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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253화 (253/1,132)

< -- 253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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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돌아올까요?"

코리온을 간호하던 하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자리에 누워있던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발목 상태가 그럭저럭 나아진 카렐은 두딘카 시로 돌아가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돌아오겠다며 라스와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나선 후였다.

"아니면......우리 있는 곳을 신고하지나 않을까요?"

하심은 카렐이 돌려주고 간 자신의 할룩스를 만지작거리며 묘하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카렐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작동되던 그의 할룩스는 그가 떠난  얼마 후 코리온의 것처럼 먹통이 되어버린 후였다. 적들이 하심과 카렐의 통화사실도 이미 파악해낸 것이 확실했다.

"어쩌죠? 이것까지 불통이 되어버렸는데 녀석들이 저 사람 존재를 눈치채지나 않았을까요? 이 사실을 아직 모를텐데 두딘카로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우리가 저놈 안전까지 신경 써야 하나."

코리온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하심은 카렐의 신변은 전혀 걱정조차 해주지 않고 있는 코리온이 내심 야속한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카렐의 혈흔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있는 자신의 푸른색 할룩스를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5시간째 도로를 따라 걷고있던 카렐은 어제 다친 발목이 욱신욱신 쑤셔왔지만 하루 정도 푹 쉰 덕에 꽤 나아졌는지 가볍게 걷거나 뛰는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버티어내고 있었다. 옆을 함께 걷는 라스가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카렐이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뭘 그리 생각해?"

"아, 아뇨, 그냥......"

추위로 벌겋게 달아올라있던 라스의 얼굴이 더 홍조를 띠고 있었다.

"너 무슨 딴 생각 하는거냐? 그 사람이 그렇게 맘에 들던?"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눈은 높아가지구......에라, 이놈아 정신차려라. 어디 눈 둘 데가 없어가지구......괜히 맘만 상할라구 말이야."

"알아요, 안다구요."

카렐이 머리를 쥐어박자 라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그는 시린 손을 겨드랑이에 꼭 끼워 넣으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카렐을 종종걸음으로 겨우겨우 따라붙었다.

"깜깜했으니 얼굴보고 반한 것도 아닐테고, 도대체 뭐가 맘에 들었다는 거야?"

"......"

"니가 저 귀족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몰라서 그런 거라구. 아마 너 따위 노예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안 볼껄."

"쳇. 뭐 그냥 혼자 사모하는 것도 안되남요."

고기가 가득 얹힌 라스의 묵직한 썰매가 덜크덩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백 스타디아 떨어진 통행제한지역 경계까지 썰매를 끌고 나가 검문소에서 기다리던 주인에게서 고기를 넘겨받은 라스는 유난히 심통맞아 보이는 주인에게서 칭찬은 고사하고 주인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호통만 잔뜩 당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어쨌든 카렐과 라스는 지금까지 만난 3번의 검문에서도 팔 고기를 가져가는 푸주간 종업원과 노예 행세를 해 가면서 별 문제없이 지나쳐올 수 있었다.

"저분들도 그러면 그렇게 답답하고 무서운 분들이신가요?"

라스의 순진한 물음에 하마터면 카렐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천하의 벽창호 먹통들 최고 우두머리'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뭐, 다 그 부류지 뭐겠어. 아마 증세는 조금 더 심한 인간들일걸."

"근데, 저 두 분은 부부세요?"

"푸핫!"

카렐이 결국 참고참던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니. 천만에. 둘 다 미혼이야. 걱정 마. 저 여자는 평생 임자도 한 번 없어본 게 틀림없어."

"그럼.......남자분은요?"

"그쪽은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구. 그러니까 행여 저 둘이 이러쿵저러쿵 이상한 상상 할 거 없어."

둘이 두딘카 시내에 들어선 건 이미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시각이었다. 보통 때라면 적막에 빠져들었을 시각이지만 낮과 밤을 바꾸어 사는 라마단 시기인 탓인지 시내는 낮보다 더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문닫은 푸주간 앞에 도착한 라스가 카렐에게 물었다.

