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62화 (261/1,132)

< -- 262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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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식사를 하고 다시 잠들었던 코리온은 얼굴에 느껴지는 묘하게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에 자꾸 그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간만의 편한 잠자리에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잠들었던 코리온에게 이곳이 자신의 익숙한 침실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함께 잠든 사람이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까지 떠올리는데는 또 그만큼의 시간이 허비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눈을 뜬 코리온에게 자신을 품어 안은 채 잠들어있는 이 꼴 보기 싫은 사촌누이의 존재가 얼마나 충격스러웠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건 자신 역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있었다는 것이었지만.

"제길,"

정신을 차린 코리온이 그제서야 뒤로 휙 돌아누웠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잡아채 다시 품으로 끌어당기는 그 엄청난 팔힘에 코리온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고 말았다.

"욱!"

자신의 신음소리에 잠이 깬 카렐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자 코리온이 짐짓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잠이 덜 깬 카렐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밝은 오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큰 창 너머로 짙은 남색의 바다가 내다보이고 있었다.

"내가 주책을 떨었구려, 오라버니."

잠결에 코리온을 껴안았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렐은 코리온이 자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카렐은 웃옷을 벗은 채 '잠들어있는' 코리온에게 다가와 가슴과 다리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내 잠깐 나갔다 올 테니.....푹 주무시오."

코리온의 어깨까지 담요를 잘 덮어준 카렐은 작은 쪽지를 적어 코리온의 머리맡에 남겨두고는 객실 밖으로 사라졌다. 카렐이 사라지자 눈을 번쩍 뜬 코리온은 옆에 놓인 쪽지를 얼른 집어보았다.

-필요한 물건과 적적할 때 보실 책들 좀 사오겠습니다. 방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큰 객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코리온은 크고 푹신한 침대에 지치고 아픈 몸을 편하게 내맡겼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저 원수 같은 카렐이 잠시나마 사라졌으니 속이 시원해도 모자라야 할 터였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 카렐이 누워있던 바로 옆의 침대 빈 공간에서 묘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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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노 태자로부터 '일방통고'가 있은 그날의 늦은 저녁, 주페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은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었다. 회색 망토 차림으로 주페의 교수실에 찾아온 이 큰 키의 북부 여인은 태자와의 가벼운 맞절이 끝나자 잠시 아무 말 없이 크지 않은 교수 숙소 안을 둘러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한쪽 벽을 꽉 채운 책들과 글씨, 문서들이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독신의 교수 혼자 살기에 지장 없는 수준이 고작인 한 칸 짜리 작은 살림집이 이 '태자'의 살림살이 전부였다.

"듣던 대로 검소하시군요."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이 망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사뭇 무표정한 얼굴의 주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에서 망토를 받아들어 벽에 걸었다. 흰 무명포 차림의 세네피스와 검은 무명포의 주페가 차 한잔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앉아 잠시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게 이렇게 혼자 찾아오시다니, 뜻밖이군요."

주페가 눈을 내리깔며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세네피스는 그의 선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전히 세네피스의 시선을 피하던 주페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레곤의 별장에서 절 구해주셨던 일은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릴 기회가 없었군요. 매사 시비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일단 그 일은 감사드리겠습니다."

"태자저하를 구해드릴 수 있다면 더한 일이라도 했을 겁니다."

세네피스의 반짝이는 회색빛 눈동자가 주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디아크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랬군요."

주페의 말속에 숨어있는 경멸의 의미를 눈치챈 세네피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변명 같지만.....저도 몰랐습니다. 정말로.....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전 그냥......장태자가 선제공격한 정도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세네피스의 얼굴을 주페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요. 가끔은 가문이고 뭐고 다 버리고 이곳에 와 있는 오르 언니가 부럽기까지 하더군요. 하지만 차마 그 길을 따라나설 용기가 제겐 없었죠. 제 삶은 어차피 가문의 복수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이미 완전히 망가졌으니."

주페에게 조금 더 바싹 다가앉은 세네피스가 방금 전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당신과 가문 사이에서 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유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헛된 집착일 뿐입니다."

주페가 찻잔을 다시 들이키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 괴로움을 이해 못하시는군요,"

세네피스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조금씩 맺혀있었다.

"제가 코리온 조카와의 관계를 부정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지금 5개월 된 제 딸이 자라고 있습니다."

순간 멈칫 한 세네피스가 하던 말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제 딸에게 떳떳치 못한 아버지가 되고싶지는 않습니다."

입술을 굳게 깨문 세네피스가 억지스러우나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딸을 그리 원하셨다더니......좋은 아버지를 만났으니 행복하게 크겠군요."

"진심이시라면 감사하겠습니다."

주페의 여전히 곱지 않은 대답에 말에 세네피스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피가 섞였다면......제게도 소중한 존재가 될 이유로 충분하죠."

