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5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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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잣집에서 자고 있던 라스는 치안군의 일제수색 덕에 새벽부터 밖으로 끌려나와 있었다. 별 들은 것도 없는 판잣집 살림살이를 마구 뒤져대는 병사들을 피해 길 건너에 쭈그려 앉아있던 라스는 한쪽에서 나타난 '조금 다른 복장의' 병사들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 델루지 가 특수부대원들의 선두에 있던 누마 피카르 교위가 푸주간 간판을 올려보며 부하들에게 물었다.
"여기 맞나?"
"예. 목장 주인 말이 여기 있는 외거노예에게 준 할룩스라고 했습니다."
"문 열어봐라."
낯선 병사들이 푸주간 문을 잡아뜯는 광경에 깜짝 놀란 라스가 그들 앞에 나서려다가 멈칫거리고 있었다. 30년이 넘는 노예로서의 삶 동안 그가 배운 건 '꺼림칙한 일이 있으면 괜히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라스는 골목 모퉁이에 급히 몸을 숨기며 저 병사들이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안에 없습니다. 짐들도 다 있는 걸로 봐서 어디 달아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간 거야! 썅! 어떤 새끼인지 잡히면 모가지를 뽑아버릴 테다."
누마가 뜯어낸 문짝을 힘껏 걷어차며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저 무서운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란 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골목 안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온 라스는 가지고있던 할룩스로 급히 주인의 코드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난 건 잔뜩 격앙된 표정의 주인의 모습이었다.
"이 망할 새끼! 무슨 사고를 쳤길래 군인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고 난리야!"
"사고라뇨? 주인님, 저 아무 문제 안 일으켰는데요? 지금 가게에 웬 군인들이 몰려와서......"
"이 썩을 놈! 뭔 짓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너 이제 맞아죽을 줄 알아! 썅! 도대체 이 할룩스로 어제 어떤 망할 새끼하고 통화한 거야! 네놈 때문에 가족까지 다 잡혀죽는 줄 알았잖아! 이 쳐죽일 놈 같으니!"
"몰라요, 저......전"
"닥쳐! 네놈 이제 내 노예도 아니니까......"
뭐라 대답하려던 라스는 갑자기 할룩스가 끊어져버리자 순간 당황하고 있었다.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벌벌 떨고 있는 그의 옆으로 푸주간이 있는 거리를 향해 수십의 치안군 병사들의 달려지나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길가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라스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상황이었다.
"이게.....대체......"
라스의 맑고 큰 눈동자에서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길모퉁이에 쭈그려 앉아 애써 눈물을 감추던 그는 갑자기 앞에 멈춰서는 차에 흠칫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고 말았다.
"여기 있었군. 빨리 타라."
"예?"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차안에서 낯선 푸른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는 라스를 반 강제로 차안으로 잡아끌었다. 라스를 태운 차는 검문을 하는 남부 병사들을 보란 듯이 가로질러 시 외곽으로 급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잔뜩 겁에 질린 라스는 옆에 앉아있는 푸른 눈에 금발머리의, 놀랍도록 잘생긴 미남자를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올려보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샤드니는 그에게 코리온과 하심의 얼굴이 담긴 카드를 내보였다.
"이 두 사람 본 적 있지?"
"어제도 군인이 같은 질문을 했는데요.....이런 분들은 본 적이......"
그제서야 산막에서 본 '어둠 속의 두 사람'을 떠올린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샤드니가 무서운 얼굴로 이 노예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샤드니는 이곳에 병사 십여 명만 데리고 올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플레렌 가에 연락해 이곳의 서부 첩보망을 총동원한 샤드니는 이미 이번 사건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다.
"내 이름은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이다. 서부 최고제후 플레렌 가 직계 상급귀족이고 군사령관이다. 25분 전 네 전 주인에게서 3천5백 골드로 널 매입했다. 내가 이제 네 새 주인이니 내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예에?"