"뭐,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셔틀편이나 좀 알아보고.....살 것도 좀 사야겠지."

가게문을 열고있는 라스와 카렐에게 치안군 병사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병사들이 카드 한 장을 내보였다.

"이런 사람 본 적 있나?"

병사가 불쑥 내민 건 다름아닌 코리온의 얼굴이었다. 카렐의 가슴이 순간 뜨끔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코리온의 얼굴을 제대로 본 바 없는 라스는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무지 쌀쌀맞게 생겼네요."

"입닥치고, 본 적 있냐고."

"아아뇨."

"이 녀석 행방을 알아 신고하는 녀석에게 가문에서 1만 골드의 상금을 걸었으니까 신세 고치고 싶으면 보는 즉시 신고해. 노예는 면천될 수도 있다."

모든 노예들의 꿈인 '면천'이라는 말에 라스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지만 결국 자신의 노예 신분을 새삼스레 깨달은 그는 이런 잠시동안의 기대를 한숨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렐 역시 코리온이 이 도시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라스와 헤어진 카렐은 추운 몸도 녹일 겸 늦게까지 열려있는 술집에 들어섰다.

라마단 기간이라 밤새 열려있는 이 술집은 대폭 증원된 치안군 병사들과 취객들 덕택에 한밤중인 지금까지도 꽤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꿀술 한 잔을 사든 카렐은 구석진 자리를 비집고 앉아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야할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고모님이 혹시 와 계실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렐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취객과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할룩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술 냄새만 맡으며 잠시 시간을 끌고있던 카렐은 취객들 중 한 명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군데군데 설치된 가로등이 무색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시내에는 드물게 보이는 치안군 병사들뿐이었다. 발소리도 나지 않게 취객 뒤로 달라붙은 카렐은 그가 골목 모퉁이를 꺾기가 무섭게 손을 뻗었다.

"읍!"

뒷목의 급소를 짧게 얻어맞은 취객은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안하우."

기절한 취객의 품에서 할룩스를 빼앗아든 카렐은 그를 길가의 잘 보이는 곳에 앉혀놓고는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왔다.

콜로니 아카데미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코리온과 하심의 죽음을 거의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파예드 교수들의 입에서조차 '제발 시신수습이라도 해야할텐데' 라는 절망적인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현실이었다.

"틀린 얘기도 아니지 뭐."

우베가 대공주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자이납에게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날씨에서 얼마나 살아남겠냐고. 지금 30시간이 넘었다는데, 부상까지 입고 방한복도 못 챙겨입었다며."

자이납의 독기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베가 계속 수다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서너 시간이나 버텼으면 잘 한거지. 시체나 찾는 게 현명한 거지 뭐겠어. 추워서 시체는 안 썩겠네. 아야야!"

쓸데없는 소리 덕에 자이납에게 꼬집히고 만 우베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물러난 우베는 자신을 무섭게 째려보는 자이납을 못 본 척 엉뚱한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씨, 제기랄, 근데 뭐 이런 곳이 다 있대? 들어오자마자 할룩스 코드까지 다 따가지를 않나......바깥하고 통신도 다 허락 받아서 해야하고......베아트릭스 플라칼 단장님도 이런데 오래 살아서 그 지경으로 철판인상이 됐나."

이 혼란스런 와중에 코리온의 죽음을 받아들지 않고 있는 건 실상 어머니인 대공주 단 한 명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음도 전폐한 채 일선에서 들어오는 소식에만 귀를 기울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대공주는 자신이 불러온 전사단 사람들이나 서부에서 온 사람들을 수색에 절대 참여시킬 수 없다는 플라칼 가의 태도에 있는 대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차였다.

아들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며 아랫사람들 앞에서 헛말을 하고 만 헤즈 플라칼 사령관과 한참을 투닥거리던 레곤 대공주는 갑자기 울린 할룩스에 또다시 짜증을 내며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제기랄! 바쁜 때 어떤 미친 새끼야!"

