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54화 (254/1,132)

< -- 254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궁지까지 몰린 로노 장태자가 결국 넷째 동생 모디아크 태자를 선공할 수밖에 없었던 건 오넬론-모디아크의 공식적인 협력이 발표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오넬론에게서 10억 골드의 거금과 근위대장직을 약속받은 모디아크는 동부 샤레이 인근에 이미 대병력을 이동시킬 준비를 갖추어놓고 있었고, 이 두 세력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는 날에는 빈약한 동부로서도 장태자를 도저히 지켜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행한 동생에 대한 공격이 처음부터 '전면전'으로 예상하고 들어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로노 장태자가 근위대에서 귀순해 온 시로에게 당초 내렸던 명령은 동생을 '납치해 오라'는 것이었다.

10명의 가디언을 거느린 시로는 남부 5제후 이그나토 가 제후군 1만 5천과 함께 머무르던 모디아크 공주의 막사에 야음을 이용해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순간 공주가 다른 볼일로 막사를 잠시 비웠다는 사실이었다. 작전실패를 깨달은 시로는 즉시 그 곳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경비병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이 일을 전면공격의 시초로 오판한 모디아크는 인근에 주둔하던 5천 명의 근위대 귀순군 부대에 대해 즉시 반격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3천의 중장기병과 8천의 중장보병, 4천의 경보병으로 근위대 5천 정도는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모디아크는 중장기병 선두에 직접 나와 근위대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곳 삼각주 일대를 빙 둘러 간이 에너지장벽을 친 그의 만 5천 대군에게 제아무리 근위대여도 저 정도의 병력은 고양이 앞의 쥐일 따름이었다.

"첫 전투이니 만큼 이번에 기선을 제압해야 된다."

모디아크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나운 말의 고삐를 꽉 움켜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앞에 보이는 2천 5백 명의 근위대 경보병은 그 폭만도 10스타디아에 가까운 거대한 강의 삼각주 돌출부를 등진 배수의 진을 치고 그 여섯 배에 달하는 만 5천의 남부제후군과 맞서고 있었다.

"완전히 미친놈들이군. 여기서 배수진이라니."

모디아크는 강을 따라 길게 장사진을 친 근위대 보병들을 바라보며 내심 기가 막혀 하고 있었다. 삼각주 중간으로는 낮은 풀들이 자라난 그럭저럭 다져진 땅이 있었지만 남부제후군의 후방 늪지대와 주변 강물에 접한 부근으로는 얼마 전 내린 비로 개흙과 뻘이 뒤섞여 제대로 걷기로 힘든, 한마디로 싸움을 벌이기는 최악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5천이라고 들었는데 나머지는 어딨지?"

"지금 저희 정찰병들이 행방을 찾고있는 중입니다만 눈치를 채고 1차로 퇴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장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모디아크는 자신의 진형을 한 번 돌아보았다. 1선의 중장기병을 선두로 2선의 중장보병, 3선에 예비대로 자리잡은 경보병이 산개한 채 각각 자리잡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질 것도 없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라!"

창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친 모디아크의 고함소리에 큰 함성을 내지른 3천의 중장기병들이 땅을 울리는 굉음소리를 내며 배수진을 친 2천 5백의 근위대 경보병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준비해라."

2천 5백 명의 근위대원들의 선두에 있던 시로가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3천기의 중장기병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시로를 따라 로노 장태자에 투항한 3만의 '태자군'들은 사실 보통의 근위대들이 아니었다.

'아메샤 스펜타'로 불리는 이들은 제국을 성립시킨 열성 민병대 출신들로 조직되어 타르서스 망명정부시절에는 황실의 몰락 직전의 상태에서 어렵게 즉위한 세나우스 2세 황제를 사나운 제후들에게서 지켜냈고, 지금 존재하는 20만 근위대의 모태가 된 최정예 부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데리고 나온 이들은 그 중에서도 최정예부대인 크샤트라 연대의 믿음직한 베테랑 병력들이었다.

뿔같이 돌출된 삼각주의 제일 모퉁이에 엷게 자리잡고 있던 근위대 경보병들은 기병들의 무서운 돌격에 한발두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 중장보병들 역시 돌진하는 기병들의 뒤를 이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춰 전진해오고 있었다. 어느새 적 중장기병들은 거의 물가까지 밀려난 근위대들의 코앞까지 쳐와 있었다.

시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저 기병대와 자신의 보병대와의 거리를 어림하며 시선을 절대 떼지 않았다.

"퇴각!"

팔을 번쩍 치켜든 시로의 명령과 함께 천 5백 여명의 근위대 경보병들이 미처 치러보지도 않은 싸움을 포기한 채 일제히 강물에 뛰쳐들었다.

