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52화 (252/1,132)

< -- 252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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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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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혼란기 초기 2년이 넘도록 계속된 소위 '암흑시기'는 얼핏 부정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그 이름과는 달리 태자들간의 '형제로서의 최소한의 도리' 때문에 야기된 모순적인 결과였다.

군대로 무장하고 있던 3명의 태자들 모두 '형제에 대한 선제공격'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들을 화해시키려 동분서주하던 주페 태자의 노력 또한 내부의 적에 의해 난관에 봉착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서 황금 같은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도 세간의 관심은 희대의 명장 오르마즈 경과 20만이 넘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북부가 왜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는지에 쏠려있었다.

특히나 오르마즈 경이 세나우스 2세의 장례식 이후 2년이 넘도록 공개석상에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과 맞물려서 이전에 입은 독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는 둥, 북부의 그 유명한 환락컴플렉스에서 술과 윤락부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둥 하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으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었다.

어쨌든, 오르마즈가 타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말도 안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에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분이 우리 가게 손님으로 오셨다니,"

북부 나에스탄에 위치한 29번 환락컴플렉스의 구석진 밀실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던 오르마즈는 지배인이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윤락부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미 비어있는 두개의 리커병을 보아서는 그도 꽤 많은 술을 마신 것이 틀림없었지만 눈이 조금 붉어진 것을 빼면 술을 마셨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저들은 필요 없다하지 않았나?"

'과잉친절'에 오르마즈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지배인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휴, 저희 업소의 무료서비스입니다. 어떻게 오르마즈 경같이 귀한 분께서 이런 것들 하나 없이 술을 드시겠습니까. 저희 컴플렉스 최고수준들로 골라왔으니 맘껏 즐기십시오. 컴플렉스 최고지배인께서 남쪽에 있는 호텔 특실을 비워두겠다 하셨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저희 업소 기사들과 경호원들이 모셔다드릴 겁니다."

얼떨결에 5명이나 되는 윤락부들을 떠안게 된 오르마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술과 노는 것으로 따지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였지만 지금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도 잊고 저들 품에서 희희낙락거릴 정도로 생각 없지는 않다는 것이 보통의 '한량'들과 그와의 분명한 차이였다.

허리를 껴안은 채 술을 따르는 2명의 미녀들 반대편에서는 3명의 미소년들이 굳어있는 오르마즈의 얼굴과 어깨를 더듬기 시작했다.

"푸훗,"

밀실 문이 열리고 회색 망토를 뒤집어쓴 큰 키의 여자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그는 5명의 윤락부들 사이에서 무감각하게 앉아있는 오르마즈를 사뭇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르 언니답지 않으시네요. 있을 땐 철저하게 즐기시는 분 아니셨던가요?"

"할 얘기가 있으니 너희들은 나가있어라."

핑계거리가 생긴 오르마즈는 그들 5명을 재빨리 밖으로 내보냈다. 어두침침한 밀실 안에는 오르마즈와 망토 차림의 여인,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얼마만이죠? 그 동안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웃는 낯의 세네피스 카파키 태자빈이 망토를 벗으며 오르마즈의 옆에 바싹 자리잡고 앉았다. 그는 이미 술기운이 잔뜩 올라있는 오르마즈의 손에서 리커병을 자연스럽게 빼앗아들며 빈 잔에 담아 들이키기 시작했다.

"조카들하고 형부들은 만나보셨어요?"

"다들 잘 있더구나."

"아버지가 얼마나 애타게 찾고 계신지 잘 아시면서......"

"난 이미 사령관을 그만둔다지 않았냐."

"건강해 보이시네요. 팔도 재생시키셨고."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강건한 왼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밀실의 원색적인 불빛 아래에서 둘의 너무도 비슷한 무지개톤 회색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눈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세네피스가 물었다.

"종가로 직접 안 돌아오시고 여기로 부르신 걸 보니까......저한테 따로 할말이라도 있으신가보죠?"

"묻고싶은 게 있다."

