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8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
.
.
"앞으로는 이 할룩스를 쓰십시오. 저희 조직원들이 쓰는 무등록 가변형 할룩스니 추적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 분의 가짜신분증도 들어있습니다."
비엔 6번 행성 중부의 북적거리는 터미널에서 기다리던 북부길드 프락치가 막 도착한 제네르 일행에게 봉투 한 개를 내밀며 말했다.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에게 '활동준비'를 해 달라 부탁한지 겨우 10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새 모든 것을 다 마련해둔 모양이었다. 카렐이 이곳 비엔 6번 행성에 있다는 우베의 보고에 서부에서 서둘러 이곳까지 허둥지둥 달려온 이들은 사실 변변한 준비는 물론이고 정보조사조차 되어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차는?"
"저 밖에 있는 화물 승합차입니다. 필요한 때 사람을 숨길 수 있도록 비밀공간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마스터 케스난께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명하셨습니다."
"웬일이야. 전하 직접 명령 아니고서는 들은 척도 안하는 여자가."
제네르가 때묻은 모자를 삐딱하게 돌려쓰며 옆에 선 시로에게 속삭였다.
"길드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지금 쿠엘스크 치안군이 도시를 폐쇄하고 일제수색중이라고 합니다. 그쪽에 계신 듯 하니 일단 그곳부터 가 보십시오. 그럼 가보겠습니다."
볼일을 마친 프락치는 몰려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총총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터미널을 나선 세 사람은 마구와 낡은 농기구가 실린 지저분한 승합차를 몰고 두딘카 시가 있는 북쪽 고위도를 향해 차를 출발시켰다.
"쿠엘스크 시면.....날씨부터가 아주 고약한 곳이군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베아트릭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커?"
"쿠엘스크 주의 주도이니 작은 도시는 아니죠."
제네르의 질문에 베아트릭스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젠 뭘 어쩌지? 그런 큰 도시를 우리 셋이 수색할 수도 없고......연락방법도 없으니......홀몸도 아니시고 짐덩이를 둘이나 매달았으니......그나마 리쿠 학장은 중상을 입어서 움직이기도 힘들다던데."
제네르가 판단이 서지 않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생각해보면 전하도 대단하셔. 솔직히 나라도 저 정도 포용력은 발휘 못할거야. 뭐 그 전에 아켐에서 있었던 일은 접어두고라도 말이야, 그렇게 원수 취급하는 그런 사람을 구해줄 생각을 하시다니 말이야. 전하께선 '무조건 포용'으로 학장을 굴복시키려 하시는 건 알겠지만.....원래 머리와 가슴이 항상 함께 움직이는 건 아니잖나?"
두딘카 일대의 고지대에서 흘러 내려온 차가운 물에는 군데군데 얼음덩이까지 떠 있었다. 나무에 기대 맥없이 앉아있는 코리온은 아침에 겪은 고약한 일 때문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호수를 헤엄쳐 쿠엘스크 시를 빠져나간다는, 이 황당하기까지 한 탈출 계획은 카렐이 자이납을 보고 즉석에서 떠올린 것이었다. 수영실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 녀석 정도면 최소한 한 사람은 매달고 호수 건너편까지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카렐의 계산이었다.
야음을 틈타 몰래 폐기물 하치장을 빠져나온 일행은 숲과 맞닿은 호수 주변에 서 있었다.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물이 아직은 많이 차갑지만 참을 만 할겁니다. 몸이 젖지만 않는다면. 자이납. 가능하겠나?"
"물론이죠. 바다도 아니고 호수니까 수영하기는 훨씬 낫겠죠."
자이납이 키득거리며 입고있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물에 손을 집어넣었던 하심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걸 어떻게 헤엄쳐요!"
"나나 자이납 정도 실력이라면 한 시간정도 걸릴 거요."
"댁들은 모르지만......나, 난 수영을 할 줄 모른단 말이예요! 게다가 학장님은 저리 다치셨는데......"
