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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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과 코리온을 찾는 데 실패한 제네르 일행은 새벽녘 호숫가 한구석에 차를 세워둔 채 잠시 쉬고있었다.
"벌써 부근을 빠져나가신 것 아닐까요?"
마을에서 간단한 새벽식사를 사온 시로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돌리며 물었다.
"그랬을 수도 있지......만약 그때 차만 구하셨다면 이미 다른 대륙까지도 넘어가고 남았을 시간인데.....
"식당 주인이 그러는데 이 아랫마을에서 어젯밤에 차 한대를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수법이 워낙 교묘해서 흔적도 못 찾고 있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베아트릭스가 얼른 시로를 다그쳤다.
"차종은?"
"그것까지는 모른대고......그냥 '승용차'라는 걸로 봐서 흔한 보통 차인 모양입니다."
샌드위치를 씹던 자이납이 먹던 것을 사방으로 튀기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역시 우리 전하셔, 저 실력으로 가디언 안하셨어도 어디 가서 굶지는 않으시겠네요."
"전하께서 훔치신 것이라면......이미 대륙을 넘어가셨겠지?"
"아마도."
베아트릭스가 어깨를 으쓱 했다. 제네르가 6번 행성의 지도를 펼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디로 가셨을까?......북반구 대륙이 6개니까.....제길, 이젠 또 어떻게 찾지."
이들 전사단 일행 옆에서 계속 한숨만 내쉬고있던 하심은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가 울리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생각 없이 할룩스를 꺼내보았던 그는 이미 폐쇄된 줄 알았던 자신의 할룩스가 울리고 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받지 마십시오. 위치추적당합니다."
베아트릭스가 평소처럼 쌀쌀맞게 말했지만 하심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발신자가 샤드니 님인데?"
"남부 녀석들이 코드를 위장해서 하는 것 아닐까요?"
"글쎄, 설사 위치가 발각되어도 출동까지는 몇 분 걸리니까.....일단 받아봐, 아니다 싶으면 당장 위치를 옮겨야지. 우리 얘기는 하지 마. 하심."
잠시 눈치를 본 하심이 일행에서 멀찍이 떨어져 할룩스를 작동시키자 틀림없는 '진짜' 샤드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샤드니는 비교적 멀쩡한 하심의 모습에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쿠엘스크에서 달아난 건가? 학장님은! 학장님은 어디계셔!"
"학장님과 헤어졌습니다."
"카렐 그놈과 함께 있었던 거 알아!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자면 깁니다."
한숨을 푹 내쉬는 하심에게 샤드니가 얼른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빨리 돌아오게나. 적당한데서 만나자구."
"도둑질에 이골이 붙었나보군."
운전석의 카렐을 바라보며 뒷자리에 앉은 코리온이 또다시 악담을 터뜨렸지만 카렐은 피식 웃음까지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칭찬으로 알지요."
카렐과 코리온이 탄 차는 두딘카가 있는 쿠엘스크 주를 벗어나 비교적 온화한 중위도의 예리반 주로 접어들고 있었다.
터널 입구에서 있었던 검문도 '북부귀족 블리크 시어리'라는 이름으로 천연덕스럽게 통과한 카렐은 터널에 들어선 이후로는 내내 무기력하게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꽤나 멋대가리 없는 투명한 터널 밖으로 가도가도 별다른 변화도 없는 넓은 바다가 지루하게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무슨 이유엔지 정신을 깜박깜박 놓고 있는 카렐이 피곤해 졸고있는 것인지, 출혈 때문에 가끔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인지 코리온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의 날갯죽지를 감싸고있는 무명수건은 이미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또 한번 '졸다가 깬' 카렐이 코리온을 돌아보며 물었다.
"몸이 워낙 안좋다 보니 상처가 덧나려나 봅니다. 근데 상처 좀 볼 줄 아시면 좀 손봐주시겠소? 등이라 내가 직접 손대긴 어려울 것 같으니......"
"할 줄 안다해도 내 네놈 몸에 손댈 것 같느냐?"
쌀쌀맞게 대꾸한 코리온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어깨를 으쓱 한 카렐이 피가 흐르는 날갯죽지를 움켜쥐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걸 물었군요......"
카렐이 고통스러운지 이를 한 번 꽉 악물었다.