오르마즈가 막내동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매서운 시선에 아무러한 세네피스도 움찔 하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묘한 두려움과 존경,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애증이 뒤섞인 이 맏언니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너희가 넷째 모디아크 공주를 회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정보가 빠르시네요......어디 산골에 숨어 계셨던 건 아니신가보죠?"

"누가 들으면 네가 내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것처럼 알겠구나."

언니의 가시돋힌 말에 세네피스가 또 한번 움찔 하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말을 이었다.

"네가 아버지에게 말 안하고 감추고있던 건 고맙게 생각한다만......네페티 부인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건 보기가 영 안좋더구나."

굳은 얼굴로 술 한 모금을 들이킨 세네피스는 이 무서운 언니가 자신의 속내를 이미 다 꿰고 있었다는 데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2년여 전 오르마즈가 '네페티 부인 초대로 서부로 간다'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세네피스는 오르마즈의 가출 직후부터 네페티 부인 주변에 사람을 풀어 그 주변을 감시해오고 있던 차였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까지도 잡지 못했지만 오르마즈가 가문이 저지른 일들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한 죄책감을 느꼈을 오르마즈가 네페티 부인에게 도움을 주려 접근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세네피스도 이미 심증으로 굳히고 있었다.

물론 세네피스가 아버지인 투르케스크 공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이 강직한 언니가 더러운 제위다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총애를 독차지하고있는 언니에 대한 묘한 질투도 한몫 했음을 그 스스로는 물론이고 오르마즈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기절하시겠죠. 서부 최고제후인 유부녀와 간통이라니......"

"난 떳떳하지 못한 짓 한 적 한 번도 없어."

눈을 치켜 뜬 오르마즈가 남은 술을 훌쩍 들이켰다.

"그래요. 그러실 지도 모르죠.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약혼자한테 미련을 둬서 뭣하겠어요?"

눈을 가늘게 뜬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오르마즈의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 잠깐이나마 동생을 노려보았다.

오르마즈에 붙어 앉은 세네피스가 그의 어깨에 가볍게 턱을 걸치며 말했다.

"언니하고 저하고는 정말 많이 닮았죠......얼굴은 물론이고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꼽혔던 것도 그렇고......7남매 중에서도 단 두 명 나온 이 희귀한 회색빛 오팔 눈동자까지 말이죠. 하다못해 엄청난 주량까지도."

세네피스가 히죽거리며 술을 입안에 확 쏟아부었다. 술잔을 손에 쥔 오르마즈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오르마즈에 입술을 바싹 가져간 세네피스가 들릴 듯 말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이렇게 비슷한 우리가 어쩌다가 성격은 영 딴판이 되었을까요?"

동생을 휙 돌아본 오르마즈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디아크 공주를 회유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도 그렇게 이해가 안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으로 말이야."

"원래 셋이 있을 땐 둘이 먼저 손잡고 하나를 치는 게 정석 아닌가요?"

"그래, 그건 누구나 다 알고있지. 그런데 그 뒤에 숨겨놓은 의도도 알려주면 고맙겠구나. 네가 그 협상사실을 로노 장태자에게까지 공공연히 흘리면서 진행하는 이유를 말이야."

긴장한 세네피스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또 한잔의 술을 들이키며 질문을 이었다.

"로노 태자가 기대고 있는 동부는 우리 북부보다 가난해. 아무리 애써도 북부가 가지고있는 경제력에 맞설 수가 없겠지. 하지만 장태자에겐 '명분'과 용맹한 동부기병대가 있지. 그 명분 덕택에 근위대......그것도 최정예 아메샤 스펜타 군단 3만 명이 귀순해오는 성과까지 거두었고."

"그래서요?"

세네피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모디아크 공주는 놀랄 만큼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너희 쪽에 귀가 솔깃해 있겠지? 어차피 세력상 두 오빠를 이기기는 어려운 형편이 되어버렸으니......한쪽에 붙어서 살길이라도 모색해야 할 테니. 살려주겠다는 약속만 해줘도 감지덕지할 판에 근위대장직에 그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제안이라니 두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 됐겠구나......독이 든 선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

"더 놀라운 건 똑똑한 근위대장 베흔 녀석이 그 소문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정도로 끝내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실이겠지만."