"그런데 전하께선 물에 가라앉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하심의 불평을 한 귀로 흘려버린 자이납이 망토를 벗고있는 카렐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맞아. 난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거든. 그래서 평소엔 잠영만 하거든. 파충류 사촌이 오죽하겠어."
태연하게 대꾸한 카렐이 벗은 망토를 코리온의 몸에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저나 전하야 그렇다 치고 이분들은 어떻게......수온이 낮아서 바로 저체온증에 걸릴텐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이납과 하심의 앞에 카렐이 들어 보인 건 폐기물 처리장에서 주워온 두껍고 큰 봉투 두 개였다.
"시체 담는 봉투야. 한번 썼던 것 같긴 한데.....별 수 없지. 질기고 두껍고 물과 공기도 통하지 않고. 부력과 보온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지. 이걸 입은 사람을 껴안으면 나도 뜰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잠영 대신 횡영을 해야겠는걸."
'시체 봉지'를 뒤집어보며 자이납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하심은 경악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전 못해요! 세상에, 그럼 지금 이 시체 담았던 곳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댁보고 수영하라는 것도 아니니 한두 시간만 눈 딱 감고 참으시구려. 이나마 없어서 젖기라도 하면 체온을 잃고 바로 얼어죽을 거요. 자이납. 예킨터스 교수를 자네가 안고 가게나."
"근데 학장님을 제가 모시고가면 안될까요? 헤헤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자이납의 머리를 대뜸 쥐어박은 카렐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너 뭔 짓 할지 안 봐도 빤한데 내가 네놈한테 맡기겠냐?"
"아씨, 정말 아무 짓 안한다니까요."
"그 말을 믿느니 오르마즈 경이 수절했다는 말을 믿겠다."
칭얼거리는 자이납을 쫓아낸 카렐은 입고있던 옷을 차례대로 벗기 시작했다.
"몸이 보기 흉해도 좀 참아주시죠. 어쩔 수 없으니."
카렐이 코리온을 바라보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위아래 한 벌씩만 남기고 모두 벗은 카렐은 벗은 자신의 옷들과 신발을 모두 코리온에게 덮어주고는 옷자락이 바깥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머리를 제외한 몸에 꼼꼼하게 필름을 감아주었다.
"몸에 힘을 최대한 빼고 제 손에 모든 걸 맡기십시오. 코에 물이 들어갔다던지 몸에 이상이 오면 꼭 얘기하시구요."
카렐의 어깨에 새겨져있는 선명한 황족문을 바라본 코리온이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심은 지난번에 이미 본 바 있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민망한 듯 얼굴을 조금 붉히고 있었다.
카렐은 목에 걸고있던 비취목걸이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큰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이제 가자구."
코리온을 품에 껴안은 카렐이 살을 에는 차가운 물 속에 조심스럽게 몸을 담궜다. 찬 물이 얼굴에 닿자 코리온 역시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카렐의 오른팔이 그의 가슴과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세운 채 다리와 왼팔을 움직여 앞으로 물을 차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심을 껴안은 자이납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하심이 놀라 잠시 비명을 질렀지만 곧 자이납의 팔을 꼭 붙든 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
"제게 몸을 좀 더 붙이십시오."
카렐이 입에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숨을 헐떡였다. 빠른 속도로 물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 카렐의 몸에서도 희미하게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입벌리지 마십시오, 물먹으면 쉽게 탈진합니다."
카렐은 조금 뒤쳐져서 다가오고 있는 자이납을 돌아보았다.
"추워?"
"아닙니다, 참을만합니다."
자이납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30여분을 나아가자 호수 건너 있는 제법 큰 마을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카렐이 추위에 떨고있는 코리온에게 힘을 주려는 듯 그의 어깨를 굳게 쥐며 속삭였다.
"벌써 절반은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넌......어떠냐?"