"뭐야! 저 새끼들!"

중장기병들의 선두에서 달려오던 모디아크는 적들의 뜻밖의 행동에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비명처럼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갑주를 입은 채로 그대로 물에 뛰쳐든 근위대 보병들은 그 상태 그대로 강 양안을 향해 능숙하게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저 새끼들 뭐 하는 거야? 도망쳐 봤자 에너지 장벽인데?"

목표를 잃고 제자리에 멈춰서버린 1선 중장기병대나, 2, 3선 중장보병대와 경보병대 모두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멍해져 있었다.

적들의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모디아크는 순간 뒤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떨리는 시선은 물풀과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후방의 깊은 늪지대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대가 적 경보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삼각주 끄트머리, 좁은 늪지대에 와글와글 갇혀있다는 것도.

"경보병 선두로 뒤로 빠져! 늪지대를 조심해라! 경보병 5열 방진 밀집대형으로!"

그제서야 허둥지둥 대오를 만들기 시작한 3열 최후방의 경보병들이 '늦었음'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상의 뜻을 감히 거스른 저 반역자들을 처단해라!"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늪지대 진흙 속에서 튀어나오는 시커먼 병사들의 모습에 삼각주 끄트머리에서 서둘러 도망나오던 남부 병사들이 기겁을 하고 말았다.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괴물 같은 형상으로 달려나오는 그들의 본래 모습은 얼핏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제후군과는 완전히 틀린 화려한 갑주와 장검, 그리고 창을 쥔 그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는 아메샤 스펜타의 중장보병들이었다.

"진격!"

뼈대를 맡고있는 가디언 분대장들의 명령에 눈 깜짝할 새 20여명씩의 소규모 대오를 이룬 근위대 중장보병들은 남부제후군의 최후방에 산개해 있던 경보병들을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도륙해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중장보병대는 빨리 움직이란 말이다! 경보병들이 무너지기 전에!"

모디아크가 2열의 중장보병대에 악을 쓰며 외쳤지만 견고한 대오를 이룬 그들이 갑자기 뒤로 진격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것이 그렇게 눈 깜짝할 새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최전방과 최후방이 뒤집어져버린 남부제후군은 뒤와 양옆까지 물로 가로막혀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얼떨결에 선봉이 되고 만 경보병들이 뒤늦게 대오를 갖추려 하고 있었지만 무려 백여 명이나 되는 가디언들의 지휘를 받는 노련한 근위대 중장보병들에게 뿔뿔이 흩어진 이들은 손쉬운 사냥감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강으로 도망쳤던 근위대 경보병들까지 남부제후군의 양 측면으로 헤엄쳐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저들에게 측면 기습까지 당한다면 모디아크의 만 5천 대군은 꼼짝없이 저들의 손아귀 안에 잡혀버리는 셈이었다.

"경보병대는 측면으로 퇴각한다! 기병은 하안을 통해 적 측면을 기습해!"

기병들과 함께 제일 후방에 몰린 채 손도 써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모디아크가 결국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아군 중장보병 대형을 피해 삼각주 측면을 통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공주 저하! 이 상태로는 진격이....."

모디아크의 부관이 날뛰려는 말의 고삐를 황급히 잡아당기며 고함을 꽥 내질렀다. 보통 사람의 족히 종아리 깊이는 될 그 깊은 뻘에 발이 빠져 들어가자 놀란 말들이 제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근위대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던 곳 양옆의 뻘은 말조차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정도의 지독한 진창이었다.

"말을 독려해! 최대한 한쪽에 붙어서라도 나가란 말이다! 기병이 없으면 가디언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나!"

온몸이 그새 더러워진 된 모디아크가 말의 엉덩이를 힘껏 후려치며 몸소 앞장서 뻘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하자 나머지 기병들이 마지못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옆을 꽉 채운 뻘은 선봉의 모디아크는 물론이고 뒤를 따르던 기병들 모두의 발목을 붙들 채 목숨과도 같은 시간을 계속 잡아먹게 만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근위대 보병들의 후방기습을 당한 남부제후군 보병대는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었다.

"젠장!"

온몸이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모디아크가 몇 안되는 기병들과 함께 적의 측면에 가까스로 접근했을 때는 이미 경보병들은 궤멸상태에 빠져 있었고 남부 중장보병들이 막 근위대들과 맞서려는 참이었다.

"서쪽 측면에 방금 달아났던 적 경보병들입니다!"