"제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즐거우신가요?"
"행복해 미칠 지경이다."
"뭐 새로울 것도 없군요. 베흔에게도 평생 들어왔던 말이니."
운전석 옆에 놓인 봉투를 뒤적거린 카렐은 오다가 산 사과를 한 개 꺼내 코리온의 무릎에 올려주었다. 그 능청스런 태도에 코리온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카렐을 쏘아보았다. 카렐이 사과를 심지 째 씹으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죠? 다른 사람이 제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히면 펄펄 뛰시는 어머님이 오라버니가 해놓은 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별 말씀을 않으시죠."
"주제에 죄는 아나보군."
카렐의 수다에 퉁명스럽게 대꾸한 코리온은 이 원수 같은 동승자의 얼굴을 새삼스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등의 고통 때문인지 눈을 꽉 감고있는 카렐의 왼쪽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터널을 막 벗어난 차는 예리반 대륙의 풍요로운 평원을 가로질러 멀리 보이는 해안도시를 향해 달렸다.
"안되겠습니다. 공용터미널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공용 터미널에서 돌아온 카렐이 차에 올라타며 망토를 벗어 던졌다. 망토에 가려져 있던 카렐의 피묻은 어깨가 드러나자 코리온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 행성에서 그나마 가장 따뜻한 온대지방에 속하는 예리반 대륙은 이웃한 비엔 5번 행성과 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울창한 혼합림과 농장, 목장들이 어우러진 이 풍요로운 땅은 이 척박한 플라칼 가 영지에서 가장 '살만한' 곳이기도 했다. 어쨌든 마을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쿠엘스크 대륙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지만 쫓기는 입장인 카렐과 코리온에게는 '숨기가 편하다'는 것 이상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저녁시간인 이곳은 한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른손 팔찌가 없어졌군."
코리온이 짐짓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 채 중얼거리자 카렐이 현금카드를 들어 보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500골드에 팔았죠. 580골드에 산 건데 뭐, 그 정도면 잘 쳐서 받은 거죠."
코리온은 여전히 바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카렐이 코리온에게 새 할룩스를 한 개 내밀었다.
"새로 산 겁니다. 제 꺼하고 해서 두개 만들었으니 급할 때 쓰십시오. 제 코드는 그 위쪽에 있으니."
할룩스를 받아든 코리온은 말없이 기계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카렐이 여전히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오다가보니 호텔이 몇 개 있더군요. 여긴 쿠엘스크에서 같이 집중단속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제 이름으로 숙박계를 작성하면 될 겁니다. 일단 다치신 몸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니까 며칠만 거기서 저와 함께 숨죽이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면?"
코리온이 냉랭하게 물었다.
"혼자 몸 추스를 수 있으실 정도로 나아지시면 저 혼자라도 일단 나가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단을 만들어 되돌아오겠습니다."
"내 네놈을 어떻게 믿지?"
"그건 오라버니 선택에 맡기죠."
피식 웃음지은 카렐은 눈앞에 보이는 큰 호텔로 차를 몰아들어갔다.
"남편분이 정말 미남이시군요."
숙박계를 받아주던 호텔 지배인이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코리온에게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부인도 정말 멋있으시고 남편분도 저리 크고 매력적이시니......역시 북부분들은......"
평소 늘어뜨리고 다니던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코리온은 귀밑에 있는 대군의 황족문과 얼굴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머플러를 코까지 칭칭 돌려감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반짝이는 다갈색 눈동자와 균형 잡히고 잘생긴 이목구비, 늘씬한 몸매만으로도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남의 남편 함부로 눈독들이지 마쇼."
카렐이 코리온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자 지배인에게 짐짓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일부러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북적대는 고급 호텔을 찾아온 카렐은 숙박계를 작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남편 몸이 안 좋아서 맘먹고 북부에서 여기까지 요양 온 거니까......되도록 볕 잘 드는 좋은 방 주시오. 조금 비싸도 상관없으니."
"아휴, 두꺼운 망토까지 입고계신 게 여기 분은 아니다 싶었죠. 보자아......북부에서 오신 금슬좋은 부부께서 묵으실 볕 좋은 방이라......9층에 바다를 바로 바라보고 있는 좋은 방 하나 있군요. 식사 포함해서 하루에 25골드 되겠습니다."