뜻밖의 질문에 카렐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코리온이 자신에게 안부를 물어온 것이었다. 카렐이 파랗게 얼어가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좀 춥군요.....아직은 괜찮습니다."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카렐의 팔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코리온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을 막아주는 봉투와, 몇 겹이나 되는 옷으로 몸을 칭칭 감싼 그는 사실 아직까지는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카렐의 가슴과 맞닿아있는 등에서는 이 철천지원수의 따뜻한 체온이 살을 에는 차가운 물을 뚫고 전해져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몸과 맞닿아있는 것이 이렇게 따스하다고 느껴본 건 그에게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코리온입니다."
주페 태자의 숙소에 들어선 코리온은 한쪽에 세워져있는 칼과 갑주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새것인 듯한 파란색의 갑주와 장검, 창은 코리온이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모디아크의 장례식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주페는 방 한구석에 고이 놓인 태아 캡슐을 미소 띤 얼굴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기들을 어디서 나셨죠?"
"장례식 떠나기 전에 오르마즈 경이 선물한 거란다. 이번에 출정할 때 입을 거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주페 앞에서 내심 기겁한 코리온이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불길한 예상 그대로, 이번의 '기습진공계획' 역시 오르마즈와 주페, 이들 둘의 합작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오르마즈와 주페가 만났다면 행여 주페가 자신의 그간의 행적을 이미 눈치채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아캡슐의 작은 창으로 비치는 딸의 모습만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주페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이상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이 애를 모디아크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구나."
그제서야 코리온에게 시선을 돌린 주페가 그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지난 생각은 다 잊으세요."
그에게 다가선 코리온이 주페의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주페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이 이름은 고모 이름을 따서 모디아크라고 붙여야겠다. 잠깐, 성을 어쩌지? 리쿠를 두 번 붙이자니 좀 많이 웃기구나. 딸아이라면 기왕이면 널 많이 닮는 게 나을 테니......모디아크 세닉 리쿠로 해야겠다. 어떠냐?"
"예. 괜찮네요."
코리온이 주페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며 낮게 대답했다.
"내가 전장으로 떠나거든......모디아크는 네가 맡아다오.....행여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널 믿을 테니까......."
"무사히 돌아오실 테니 그런 말씀 마세요."
코리온이 주페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든 욕심을 버린 듯한 주페의 평온한 얼굴에는 여전히 가벼운 웃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내 흔적이나마 남겨놓았다고 생각하니 이제 마음이 정말로 편하구나. 내 피를 물려받은 딸을 꼭 지켜다오.....코리온."
"꼭 죽으러라도 가시는 분같이 말씀하시네요."
코리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지만 주페는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제발 약속해다오. 너만은 꼭 살아서 내 핏줄을 지켜주겠다고."
미소짓는 주페의 암갈색 눈동자 안에서는 곧 맞닥뜨려야 할 전장과, 그곳에서 어쩌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의 마지막 걱정이 맴돌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속이 북받쳐 오른 코리온은 주페의 가슴을 꼭 껴안으며 힘있게 대답했다.
"숙부님의 핏줄을 제가 반드시 지켜주겠습니다."
"그래. 정말 고맙다."
그제서야 코리온을 향해 돌아앉은 주페는 조카의 희고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랬는지 나도 다 이해한다."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코리온이 멍 한 표정을 지었다.
"에......예?"
"처음엔 화도 나고.......미칠 것 같았지만.....이젠 괜찮다. 오르마즈 경의 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내 잘못이 크구나.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그런 걸 따져서 무엇에 쓰겠느냐."
"무슨......말씀을......"
주페가 얼떨떨해져있는 코리온에게 뺨을 부비며 말을 이었다.
"네페티 부인은 오르마즈 경이 지키고 있다. 샤드니라는 녀석이 비록 플레렌 가 원로들을 등에 업었더라도 이길 수 없을거다."