할룩스를 핑계삼아 재빨리 자리에서 도망쳐버리는 헤즈의 뒷모습을 째려보며 대공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엉?"

생각 없이 내용을 살펴본 대공주가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거의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우베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무슨......일이십니까? 저하?"

대공주가 보여준 메시지의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전 살아있습니다. 델루지 가와 플라칼 가를 믿지 마십시오. 동행자의 베였던 발목은 많이 나았습니다.-

코리온이 보낸 것이 분명한 그 문장에 우베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고 말았다. 아들의 생존을 알려주는 문장을 손에 쥔 대공주는 차마 뭐라 표현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누가.......장난으로 보낸 것 아닐까요? 첫째와 둘째 문장은 이해가 됩니다만......마지막 문장이 무슨 뜻인지......"

우베가 푸아킨 경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베가 들은 소식에 하심이 이전에 발목을 다쳤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 문장의 분위기로 보아 대공주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내용에 틀림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달은 대공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를 머릿속에 떠올린 대공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맙소사......내가......카렐의 발목을 베었었어......설마......"

"예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우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이납과 카토를 휙 돌아보았다. 아들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는 새 희망을 얻은 대공주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히고 있었다.

"방금 전 대공주 할룩스에 입력된 문장입니다."

플라칼 가 장교가 마누엘 경, 헤즈 경과 담소 중이던 베흔에게 허둥지둥 달려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내용을 살펴본 베흔의 표정이 순간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발신지가 어딘가!"

"지금 추적중입니다만 두딘카 시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등록자는......공용터미널에서 일하는 평민 노동자로 되어있습니다."

"당장 잡아들이고 시내 폐쇄해! 그 일대 샅샅들이 수색하란 말이다!"

베흔이 이를 빠드득 갈기 시작했다. 코리온이 이미 시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의 머릿속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문장을 함께 살펴본 마누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난 같지는 않고......대공주야 애당초 우릴 믿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지만.....마지막 문장이 도대체 뭘까?"

"학장이나 같이 있다는 그 교수가 혹시 발목을 다쳤습니까?"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무슨 암호 같지 않나?"

"당장 근위대 암호해독 전문가 투입하겠습니다."

마지막 글을 암호로 생각해버린 베흔이 창 너머에서 푸아킨 경과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던 레곤 대공주를 확 째려보았다.

"망할 새끼 천재는 천재였군. 그새 도시까지 숨어들어 살아있었다니."

마누엘 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헤즈 경이 치안군 장교를 불러 호통치듯 명령을 내렸다.

"인근 수색하던 병력하고 수색셔틀들 총집결해서 시내를 집중적으로 뒤지도록 해! 도시 어느 구석에 숨어있을지 모르니 주민들도 모두 끌어내서 가택들도 구석구석 이잡듯이 수색해! 알겠나?"

"예!"

명령을 받고 달려나가는 치안군 간부의 뒷모습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베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똑똑한 놈이 나 잡으라는 듯이 이런 문장을 내보낸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도감청당하고있는 것도 이미 눈치 챘을텐데."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요? 지가 발신하고 최대한 도망쳐봤자 시내 부근일텐데. 차량이나 셔틀 통행도 금지되어있으니 뛰어봤자 그 동네지. 또 혹시 압니까, 골수 유학자선생께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불효를 피해보려고 저러는지."

마누엘 경이 큭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베흔은 가슴속 한구석에서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다급한 얼굴로 달려들어온 다른 장교와 잠시 귀엣말을 나눈 헤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등록자놈을 붙잡았는데......별다른 혐의점은 없다는군요.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졌다고 하는데 그 때 할룩스를 도둑맞은 것 같다고 합니다."

"리쿠 학장이 도둑질을?"

헤즈 경의 말에 베흔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쓰러져 있는 놈한테서 가져간 거요? 아니면 녀석을 쓰러뜨리고 가져간 것 같소?"