세네피스의 회색빛 시선과 주페의 암갈색 선한 눈동자가 방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마주치고 있었다.

"당신과 제 피가 합쳐진 아이라면 그 의미가 더하겠지만......아, 아닙니다."

세네피스의 두 뺨으로 결국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세네피스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주페가 중얼거렸다.

"오넬론 문제 때문에 괴로우시겠군요."

"알고 계셨군요......"

"그 애가 몸도 마음도 성치 않다는 것을.....미리 알려드렸어야 할 것을......"

"상관없습니다. 알았다 해도 결혼을 포기하셨을 아버지가 아니시니까요."

자신이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세네피스를 바라보며 주페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을 가다듬은 세네피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오늘 장태자가 협상을 제안해왔죠?"

조금 놀란 주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네피스는 주페의 손수건을 잘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깜짝 놀랄 말을 꺼냈다.

"근위대장 베흔이 태자저하를 근위대에 넘기면 장태자를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밀약을 했습니다."

순간 너무나 놀란 주페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 주페는 멍 한 얼굴로 자리에 굳어버린 듯 앉아있었다. 세네피스가 주페에게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태자저하를 잡아 근위대에 넘기려는 수작이니.....절대 가지 마십시오. 이번엔 제발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이번엔 제 사람을 동원해 구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주페가 떨리는 목소리로 세네피스에게 물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페의 날카로운 질문에 세네피스가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베흔이......장태자와 저희 양쪽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저희에게도 역시 비슷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진 주페가 공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 주페를 바라보던 세네피스는 태자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게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페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근위대장이......누구든 절 잡아바치면 제위에 밀어주겠다 말했다구요?......그랬다는 말입니까? 근위대장이?"

"저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세네피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하자 주페가 세네피스를 바라보며 힘없이 물었다.

"가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지금 그 조건을 다른 물질적 대가와 교환할 협상을 근위대와 진행중이고......분위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저희 북부에는 태자저하를 살려드릴 수 있는 다른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제발,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주페의 앞에 바싹 다가앉은 세네피스가 그의 두 손을 꽉 잡으며 호소했다.

"태자저하의 명예나 자존심에 전혀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협상 명목으로 코윈에 오시면 제 사람들이 태자저하를 일단 체포할겁니다. 그리고......그 상태에서 근위대의 묵인을 받으며 황궁을 접수할 테고 태자저하는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사면 형식으로 다시 풀어드릴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저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주페의 손을 꼭 쥐며 세네피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10년 이내에 태자저하를 남극성당 대제학으로 삼겠습니다. 저와 남편이 제국을 바로 이끌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 역시 유학자입니다. 태자저하의 뜻을 왜 모르겠습니다? 태자저하께서 근위대 손에 죽임을 당하신다면 누가 그 뜻을 세우겠습니까, 제발, 유학자로서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하는 물론이고 코리온 조카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세네피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제발, 제발, 받아들여주십시오."

세네피스가 주페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고개를 떨군 주페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정성들여 준비해 온 기습 진공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고 이젠 그 대가를 치를 일만이 남아있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숨과, 도리 그리고 그 동안 그를 이끌어온 숱하게 많은 어떤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참만에 깊은 한숨을 토해낸 주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와 태자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무도한 세력이 감히 왕도정치를 구현할 것이라 말하다니, 우습군요."

주페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세네피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주페의 거절에 충격을 받은 세네피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 목이 백 번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도한 세력이 유학자를 회유해 제위에 올랐다는 선례만은 절대 만들지 아니하겠습니다."

"태자저하, 하지만......"

"밤이 늦었으니 이 옆의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십시오. 저는 책상 옆에 간이침대가 있으니 여기서 자겠습니다."

어깨를 껴안고있던 세네피스를 가볍게 밀치며 일어난 주페는 교수실 옆에 달린 작은 살림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던 세네피스는 방 한쪽에 고이 놓여있는 작은 캡슐을 바라보고는 또 한번 탄식을 내뱉었다. '모디아크 세닉 리쿠'라는 작은 이름표가 곱게 붙어있는 캡슐 옆에는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작은 아기옷과 신발까지 놓여있었다.

세네피스는 카펫과 담요를 깔아 직접 잠자리를 만들고있는 주페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저 죄없는 아기를 부모 없는 고아로 정히 만들고 싶으십니까?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하십시오, 태자저하께서 잡히신다면 코리온 조카라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럼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잠시 꼼짝도 않던 주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절하고 살아남은 아버지보다 뜻을 지키고 죽은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저 아이가 커서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예?"

"......"

고개를 떨군 주페는 그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페의 침실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세네피스는 교수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교수실과 방 사이에 쳐져있는 발 너머로 창가에 말없이 서있는 주페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주페가 이미 몇 시간째 저 모습으로 서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주페의 낮은 한숨 소리가 세네피스의 귀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휴."