주페의 품에 안겨있던 코리온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지금 북극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을, 샤드니의 쿠데타를 주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뿐이었다. 눈앞이 막막해진 코리온이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럼......제게 덫을 놓으신 겁니까?"
떨고있는 코리온의 등을 토닥거리며 주페가 대답했다.
"오르마즈 경이 황궁에 기습진공작전을 제안하면서 내게 그러더구나. 그 계획을 네게도 흘리면 네가 지시해서 샤드니가 부인을 공격할 거라고. 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고......술내기를 했는데 결국 내가 지고 말았구나. 오르마즈 경 주량이 대단하다던데 그 술을 다 사줘야 한다니, 정말 큰일이다."
눈물이 북받쳐 오른 코리온이 이를 꽉 악물고 말았다. 그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주페는 그런 코리온의 허리를 더 힘있게 껴안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내 생각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구나. 괜찮다. 네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 테니 앞으로는 너와 이 문제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싶지 않다. 알겠느냐?"
입술을 굳게 깨문 코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에서 무명 손수건을 꺼내든 주페는 코리온의 얼굴에 젖어들고 있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지난 일은 모두 잊자꾸나......이제 다 잘 될 거다. 설사 무슨 일이 생긴다해도......내 뒤를 지켜줄 네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냐."
주페의 넓은 품을 와락 껴안은 코리온은 놀랍게도 자신을 그대로 용서해준 이 연인의 따스한 가슴에 안긴 채 미안함과, 후회, 그리고 울분이 뒤섞인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 한 명을 매달고 30분이 넘는시간동안 이 얼음 같은 찬물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빼앗긴 카렐의 몸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카렐은 자이납을 다시 돌아보았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속도가 많이 떨어진 자이납 역시 힘겹게 뒤를 겨우 따라붙고 있었다. 카렐은 팔놀림을 멈추고 두 팔로 코리온을 꼭 껴안으며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자이납, 힘들면 예킨터스 교수를 내게 맡겨라. 넌 맨몸으로 헤엄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이납이 이를 악물며 다시 속도를 붙였다.
"엉?"
갑자기 고개를 조금 치켜든 카렐이 자이납의 어깨를 툭 쳤다.
"수색셔틀이다. 잠수해야겠다."
멀리 항구 쪽에서 작은 비행체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카렐이 품에 안겨있는 코리온에게 급히 속삭였다.
"잠시 잠수해야겠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눈을 감고 계십시오. 에너지가 소모되니 절대 움직이지 마십시오. 자이납, 물 속에 들어가면 날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
크게 숨을 들이키고 물 속으로 빠져든 카렐은 최고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이납 역시 카렐을 따라 물 속에 뛰쳐들어 지시받은 대로 카렐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웁!"
자이납의 품에 안겨있던 하심이 숨이 막히는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자이납이 그의 입을 가슴에 바싹 붙였지만 입수하면서 물을 먹은 하심은 거의 미친 듯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결국 자이납은 카렐을 따라붙는 것을 포기하고 물위로 급히 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푸하!"
하심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물 밖으로 머리를 가까스로 내밀었다. 순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면 위를 날아가던 수색셔틀이 방향을 홱 틀었다.
"이, 이런!"
새파랗게 질린 자이납이 정신없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자이납이 떨어지자 급히 머리를 내밀었던 카렐은 자이납 쪽을 비추고 있는 수색셔틀에 놀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물 속으로 날 따라와!"
"안됩니다! 이분이 질식한 것 같습니다! 잠수 못합니다!"
"제길!"
"먼저 가십시오! 뒤따르겠습니다!"
거의 사색이 다 된 자이납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정신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카렐 역시 코리온을 끌어안은 채 사력을 다해 물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항구 쪽에서 비상경보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젠 슬슬 들어가도 되려나?"