샤드니가 주머니에서 라스의 노예 등록카드를 꺼내 보였다.
"서부....라구요?"
'서부'라는 말에 라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있었다. 그간 벌어졌던 그 많은 노예폭동의 발원지가 모두 서부였다는 사실이 상징하듯, 서부는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그나마 주인에게 인정받아 외거노예로까지 나올 수 있었던 라스로서는 외거노예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서부 사람에게 자신의 소유가 넘어갔다는 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듣기 싫으니 입 닥쳐."
또다시 울먹이기 시작한 라스에게 샤드니가 사뭇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 털어놓지 않으면 네놈 손목을 토막내 놓을 테니 있는 대로 다 말해라. 이 두 분을 보았나? 남자분은 키가 꽤 크신 분이다. 검은색 긴 머리에......"
"어제 산막에서 본 분들 같은데요......"
"뭐라구?"
샤드니가 대뜸 언성을 높이며 라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몰라요, 어둠 속에서 잘 안보였지만......남자분은 몸을 다친 것 같았고......목소리가.....정말 맑았어요, 시어리 씨께서....."
"시어리 씨? 그게 누군데? 어떻게 생긴 놈이야?"
"북부에서 오신 귀족분이신데......키, 키가 엄청 크세요, 머리칼은 갈색이시고, 눈동자는 회색인데 꼭 기름뜬 것 같은 희한한 색깔에"
"잠깐, 뭐라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 샤드니가 멍 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혹시 손 무지하게 크고, 목소리 좀 희한하고......"
"어, 아세요?"
"맙소사."
순간 경악한 샤드니가 머리를 싸쥐었다. 파예드 인근에서 놓쳤던 카렐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리온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 확실했다.
"카렐 그놈이 왜......"
샤드니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녀석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쩌다가 코리온을 구해낸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 '천박한 가디언' 카렐이 자신을 그리도 원수 취급하는 코리온을 남부 손에서 구해내 도주중이라는 것이었다.
"사령관님."
앞쪽에 앉아있던 샤드니의 수행원 중 하나가 어디서인가 받은 암호전문을 확인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치안군들이 도시 남쪽 순록방목지 버려진 산막에서 학장님이 머무셨던 흔적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뭐? 그럼 학장님은!"
샤드니가 라스를 내팽개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밤중에 이미 어디론가 떠나신 것 같습니다. 이쪽 당국에서 지금 쿠엘스크 주 전체로 수색범위를 확대시킬 것이라 합니다."
"젠장!"
차창에 이마를 기댄 샤드니는 카렐이 코리온을 잘 지켜주기를 바라야 하는 자신의 기가 막힌 처지를 절감하며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흠, 맛있네. 소금을 안 뿌렸더라면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카렐이 배 위에서 즉석에서 구운 청어를 뼈째 씹어먹으며 연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맛있다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 해괴한 모습에 하심이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렐과 코리온, 하심을 실은 이 자그만 어선은 군데군데 고깃배가 떠 있는 호수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선수를 향하고 있었다. 배 한쪽에는 새벽에 낚아 올린 청어와 송어가 가득히 실려있었다. 새벽식사로 청어 열 마리를 그 자리에서 산 카렐은 선미에서 하심과 마주앉아 신나게 구워먹고 있던 차였다.
"걱정 말아요. 아까 가보니까 선실 무지하게 따뜻하더구만."
피곤에 지친 코리온이 누워 잠들어있을 선실 쪽을 계속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하심에게 카렐이 태연하게 말했다.
"쿠엘스크에는 2시간쯤 후에 도착한다니까 청어나 맛나게 먹고 그리운 학장 옆에 가서 한숨 붙이시구려."
옷자락으로 소금기 어린 눈물을 다시 닦아낸 카렐은 찬바람이 몰아쳐 오는 호수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여기요. 이건 소금 안 뿌린 거예요."
