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50화 (250/1,132)

< -- 250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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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있습니다!"

스캐너를 살피던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까지도 하심을 짓뭉개고 있던 누마가 큰 소리로 물었다.

"학장 그놈인가?"

"저, 저기......"

병사가 고개를 쳐들며 한쪽을 가리켰다. 쏟아 붓듯 내리는 눈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 회색빛 형상에 누마가 급히 스코프를 눌러썼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온몸에 털을 뒤집어쓴 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무서운 속도로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웬 덩치녀석이었다.

"저놈은 뭐야!"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그쪽을 돌아보던 하심의 입가에 갑자기 희미하나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한 손에 쿠크리를 쥔 카렐은 하심을 둘러싸고 있던 30여명의 산악병들에게 주저없이 돌진해 들어갔다.

"막아!"

누마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던진 십여 발의 투창은 저 말할 괴물인지 사람인지 녀석이 휘두른 짤막한 낫 같은 칼에 동강나 눈밭에 흩어졌다.

제일 먼저 달려나와 카렐의 앞을 막아선 병사는 힘껏 내지른 칼날이 적이 내리친 쿠크리 안쪽의 둥근 홈에 물려들어가자 순간 당황하고 있었다. 능숙하게 손목을 비튼 카렐의 스냅과 함께 홈에 물려있던 녀석의 칼은 그대로 딱 소리와 함께 중간이 잘려나가 버리고 말았다.

"젠장!"

잘려나간 칼날에 신경을 쏟았던 그 병사는 적의 바윗돌만한 왼손이 그새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악!"

한 주먹에 동료의 머리가 산산조각나는 그 황당한 광경에 놀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허둥지둥 흩어졌다.

"비켜!"

앞을 가로막는 3명의 병사들을 연이어 걷어차 쓰러뜨리며 돌파한 카렐은 바닥에 쓰러진 하심을 재빨리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막아! 제길! 막아!"

방패와 칼을 치켜들며 일제히 앞을 가로막은 산악병들 중 한 명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공중으로 가볍게 날아오른 카렐은 반대편에 사뿐히 내려서 언덕을 달려올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심을 왼쪽 어깨에 불끈 짊어진 카렐은 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학장은! 학장은 어딨소!"

"저, 저기 절벽 밑에....."

얼굴이 완전히 망가진 하심이 피를 토하며 대답했다. 산악병들이 절벽으로 내달리는 카렐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기 시작했지만 그의 빠른 발을 따라잡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십여 명의 병사들은 차에 뛰어올라 카렐을 쫓아 몰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요! 여기! 이 안에!"

하심이 가리킨 돌무더기를 헤집은 카렐은 그 안에서 거의 정신을 잃어가던 코리온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흐려져 가던 코리온의 갈색빛 눈동자는 이 철천지원수의 등장에 갑자기 빛을 뿜기 시작했다.

"네, 네놈......"

"나중에 따집시다!"

코리온을 한 팔로 번쩍 일으켜 세운 카렐은 겉에 입고있던 털망토 2개 중 1개를 벗어 그의 어깨에 덮어주고는 급히 밖으로 나섰다.

"이놈 도대체 뭐야!"

차로 카렐의 뒤를 쫓아온 십여 명의 병사들이 코리온, 하심과 함께 나오는 카렐의 앞을 막아섰다. 비틀거리는 코리온을 하심이 가까스로 부축하고 있었지만 둘 다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귀찮은 놈들!"

제일 앞에서 내질러오는 장검을 또다시 쿠크리 날로 부러뜨려버린 카렐은 병사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피를 토하며 한참을 날아간 병사는 그 뒤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단 한번에 사람을 절명시켜버리는 그 무서운 공격에 병사들이 차마 다가서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분대장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병사들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악을 쓰는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든 카렐의 또 한번의 발차기에 두 명의 병사들이 미처 피해보지도 못한 채 얼굴과 가슴이 으스러지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날아오는 칼을 오른손의 쿠크리로 받아내고 주먹과 발로 상대를 잔혹하게 짓뭉개버리며 카렐이 병사들을 뚫고 하심과 코리온이 빠져나갈 길을 조금씩 만들어냈다.

