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1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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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인 오두막 안에 들어선 하심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에 파묻혀 열 수도 없이 되어버린 문 대신 한쪽에 뚫린 작은 창으로 코리온을 안고 내려온 카렐은 행여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눈 구덩이를 무너뜨려 입구를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휴우.”
카렐이 천장에 달린 작은 램프를 켜자 사람 네댓 명 누우면 꽉 찰 듯한 이 자그만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침대 두 개와 화로, 약간의 땔감과 내용물은 있지도 않은 더러운 그릇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살림살이의 전부였고 낮은 천장은 큰 키의 카렐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혀야 가까스로 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였다.
하심이 조금은 실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별거 없네요......먹을 것도 없고.....”
“그럼 호텔방이라도 바라셨수,”
솥을 집어들며 장난스럽게 대꾸한 카렐은 한쪽 창을 비틀어 열고는 이젠 완전히 다져져 거의 얼음이 되어버린 흰 눈을 안에 잔뜩 담았다. 능숙하게 화롯불을 붙인 카렐은 눈을 담은 솥을 그 위에 걸어놓았다.
“학장님, 여기, 누워 계십시오.”
코리온을 부축해준 하심은 거의 탈진해있는 코리온을 침대에 정성스럽게 눕혀주며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결과야 어쨌든, 당장은 살인마들과 저 무서운 추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한 하심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처 좀 봅시다.”
방 정리를 끝낸 카렐이 손을 내밀자 코리온이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내버렸다.
“네놈에게 보이지 않아도 내 상처는 내가 더 잘 안다.”
“말도 안되는 고집 피우면 묶어놓고라도 볼 테니. 어쩔 겁니까? 코리온 오라버니?”
학장의 적대적인 태도에 제일 당황하고 있는 건 얼떨결에 중간에 끼어버린 하심이었다. 카렐은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는 코리온을 꽉 붙들고는 그의 옷을 억지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으, 흠, 전 안보겠습니다.”
도와달라는 코리온의 눈빛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하심이 화로를 향해 돌아앉았다.
“가슴에 자상, 허벅지 안쪽에 자상, 양손, 발, 얼굴에 동상, 허허, 운 좋으셨소. 칼이 반 뼘만 위에 떨어졌다면 까딱하면 남자구실 못할 뻔했지 뭡니까.”
돌아앉아있던 하심이 카렐의 농담인지 사실인지에 민망한 웃음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하심, 거기 얹어놓은 물 따끈따끈해지거든 발하고 손 좀 담그고 녹이고 있어요. 옆에 다른 솥 거는 거 잊지 말고.”
“예.”
“이런 식으로 날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나?”
내내 조용하던 코리온이 결국 카렐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벨트에 달려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던 카렐은 라스가 싸준 상자를 꺼내놓으며 동문서답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아, 맞아, 생간이 있었군. 좀 드시겠소?”
“학장님은 채식만 하십니다.”
“아차, 그랬지......어쩌나. 자네는? 둘이 먹긴 충분할걸? 뭐, 날거 싫으면 구워먹고.”
코리온의 눈치를 힐끔 살핀 하심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낮 내내 굶은 데다가 이런 생고생을 했으니 허기가 질만도 했지만 코리온의 저런 적대적인 태도에 그의 수하인 하심이 순순히 카렐과 함께 식사를 하고싶은 마음이 들 턱이 없었다.
상자 뚜껑을 연 카렐은 안에 들어있던 반쯤 얼어있는 생간을 맛있게 씹어먹으며 코리온의 가슴에 붙어있던 지혈용 테이프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어휴, 지금껏 꽤나 아프셨겠소. 약 바르면 당장은 좀 따가울테니 참으시구려.”
입안에 가득 든 간 조각을 연신 우물거리며 카렐이 코리온의 상처에 약을 잔뜩 발라 넣었다. 불에 달군 바늘을 화로에서 뽑아낸 카렐은 입고있던 튜닉의 안쪽 솔기에서 뽑아낸 부드러운 비단실을 그 끝에 꿰어 넣었다.