"알겠소. 아참, 남편은 채식만 하니 식사에 참고해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조치해드리죠."
지배인이 보여준 방 영상에 만족한 카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석에서 첫날 숙박료를 내놓았다. 문득 코리온을 돌아본 카렐은 그의 시선이 카운터 뒷쪽에 걸린 사진카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배인이 웃는 얼굴로 설명을 해 주었다.
"아하, 저희 대륙 지사이신 루시도프 플라칼 경이십니다. 종장님의 6번째 아드님 되시고 플라칼 가에서 제일 너그럽고 후덕하신 유학자분이시죠. 그 옆은 부인이신 릴라크 예리노프 경이시고 가문 2기사단장을 맡고계십니다."
이곳에 자신을 초대했던 릴라크 경의 영향권임을 깨달은 코리온은 순간 쓴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가죠."
키를 받아든 카렐은 빙긋이 웃음지으며 코리온의 허리를 다정하게 돌려 안았다. 카렐이 코리온의 귀에 대고 짐짓 밝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웬만하면 좀 웃으시죠. 그렇게 원수 보듯 뻣뻣하게 계시지 말고."
그때까지 코리온을 넋 놓고 바라보던 지배인을 또 한번 흘겨본 카렐은 보란 듯 코리온의 귀 옆에 입을 맞추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카렐이 잡동사니만 잔뜩 들어있는 여행가방을 집어던졌다. 지배인 말마따나 바다를 향한 큰 창이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이 객실은 '금슬 좋은' 부부가 묵기는 꽤나 낭만적인 곳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슬은 고사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 둘에게 창을 마주보고 놓인 푹신한 2인용 침대는 결국 둘 중 한 명은 바닥에서 잘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훗,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 이 위에서 주무십시오."
코리온을 침대에 앉혀준 카렐이 망토를 벗어 던지며 다시 어깨를 움켜쥐었다. 튜닉을 벗고 피범벅이 된 무명수건을 풀어낸 카렐은 옷을 끌러 내리고는 거울에 상처를 비춰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거의 한 뼘 정도 찢긴 상처에는 아직까지도 피와 진물이 뒤엉켜 있었다.
"전 잠깐만 잘 테니 먼저 씻고 나오십시오. 뭐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구요."
여분 담요를 꺼내 카펫바닥에 깐 카렐은 그 위에 엎드려 누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묶은 끈과 머플러를 풀어낸 코리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보이는 늦은 저녁의 어두운 바다를 잠시 멍 하니 응시했다.
겉옷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난 코리온은 그다지 고상하지는 못한 몰골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카렐과, 그의 뒷춤에 달려있는 주페 태자의 쿠크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불편한 맨바닥에서 그새 잠이 들었는지 쌕쌕거리는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워있는 카렐의 등뒤에 쭈그려 앉은 코리온은 옷자락을 조금 들치고 그의 상처를 잠시 살펴보았다.
"신통하군. 이정도 밖에 곪지 않았다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일어선 코리온은 옷을 벗어던지고는 절룩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쿠엘스크 인근의 제법 큰 마을에 도착한 제네르는 차문을 열어주며 하심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가 봐. 우린 계속 전하를 찾을 테니까 너희도 학장을 쫓던 말던 맘대로 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함정 파놓고 기다리는 것만 아니면 환영해주지."
"그래, 어쨌든 구해줘서 고맙다. 제네르."
옛 친구와 가벼운 악수를 주고받은 하심은 불안하기는 한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을 중앙의 큰길로 향했다. 늦은 오전이 되면서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하는 하늘에서는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약속대로 골목 한쪽에서 차 한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열린 차문 안에서 나타난 건 너무도 반가운 샤드니의 모습이었다.
"수고했소. 예킨터스 교수."
"감사합니다. 플레렌 응교님."
차에 올라탄 하심은 운전석 옆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또 다른 낯익은 얼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잔뜩 풀죽은 얼굴의 라스 역시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잠시 하심을 돌아보았지만 바로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쁘장하던 얼굴에는 작은 채찍에 맞은 듯한 여러 개의 상처와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샤드니의 자리 옆에 노예를 다룰 때 쓰는 작은 채찍이 놓여있었다.