"이게.....도대체....."

원수인 카렐이 주페 태자의 칼로 동맹군인 남부 병사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그 기가 막힌 모습에 코리온이 탄식을 내뱉으며 하심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젠장할!"

두 명의 병사를 더 쓰러뜨리고 차를 빼앗으려 돌진하던 카렐은 산 아래쪽에서 몰려올라오는 수십의 원병들과, 또 한대의 병력수송차의 모습에 결국 차를 포기하고 급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뒤로 휙 돌아선 카렐은 멍 하니 서 있던 하심을 눈 깜짝할 새 왼쪽 어깨에 짊어졌다. 하심이 카렐의 등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말고 하, 학장님을......"

"알았다니까!"

또다시 달려드는 병사 한 명의 머리를 산산조각 내버리고는 비틀거리는 코리온에게 달려든 카렐은 그를 오른팔로 번쩍 안아들고 필사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 안 껴안으면 떨어져도 책임 안집니다!"

가슴에서 흐느적거리는 코리온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내 달리지 못하던 카렐이 결국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더듬거리며 카렐의 가슴을 타고오른 코리온의 손이 결국 그의 강건한 목을 꽉 껴안았다. 카렐의 어깨에 뺨을 기댄 코리온이 무슨 이유엔지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썅, 저 끈질긴 새끼들!"

소리를 내지른 카렐이 그제서야 최대한의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두 명을 지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카렐의 입에서 거친 입김이 뿜어나왔다. 그 무서운 속도에 겁을 집어먹은 하심이 그만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차! 차로 잡아!"

두 다리로 카렐을 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허둥지둥 차에 뛰어올랐다. 뒤를 쫓기 시작한 3대의 차를 돌아본 카렐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크레바스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는 카렐의 뒤로 누마의 병사들이 탄 차가 거센 눈보라를 일으키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뒤를 쫓는 차와의 간격이 조금씩 가까워지자 겁에 질린 하심이 카렐의 등을 거칠게 두들겼다.

"바, 바로 뒤에......"

"알고 있소!"

거의 잡을 듯 쫓아오는 차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리던 카렐이 갑자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카렐은 자신의 목을 껴안은 코리온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거대한 크레바스 경계에 도달한 카렐은 허리를 활처럼 구부리며 발목과 그 강인한 다리에 최대한의 힘을 가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아욱!"

공중으로 날아오른 카렐이 무슨 이유엔지 거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발 밑에서 스쳐 지나고 있는 까마득한 크레바스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카렐의 어깨에 얹힌 하심이 비명을 올렸다.

"에익!"

그 거대한 크레바스 위를 가로질러 반대편 눈바닥에 곤두박질쳐진 카렐은 안고있던 하심과 코리온을 눈바닥에 떨어뜨리며 왼쪽 발목을 꽉 붙들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제기랄! 발목이......"

눈바닥 위를 한바퀴 구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카렐은 이를 악물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크레바스 반대편에 도착한 적 병력수송차가 또다시 수십의 병사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쫓아가! 빨리!"

누마의 고함소리에 몸이 제일 날래보이는 한 병사가 몸에 밧줄을 매고 카렐의 흉내라도 내려는 듯 크레바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악!"

그 용감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끝까지 다다르지 못한 그 병사는 절벽 모퉁이에 흉하게 매달린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오호,"

발목을 싸쥐고 있던 카렐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 다가갔다.

"제발, 사, 살려주세요,"

까마득한 크레바스 밑을 내려다본 병사가 파랗게 겁에 질린 얼굴로 카렐에게 손을 뻗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씨익 웃어보인 카렐은 손을 뻗어 병사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살았다고 생각한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없으면 매달려있기 훨씬 편할거야."

카렐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나머지 한 손을 뻗은 카렐은 녀석의 등에 달려있던 방패와 흉갑을 확 뜯어내 하심에게 집어던졌다.

"계속 잘 매달려있어."