“거, 참. 유학자들 꿰매주는 거하고 무슨 악연이라도 붙었나.....지난번엔 제네르, 오늘은 코리온 오라버니에, 하심 머리도 꿰매줘야 할 테고......어머니 꿰매드릴 일만은 안 생겼으면 좋겠군.”
“전 사양할께요.”
코리온의 가슴에 바늘을 들이대는 모습에 기겁을 한 하심이 손을 급히 내저었다.
“안 꿰매면 더 아파질텐데?
바늘이 살을 뚫자 코리온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지만 그는 신음소리조차 전혀 내지 않은 채 그 아픔을 그대로 이겨내고 있었다.
“상처가 좀 깊어서 보통 봉합으로는 안되겠고, 2중 봉합합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간 조각을 태연하게 씹어먹으며 자신의 상처를 꼼꼼히 꿰매주는 이 황당할 정도로 뻔뻔스러운 사촌누이의 모습에 코리온은 침묵으로 그 불쾌감을 소극적으로나마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을 다 꿰매고 매듭을 짓던 카렐은 화로 옆에 불쌍할 정도의 모습으로 웅크려 앉아있는 하심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오라버니야 채식주의자에 나 꼴 보기 싫어 안 먹는다고 치고, 고생한 하심은 무슨 죄라고 덩달아 굶기는 겁니까? 휴우~ 지난번에 확인했지만 오라버니 몸매 하난 진짜 예술이구려. 자이납 그 새끼 하여간 남자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카렐은 코리온의 긴 다리를 들어올려 한쪽 어깨에 걸고는 허벅지 안쪽을 꿰매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코리온이 등을 보인 채 화로 옆에 앉아있는 하심에게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예킨터스 교수. 그거라도 먹게.”
“아닙니다. 별로 고프지 않습니다.”
“내 지시니까 먹어.”
잠시 쭈삣거리던 하심은 상자에 들어있던 간 조각을 꼬챙이에 꿰어 화롯불에 굽기 시작했다.
다시 쌀쌀맞게 시선을 돌려버린 코리온은 벽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델루지 가 녀석들이 너희가 한 짓으로 은폐하려 드는 것 같더군.”
“훗, 이상할 것도 없군요.”
“플라칼 가가 한패거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엔 아니었어도 곧 한패거리가 될 겁니다. 이미 됐던가.”
“그렇겠지.”
코리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봉합을 끝낸 카렐은 동상이 걸려 얼어붙은 코리온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었다.
“날이 이 모양이니 염증이 생길 염려는 적겠군요. 내일까지만 버텨보십시오. 나갈 방책을 어떻게든 찾아볼 테니.”
오두막 안에 제법 훈훈해지자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탈진해버린 하심은 자리에 앉은 채 연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코리온의 손발에 준비해온 동상약을 꼼꼼하게 발라준 카렐은 동상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그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손을 가져갔다.
“천한 것이 감히 손댄다고 불쾌하게 느껴지셔도 좀 참으십시오. 어차피 직접은 바르시지도 못할 테니.”
얼굴에 약을 발라주는 카렐의 조심스런 손길에도 코리온은 무표정하게 천장만 주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가 이런다고 내가 감동받을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망토 두 개는 안에 덮으시고 겉에 담요 덮으십시오. 전 옆 침대에서 하심과 함께 자겠습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근 채 화롯가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하심을 번쩍 안아든 카렐은 그를 옆 침대에 눕히고는 눈에 젖은 옷가지를 벗겨냈다. 많이 피곤했던지 옷을 벗기는 카렐의 손에도 잠결에 별 저항 없이 따르고 있었다.
느닷없이 울린 하심의 째지는 비명소리에 바로 옆에서 잠들어있던 카렐이 속셔츠바람으로 허둥지둥 일어나 칼을 움켜쥐었다. 반대편에서 잠들었던 코리온도 많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붉은빛 안광을 번득이며 어둠 속에서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카렐은 아무 일도 없자 램프를 다시 켜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요?”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 한 거예요!”
