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부숴 죽이던 그 끔찍한 무리들이 우루루 내려섰다.

"학장님......안녕히 계십시오......"

입술을 꽉 깨문 하심은 뒤로 홱 돌아서며 절벽 반대편으로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부림으로 녀석들이 먼저 코리온을 발견하기 전에 진짜 구조대가 도달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역할은 다하는 셈이었다.

"뭐야!"

가만히 있는 듯 싶던 하심이 갑자기 달아나자 당황한 누마가 큰 소리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저년 잡아!"

대장의 지시에 네 명의 발빠른 병사들이 하심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2대의 차에서는 거의 30여명에 달하는 산악병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내려서고 있었다. 누마가 이를 악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씨발, 왜 저년 하나야? 아까 통신에서는 그 학장놈도 있었잖아?"

누마의 옆에 선 병사가 스캐너를 작동시켰지만 인근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포착되지 않았다.

4명의 병사들에게 쫓겨 도망치던 하심은 동상으로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발 때문에 몇 번이나 바닥에 넘어져가며 깊은 눈밭을 헤치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학교에서 글공부나 하던 것이 고작인 그에게 훈련받은 정예 산악병들을 따돌리는 일은 어차피 역부족이었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뒤를 쫓아온 거친 병사들에게 뒷덜미를 채인 하심이 온몸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하심의 사지를 가까스로 붙든 결국 병사들이 그를 눈밭에 질질 끌고와서는 대장인 누마 앞에 패댕이쳐 버렸다.

"맹랑한 년 같으니. 네 학장놈 어딨냐?"

누마가 하심의 가슴을 밟으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분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서......나 혼자 도망쳤소,"

"닥쳐!"

고함을 지른 누마가 빈 칼집으로 하심의 이미 째진 옆머리를 다시 후려쳤다. 피가 튈 정도의 강력한 타격에 하심이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불어. 이런 추운데서 시간 끌기는 나도 귀찮으니까."

"정말로......"

"썅!"

욕을 내지른 누마가 쓰러져있는 하심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계속되는 무자비한 발길질에 하심이 처절한 신음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를 둘러선 병사들은 구타당하는 이 여자 유학자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년아! 네 속을 모를 줄 알고! 이렇게 시간 끌면 누가 와줄 줄 알았냐! 착각하셨어! 너희 구조대 놈들 북쪽에 엉뚱한 데 뒤지고 계셔! 알아? 네가 여기서 내 발에 갈갈이 저며져도 아무도 볼 놈 없어. 알아?"

잠깐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하심이 자신을 둘러선 남부 병사들을 야속하게 돌아보았다. 서부 같았다면 피아를 불문하고 정교수인 '교리'급 유학자에게 이런 무자비한 폭행, 아니 작은 손찌검 한 번 범하는 것도 감히 상상 못할 일이었다.

하심이 피범벅이 되어 부어오른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무엄하게......유학자를 해치려 들다니......"

"이년아! 여기가 서부인 줄 알았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누마는 이미 저항불능이 된 하심을 다시 짓밟기 시작했다.

"네년 얼굴 단검으로 조각조각 찢어놓기 전에 빨리 실토해! 그 긴머리 샌님새끼 어디 갔어!"

"혼자 도망쳤다니까....."

하심이 빠드득 하며 이 가는 소리를 냈다. 피가 엉겨든 그의 눈앞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스캐너를 피하기 위해 신진대사와 체온을 최저로 낮추고 멀찍이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카렐은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심 혼자 쫓기고 있는 줄로 알고 찾아왔던 카렐은 코리온 역시 부근에 있다는 말에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건 코리온을 지키기 위한 하심의 마지막 몸부림임에 틀림없었다.

코리온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건 무조건 받아들여줘야 한다고 머릿속에 세뇌시키고 또 세뇌시켰던 카렐이었지만 그에게 온갖 험한 꼴을 다 당했던 카렐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그를 구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한 갈등이 오가고 있었다.

사실 가슴 한쪽에서는 저 괘씸한 원리주의자들을 죽게 놔두고 이곳을 홀가분하게 빠져나가라는 욕구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버려두고 나 혼자 왔다니까!"

하심이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소리에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울려온 하심의 비명소리에 결국 천천히 눈을 치켜 뜬 카렐은 얼굴을 머플러로 칭칭 가리며 온 몸을 한 번 비틀었다. 특유의 대사호르몬이 혈관을 타고 퍼지기 시작하면서 얼음처럼 차갑던 그의 몸에서도 조금씩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굳어있던 몸을 한 번 풀어 준 카렐은 허리에 찬 주페 태자의 쿠크리로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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