녀석을 그대로 절벽 밑에 내던져버린 카렐은 밧줄에 매달려 버둥대는 병사의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하심, 코리온과 함께 쏟아지는 눈 속으로 비틀거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괴한들의 학회장 습격사실과 코리온의 행방불명 소식을 전해들은  베흔은 짐짓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경비대장을 호되게 질책하고 있었다. 5번 행성의 델루지 종가에 머무르던 베흔은 이 '놀라운'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이곳 콜로니 아카데미로 달려와 사태수습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라마단을 맞아 영지에 돌아와 부대 재편성작업으로 분주하던 헤즈 플라칼 사령관도 자신의 가문 영지에서 이런 수치스런 일이 발생했다는 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책회의 석상에 플라칼 가 간부들과 함께 앉아있던 베흔이 헤즈를 돌아보며 근심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령관께선 당장 대공주저하께 이 사실을 알려주시오, 당장은 그쪽이 가장 시급한 듯 하니......"

"알겠소......그런데......도대체 어떤 무엄한 녀석들이 감히 라마단 기간 중에 이런 무도한 짓을......."

"누군지 안 봐도 빤하지 않습니까! 그 망할 동부 놈 아니면 코아 전사단 놈들 아니겠습니까! 남부와 서부가 손잡으면서 패색이 짙어지니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일 겝니다!"

헤즈와 함께 온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분통을 터뜨리며 대뜸 고함을 질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사촌동생을 바라보며 잠시 한심한 표정을 지은 플라칼 가 종장 카나르 플라칼 경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게. 아직 아무 것도 확실한 건 없으니."

종장답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카나르 경은 자리에 모인 베흔과 헤즈 사령관, 케세크 경과 치안군 사령관, 베흔과 함께 온 델루지 가 총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경을 한번씩 돌아보았다.

사실 카나르 경도 이번 사건에 무언가 찜찜한 면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는 있었지만 아직 입 밖으로는 내고있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돌고있는 용의자중에는 동부와 코아 전사단도 있기는 했지만 바로 자신의 코앞에 앉아있는 근위대장이나 그간 코리온을 못 잡아먹어 안달해온 친척 델루지 가 역시 맴돌고있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일은 어차피 터졌고', 이젠 어떤 방식으로 수습하느냐에 가문의 전략을 저울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뭐, 케세크 경의 말이 백 프로 맞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베흔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카나르 경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베흔 역시 이 모든 가능성들을 내심 저울질하며 가문의 이해득실을 따지고있을 카나르 경의 속내를 이미 충분히 꿰고 있었다.

"잘만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는 있겠죠."

"누가 했는지를 따지는 건 의미 없다는 말이요?"

베흔의 의도를 파악한 카나르 경이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차피 죄를 누가 지은 것으로 처리할지는 거의 결정 난 것 아니겠습니까?"

입술을 굳게 다문 카나르 경이 조금 불쾌한 듯 베흔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델루지 가와의 각별한 관계를 자랑하는 저 근위대장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베흔의 옆에 내내 조용히 앉아있던 은발의 한 남자가 굵은 목소리로 갑자기 입을 열었다.

"리쿠 학장이 죽었다면 모르지만 만약 살아있다면......동부와 전사단 놈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녀석을 이 기회에 없애는 게 남부에 득이 되겠소? 아니면 신사적으로 살려주는 게 득이 되겠소?"

그 남자의 사뭇 위압적인 한마디에 자리에 모인 플라칼 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베흔이 이 냉랭해진 분위기를 웃음으로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마누엘 델루지 경께서는 항상 핵심만을 정확히 골라 짚으시니 때론 당혹스럽기까지 하구려."

약간 마른 듯한 긴 얼굴에 짧은 은발, 매섭게 옆으로 째진 갈색 눈동자의 남자는 베흔의 한마디에도 전혀 표정변화조차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큰 키, 역삼각형의 다부진 체구를 자랑하는 이 남자는 15만의 델루지 가 제후군을 총지휘하는 마누엘 델루지 사령관이었다.