부장의 목소리에 모디아크가 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시로가 이끄는 2천 5백 여명의 아메샤 스펜타 경보병들이 강을 다시 헤엄쳐 이곳에 거의 도달해 있었고, 모디아크의 3천여 기병들은 뻘과 씨름하느라 긴 하안을 따라 군데군데 흩어져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저들 경보병들의 측면기습을 받는다면 기병대 역시 끝장이었다.

"이런 제기랄! 망할 근위대놈들!"

절망에 빠진 모디아크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중장보병! 후미부대는 기병대를 엄호해 당장!"

시로의 지휘하에 양쪽 하안으로 다시 상륙해온 2천 5백 여명의 경보병들은 뻘에 빠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병들에 창을 들고 달려들어 차례차례 도륙하기 시작했다. 말이 움직이지 못하는 한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들 기병들은 결국 말을 버리고 보병대 쪽으로 결사적으로 도망치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통 병사들은 어떻게 상대하겠지만 가디언들을, 가디언들을 뚫을수가 없습니다!"

적과 막 마주친 중장보병대 지휘관이 거의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질러왔다. 무려 8천의 중장보병들은 북쪽은 근위대 중장보병에, 서쪽 하안은 근위대 경보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금씩 궤멸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고집을 피워봤자 피해만 더 커진다는 것을 깨달은 모디아크는 부장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퇴각! 퇴각셔틀을 불러! 이곳에서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퇴각셔틀이 도착할 때까지의 그 길지 않은 시간 중에도 보병들은 계속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려 직접 중장보병대 진두에 나선 모디아크가 쓰러진 남부 병사를 찌르려던 근위대 병사를 칼로 힘껏 쳐 밀어내 버렸다.

"내가 함께 지킨다! 중장보병대는 퇴각셔틀이 올 때까지 위치를 사수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병사를 향해 있는 힘껏 칼을 휘두르며 모디아크가 둘러선 보병들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미 진흙투성이가 되어있는 그의 투구 위로 적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

"물러나는 놈은 내 손으로 목을 벤다!"

진두에서 적병들과 사투를 벌이는 모디아크 스스로도 이미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 수십 개를 입은 상태였지만 이 고집스러운 태자는 물러나라는 부관들도 뿌리친 채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다! 너희를 끝까지 거둘 테니 물러나지만 마라!"

얇지만 가디언들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강력한 방진을 펼친 근위대들의 거친 돌격에 남부제후군 중장보병들은 조금씩 밀려나며 가까스로 시간만을 벌고있을 따름이었다. 진형을 지키려는 모디아크의 이 필사의 분전은 동쪽하늘에서 퇴각용 셔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무의미하지 않았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먼저 퇴각하십시오! 공주저하!"

팔을 붙드는 부장을 뿌리치며 모디아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태자가 패전도 치욕스럽거늘 병사들을 놔두고 먼저 도망치다니! 부상병들부터 차례대로 퇴각시켜라! 난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

모디아크의 진두지휘를 받으며 중장보병대가 최후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때까지 버티고있던 부상병들과 말을 잃은 기병이 차례대로 후방으로 이송되어갔다.

"생포는 힘들겠습니다."

후방으로 돌아와 물을 벌컥 들이키는 시로에게 다가온 크샤트라 연대장이 찡그린 얼굴로 말을 건네 왔다. 선봉에서 직접 적 보병들을 도륙하던 시로가 공주를 죽일 기회는 몇 번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는 로노 태자로부터 '모디아크는 절대 해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온 터였다.

몇 번 시도했던 생포작전마저 실패하면서 시로는 모디아크를 이대로 놓아주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공격 중단하라!"

남부의 마지막 퇴각셔틀이 도착하는 모습에 시로가 결국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모디아크와 마지막 남은 천여 명의 남부 보병들을 몰아붙이던 근위대들이 일제히 무기를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계속 몰아붙인다면 더 많은 피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번 전투는 적을 많이 죽이거나 승리를 거두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진 거대한 삼각주는 물론이고 양쪽을 감싸고도는 강물은 2천 여명에 달하는 남부 전사자들이 흘린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장태자전하께서 이제 어떻게 결정을 내리시겠지."

시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셔틀에 올라 퇴각하는 모디아크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로는 이 '절반의 성공'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제 앞으로의 제위경쟁은 패전하고 돌아간 모디아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저 용맹한 태자의 귀환 뒤에 어떤 음모가 벌어질지 시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로에게 크게 패하고 가까스로 숙영지로 돌아온 모디아크 공주는 어처구니없는 패전의 분을 이기지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카파키 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씩씩거리던 모디아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오르마즈의 남동생이기도 한 일라드 레즐린 카파키의 모습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저하."

일라드가 모디아크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오넬론 태자저하께서 많이 걱정하시면서 제게 가보라 말씀하셨습니다."