도시 외곽의 높은 언덕 위에서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던 제네르 일행은 저녁시간이 되자 도시 안으로 들어갈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꺼칠해진 얼굴로 내내 스캐너만을 살피던 베아트릭스는 제일 먼저 무기를 챙기며 자리잡고 앉았다. 이들이 도시 안쪽에서 들려온 경보음을 들은 건 그때였다. 거의 기절할 듯이 놀란 베아트릭스가 차 밖으로 튀어나가 망원경을 눈에 들이댔다.
"뭔가!"
운전석에 앉았던 제네르가 얼른 머리를 내밀었다. 베아트릭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수 쪽 같습니다. 수색정들이 몰려나오고 있고......수색셔틀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호수를 건너 달아나는 길을 택하셨던 모양입니다. 위치로 봐서......호수 건너편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반대편으로 가자!"
"제가 지리에 익숙하니 제가 몰겠습니다."
제네르 대신 운전석에 앉은 베아트릭스가 무서운 속도로 차를 출발시켰다. 거의 뒤로 나뒹굴 뻔했던 제네르는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할룩스를 급히 받아들었다. 지난번 한 번 연락을 준 적 있던 북부길드 프락치였다.
"뭐라고? 호수 중앙에서 걸리신 것 같다고요? 제길! 그건 안다구요!......예? 가디언같이 날랜 여자가 그분하고 함께 있는 것 같다구요?"
할룩스를 끈 제네르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잠깐, 잠깐, 그럼......누구야? 자이납! 자이납인가? 그래, 자이납이 수영을 잘 하니까.....그래서 호수를 건너려고 하신건가?
"자이납 코드로 연락해보시죠. 어차피 위치가 발각되었으면 받든 말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운전을 하던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안그래도 제네르는 자이납의 코드를 입력해 통신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썅! 썩을놈들!"
물을 먹고 거의 까무러쳐 가는 하심을 한 팔에 껴안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자이납의 등뒤에는 이미 두 대나 되는 무인 수색셔틀이 달라붙어 있었다. 카렐과 코리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 썅!"
뒤에서 쫓아온 수색정의 물살에 밀려나며 자이납이 비명을 질렀다. 1, 2인승의 저 치안군 수색정은 잘못 휩쓸리면 그 수압만으로도 물에 있는 사람을 기절시키거나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향을 휙 돌린 수색정이 자이납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씨!"
하마터면 체포용 올가미에 걸릴 뻔했던 자이납은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옆에 떠 있는 얼음덩이 위로 급히 기어올랐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얼음 위에 올라선 자이납은 어깨에 하심을 둘러멘 채 눈을 부릅떴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수색정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거리를 어림하던 자이납은 어느 순간, 얼음을 박차고 몸을 날려 수색정을 몰던 치안군 병사의 머리 위를 그대로 덮쳤다.
"떨어져! 이 새끼야!"
타고있던 병사를 물 속에 내던진 자이납은 재빨리 수색정 조종간을 붙들고 카렐이 있는 쪽을 향해 속도를 붙였다. 사방에서 수색정 수십 대가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조금 차린 하심이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학장님! 학장님 어디계신가!"
"몰라요! 방금 앞서가고 계셨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이납도 카렐과 코리온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심이 몸을 감싸고있던 거추장스러운 봉투를 벗어 내던지고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학장님! 학장님!"
"전하께서 잘 피하고 계셨으니 일단 육지로 올라가 기다려야겠습니다!"
자이납이 몸을 낮추며 수색정에 최대로 속도를 붙였다. 자이납의 허리를 꽉 부둥켜안은 하심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자이납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그가 발견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때, 자이납의 허리에서 갑자기 할룩스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심이 냉큼 할룩스를 집어들자 자이납이 언성을 높였다.
"받았다가 위치 발각당할 지도 모르는데요?"
"어차피 쫓기는 주제에 발각되건 말건!"
"그런가?"
할룩스를 허둥지둥 작동시킨 하심은 그 안에서 웬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지금 그쪽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 정확히 어딘가!"