불빛에 깜짝 놀란 하심이 거의 벗은 몸을 급히 담요로 감싸며 카렐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어안이 벙벙해진 카렐이 생각 없이 되물었다.
“무슨 짓이냐니?”
“왜......왜 내가......”
담요가 흘러내리면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자 또한번 비명을 내지른 하심이 얼른 담요를 다시 추스렸다. 그는 벽에 널려있는 자신의 옷가지들을 야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옷을 왜 벗겼냐구요!”
순간 기가 막혀온 카렐이 칼을 떨구고 말았다.
“위아래 속옷 한 장씩은 남겨 놨잖수?”
하심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코리온 보기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그걸 말이라고 해요!”
하심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세상에.....249년이나 처녀를 지키면서 살았는데......이렇게 무너질 줄이야......이제 어떡하라고......”
“댁 몸에 손 안댔다니까! 저놈의 궁상하고는!”
카렐이 버럭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그럼 왜 날 안고있는 거예요!......날 안고있었으면서 손도 안댔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릴 누가 믿냐구요!”
“참, 나, 파고 들어온 건 댁이란 말이요! 가뜩이나 좁은 침대에서 사람 계속 밀어붙인게 누군데!”
“거짓말 말아요! 어떡해......이제 더 이상 처녀라는 소리도 못하게 되었으니......어떡할 거예요! 이제 어떡할 거냐구요!”
“미치겠네.”
벌떡 일어난 카렐이 벽에 널려있던 하심의 젖은 옷들을 그의 얼굴에 홱 내던졌다.
“내 안 말릴 테니까 그거 입고 자구려!”
“어......”
축축해져있는 옷을 자기 손으로 확인한 하심이 그제서야 조금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내 몸에 정말 손 안 댔죠?”
“댁 몸엔 관심 없수. 나는 눈도 없는 사람인줄 아쇼?”
홧김에 퉁명스럽게 대꾸한 카렐이 옷들을 도로 벽에 널었다. 카렐의 말에 자존심이 제대로 상해버린 하심이 갑자기 그를 신경질적으로 째려보았다.
“불안하니까 내 옆에서 자지 말아요.”
“원하시는 대로.”
화로 속을 한 번 헤집은 카렐은 그 옆 맨바닥에 담요도 없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마룻바닥을 뚫고 찬 기운이 솟아올라왔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제서야 안심한 듯 카렐에게 등을 보이고 드러누운 하심은 눈에 고인 눈물자국을 얼른 닦아냈다.
‘춥긴 춥네.’
맨몸 위에 알량한 담요 한 장만 돌돌 말은 하심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결국 화로를 향해 다시 돌아누운 하심은 화로 옆 바닥에서 그새 쿨쿨 잠들어버린 카렐을 쏘아보며 혼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가란다고 진짜 가는 건 또 뭐야.’
코리온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비엔 6번 행성으로 향하던 레곤 대공주는 아들을 기습한 범인이 전사단과 동부 사람들인 것 같다는 플라칼 가의 보고에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말도 안돼.......그럴 리가 있나......”
“동감입니다.”
함께 있던 푸아킨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전사단 측에서도 아직 카렐 전하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행방불명된 그분 수색에 온 신경을 쏟고있을 전사단에서 벌써 그분의 복수 운운하면서 대군마마를 기습한다는 건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래.....맞아. 맞아. 말도 안돼......그런데 그 근위대 바보 놈들은 카렐이 이미 동부로 달아났을 것이라 알고 있을 테니......그래서 이런 자작극이 나올 수 있던 거겠지?”
전전긍긍하던 대공주는 그제서야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 그의 아들 코리온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행방불명상태라는 것이었다.
아들 걱정에 창백해진 대공주의 얼굴을 살피던 푸아킨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근위대장이나 남부녀석들을 닦달하지는 마십시오. 일단 다 믿어주는 척 하십시오.”