물 한 모금을 들이킨 주페는 빈 컵을 옆에 내려놓고 이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개에 얼른 얼굴을 파묻은 세네피스는 짐짓 자는 척 얼른 눈을 감았다. 발을 조심스레 걷고 방 안에 들어선 그는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태아 캡슐을 열어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조금 열려있던 창문을 급히 닫은 주페는 방 한쪽 이부자리에 누워있던 세네피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존재를 느끼며 세네피스가 자기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불쌍한 사람 같으니......"

세네피스의 어깨에 담요를 푹 덮어주며 주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담요 밖으로 드러난 세네피스의 어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주페의 손은 마치 무사의 그것처럼 굵고 갈라져 있었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뜬 세네피스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주페의 반짝이는 시선에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말았다.

"난.....이렇게 살고싶지는 않다구요......"

벌떡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와락 부둥켜안은 이 여인을 주페가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 주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눈물로 젖은 얼굴을 부비며 세네피스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사람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따름이었다.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 팽개쳐져있던 제네르는 시간관념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건 틀림없었지만 볕이 드는 창 하나 없는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는 가끔 쥐나 기어다닐 뿐 아무도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종이를 사기 위해 학교 매점에 가다가 코리온의 교수실 쪽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오고 있던 샤드니를 발견했다는 것과, 네페티 부인에게 신고하기 위해 할룩스를 집어들었다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뿐이었다. 머리가 깨질듯 아픈 것으로 보아서는 급소를 제대로 가격당해 정신을 잃은 것이 확실했지만 도대체 누구의 소행인지조차 알 도리가 없었다.

"나와!"

참으로 오랜만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사복 차림의 두 사람이 난입해들어와 제네르의 눈을 가리고 대뜸 밖으로 끌어냈다. 내내 굶어 기진맥진해있던 제네르는 거의 발도 디디지 못한 채 그들에게 맥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다시 바닥에 팽개쳐진 제네르의 곁으로 몇 명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세작이 틀림없습니다."

위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제네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녀석 할룩스에 입력하다 만 코드는 틀림없이 부인 겁니다."

"흠.......어쩐다......"

2명이 대화를 나누는 듯 싶었지만 모두 제네르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생소한 목소리였다.

"이 녀석이 우리 계획을 태자와 누나에게 밀고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제네르의 귀에 어딘지 익었다. 머리를 쥐어짜낸 제네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샤드니.......플레렌?"

"대군마마와 그렇게 가까운 곳에 버러지 같은 첩자가 있었다니, 썩을!"

샤드니가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자 제네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샤드니는 감정이 많이 격앙된 듯 쓰러진 제네르에게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가하고 있었다.

"그만해라. 샤드니.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누군가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말하는 태도로 보아 상당히 연륜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이 망할 년을 사막에 내다버려야겠습니다!"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제네르를 또 한번 사정없이 걷어차며 샤드니가 또다시 신경질을 부렸다.

"죄값을 치르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 망할 놈들! 태자저하와 최고제후님을 배신한 건 네놈들 아닌가! 난 프락치가 아냐! 난 아무 것도 밀고한 일 없어!"

제네르가 두 눈이 가려진 채 필사적으로 울부짖자 샤드니가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았다.

"프락치가 아냐? 아니라구? 그럼, 날 밀고하려 했던 건 뭐냐! 이 배신자 년아! 갈곳 없는 빈털터리 거지새끼 거두어다가 입혀주고 가르쳐준 대군마마를 배신하다니! 이 썩을 년아!"

샤드니의 주먹에 제대로 얻어맞은 제네르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샤드니가 제네르의 목을 꽉 밟으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천하의 거렁뱅이 출신 주제에 그 동안 생도라고 떵떵거려 좋았지? 어쩌냐? 이제 좋은날도 다 끝났으니? 내가 오늘 네년 정체를 대군마마께 알려드렸거든? 그분이 무슨 판단을 내리셨는지 궁금하지? 넌 이제 퇴학이야. 퇴학. 명문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퇴학이라구. 어떠냐? 나락으로 다시 떨어진 기분이?"

자신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순간 경악한 제네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멍 하니 있을 뿐이었다. 제국 제일의 유학자가 되겠다는 그의 일생의 꿈이 송두리째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부어오른 눈 밑으로 처절한 회한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샤드니!"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샤드니가 숨을 씩씩거리며 제네르에게서 물러났다.

"어차피 네페티는 근위대 손에 몰락할 수밖에 없어."

냉소 섞인 목소리에 제네르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네페티가 근위대장과 친한 건 잘 알지만......그 녀석은 배신자한테는 정말로 가혹하거든. 어차피 새 황제가 오르면 네가 새 최고제후가 될 테니 흥분할 것 없다."

