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3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
.
.
남편 제롬에게 끌려 어거지로 정원에 나온 오르테 부인은 서부에서 막 도착한 셔틀 문이 열리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제롬이 부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착한 아이라구요, 당신 말도 잘 들을 거요."
"닥쳐요. 난 틀림없이 용납 못한다고 했고 어머님도 틀림없이 안된다고 하셨어요."
"참, 나, 정말 착한 애라니까요. 당신도 기왕이면 성깔 더러운 첩보다는 고분고분한 애가 있는 게......"
"지금 그걸 내 앞에서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장이라는 사람이......"
남편에게 한참 핏대를 세우려던 오르테 부인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마치 죄수처럼 끌려나오는 솔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서부식으로 넘긴 머리 위에는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의 긴 베일이 씌워져 있었고 검은 원피스 위에 긴 숄을 두른 매력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가디언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끌려나온 솔은 델루지 종가의 이 아름다운 풍광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온몸을 떨고있을 따름이었다.
솔에게 웃으면서 다가선 제롬이 짤막하게 인삿말을 던졌다.
"남부에 잘 왔다. 이제 여기가 네가 평생 살게 될 곳이다. 이쪽은 내 정실부인인....."
"얘가 왜이리 떨고있죠? 소실 감이 아니고 무슨 죄수 압송해온 꼴이군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애는 당신한테 별 관심이 없는 듯 한데요?"
오르테 부인이 남편에게 또 한번 쏘아붙였다.
"전 이 사람하고는 절대 결혼 안할 거라구요!"
솔이 가디언들에게 저항하며 악을 쓰는 모습에 오르테 부인이 남편을 살짝 흘겨보았다.
"오호, 대단하시군요. 싫다는 애 강제로 잡아다가 소실로 앉히려는 거였어요?"
셔틀에서 뤼렌 부인, 사르키스가 차례대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들을 돌아본 제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애 하나 낳으면 도망갈 생각 못하겠죠."
남편의 무책임한 한마디에 오르테 부인이 사뭇 흥분한 말투로 핏대를 올렸다.
"그러세요? 오늘 당장 잠자리라도 같이하시게요? 날 때려잡기 전까지는 당신 별채 부근엔 얼씬도 못하실 걸요? 저 애하고 합방하고 싶으면 타르서스에 계신 어머님 허락을 받아서 혼례를 올리신 후에나 하시라구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혼례를 허락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이를 어쩌죠?"
제롬이 여전히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있는 부인을 바라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형식적이나마 정실부인의 동의가 없으면 소실을 들이는 것도 그다지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쌀쌀맞게 휙 돌아선 오르테 부인은 본채 쪽으로 돌아가 버리고 있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제롬이 뤼렌 부인, 사르키스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식 올리기까지 날짜가 좀 걸릴 듯 하니......영빈관에서 편히 쉬고들 계시오."
"이런 남자 본 일 있소?"
카렐이 묵고있는 호텔에 찾아온 치안군 병사가 코리온의 얼굴을 내보이며 물었다. 여자 지배인은 병사가 내민 카드를 받아들며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휴우, 미남이네요? 누구죠? 무슨 죄라도 지었어요?"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인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이요. 유명한 유학자라는데....아마 덩치 큰 가디언과 함께 있을 거요. 죄인은 아니고.....납치되어 행방불명되어서 찾고 있는 거요."
'유학자'라는 말에 혀를 쑥 내밀었던 지배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흠, 가디언하고 함께 묵고있는 손님은......두 분 계신데.....한 분은 여자분이고 한 분은 생김새가 완전히 틀린데요?"
"아니면 가디언이란 걸 감추고 덩치 큰 남자하고 둘이 묵고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이렇게 생긴 사람 없소?"
"글쎄요, 저희 호텔은 워낙 여유있는 분들이 오시는 곳이어서......남자분들도 다들 멋쟁이시죠. 그래도 이런 분은....."
지배인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꾸했다. 병사는 지배인에게 카드를 주고 돌아서며 말했다.