"훗, 말은 똑바로 하라고. 둔해터진 오넬론 오빠가 퍽이나 그랬겠군. 세네피스 올케가 보낸 건가?"

모디아크의 퉁명스런 한마디에 일라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모디아크는 이미 독한 리커를 두 잔 째 들이키고 있었다.

"술은 이제 그만 드시죠. 언제 반격해올지 모르는데 취해 계시면 어쩝니까."

일라드가 모디아크의 술잔을 자연스럽게 빼앗아 한쪽으로 치우며 중얼거렸다.

"근위대 놈들 이제 진절머리나. 제기랄. 내가 너희 편들었다가 이지경이 됐는데 너흰 뭐 하는 거야?"

흥분한 모디아크가 엉뚱한 일라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일라드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이게 뭐 저희 잘못입니까? 이젠 곧 동맹체가 출범할 테니....."

"동맹체건 자시건 지금 코앞에 들어앉은 저 망할 근위대 놈들은 어쩔 거야? 네 누나는 도대체 어딨는 거냐? 오르마즈 경이 직접 와서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구! 솔직히 네놈보다 오르마즈 경이 왔으면 열 배는 반가웠을 거야."

"훗,"

'오르마즈'라는 말을 들은 일라드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말이 없던 일라드는 모디아크에게서 빼앗은 술잔에 술을 다시 가득 담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시간을 잘못 잡아 온 것 같군요. 한잔 더 하시고 그냥 주무시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참, 이건 아버님께서 보내신 친서입니다. 술 깨거든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일라드는 들고 간 가방에서 단단히 봉인된 문서 하나를 꺼내 구석의 책상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모디아크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일라드는 문 앞을 지키던 모디아크의 부장에게 태자가 많이 불안해 보이니 잘 챙겨주라는 친절한 말까지 잊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는 부장에게 나가라며 신경질적으로 손짓해 보인 모디아크 공주는 잔에 가득 들은 리커를 훌쩍 들이키며 탁자를 또 한번 걷어찼다. 만 5천이나 되는 병력으로 겨우 5천에 불과한 근위대에 참패를 하고 말았다는 이번의 끔찍한 전적은 앞으로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여섯 태자들 중에서도 가장 자존심이 강하던 모디아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최악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거기서 죽어버렸으면 이보다는 나았을 텐데!"

모디아크가 술잔을 내던지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미 한 병이 넘는 리커를 모두 마셔버린 모디아크는 이미 머리끝까지 술이 올라있는 상황이었다. 지독한 취기로 몸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린 모디아크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투르케스크 공이 보냈다는 친서가 봉인된 채 고급스런 비단끈에 묶여있었다.

"제기랄, 이 중늙은이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술기운 때문인지, 다른 무슨 이유엔지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더듬더듬 봉인을 풀려던 모디아크는 순간 멈칫 하고 있었다. 말려있는 편지지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봉인은 어딘지 눈에 익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순간 황당해진 모디아크가 거의 말을 듣지 않는 손을 가까스로 움직여 봉인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리고 취해있던, 아니 이미 본래 의식의 10분의 1도 남아있지 않은 모디아크의 눈은 '유언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그 황당한 문서의 끝에 바로 자신의 수결이 되어있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당.....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모디아크는 그제서야 감각이 거의 사라진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마치 타 들어가듯 쓰려오는 뱃속 역시 술 때문이 아님을 깨달은 모디아크는 큰 소리로 부관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고함소리는 반쯤 굳어 가는 혀 때문에 뭉개진 신음소리 정도로 올려 퍼졌을 따름이었다.

"아......악.......이......죽일......."

온몸의 힘이 빠지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모디아크가 문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자결이 아닌, 누군가의 손에 독살당한 것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알려져야 했다.

"학, 학,"

모디아크의 입과 코에서 검은 덩어리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무언가에 막힌 듯 숨도 거의 쉴 수 없었다. 피범벅이 된 채 가까스로 문고리를 짚은 모디아크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어머니......왜 그렇게 돌아가셨습니까......"

가까스로 연 문고리를 놓치며 카펫바닥에 쓰러진 그의 두 눈에서 마지막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때 슈로 기사단의 촉망받는 장교였던 이 용감한 태자는 자살로 목숨을 끊은 못난 태자로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놀란 얼굴로 달려드는 부관과 경비병들의 모습이 그의 희미해져 가는 눈동자 위에 반사되었다.

자신의 '유언장'으로 남게 될 그 비단조각을 찢으려 마지막 발악을 하던 세나우스 2세의 제4태자 모디아크 공주는 결국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한 채 막혀버린 숨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그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소설 이 회의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편이 끝나는대로 그림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