"그래서 이년을 어떡하시려구요?"

샤드니가 숨을 헐떡거리며 손을 툭툭 털었다.

"뭣 때문에 우리가 손을 더럽히겠냐. 로노 그놈의 세작이니 근위대에 함께 넘겨버려라. 녀석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바닥에 팽개쳐진 채 온몸을 떨고있던 제네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샤드니를 앞세운 플레렌 가 원로세력들이 근위대와 손을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지만 주페 태자를 그리도 헌신적으로 따르는 코리온 역시 이들과 한패거리인지는 제네르로서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두 팔이 붙들린 제네르는 음산한 지하실로 다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요동의 기병대 막사에 말없이 앉아있는 로노 장태자의 앞에는 동부 최고제후 샤자한 공이 사뭇 굳은 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 장태자를 한참동안 노려보고 있던 샤자한 공이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못하겠다 하셨습니까?"

"지금 주페와 함께 진격해도 충분히 가능해. 주페 말대로 서부가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근위대가 저항해도 충분히 황궁을 차지할 수 있어.......북부는 오르마즈가 나서면 분열시킬 수 있고. 내 제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어찌 친동생을 팔아 넘기겠는가."

한 손에 술잔을 쥐고 있는 로노 장태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근 이틀간 이 문제를 쥐고 갈등을 거듭하던 로노 장태자는 주페를 팔아 넘길 수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주페를 근위대에 넘기자며 계속 태자를 설득해 온 샤자한 공은 그의 이 결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거저먹고싶어 환장했군.'

로노 장태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샤자한 공을 살짝 째려보았다. 신중한 '현실주의자'로 소문난 저자가 기습진공계획에 반대하고 주페를 팔아 넘기려 하는 이유는 말하나 마나였다. 2차 혼란기 이후 주페 태자를 지독히도 미워해 온 샤자한 공의 구구한 개인적 감정도 있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을 터였다. 함께 진격할 서부, 그리고 오르마즈의 북부와 '수확물을 나누어먹지는 않겠다'는 것이 저자의 진짜 속내일 터였다.

그리고 근위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저자, 아니 동부는 다른 어떤 제후지역의 힘도 빌지 않고 제국의 주도권을 근위대와 단둘이 나누어먹게 될 터였다.

"저와 상의 한마디 없이 임의로 결정을 내리시다니,"

샤자한 공이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주페 태자의 야심을 과소평가하고 계신 듯 합니다. 주페 태자는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고 난 후에라도 어차피 제거되어야 할 자입니다. 그럴 바엔 깨끗이 지금 제거하시는 편이....."

"주페는 그럴 녀석이 아냐. 절대로."

"그리고 주페 태자만큼이나 위험한 오르마즈에게 북부를 그대로 차지하게 하시다니요? 저 막강한 북부를, 야심만만한 오르마즈가 차지한다면 그 역시 전하의 권위를 얼마나 위협할지 생각 못하셨습니까?"

"오르마즈는 어머니의 충신이었어."

로노 장태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중에 배신당했죠."

"흔히 그렇게들 알고있지만......난 그게 아니란 걸 잘 알아. 그 이유도......."

눈을 가늘게 뜬 로노 장태자가 굳은 얼굴의 샤자한 공을 또 한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몫'을 서부, 혹은 북부와 절대 나눠먹지 않겠다는 저 제후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샤자한 공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저도 별 수 없군요.......북부와 동부는 전통적으로 우방지간이었다는 것을 잘 아시죠?"

"이, 익......"

이를 악문 로노 장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쌀쌀맞은 표정의 샤자한 공이 말을 이었다.

"투르케스크 공 역시 딸인 오르마즈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를 원치는 않을 테니......저와는 이해가 맞아떨어지겠군요. 주페 태자를 근위대에 넘기지 않을 생각이시라면, 저희 동부는 더 이상 장태자전하를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페를 팔아 넘기지 않으면 자신을 버리고 오넬론 태자를 지원하겠다는 샤자한 공의 폭탄선언에 로노 장태자는 잠시 할 말조차 잃은 채 치를 떨고있을 따름이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제 현실적인 판단일 따름입니다."

샤자한 공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장 동부의 지지를 잃는다면 장태자의 손에는 근위대에서 귀순해 온 시로의 '아메샤 스펜타' 군단 3만 명만이 남을 뿐이었다. 절망 섞인 표정을 짓는 로노 장태자를 여유만만하게 바라보며 샤자한 공이 눈을 흘겼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동생을 버리실 겁니까? 아니면 동부를 버리실 겁니까?"

장태자는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지독할 정도의 무력함이 그의 양어깨를 엄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장태자로 태어난 사실을 생애 처음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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