하심이 잘 익은 청어 한 마리를 카렐에게 내밀었다. 그가 내민 청어를 씹어먹으며 카렐이 질문을 던졌다.
"듣자하니까 대공주께서 학장하고 결혼할 생각 없냐고 물어본 일도 있다던데, 왜 거절한 거요?"
"학장님은 학장님일 뿐이세요. 제 목숨을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학장님이시죠. 제네르 하크로딘 교수가 당신한테 그렇듯이 말이죠."
"난 또, 지금까지 250년을 애인하나 없이 산 게 학장하나 바라보고 일편단심 한 건 줄 알았네."
잠시 망설이던 하심이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사랑한 사람은 있었죠.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허, 정말이요?"
카렐이 갑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묻자 하심이 옛 생각이 나는지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하늘을 올려보았다.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오래 전에......"
"설마 누구처럼 주페 태자?"
카렐의 짓궂은 질문에 하심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카렐의 어깨를 확 떠밀었다.
"세상에, 농담에라도 그런 소리 마세요. 학장님이 계신데 제가 어딜"
"글쎄, 누굴 닮아서 이런가?"
카렐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하심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전 진지하다구요."
하심이 갑자기 눈을 흘기자 카렐이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화로 위에 청어 한 마리를 더 올려놓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하심같이 괜찮은 여자의 짝사랑을 받은 그 운 좋은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짝사랑 때문에 평생을 수절하며 산 것도 좀 웃기지 않소?"
"상관없어요. 제게 얼마나 다정하셨는데요, 그 그윽한 눈빛으로 절 바라보셨을 때 가슴이 얼마나 울렁거리던지......"
"울렁거리건 자시건 누군지 이름이나 좀 압시다."
카렐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끼어들자 하심이 카렐을 또 한번 째려보았다.
"안 봐도 뻔하지."
카렐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화로 위의 청어를 뒤집었다.
다른 쪽에는 꽤 똑똑한 지 모르지만 최소한 연애 문제에 한해서는 아직 '소녀' 수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저 천하의 궁상 유학자가 어쩌다가 한번 본 미남에게 자기 밑의 어떤 반쪼가리 가디언녀석처럼 홀랑 빠져 제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이라 넘겨짚는 정도가 카렐이 짐작할 수 있는 전부였다. 카렐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심은 청어가 타는 줄도 모르고 혼자 옛 생각에만 잠겨있었다.
"제 나이 서른에 첫 키스를 받았어요......그분께 제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쳤으니 이제 다른 분께 정을 줄 이유가 없다구요."
"엑,"
불에 탄 청어를 화덕에서 겨우 떼어내던 카렐은 '첫 키스'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청어를 불 위에 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키스? 댁도 그런 거 할 줄 아쇼?"
카렐의 핀잔에 하심이 또한번 눈을 치켜 뜨며 그를 째려보았다. 키스 한번으로 평생 수절할 결심을 했다는 말에 너무도 기가 막혀진 카렐이 숯덩이가 되어버린 청어를 호숫물에 내버리며 중얼거렸다.
"내 솔직히 맘먹고 수절하는 사람한테 이런 말하긴 좀 뭣하지만 키스 정도는 엔간한 사람은 그냥 장난으로도 하는데, 그걸로 평생을......"
"정말,"
하심이 다시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째려보자 카렐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렐의 기가 막혀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숟가락을 꼭 쥔 하심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혼자 옛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분을 단 한번만 다시 뵐 수 있다면......"
"못 말리겠군."
갑자기 혼자 훌쩍이기 시작한 하심에게서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을 일단 포기한 카렐은 다시 청어 한 마리를 통째로 입에 쑤셔 넣었다.