하심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근위대 놈들이 증거 찾아내기 전에 내가 샀네. 하여간 남부 노예 놈들은 길이 덜 들어서 도무지 싸가지가 없어.....잠깐 손 좀 봐줬지."
샤드니가 쌀쌀맞은 얼굴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운전석 옆 조그만 구석에 웅크려 앉은 라스를 한 번 바라본 하심은 자신들을 도와준 덕에 이렇게 그나마 자유롭던 외거노예에서 솔거노예 신세로 전락해버린 저 조그만 체구의 노예에게 괜한 미안한 마음이 솟구치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거세해야 한다고 했더니 듣기 싫게 울고짜고 해서 좀 두들겨 준 것 뿐이야."
하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로 반입되는 모든 노예는 남녀불문하고 거세를 받아야 하는 것이 서부 법률에 규정되어 있으니 샤드니의 행동이 잘못된 건 결코 아니었다. 노예의 '더러운 피'가 시민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한 극단적 조치였지만 그 덕에 자연 감소되는 만큼의 노예를 남부에서 돈을 주고 사들여와야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래도 서부에서는 사회혼란 대신 차라리 노예를 매입하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물론 제국에서 노예가 가장 많고, 출산율도 상당한 남부에게 꽤 짭짤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제 다시는 자유로운 외거노예가 될 수 없게 되어버린 저 노예청년에게는 꽤나 불운한 일이 된 건 사실이었지만 서부인인 하심이 거세하는 것 자체에 그다지 '안됐다'라는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제 할룩스로 어떻게 연락하셨죠?"
"감청반에 있는 놈 잠깐 구워삶았네. 딱 1분만 폐쇄목록에서 지워달라고. 돈 꽤나 들었지. 지금쯤 다시 폐쇄했을걸세. 근데, 카렐 그 망할 새끼가 학장님을 모시고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차를 훔친 모양이라니까 다른 대륙으로 넘어갔을 공산이 큽니다."
"제기랄,"
샤드니 역시 뾰죽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자넨 어쩌다가 학장님과 떨어진 거지?"
"그게....."
잠시 머리를 굴린 하심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수 건너편에서 몰려나온 사람들한테 쉽쓸려 일행과 헤어졌습니다. 마을사람이 차를 태워줘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아켐에서 사소한 실수로 '은인' 카렐을 쫓기게 만들었던 하심은 이번에는 제대로 거짓말을 둘러대고 있었다. 코리온 수하에서도 지독한 매파에 속하는 샤드니가 사실을 안다면 이번엔 제네르를 죽이겠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샤드니가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대공주저하께 데려다주겠네. 그러면 저 미친 근위대나 남부놈들도 더 이상 수색할 명분이 없어질 게야. 자넬 증인으로 내세우자고 협박하면 녀석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화해하자고 손을 뻗을 테니까 일단은 녀석들 비위 거스를 말은 하지 말게. 괜히 쥐고있는 패를 줄일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하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만이라도 되돌아온 것이 코리온까지 구해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로서도 더 이상 바랄 바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짙푸른 쿠엘스크 호수와 울창한 침엽수림이 지나고 있었다. 아직 적들에게 쫓기고 있는 코리온을 머릿속에 떠올린 하심에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편안함은 어딘지 죄스럽게 느껴져오고 있었다. 호수를 멍 하니 바라보던 하심이 조그만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장님께서 주페 태자저하를 많이 그리워하고 계신 듯 합니다."
"뭐 그게 하루이틀 일인가."
샤드니가 성의 없이 대꾸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참,"
앞의 운전석과의 사이에 칸막이를 친 하심이 조심스레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가디언 카렐이 태자였다는 거?"
"무슨 소리야?"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뜬 샤드니가 하심을 휙 돌아보았다. 하심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교님도 모르셨군요......학장님이 그 말씀을 왜 저희에게도 하지 않으셨는지......알 수가 없네요."
고개를 번쩍 든 샤드니가 대뜸 하심의 멱살을 움켜쥐며 큰 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말하란 말이야! 카렐이 태자라니!"
샤드니의 느닷없는 거친 태도에 놀란 하심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하심이 더듬거리며 사실을 설명하자 샤드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그럼......카렐이......유전자은행에 있던 황제와 황후의 세포로 만든.....장태자란 말이야?"