얼마 전 죽은 테번 공의 막내동생으로 수명개조 당대세대인 그는 개조 당시 운 좋게도 30살이 갓 넘은 젊은 몸을 지녔던 덕에 아무도 당대세대라고 믿지 않을 정도의 강건하고 매력적인 몸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지금껏 제국의 모든 혼란기들을 다 경험해온 백전노장으로서 그는 오르마즈와 슈엘러 경이 없는 지금 제국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으로 손꼽아도 전혀 지장이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카나르 경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학장이 죽으면 우리 가문이 제국의 망신거리가 될 것인즉, 그건 생각해보지 않으셨소? 미쳐 날뛸 서부 놈들은 또 어떻게 속여넘길거요? 이 일로 탈라스의 동맹체가 와해되면......"

베흔이 카나르 경의 의심에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탈라스 동맹체는 어차피 플레렌 가와 세호 가의 땅덩어리 욕심 때문에 있은 것이니 별 영향은 없을 겁니다. 막말로 저희들이 물러난다고 다른 뾰죽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코리온 그놈을 죽인 게 동부 놈들이나 전사단 놈들이라면 더더욱 탈라스를 쳐서 응징을 하려 들겠죠."

"내 말은 서부 놈들을 어떻게 완벽하게 속여넘기느냐요."

카나르 경이 조금 흥분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베흔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친절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요즘 서부 놈들하고 코리온 그녀석이 카렐 그놈을 대한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니다 싶을 정도라는 걸 잘 아실 테고......카렐 녀석도 두들겨 맞고만 있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일단 동기는 완벽하죠."

"그 다음은?"

"코리온 녀석의 수색을 담당하는 체계를 일원화시켜야겠습니다. 이곳 주의 치안군을 총동원해 이 일대를 완전폐쇄하고 집중 수색하면 살아있는 녀석이든 얼어죽어있는 시체든 일단 찾을 수 있겠죠. 군용 외의 차량, 셔틀 일체의 교통수단을 금지하고 터미널도 폐쇄하고."

"얼어죽어 있다면 다행이지만 살았다면?"

"그냥 놔두면 지가 얼어죽겠죠."

베흔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어쨌든 원인제공자는 애초 기습한 '동부 혹은 전사단 놈들'이니까. 누군가의 칼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그편이 도리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죠."

카나르 경이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갑자기 회의장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검은 무명포 차림의 유학자들 서너 명이 갑자기 안에 난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대책회의를 한다면서 우릴 쏙 빼놓고 하다니! 지금 학장님이 행방불명이 되신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우리 유학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요!"

그들에게 무어라 나무라려는 카나르 경을 가로막은 베흔이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죄송합니다, 미다트 부학장님, 지금 행정적인 문제를 논의하느라 미처 교수님들을 생각지 못하였으니 널리 양해해주십시오. 학장님을 찾는 문제가 무엇보다 시급하오니 이제 모든 회의는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님들 입회 하에 최대한 투명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일단 거기 앉으시지요."

베흔의 친절한 태도에 성이 조금 누그러들었는지 부학장은 베흔이 권한 자리에 일단 앉으며 원탁에 함께 둘러앉은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의 고위급 인사들을 한번씩 째려보았다.

마누엘 델루지 경이 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부 최고제후가 사람으로서 이번 사태에 유감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학장님을 구해내 남부의 명예를 회복할테니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때맞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카나르 경의 비서관이었다. 그는 앉아있던 사람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을 꺼냈다.

"콜로니 아카데미에 남아있던 괴한들의 시신과 혈흔을 분석한 결과 총 6명 중 3명은 동부 혈통임이 거의 확실하고 2명은 황제령 타르서스와 ㅤㅋㅞㄹ크, 1명은 북부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함께 있던 경비병들이나 유학자 분들의 증언에도 녀석들이 동부, 혹은 북부 억양이 강한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미다트 부학장의 입술이 순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카나르 경이 파일을 탁 덮으며 짐짓 흥분한 듯 언성을 높였다.

"망할 녀석들......아주 남부하고 서부를 대놓고 엿먹이는군!"