"행여 그런 사람을 보거든 꼭 신고해주시오. 지금 현상금이 네 배로 뛰어서 4만 골드가 걸렸으니 잘하면 한몫 잡을 수 있을 거요. 아참, 이 사람 채식만 한다더군."
치안군들에게 받은 카드를 다시 작동시켜보며 지배인이 갑자기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고 있었다.
"채식만 한다고?"
호텔 밖으로 나가는 치안군들과 마주친 카렐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객실이 있는 9층으로 재빨리 뛰어올라갔다.
"누구냐?"
테라스에서 들려온 코리온의 목소리에 카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햇빛 좋죠?"
카렐이 커다란 장보따리를 바닥에 풀어놓으며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벽을 짚고 절룩거리며 안에 들어오는 코리온에게 카렐이 제일 먼저 내민 건 지팡이었다.
"그리고오......새 속옷하고, 얼굴에 바를 유약하고.....내가먹을 사과하고, 양고기에......어휴, 배고파."
물건들을 쏟아내 놓는 카렐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코리온이 침대에 말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카렐은 양고기를 잘근거리고 씹으며 새로 사온 십여 권의 신간 책들을 코리온에게 내밀었다. 라마단 기간 낮시간에도 생각 없이 먹어대고 있는 카렐의 모습에 코리온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돼지같이 쳐먹어대는군."
"어째 말씀하시는 게 어릴 때 페로가 나 놀리던 것하고 토씨까지 똑같으시오?"
태연하게 받아치는 카렐의 모습에 또 한번 얼굴을 찌푸린 코리온은 아예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자, 이거 받아요."
코리온의 앞에 카렐이 단검 한 개를 불쑥 내밀었다. 손가락 정도의 좁은 폭에 한 뼘 정도 길이의 예리한 날끝을 지닌 그 칼은 검이라기보다는 찌르기용의 비수에 가까운 칼이었다.
"난 싸움 같은 건 않는다."
"호신용으로 갖고있어요. 내 간단한 쓰는 법은 가르쳐 줄 테니. 초보자가 제일 쓰기 편한 스타일로 골라왔으니 만일을 대비해 하나쯤 갖고 계시구려. 이 정도면 엔간한 중갑주틈새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요."
코리온은 여전히 카렐의 뒤춤에 매달려있는 주페의 쿠크리를 문득 바라보았다.
"이거 말이요? 쿠크리는 오라버니 같은 초보자가 쓸만한 칼은 못되는데? 뭐, 나중에 헤어질 때 돌려드릴 테니 걱정 마시오. 내 설마 남의 추억어린 물건을 빼앗겠소. 자, 오른손 벌려봐요. 이렇게, 손가락을 모아서 가드에 바싹 붙여 쥐어요. 엄지손가락 앞으로 내밀어서 쥐는 녀석들도 있는데 잘못하면 손가락 끝 잘리기 십상이니 초보 때는 하지 마시구려."
카렐이 코리온의 손가락 위치 하나하나를 친절하게 잡아주며 그의 오른손에 단검을 쥐여주었다. 코리온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카렐은 그와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서서 직접 자세를 잡아주었다.
"자, 단검은 최근접전에서만 쓰는 거니까 가능하면 최대한 접근할때까지는 무기를 보이지 말고, 상대가 안심하고 바싹 오면 칼을 뽑아서 이렇게 힘껏 옆구리를 찔러요. 갑주를 입고 있는 상대는 초보자가 단검으로 상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옆구리 여기쯤에 조인트가 있을 테니까 그 틈새를 노리고. 조인트나 손바닥이 아니면 단검으로는 뚫기 어려울 거요."
카렐이 칼을 쥔 코리온의 오른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구리에 칼끝을 붙이자 조금 놀란 코리온이 문득 카렐의 눈을 올려보았다. 카렐이 씽긋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에고, 더 찌르시게요?"