"몸에 외상흔적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쓰러진 후에 가져간 게 아니면......녀석이 어마어마한 고수던가 둘 중의 하나겠죠."

"풋, 칼 잡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

"저건 또 누구신가."

인기척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던 베흔이 갑자기 오만상을 찌푸렸다.

"불청객께서 오시는군."

십여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린 샤드니가 사뭇 굳은 표정으로 베흔과 헤즈 경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일대 전면수색을 하신다더니.......뜬금없이 두딘카 시내로 치안군들을 총집결시킨다니, 이건 또 무슨 일이요?"

"심야 일제수색의 일환이요."

베흔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댄 샤드니가 다시 물었다.

"우리 속을 빤히 아는 처지에 조금만 더 솔직해지죠. 발신지가 시내인가요?"

베흔이 샤드니를 향해 다시 눈을 흘겼다. 샤드니가 베흔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행여 그분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우리 서부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잘됐군요. 기왕 동부 공격을 개시했으니......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죠,"

베흔의 뻔뻔스러움에 부아가 돋은 샤드니가 대뜸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내 댁들의 속을 모를 줄 알고 하시는 말씀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모르겠소."

베흔은 두딘카 시내를 향해 출발하는 수십 대의 병력수송차 쪽으로 문득 시선을 돌리며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샤드니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분께 무슨 일이 있으면 동맹이건 뭐건 모두 끝인지 아시오."

"어허, 알만큼 아시는 분이 성질 급하신 거 하나는......."

빙긋 웃음 지은 베흔이 샤드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묘한 눈빛에 흠칫 놀란 샤드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베흔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샤드니에게 짧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시려구요?"

순간 도도하던 샤드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창백해진 샤드니의 표정을 즐기듯 다시 한번 미소를 띠어보인 베흔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현명하신 분이니......가만히 있는 것이 옳은 선택이란 걸 이해할 줄로 믿겠소. 동맹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소이다."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샤드니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시내를 향해 출발하는 수천의 치안군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그 때 뒤따라온 서부 수행원 중 한 명이 갑자기 그의 귀에 대고 짧게 속삭였다.

"감청부대 세작이 새 통화내역을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본가에 확인 결과 수신자 명의가 하심 예킨터스 교수라고 합니다."

순간 놀란 표정의 샤드니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남부 녀석들은 모르겠지?"

"서부 것이니 아마 녀석들이 조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수행원이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하자 샤드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 명의 할룩스로 통화한 놈은?"

"쿠엘스크 시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놈 명의이고......확인결과 녀석이 라쿠니어스라는 외거노예에게 준 할룩스 것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샤드니가 한쪽에서 헤즈와 무언가 논의중인 베흔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들을 지켜보던 샤드니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넌 당장 현금 5천 골드만 준비해서 그 노예 주인에게 찾아가. 저 녀석들보다 먼저. 나도 지금 두딘카 시내로 가겠다."

"휴, 잘들 모인다."

외곽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두딘카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렐은 그새 이미 도시 밖으로 족히 10스타디아는 넘게 도망쳐온 후였다.

전송 직후 할룩스를 내버리고 도시 밖으로 잽싸게 내뺀 카렐이었지만 단 3분만에 나타나기 시작한 치안군들에 하마터면 잡힐 뻔했던 터였다. 발목에 무리가 가는 것을 무릅쓰고 결사적으로 달려 이 언덕으로 피해온 카렐은 이젠 한숨을 돌리며 도시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치안군들을 속 편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내, 참 오늘은 도둑질의 연속이군."

카렐은 옆에 내려놓았던 묵직한 썰매와 이런저런 먹을 것, 옷가지들이 잔뜩 든 주머니를 등에 불끈 짊어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룩스와 마찬가지로 이놈들 역시 군데군데에서 슬쩍 해온 것들이었다.