"예......에. 그, 그렇다구요......"
하심의 대답에 샤드니의 두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심의 멱살을 쥐고있던 손을 한참만에 스르르 놓은 샤드니가 갑자기 운전석에 차를 세우라는 손짓을 보냈다. 하심은 샤드니의 뜻밖의 태도에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샤드니가 운전석과의 사이에 쳐 있던 칸막이를 열며 기사에게 짧게 지시했다.
"숲속으로 몰아."
샤드니의 명령에 기사가 차를 소나무숲 안으로 몰아들어가고 있었다. 도로에서 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샤드니는 그만 됐다는 손짓을 보냈다. 약간 비탈진 소나무숲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다 내려."
샤드니의 명령에 운전기사와 라스가 차에서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무언가 생각하던 샤드니는 하심에게도 짧게 말했다.
"자네도."
"예, 예?"
샤드니의 사뭇 위협적인 태도에 놀란 하심이 얼른 차에서 내려섰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 가득 내리는 하얀 눈발이 모두의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샤드니는 운전기사와 라스, 하심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하심이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하심의 눈치를 무시하며 운전기사 뒤로 다가선 샤드니는 갑자기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더니 그의 뒷덜미를 대뜸 내리쳐버렸다.
"아, 악!"
소스라치게 놀란 하심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급소에 치명상을 입은 건장한 기사는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눈밭에 쓰러져 온몸을 부르르 떨고있을 따름이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던 하심의 손목을 샤드니가 거칠게 붙들며 말했다.
"라스, 차 뒤에 삽 있으니 가져와라."
뜻밖의 광경에 벌벌 떨고있던 라스가 차에 실려있는 응급장비중에 있는 삽을 허둥지둥 가져왔다. 샤드니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기사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을 묻어."
"플레렌 응교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시다뇨!"
샤드니에게 손목을 잡힌 하심이 악을 쓰며 그의 손목을 떨궈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코리온의 친필 문장이 새겨진 피묻은 시미터를 한 손에 쥔 채 겁에 질린 라스가 울며 땅을 파고있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땅을 다 판 라스가 기사의 시체를 구덩이 안에 끌어넣었다. 이 황당한 상황에 놀란 하심이 다시 소리쳤다.
"응교님!"
"옆에 하나 더 파라."
샤드니가 라스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자 하심의 얼굴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뒤로 휙 돌아선 샤드니는 이번에는 벌벌 떨고있는 하심을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미안하네. 예킨터스 교수."
입술을 깨문 샤드니가 하심의 목을 겨냥하며 대뜸 시미터를 내리쳤다. 죽음을 직감한 하심이 몸을 움츠리며 눈을 꽉 감고 말았다.
"헉!"
둔탁한 타격음에 칼을 내지르려던 샤드니가 앞으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눈을 번쩍 뜬 하심은 쓰러진 샤드니의 등뒤에서 눈과 흙이 묻은 삽을 치켜든 채 부들부들 떨고있는 라스를 문득 돌아보았다. 뒤통수를 삽으로 얻어맞고 쓰러진 샤드니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달아나요!"
라스가 삽을 내던지며 하심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차! 차에 타!"
하심이 운전석에 앉으며 라스를 거칠게 차안으로 잡아끌었다.
"이것들이 어딜!"
비틀거리며 일어난 샤드니가 다시 칼을 치켜들며 운전석에 달려들었다. 채 문도 닫지 못한 채 차를 출발시킨 하심은 샤드니가 결사적으로 내지른 칼날에 팔을 베이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열려있던 차문이 굵은 소나무에 요란스레 부딪히며 차에서 떨어져나가 버렸다.
"썅! 서!"
샤드니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한쪽 팔을 다친 하심은 울창한 소나무 사이를 가까스로 통과하며 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급히 달리는 차 양옆이 나무에 긁히면서 차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반쯤 이성을 잃은 하심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장 충실한 코리온 사람이며 동지인 샤드니가 도대체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하심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장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심의 두 눈에서 이유도 없이 눈물이 펑펑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제발, 진정하세요!"
뒷자리의 라스가 넋이 나간 듯한 하심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도로에 도착한 차는 방금 전 제네르 일행과 헤어진 마을 쪽으로 미친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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