카렐의 장난기에 코리온이 칼을 거두며 다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약간 틀어서 찌르면 상처가 커지고 칼을 쉽게 되뽑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글쎄요, 칼도 처음 써보는 오라버니가 할 수 있으실지는 모르겠소. 뭐, 일단 알아나 두시구려. 그리고 여기, 유약 좀 발라요. 그 뽀얗고 곱던 피부 다 망가졌지 뭐요. 쫓겨 댕기는 티 내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님께 여쭙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로노 장태자와 다시 통신을 연결한 주페가 사뭇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은 죄'가 있는 로노는 떨리고있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뭘?"
"근위대장과 무얼 약속하셨습니까?"
순간 멍해진 로노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페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질문을 이었다.
"저를 넘겨주어 근위대의 지원을 받아내신다는 약속 외에......무슨 약속을 또 하셨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모르겠구나......약속이라니......"
"근위대에 더 큰 권한을 부여한다거나, 아니면 특정지역에 특권을 부여한다던가 아니면 탄압한다는.....정치적인 합의가 있으셨습니까? 형님께 화내려는 것이 아니니 제발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다 알고있습니다."
주페의 너무도 태연자약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로노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돌아서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로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와의 공동진공계획은......"
"샤자한 공이.....북부와 서부를 저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하는구나. 나로서는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구나."
주페의 머릿속이 아찔 해왔다. 샤자한 공은 다른 지역과 수확을 나누어먹어야 하는 상황을 달갑지 않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북부와 서부를 거세하기 위해서라도 근위대와의 밀약을 택하도록 샤자한 공이 형에게 압력을 넣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겐......아무런 힘이 없다."
로노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의 가장 충성스런 지지세력이라 믿었던 근위대에게 배신을 당하고 변변한 자신의 사람이나 세력 하나 없이 어쩔수없이 동부에 기댈수밖에 없었던 '장태자'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형의 불쌍하기까지 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페가 조용히 말했다.
"약속대로.......황궁 별관에 가겠습니다."
"무, 어?"
로노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잠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냐?"
"제가 황궁에 갈 테니......절 근위대에 넘기십시오."
동생의 비장한 표정에 로노는 멍 한 얼굴로 바보같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리해서 형님이 황제가 되실 수 있다면......저를 넘기십시오."
"......"
"다만......"
주페의 마지막 말에 로노의 표정이 갑자기 긴장되었다.
"형님께서 힘을 키우셔서 어머님과 같은 제대로 된 제국의 황제가 되시기 위해서는......진정한 충신의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제가 그리하려 했지만......전 어차피 죽어 없어질 터이니......"
주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주페가 고개를 조금 떨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코리온이 제 뜻을 이어 형님을 받쳐드릴 겁니다. 저의 유지라면.......코리온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뜻을 따를 것입니다......코리온을 항상 곁에 두시고.....친자식처럼 아껴주십시오. 그 애라면......형님이 동부와 근위대에 휘둘리지 않고 황제다운 황제가 되실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되어줄 겁니다."
할 말을 잃은 로노는 주페의 마지막 '협상조건'을 조용히 듣고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흐뜨러진 제국을 수습하고 장기적으로 근위대를 형님 것으로 삼기 위한 10가지 방안을 알려드릴 터이니......그것들을 윰 포고령에 반드시 반영시켜 주십시오. 이 두 가지만 지켜주신다면.......기꺼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로노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주페의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금 떨어진 호텔 정원에서 바닷바람을 쐬며 초저녁부터 자고 있는 카렐을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며 코리온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늘밤 자신을 이곳에 놔두고 혼자 델루지 가 영지로 가겠다고 말하던 카렐에게 그냥 함께 있자는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적지 않은 돈과 며칠간 갈아입을 속옷, 읽을 책들, 심지어 심심할 때 쓰라며 붓과 종이, 벼루, 먹까지 꼼꼼하게 챙겨준 카렐이었지만 코리온은 그의 가슴에서 내내 빛나고있던 고급스러워 보이던 브로우치가 외출 이후로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후,"
다시 객실로 돌아온 코리온은 바닥에 펼쳐놓은 흰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도 글쓰기를 좋아하던 자신이 근 며칠간 단 한번도 붓을 잡아본 일이 없었다. 코리온은 그런 자신의 심정을 귀신같이 알아서 챙겨준 저 눈치 빠른 사촌누이에게 그답지 않은 고마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손에 익은 붓이 아닌 것이 영 신경에 쓰이고 있었지만 연습 겸해서 몇 글자 써보는 정도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붓을 집어든 코리온은 몇 글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들긴 건 그때였다.