세네피스는 여전히 술잔만 기울일 뿐 별 말이 없었다.

"네 계획대로......궁지에 몰린 로노 장태자가 모디아크 태자를 선공한다면......형제를 먼저 공격한 무도한 자가 될 테고.....장태자로서의 명분에도 큰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다 아시면서 새삼스럽게 질문을 왜 하시는데요? 오르 언니?"

듣다못한 세네피스가 결국 반격을 개시했다. 동생의 독기어린 눈을 문득 바라본 오르마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무릎 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으며 얼굴을 바싹 들이밀어왔다.

"한가지 더 알려드리죠."

오르마즈가 동생의 얼굴을 문득 올려보았다.

"제 계획 중에는 언니도 들어가 있죠."

오르마즈를 노려보는 세네피스의 눈가가 유난히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단 제위경쟁이 피를 보기 시작하면......패한 쪽 가문은 몰락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언니도 잘 아시겠죠? 카파키 가 적장자이신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 님?"

"날 협박하는 거냐?"

오르마즈의 매서운 눈길이 막내동생을 대뜸 째려보았다.

"언니 생각대로 평화롭게 수습이 된다면 가문으로서는 본전치기라도 하는 셈이니 언니도 부담이 별로 없겠지만......일단 교전상태에 들어가면 결국 언니도 가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잘 생각해 행동하세요. 오르 언니."

뒤로 휙 돌아선 세네피스는 벗어놓았던 망토를 다시 뒤집어쓰고 총총히 밀실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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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주와 함께 나타난 우베의 모습에 베흔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베흔의 얼굴은 그의 등뒤에서 나타난 자이납의 존재에 순간 거의 경악에 가깝게 변해버리고 있었다.

지난번 저 같잖은 계집애 덕택에 거의 익사할 뻔했던 베흔으로서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지금......용의자로 꼽히는 무리들을 부르셨다뇨......조금 부주의하신 것이 아니신지."

베흔이 힐난하는 투로 자신에게 말하자 사뭇 굳은 표정의 대공주가 대뜸 그를 몰아세웠다.

"그들이 동부나 황제령 출신이란 것만 밝혀졌지 그 이상은 아무 진척이 없잖소. 내 저들에게 사실여부를 추궁하기 위해 불렀으니 근위대장은 내게 감히 이러쿵저러쿵하지 마시구려."

"아......예, 황공하옵니다. 저하."

급히 머리를 조아린 베흔은 대공주 뒤에 선 푸아킨 경을 살짝 흘겨보았다.

대공주와 베흔 사이에 흐르던 잠시 동안의 어색한 분위기는 금발머리의 한 미남자가 십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허겁지겁 들어오면서 확 깨져버렸다.

"대공주저하! 부름 받고 달려왔습니다!"

대공주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인 사람은 푸아킨 경의 연락으로 탈라스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샤드니였다.

"오긴 왔군."

마지못해 그를 부르기는 했지만 영 미덥지는 않은지 대공주가 낯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샤드니의 그 맑고 아름답기까지 한 얼굴은 이 충격적인 소식에 거의 시체처럼 변해있었다.

"이들이 수색작업이 참가할 수 있게 협조 좀 해주시겠소? 근위대장?"

대공주의 요청에 베흔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건 소인 소관이 아닌 듯 합니다. 이곳은 플라칼 가 영지이오니 종장 카나르 경에게 협조를 구하심이 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립 유지와 현장보존을 위해 치안군 외 다른 세력의 현장활동을 엄금한다 밝힌 바 있으니.....그런 뜻을 대공주저하께서도 알고계심이......"

"저 한심한 녀석들이 뭐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으니 그러는 것 아닌가!"