"누, 누구야? 도대체?"
하심에게서 할룩스를 빼앗아든 자이납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제오신 분입니까?"
"아니! 5일 전 왔다!"
암호를 확인한 자이납은 제네르 일행인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우......여기......맞은편 마을 부근에 곧 상륙할 것 같습니다! 빨리 와 주십시오!"
가까스로 육지에 도착한 자이납은 수색정에서 뛰어내리며 하심의 손을 붙들고 마을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귀찮은 두 대의 수색셔틀은 여전히 그의 머리 위를 따라오며 뒤쫓아오는 치안군들에게 충직한 표식을 해 주고 있었다. 수색정을 빼앗은 덕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인지 아직 적 병력수송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셔틀 서너 대는 그의 눈으로도 똑똑히 분간되고 있었다.
"뭐야?"
한밤중의 소란에 놀라 호숫가에 나와있던 수백의 주민들은 이 추운 날씨에 물에 흠뻑 젖은 채 거의 속옷바람으로 달려오고 있는 여자와 '멀쩡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잘못하면 치안군보다 저들에게 먼저 붙들릴 판이었다.
순간 머리를 굴린 자이납은 자신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짐짓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목이 째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도적떼예요! 무지 많아요! 이쪽으로 오고있어요!"
자이납의 고함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주민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 흩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가만히 있던 주민들까지 우루루 쏟아져 나오면서 수백 명의 주민들이 뒤엉킨 마을에는 일대 혼란이 연출되었다. 한 마음좋은 노인은 그 와중에도 '도적떼에게서 도망친' 자이납의 떨고있는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는 친절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몰려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뒤엉켜 함께 달려나온 자이납은 사람들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치안군 병력수송차 선두와 셔틀에서 몰려나온 이십 여명의 치안군 병사들을 교묘하게 피해 빠져나갔다. 수백 명이 뒤엉켜버린 그 와중에 수색셔틀은 표적을 잃어버리고 공중에서 헤매고 있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시오! 아무 일 아니니 집에 돌아가서......"
치안군 장교의 고함소리는 이성을 잃고 도망치는 주민들의 아우성 속에 파묻혀 버리고 있었다. 하심의 손을 꽉 붙들고 사람들을 밀치고 나온 자이납은 병력수송차 너머 안보이는 구석에 희미하게 보이는 웬 지저분한 화물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휘둥그레진 눈을 한 채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있는 사람은 눈에 확 띄는 애꾸로 보아 틀림없이 제네르였다.
자이납을 알아본 제네르가 급히 문을 열어주자 담요를 뒤집어쓴 자이납과 하심이 숨을 헐떡이며 차안에 확 뛰쳐들었다. 옛 학우이기도 한 하심의 모습에 제네르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당장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하는!"
"몰라요! 저도 몰라요!"
거의 탈진해버린 자이납이 끊어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하, 학장님하고......호수 남쪽으로 가시는 듯 했는데......헉헉, 전 수색정 뺏아타고 왔고 전하는 계속 헤엄쳐서 가셨어서.....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긴장이 풀리며 탈진해버린 자이납이 헛구역질까지 하며 의자에 축 늘어지자 시로가 파랗게 변해버린 그의 몸을 급히 주물러주고 있었다.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한 치안군들을 바라보며 베아트릭스가 급히 차를 돌렸다.
"아직 시끄러우니 일단은 빠져나가야겠습니다. 전하께서 자이납보다는 늦게 도착하실 테니 병사들 몰려드는 걸 빤히 보시면서도 이리로 오시지는 않을 겁니다. 녀석들은 자이납을 찾아 이 일대를 수색할 테니 우리는 조금 기다렸다가 남쪽 호숫가를 뒤져야겠습니다."
자이납과 하심을 일단 구해낸 제네르 일행은 통제불능이 되어버린 마을 부근에서 서둘러 빠져나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코리온과 단 둘이 있을 카렐을 찾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