"누군가?"
글쓰기를 방해당한 코리온이 대뜸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저녁식사입니다."
얼굴을 찌푸린 코리온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잠갔던 문을 연 코리온은 객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목욕중이니 놓고 나가라."
욕실 문 틈새로 눈을 조금 내놓았던 코리온은 메이드가 식탁을 가져와 차려놓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안심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코리온은 메이드 뒤를 따라 들어온 또 한사람의 모습에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어제 자신을 유난히 관심 깊게 바라보던 그 지배인이 식탁을 차리던 메이드를 따라들어와 무어라 귀엣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메이드가 큰 소리로 물었다.
"채식만 하신다고 하셨죠?"
"아침에도 왔다가지 않았느냐."
물을 더 세게 튼 코리온이 짐짓 태연하게 두리뭉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부인께선 지금 안 계신 모양이시죠? 어디계신지 말씀주시면 들어오시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책 나갔으니 곧 돌아올 거다. 준비 끝났으면 나가거라."
코리온이 메이드의 과잉친절에 잔뜩 긴장의 끈을 잡아당기며 대꾸했다. 메이드와 함께 들어왔던 지배인은 쓰다 만 코리온의 글씨와 침대맡의 책들을 보며 놀란 얼굴로 방 안을 계속 두리번거리더니 메이드를 따라 마지못해 방을 나서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나온 코리온은 급히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라면 저 지배인의 행동은 어딘가 수상쩍었다.
"과민반응이었나....."
코리온은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선선한 밤바닷바람이 느껴져오는 모래사장에서 카렐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안심하며 뒤로 돌아서려던 코리온은 호텔 입구에 서서 이쪽을 올려보고 있는 지배인의 모습에 순간 깜짝 놀라고 있었다.
재빨리 몸을 숨긴 코리온은 호텔 안으로 들어온 차 안에서 이십여 명의 치안군들의 내려서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지배인은 그들에게 무어라 말하며 호텔 안쪽을 가리켰다.
"이, 이런,"
짐가방을 챙겨든 코리온은 서둘러 망토를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구석진 계단으로 들어선 코리온의 머릿속에 카렐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할룩스를 꺼내 쥔 코리온은 이 원수를 함께 데리고 갈 것인지, 저대로 남부녀석들에게 잡혀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에 휩싸였다.
호텔 정원에서 밤바람을 쐬며 자고있던 카렐은 할룩스가 울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챈 것 같다. 달아나는 게 좋겠다."
코리온의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카렐이 허둥지둥 호텔 건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 지금 어디십니까?"
"동쪽 끝 계단이다. 걸어 내려가는 중이다. 지금 8층이다."
계단을 힘겹게 걸어내려오는지 코리온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가방은 무거우니 계단실 밖으로 던지십시오! 제가 모시러 갈 테니 움직이지 마시구요!"
위를 올려본 카렐은 창 밖으로 비죽이 나온 가방을 올려보았다. 카렐이 시킨 대로 창밖으로 내던진 가방이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방을 받아 구석에 치워놓은 카렐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잽싸게 벽을 박차고 올라 2층의 열려있는 창으로 아무 곳이나 몸을 던져 넣었다.
"이, 익......"
고통이 엄습해오는 허벅지를 꽉 움켜쥐며 코리온이 힙겹계 6층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가방을 내던진 덕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치안군들은 이미 객실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위층에서 웬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계단 하나씩 위아래에서 훑어! 1층 엘리베이터마다 2명씩 배치하고! 3분대는 외부를 폐쇄해! 빨리빨리!"
위에서 달려 내려오는 발소리에 걸음을 재촉하던 코리온은 하마터면 계단에서 중심을 잃을 뻔하고 말았다. 난간을 붙들고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코리온은 일단 5층 객실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어디 계십니까?"