고산 호수지역의 공장들이 몰려있는 쿠엘스크 시는 같은 이름을 한 이곳의 주도이기도 한 제법 큰 도시였다. 동쪽의 큰 항구를 끼고있는 이 도시는 남쪽의 거대한 공단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는 도시빈민들이 사는 허름한 집들만이 우글거리는, 이곳 플라칼 가 영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슬럼화된 경공업도시이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도 음산해 보이는 도시 중심부는 합숙생활을 하는 노예들과, 그보다 '조금 나은' 형편의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공동주택들과, 구석구석 좁고 어두운 골목들이 더러운 오물들과 구정물이 그득히 고인 채 자리잡고 있었다.
카렐 일행이 탄 어선은 새벽에 낚아올린 고기를 잔뜩 실은 채 쿠엘스크 동쪽의 어항 선착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부부로 행세하셔야 의심을 덜 받습니다. 제가 앞서가겠습니다. 남쪽에 공용터미널이 있으니 여기서 바로 델루지 가 영지로 가는 셔틀을 타야겠습니다."
카렐의 말에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난 코리온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사방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어항 부근은 새벽의 활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마치 장보러 나온 일행인 양 한 꾸러미의 청어와 연어를 사든 카렐은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을 계속 살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십여 명이 발을 맞춰 다가오고 있는 기척을 느낀 카렐은 코리온과 하심을 급히 골목 한쪽으로 급히 잡아끌었다. 아니나다를까 열 명이 넘는 치안군 병사들이 분대장을 앞세우고 서둘러 항구 안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확인한 카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군요. 치안군들이 저렇게 많이 움직이고 있다니......그냥 순찰이면 두세 명이 다녀야 정상인데......."
이곳도 안전하지 않음을 깨달은 코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항구 밖 조그만 광장으로 고개를 내민 카렐은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방금 도착한 듯한 치안군병사들 오십 여명이 차에서 우루루 내려서고 있었다. 그 때 호수 양안을 오가는 통근 여객선에서 내린 거친 노동자 복장의 사람들 수백 여명이 항구 안에서 몰려나왔다.
"빨리,"
카렐이 코리온의 허리를 거칠게 나꿔채고는 그들 사이에 파묻혀 걷기 시작했다. 카렐의 손에 허리가 들린 코리온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 키가 너무 띄지 않도록 고개를 바싹 숙인 카렐은 노동자들 무리에 파묻혀 가까스로 항구를 빠져나갔다.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 으슥한 골목에 가까스로 도착한 카렐은 다른 사람이라도 없는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싹 뒤따라온 하심이 코리온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녀석들이 벌써 흔적을 찾아내고 여기까지 수색범위를 넓힌 건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바깥 분위기 좀 살피고 올 테니 여기서 가만히 계십시오."
카렐이 코리온과 하심을 골목에 놔둔 채 종종걸음으로 큰길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축축한 골목 한쪽에 기대 선 코리온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심이 코리온의 상처입은 가슴을 짚으며 걱정스럽게 묻자 그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하심은 발 밑을 달려 지나가는 시커멓고 큰 시궁쥐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 이런 곳에 어떻게......"
하심이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양쪽을 감싸고 있는 2, 3층 정도의 낡아빠진 집들에는 널려있는 빨래감들과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통, 공동 화장실 정도가 사람이 살기는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미 일터로 나갔는지 아이들만 무언가를 겨드랑이에 끼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곳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듯 합니다. 어쩌죠?"
하심이 우두커니 서 있던 코리온에게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짐덩이만 되는 듯 하네."
코리온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코리온은 골목 안쪽의 허름한 건물에 붙어있는 크지 않은 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선학교군요."
하심이 별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주로 빈민가 평민자녀들에게 무료로 글과 기초적인 공부를 가르치는 자선학교는 주로 돈 있는 귀족 제후들의 지원하에 낙향한 유학자들이나 몇몇 지식인들이 봉사 차원에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너덜너덜한 책들과 조잡한 필기구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지저분한 차림의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던 코리온이 갑자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학장님......"
"정말 예쁘지 않나?"