입고있던 망토와 모자를 벗어 하심에게 덮어준 카렐은 입고있던 흰 비단튜닉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절룩거리는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따라오는 길에 이미 몇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던 하심은 이번에도 역시 얼마 걷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카렐이 가쁜 입김을 뿜어내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미안해요......발이 얼어서......"

하심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발 좀 봅시다."

자리에 꿇어앉으며 하심을 다리 위에 앉힌 카렐은 그가 신고있던 신발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별로 큰 움직임이 아닌데도 하심이 많이 고통스러운 듯 갑자기 이를 악물여 카렐의 목을 꽉 껴안고 말았다..

"젖었소. 벗는 게 낫겠는걸."

살과 들러붙은 양말을 벗겨내자 하심은 결국 눈물까지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직은 감각이 있는 걸 보니 발가락을 잘라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발가락을 자른다는 말에 기겁한 하심을 억지로 등에 업은 카렐은 뒤를 문득 돌아보았다. 병사에게서 빼앗은 방패와 흉갑으로 어설프게 만든 썰매 위에 망토로 온몸을 감싼 채 맥없이 누워있는 코리온이 희미한 입김을 공기 중에 내뱉고 있었다.

세 사람의 벨트를 끌러 만든 썰매줄을 힘껏 잡아당기며 카렐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희고 굵은 눈발이 세 사람의 위로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까 차를 빼앗았어야 하는데 미안하오. 당신 한 명인 줄 알고 차도 안 가지고 무작정 달려왔는데......학장까지 있었을 줄이야. 발목만 괜찮아도 어떻게 해봤을 텐데. 이거야 원......"

"지금 여기가 어디죠?"

하심이 카렐의 어깨에 힘없이 얼굴을 기댄 채 물었다.

"두딘카 시 남쪽으로 200스타디아. 콜로니 아카데미 남서쪽 440스타디아.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그럼 이제 두딘카 시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이 속도로 걸어서 한나절은 걸릴 거요. 중간에 산도 있고, 크레바스도 있고......나 혼자 뛰면 얼마 안 걸리겠지만 지난번 다쳤던 종아리 근육이 성치않은 것 같으니 두 사람을 안고 아까 같이 뛰기는 무리일 것 같소."

카렐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제......끝인가요?"

"듣자하니 순록몰이꾼들이 여름철에 사용하는 산막이 이 부근 방목지 어딘가에 있다던데, 지금 거길 찾아가는 길이요. 지금은 겨울이라 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어있는 상태일거요."

하심의 눈이 그제서야 번쩍 하니 뜨였다.

"얼마나 남았는데요?"

"글쎄, 두딘카 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로 부근이라니까 대강 20스타디아정도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눈에 파묻혀 있지 않기만 바라야지."

하심이 카렐의 목을 껴안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당신이 운 없이 학장님 차에 탄 것도 다 이러라는 하늘의 뜻이었나 보네요."

"글쎄,"

카렐이 씁쓸하게 웃음지었다. 거의 보이는 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용케 방향을 찾아가는 카렐이 신기한지 하심이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댔다 떼었다 하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다친 다리를 힘겹게 끌고 가는 카렐도 많이 지친 듯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칼로는 사람을 안 죽이시던데, 왜 그러셨죠?"

"그래야 저 바보들이 날 '진짜 괴물'로 알 것 아니요. '리쿠 학장과 예킨터스 교수를 납치해 달아난 회색털 눈괴물 수배함'이라고 전단 붙이는 우스꽝스런 짓은 못할 테니."

하심이 간만에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를 한 번 추켜 올린 카렐은 눈발이 날리는 벌판을 가로질러 힘든 발걸음을 재촉했다.

꽤 한참을 더 걸은 카렐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약간의 언덕이 주변에 널려있는, 널찍한 평지에는 한때 이곳이 방목지였음을 알려주는 듯 지금은 버려진 물탱크와 두터운 눈 위로 지붕만 옹색하게 드러난 몇 개의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하심을 바닥에 내려놓은 카렐은 눈에 묻혀 입구조차도 보이지 않는 건물 한쪽을 손바닥과 칼집으로 정신없이 파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일단 여기서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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