“그럼 코리온은 어떻게 구하라고! 녀석들은 그 앨 죽이고싶어 안달하고 있을 텐데! 그 망할 서부 놈들! 왜 멀쩡하게 공부 잘 하고있는 녀석한테 제위니 뭐니 바람은 넣어서 일을 이 지경을 만드냐고! 지난번에도 그랬던 놈들이!”
오빠였던 주페 태자에게 있었던 일을 문득 떠올린 대공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얼마 전만 해도 ‘코리온이 혹시 정말 황제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푸아킨이 잠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실 지 모르지만 비엔 6번 행성은 플라칼 가가 지배하는 극단적인 통제사회입니다.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오래 피해 다닐 수도 없으실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죽게 놔두라고?”
“전사단과 서부에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맙소사! 미쳤어? 카렐이나 있다면 모르지만.......나머지 놈들은 그 애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낼 놈들이라고! 카렐이 없으면 페로 아니면 제네르 걔가 전사단 실권을 쥐고 있을 텐데! 지난번에 코리온 때문에 동료 40명도 넘게 죽고 자기도 죽을 뻔했던 녀석이야! 게다가 카렐도 못 찾아서 정신없다는데 여기 신경 쓰겠냐구!”
흥분한 대공주가 대뜸 언성을 높였지만 노련한 모사답게 푸아킨이 사뭇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복수심에 눈멀어 날뛸 정도로 가벼운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어쨌든 그쪽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있는 것이 좋을 듯 하니 한번 연락이나 해보십시오. 그리고 두겐 공과 샤드니 경에게도 알리는 것이.......”
“그 기생오래비새끼!”
‘샤드니’ 라는 이름을 들은 대공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주페 태자 사후 코리온을 가장 헌신적으로 받들어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대공주였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샤드니라면 질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둘의 혼인을 제발 종친회에 상정해달라며 몇 번이나 찾아와 애원했던 샤드니를 호통과 함께 쫓아내 버렸던 것도 바로 대공주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군마마를 구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들 사람입니다.”
머리를 싸쥔 대공주는 지금 이 순간 정작 도움을 청할 곳이 모두 ‘찜찜한 곳’들 뿐이라는 사실에 뼛속깊이 절망하고 있었다.
서부 아켐의 파예드 아카데미 부근에 위치한 주페 태자 묘소를 찾아온 제네르는 비석 앞에 망연하게 꿇어앉아 맑고 푸른 하늘을 잠시 올려보았다.
혈흔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에 술 한잔을 올린 제네르는 다시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흰 무명포와 머플러, 학모까지 모두 차려입고 유학자의 성장을 한 제네르는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 호젓한 묘를 바라보며 꽤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개혁파 지도자 교수님이 주페 태자 묘소에 그러고 계신 게 영 낯서네요.”
무슨 소풍이라도 온 양 기분이 들뜬 아메스는 묘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지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태자께선 마리안 부인과 사촌지간이시니 아메스 네게도 당숙이 되시는 분이다.”
제네르가 별 감흥 없이 구는 아메스에게 꾸짖듯 쏘아붙였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메스가 민망한 듯 제네르의 옆에 얼른 꿇어앉았다.
“전하의 피 맞습니다.”
비석에 남아있는 혈흔을 분석한 베아트릭스가 평소처럼 밋밋한 톤으로 말했다.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하심 예킨터스 교수를 납치해서 파예드 아카데미 인근 소도시까지 도망치셨고......그곳에서 발각되셔서 쫓기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행방불명이라.....그렇다고 플레렌 가에서 전하를 체포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제네르는 이 행방불명 사건의 의문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또한번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리쿠 학장 학회 참석길에 예킨터스 교수도 동행했나?”
“물론입니다. 리쿠 학장이 전세여객선 출발까지 연기시키고 직접 가서 인질에서 풀려난 예킨터스 교수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가장 총애하는 최측근이니.....”
“아씨, 예......머시긴가 그 망할 놈 도대체 누구예요! 감히......”
듣다못한 자이납이 대뜸 분통을 터뜨렸다.
“어쩐대? 여자거든? 지난번에 남극성당에서 학장 뒤에 따라오던 ‘미모의’ 여교수 말이야. 듣자하니까 학장 침실까지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정도로......”