대공주가 결국 분통을 터뜨리며 그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베흔과 함께 있던 헤즈 플라칼 사령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정하시옵소서. 지금 치안군들을 총동원해서 두딘카 시와 콜로니 아카데미 반경 300스타디아를 완전폐쇄하고 셔틀을 동원해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길! 지금 이런 지독한 날씨에서 아들이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하루가 되어 가는데 나보고 진정하라는 말이 나오냐고!"

흥분한 대공주가 말 그대로 악을 쓰는 모습에 당황한 남편 예르마크 경이 급히 부인을 달래주기 시작했다.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대공주의 모습에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베흔은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대공주도 저럴 때 보면 어머니는 어머니군. 그 골칫덩이 천재 아들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맨날 으르렁거렸다더니."

함께 나선 델루지 가 총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경이 코방귀를 끼며 중얼거리자 베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자식간에 정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후훗, 누가 들으면 근위대장도 자식 두셋쯤 있는 줄 알겠소?"

마누엘 경의 농담에 베흔이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코리온이 없이도 일단 학회는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쪽의 수장이 빠진 만큼 그 분위기는 조금은 맥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토론자의 격을 맞춰 진행해온 지금까지의 관례상 같은 수장 격인 세네피스 황후나 제네르 역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 그 아랫단계 교수들만의 토론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베흔은 콜로니 아카데미 곳곳에 모여 근심 어린 얼굴로 무언가를 상의중인 유학자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학장을 구해 달아났다는 그 괴물놈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를 않았으니......"

"두 사람 몫은 될 거구에 온몸이 털로 북슬북슬하고, 눈밭에서도 호랑이보다도 빠르게 달리고, 곰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낫같이 생긴 희한한 칼을 휘둘러댄다고 그랬소?"

"거 증언 한 번 정말 가관이더군요."

베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마누엘 경 역시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내, 참, 산악병 놈들이라고 안할까봐 그 망할 놈의 미신 하나는......'설인'인가 머시긴가라고 겁에 질려있지 뭐요."

마누엘 경의 푸념에 베흔이 침을 퉤 뱉으며 투덜거렸다.

"먹이 찾으러 기어 나온 곰보고 지레 놀라서 떠벌려대는 거던가, 아니면 의협심강한 겨울 사냥꾼놈? 뭐, 어쨌거나 놓쳐놓고 둘러댈 말 없으니 저렇게 호들갑을 떠드는 것이겠죠, 그 천하에 한심한 새끼들,"

"죽은 놈들 꼴을 보니 머리통 깨졌던가 뼈가 으스러져있는 게 영락없이 곰에 얻어맞아 죽은 꼴이긴 하던데. 설인이라니, 기가 막혀서 정말."

마누엘 경과 맞장구를 치던 베흔이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학장 일행이 구조신호를 보낸 그 코드로 그 직후에 두딘카 시내 어떤 놈과 통화를 했던 기록이 있어서 영 찜찜합니다. 다른 지역 코드라 검색도 되지 않던데......정말로 학장과 친한 다른 녀석이 있었는지도......"

베흔의 걱정에 마누엘 경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안 그래도 방금 그 코드 사용상황 추적하라 했으니 이제 염려 안해도 될 거요."

"아휴, 희한한데서 캠핑하고 계시네요?"

얼굴과 손발이 꽁꽁 얼어붙은 라스가 카렐이 만들어준 눈구멍을 뚫고 오두막으로 기어 내려왔다. 시간상으로는 그다지 늦지 않은 오후 4시였지만 이미 바깥은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아휴, 한시간만 더 걸었다간 길거리에서 꽁꽁 얼어죽을 뻔했어요."

추위에 덜덜 떨던 라스가 화로에 손과 발을 급히 들이대며 코맹맹이소리로 말했다. 그가 내민 큰 자루를 받아든 카렐이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미안미안, 그래도 여기 정도면 도로 부근이니 올만하지 않았어?"

"도로라고 찬바람이 피해가남요."

"미안, 미안, 자, 여기, 수고비 20골드하고......사오는데 얼마 들었어?"

"어젯밤에 갑자기 도시가 폐쇄되면서 물가가 엄청 뛰었어요. 가진 돈 3골드 몽땅 다 털었는데 그것밖에 못 샀어요. 죄송해요. 대신 간하고 염통 많이 넣어왔어요. 어차피 사갈 사람도 없으니......"