페로가디언 시절 밥먹듯이 하던 도둑질과 강탈---물론 '가디언 카렐'이라는 것만 밝히면 미친놈이 아닌 이상 순순히 내놓았으니 강탈이라 하기도 좀 뭣했지만---이었지만 한동안 사람답게 산답시고 손떼고 살았던 이 짓을 이곳에서 또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저 망할 놈의 코리온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 짓을 몇 번쯤 더 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길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들을 거의 챙긴 카렐은 코리온과 하심이 기다리고 있는 남쪽의 산막을 향해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산막 문을 열고 내려온 카렐의 모습에 하심이 반가움을 애써 감추며 짐짓 냉랭하게 물었다.

"지금껏 뭐하고 온 거예요?"

"자, 갑시다. 옷들 갈아입으시오. 지금 유학자 티내고 다녀서 좋을 것 하나 없으니."

카렐이 내놓은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하심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없이 무명포를 벗은 하심은 평상복에 평범한 외투, 두툼한 모직망토를 챙겨 입었다.

별 말 없이 옷을 갈아입은 코리온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카렐과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던 그는 이번에도 그의 시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와 비단튜닉 위로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코리온은 무명포를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매서운 위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휴, 추워,"

오두막을 나선 하심은 살을 에이는 찬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하늘은 별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지만 바람이 사람 한두 명은 날려보낼 정도의 거친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망토로 몸을 감싼 코리온을 안고 나온 카렐은 그를 가져온 썰매 위에 조심스럽게 앉혀주었다.

가져 나온 담요로 코리온을 꼼꼼히 덮어주고 잡동사니들, 옷보따리와 먹을 것들까지 모두 썰매에 싣고 확인까지 마친 카렐은 썰매끈을 어깨에 걸고 힘껏 잡아당기며 남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녀석들이 부근을 봉쇄했다면서요?"

힘겹게 카렐의 옆에 따라붙은 하심이 큰 소리로 물었다.

"두딘카 시에서 대공주저하께 일부러 메시지를 보내고 도망쳤소. 녀석들이 온통 시내에 몰려들어 총 수색을 시작했으니 오늘밤이 봉쇄를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요. 수신이 확인된 걸 보아선 대공주저하께서도 소식을 듣고 이곳에 와 계신 것 같소."

카렐이 코리온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망토와 담요로 몸이 둘둘 말린 채 썰매에 앉아있던 코리온은 어머니 소식에 말없이 눈을 감아버리고 있었다.

카렐이 그런 코리온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으니 지금쯤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걱정 마시죠. 조만간 돌아갈 수 있으실 테니."

썰매에 가속이 붙자 카렐이 걸음을 좀 더 빨리 재촉했다. 하심이 숨을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카렐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행선지가 어디죠?"

"남쪽으로 500스타디아쯤 가면 호수변에 작은 어촌마을이 하나 있소. 밤새 이 속도로 뛰어가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전 이 속도로 계속 못 뛰어요,"

벌써 지친 하심이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다.

"썰매 앞쪽에 옷 쌓은 짐 위에 그냥 앉아요. 조금만 더가면 계속 내리막이라 그 뒤로는 수월해질 테니."

결국 옷보따리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하심은 조금은 미안한지 앞에서 썰매를 끄는 카렐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언제든 무거우면 얘기하세요. 일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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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글에도 추가했지만, 이번 개인지 출판의 가계약 게시판 주소로 [http://vein.lil.to/] 외에 [http://vein.zio.to/] 가 추가되었습니다. ^^

일단 출판 자체는 거의 확정된 상태라 보셔도 됩니다.

출판 자체가 결정된 이상, 일정을 조금 앞당겨 3월 1일부터 같은 게시판에서 본예약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1, 2권에는 부록으로 아직 미공개인 황제령의 지도와 약간의 설정집이 포함되며, 예약구매자 분들께는 원하시는 분들에 한해 제 악필로(쿨럭;;;) 작가 서명을 해 드립니다. (본예약시 옵션으로 신청받도록 하겠습니다.)

배송은 우편배송과 직접수령 두가지를 생각하고 있으며, 세부사항은 본예약 시작시 별도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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