우베가 놀리듯 툭 내던지자 흥분한 자이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망할 여우같은 년! 내 손에 잡히기만.....”
자이납의 평소같은 주책을 짐짓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린 제네르는 입술을 깨물며 이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인질도 풀어줬고, 잡히지도 않으셨다면 왜 연락을 못하시는 거지? 할룩스만 쥐고 계시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연락인데.”
골머리를 썩는 제네르를 안됐다는 듯 쳐다보던 우베는 갑자기 들어온 연락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 푸아킨 경이시네......또 웬일이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거야.”
아르다가 셔틀에 허둥지둥 뛰어오른 제네르가 또 한번 머리를 싸쥐며 투덜거렸다.
“전하는 서부에서 행방불명이시고, 리쿠 학장은 남부에서 행방불명됐고, 대공주저하는 우리보고 도와달라시는데 우리가 그럴 여유가 어딨냐구. 제기랄.”
“델루지 가와 플라칼 가에서 아무래도 우리 쪽에 누명을 씌우려 드는 모양입니다. 리쿠 학장이 살아있기는 한 걸까요?”
“에엑, 재수 없는 소리 말아요!”
자이납이 생각 없이 떠드는 우베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학장과 예킨터스 교수 두 사람이 행방불명이라니......그 둘이 죽은 것이라면 벌써 근위대나 남부 놈들 펄펄 뛰고 난리를 쳐야 되는데 아직 조용하잖나? 죽은 것도 아니고 행방불명이라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제네르의 말에 조심스럽게 끼어든 건 바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베아트릭스였다.
“남서 콜로니 아카데미가 있는 쿠엘스크 주는 툰드라대에 지금은 한겨울입니다. 고도도 높고 이맘때 하루 중 일조시간은 채 5시간이 안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행방불명이라면 현실적으로 반나절이나 생존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코리온이 죽었을 것이라는 베아트릭스의 매몰찬 말에 자이납이 갑자기 코리온에게서 훔쳐온 수건과 벨트를 껴안고는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없이 셔틀 안이 떠나가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시끄러.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제네르가 대뜸 신경질을 내며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대공주저하께서 직접 도움을 요청하셨으니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우베하고 카토, 너희가 일단 공식 사자 자격으로 가도록 해. 우린 여기서 계속 전하를 찾고 있을 테니까. 대공주저하하고 함께 있으면 근위대나 남부 놈들도 어찌 못할 거야. 그쪽에 익숙한 베아트릭스 경이 가면 좋긴 하겠지만 아는 사람이 드글드글할테니 피하는 게 상책이지.”
“저, 저는요!”
자이납이 갑자기 제네르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넌 가봤자 사고밖에 더치겠냐. 가서 리쿠 학장 얼어죽은 시체라도 보고싶냐?”
제네르가 매정하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하지만 자이납은 그런 제네르의 발목을 결사적으로 붙들며 악을 썼다.
“제발, 제발요! 사고 안칠께요! 우베 님 말씀 잘 들을께요!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
“으이구,”
제네르가 옷자락을 붙들고 거의 생떼를 쓰는 자이납을 곱지 않은 눈으로 째려보았다.
“그래그래, 가라, 가. 진짜......이놈은 이럴 거면 도대체 뭣 하러 전사단에 왔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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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12 후기>
지금까지의 파트들 중 가장 가벼운(?) 내용을 이루던 파트12가 이것으로 끝이군요.
뒤이어질 파트 13, 14는 지금까지 독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시던 내용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분위기 역시 본래 이 소설의 분위기로 되돌아갑니다. 현재 이야기는 계속 이대로 이어져, 카렐과 원치 않는 동행을 하게 된 코리온 일행과, 이들의 뒤를 각각 다른 목적(?)으로 쫓는 제네르 일행, 그리고 근위대 세력들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과거 이야기는 이제 황제의 죽음으로부터 2년여 후,
태자들간의 견제만이 오가던 '암흑기' 가 지나고 결국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몇 달간의
사건이 다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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