라스가 붉게 얼어붙은 얼굴에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두딘카 시 일대가 폐쇄되어버리면서 고기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얼떨결에 할일이 없어져버린 라스에게 카렐이 약속한 20골드의 용돈 정도면 이 추위를 뚫고 이곳까지 몇 시간동안 걸어온 대가로 그다지 손색이 없을 금액이었다.

"호밀빵하고 찐 감자하구요......말씀하신 콩죽은 병에 들었어요. 치즈는 돈이 모자라서 싸구려로 사왔어요. 당근하고 양배추는 오다가 다 얼었겠네요."

"괜찮아. 삶으면 어차피 다 똑같아."

"이렇게 많이 필요하신 거 보니까 혼자 계신 건 아닌가보네요?"

오두막 안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라스는 한구석의 어두운 곳에 있는 시커먼 복장의 두 사람에게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라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코리온의 침대맡에 앉아있던 하심은 목에 노예문이 선명한 라스를 힐끔 돌아보더니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노예인가 본데.....주인은 어디 있고 혼자 돌아다니지?"

"어......저, 전 외거노예입니다. 어르신."

라스가 말을 더듬거리며 얼른 그 둘에게 절을 올렸다. 하지만 '외거노예'라는 제도 자체가 없는 서부에서 살아온 하심은 주인도 없이 혼자 '싸돌아다니는' 라스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한번 이맛살을 찌푸렸다.

카렐은 자루 안에 들어있던 죽 병을 집어들고는 누워있는 코리온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금식에서 환자는 제외되니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어휴, 다치셨나요?"

"며칠 전에 사고로 조금 다치신 거야. 의사한테 치료는 받았는데 바보같이 공짜관광 좋다고 무리하다가 몸살이 났지 뭔가."

카렐의 우스꽝스런 변명에 속아넘어간 것인지 아닌지 라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리온의 싸늘한 시선이 라스의 선한 얼굴에 잠시 멎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코리온의 놀랄 만큼 청아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라스는 얼굴조차도 거의 분간되지 않는 그 어두운 곳을 향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귀,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서.....영광입니다."

"귀하신 분이라니? 내 누군지 네 녀석이 아느냐?"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코리온이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라스를 노려보았다.

"죄, 죄송하옵니다.....말씀하시는 게 기품이 넘치시는 것이 지체 높으신 귀족분이 틀림없으신 것 같아서......"

라스의 맑디맑은 암갈색 눈동자를 확인한 코리온이 다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명문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의 신분에서 졸지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코리온은 이 좁고 초라한 오두막 안을 돌아보며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과 울분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고있었다.

그리고 문득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먼 옛날 한순간이 스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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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팔뚝만한 캡슐을 조심스레 들고 나온 의사가 확대 모니터가 붙은 작은 창을 살며시 열어 보이고는 자리를 비켜섰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코리온의 밝은 얼굴을 돌아본 주페는 사뭇 긴장된 얼굴로 그곳에 눈을 가져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아기가......"

"원하셨던 대로 딸이고 오늘로 131일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손가락, 발가락까지 모두 완벽합니다. 지금 크기는......엄지손가락 길이정도 될 겁니다."

"코리온, 이것 봐라, 손가락까지 빨고있구나."

기쁨에 넘친 주페는 코리온의 손을 꼭 움켜쥐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둘 사이의 아이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코리온 역시 입술에 연신 침을 바르며 긴장과 감격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아주 건강하고 별다른 이상징후도 없습니다. 다만 유전자 호모성이 상대적으로 클 수 있으니 두 분에게 전혀 없는 형질이 갑자기 나타나도 놀라실 건 없습니다."

"뭐 그거야 상관 없네만, 나중에 어떻게 자랄 것 같은가?"

주페의 질문에 의사가 파일을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음......호리호리하고 큰 체형에 신장은 서부 평균치보다는 꽤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머리칼은 적갈색일 것 같고, 눈동자 색깔은......분석이 안된다고 나왔군요."