아이들을 바라보는 코리온의 눈가에 묘한 공허함이 흘러가고 있었다. 갈색머리를 한 조그만 여자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코리온의 흐릿한 시선에서 그 이유를 짐작한 하심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있게."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든 코리온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하심의 소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골목 한켠에서 불쑥 나타난 두 명의 치안군병사들이 무언가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있었다. 미처 도망칠 여유도 가지지 못한 둘은 골목의 허름한 굴뚝 뒤에 궁색하게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 학장님.....어쩌죠? 그사람도 없는데......"
"빨리 빠져나갈 밖에,"
병사들이 집 안에 들어간 틈을 타 하심의 부축을 받는 코리온이 힘겨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도망가죠?"
하심의 질문에 코리온 역시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골목골목 학교에 가는 어린아이들과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이 둘을 발견할 눈들은 널려있었다. 하심의 목에 거의 매달린 채 겨우겨우 걸음을 내딛는 코리온의 희한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둘에게 무려 1만 골드의 몸값이 걸려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결과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이 답답한 사람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하심이 주변을 연신 둘러보며 거의 울먹이듯 중얼거렸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고 떠난 카렐이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알아서 찾아올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어, 이놈들 뭐야."
둘의 앞을 불쑥 가로막은 건 웬 거구의 사내였다. 막 출근하려는 노동자인 듯 한 그 남자는 누가 보아도 수상쩍은 모습의 코리온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긴 머리에 갈색빛의 날카로운 눈매, 다른 사람들과 너무도 구분되는 그 수려한 외모 정도면 처음 보는 사람도 그의 특징을 짚어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놈.....아까......"
그 자의 솥뚜껑만큼 거대한 손이 비틀거리는 코리온의 멱살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하심이 대뜸 눈을 부릅떴다.
"젠장!"
눈을 꽉 감은 하심이 코리온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그 남자의 사타구니를 있는 힘껏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우, 욱!"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주저앉는 남자를 뒤로하고 하심이 무작정 코리온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놀란 행인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이젠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골목을 달려가는 하심의 눈앞에 비교적 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길입니다! 아까처럼 사람들 사이에 파묻히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다리와 가슴의 고통을 이를 악물며 감내하고 있는 코리온이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훤하고 큰 길에 마지막 기대를 건 하심이 골목 밖으로 확 튀어나왔다.
"이, 이런......"
순간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하심은 더 이상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병력수송차와, 그 앞에서 지시사항을 하달받고 있던 오십 여명의 치안군 병사들의 의심 어린 시선이 골목에서 막 튀어나온 이 수상쩍은 두 사람에게 일제히 쏟아졌다.
자신이 서부 출신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렸는지 자이납은 이미 해가 훤하게 뜬 라마단 아침부터 샌드위치를 생각 없이 씹어대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내용물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입을 쩍 하니 벌리고 하품을 한 그는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을 또다시 뱉어냈다.
"하아, 저 새끼들 꼼짝도 안하네."
반쯤 열린 그의 눈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한쪽이 찌그러든 희한한 몰골의 병력수송차가 자리잡고 있었다. 쿠엘스크 시 외곽에 어젯밤부터 자리잡고 대기하고 있던 저놈들 역시 꽤나 무료한지 자기들끼리 공놀이를 하거나 잡담으로 몇시간째 때우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눈치 빠른 우베에게 베흔 주변을 계속 어슬렁거리던 저 정체불명의 누마 피카르라는 장교놈이 의심스럽게 보인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베의 명령으로 어제부터 저 차의 뒤를 계속 쫓고 있던 자이납 역시 저 녀석들의 행동이 다른 플라칼 가 치안군들과는 어딘지 틀리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어?"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 자이납이 양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던 공놀이도 갑자기 때려치고 차에 우루루 올라탄 저들은 무슨 긴급한 연락이라도 받았는지 급히 시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호,"
잠이 확 깨버린 자이납 역시 급히 차를 움직여 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저들의 행선지에 코리온이 관련된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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