의사의 말에 주페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그래, 무장을 만들면 딱이겠군. 재미없는 유학자들만 버글대는 집안보다는 낫지 뭔가. 장차 대군이 될 아기니......내 일찌기 군문의 꿈을 접었으니 자식이라도 길을 이어주면 바랄 것이 없겠구나."

태아가 들어있는 캡슐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안아든 주페는 코리온을 바라보며 또한번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종친회 허락을 얻어서 정식 혼인하는 일만 남았구나."

"어머니도 첫 손녀가 자라고 있는 걸 아시면 반대 못하실 겁니다."

한참 웃음짓고 있는 둘에게 의사가 짧게 덧붙였다.

"특별한 이상은 없을테니 2달마다 한번씩 캡슐만 바꿔주시고, 이상이 없는지 가능한 자주 확인해 주십시오. 문제가 있으면 저희에게 바로 연락주시구요."

"알았네, 알았어."

주페가 입가의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건성 대답하자 의사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두 분의 나머지 세포들은 어떡할까요? 폐기하셔도 무방합니다만 원하시면 서부 유전자은행에 위탁해 보관해드리겠습니다."

의사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주페가 대답했다.

"글쎄.....폐기하려니 괜히 찜찜하군, 따로 잘 보관해두게나."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교수실에서 코리온을 내내 기다리던 샤드니가 오늘따라 줄곧 싱글거리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딸아이 데려오는 길이네."

코리온의 대답에 샤드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는 얼굴에는 방금 전과 다름없는 미소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대군마마."

"이목구비에 손발까지 갖춰진 게 이젠 정말 제대로 사람이더군. 자네도 나중에 혼인해 자식을 얻게 되면 지금 내 기분 이해할걸세."

코리온의 말에 잠시 가타부타 대답이 없던 샤드니는 가지고 온 파일을 얼른 펼쳐들었다.

"아버님을 포함한 가문 원로 분들이 대부분이 제 계획에 찬성하셨습니다. 계획대로 제가 네페티 누님을 몰아내고 새 서부 최고제후가 되어서 태자저하를 밀어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자네의 성공 여부에 모든 것이 걸렸네."

굳은 표정의 코리온이 자신의 페리도트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네가 실패하면 우리 역시......붙을 곳을 찾아야하는 불쌍한 신세가 될 것인즉......"

누군가 코리온의 교수실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행여 주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샤드니는 처음 들어보는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네르입니다."

"들어오게."

당당한 태도의 코리온이 문을 열고 들어온 문하생 제네르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던졌다.

사장지학 학부과정 3년차에 접어든 제네르는 이미 학년장 겸 생도회 간부이기도 했다. 옛 티를 완전히 벗고 이곳의 원리주의 생도로 변신한 그에게 더 이상 전과 같은 가난하고 거친 이미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심 예킨터스 생도와 함께 교내에서 가장 충직한 '코리온 사람'이기도 한 그에게 다른 생도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로노 장태자가 새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전혀 굽히지 않고 있었다.

"교수님. 지금 오르마즈 경께서 태자저하 처소에 와 계십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이름인 '오르마즈'라는 말에 기겁한 코리온이 샤드니를 휙 돌아 보았다.

"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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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동안 기다려주신 독자님들을 위한 스크롤압박신공입니다.....^^

* 유전자 호모성에 관해 : 근친혼의 가장 중요한 유전적 효과로 나타나는 유전자의 호모성(동일성, 혹은 유사성)에 의해  헤테로성이 감소될 수 있습니다. 유전자의 호모성이 증진되면 형질 발현에 관련된 유전자가 고정되어 선대의 형질이 자손에 확실하게 전달되는 '강력유전'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유전자의 호모성이 증가됨에 따라 여러가지 불량형질의 발현빈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문제점 또한 있습니다만 실제 알려진 것처럼 높지는 않으며, 4촌 이상의 관계에서는 사실상 일반적인 무작위혼인과 큰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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