할룩스에서 울려온 카렐의 다급한 목소리에 코리온이 겨우 대답했다.
"5층이다. 계단실에 병사들이 있어서 빠져나왔다."
"잘하셨습니다! 중앙의 보이드계단으로 한층만 내려오십시오! 계단 옆에 큰 바가 있을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십시오! 사람이 북적거리니 잠시 눈을 피할 수 있을겁니다!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눈치를 살피며 한 층을 내려온 코리온은 저녁시간을 맞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 바 안으로 사람들에 휩쓸려 함께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족이 3백여 명은 넘을 손님들과 종업원들이 뒤엉켜 술과 춤, 퇴폐적인 쇼로 한바탕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게......"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이런 곳을 마주한 코리온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구석에 뒷걸음질치던 코리온은 테이블에서 한참 뜨겁게 입맞춤과 애무를 나누고 있던 한 커플을 깔아뭉갤 뻔하고 말았다.
"술은요?"
몇 종류의 술이 담긴 수레를 밀고 온 반나의 여종업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코리온에게 대뜸 물어왔다. 얼굴을 조금 찡그린 코리온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필요 없소."
"한잔 이상은 사셔야 돼요. 미남이시라고 봐주는 거 없어요."
종업원이 코리온에게 끈적한 눈길을 보내며 망토를 끌러 내리고 그의 귀밑에 코를 들이댔다.
"어머나? 이분......."
코리온의 귀밑에 있는 마름모꼴 황족문을 본 종업원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 1골드를 주고 술 한 병을 빼앗듯이 집어든 코리온이 지팡이에 기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몇 여자들과 남자들, 종업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노골적으로 유혹의 눈길을 던졌지만 자신이 그리도 혐오하던 '방탕'의 현장 한가운데에 얼떨결에 서 버린 코리온은 아무 정신도 없었다.
결국 제일 안쪽 어두운 모퉁이에 기대 선 코리온은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긴장과 놀라움, 그리고 지독한 혐오로 세차게 헐떡거리고 있는 가슴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고함소리들에 머릿속이 깨질 것 같았다.
"헉,"
누군가 어깨를 부딪혀오는 느낌에 코리온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옆의 코리온에게 씨익 웃어 보인 웬 여자가 벽에 기대 선 채 마주서있던 남자와 몸을 바싹 맞대고 낯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자극적인 신음소리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 코리온이 다시 자리를 옮기려는 때, 바 출입문 쪽에서 번쩍이는 투구를 쓴 두 사람이 불쑥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치안군 병사들임을 깨달은 코리온은 그만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코리온이 얼른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참 신나게 놀고있는 사람들 중간에서 망토를 어깨에 걸친 채 쑥맥처럼 멍 하니 서 있는 코리온의 모습은 누가보기에도 눈에 확 띄고 있었다. 자신의 큰 키를 직감한 코리온이 망토를 벗으며 급히 무릎을 조금 낮추었다. 두 명의 치안군들은 흩어져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세요? 이렇게 귀하신 분이 저희 업소에 오시다니......"
하필 이 순간 눈치 없이 코리온의 앞에 불쑥 나타난 건 방금 전의 종업원이었다. 코리온은 차마 그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 당혹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남의 남자 손대면 죽어."
종업원을 거칠게 밀어내고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에 코리온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코리온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카렐의 모습에 너무나 안도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능청스럽게 코리온의 어깨를 감싸안은 카렐은 바 한쪽의 구석진 창문으로 향했다.
"이 정도에 놀라시면 북부 환락컴플렉스라도 가신다면 까무러치시겠소?"
종업원을 쫓아낸 카렐은 코리온의 손을 붙들고 사람들을 헤치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젠장할."
2명의 치안군 병사들이 더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코리온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시 바 안 깊숙이 들어온 카렐은 창을 열고 바깥을 힐끗 내다보았다. 병사 한 명이 호텔 뒤쪽 외벽에 기대 선 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도 없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밑에서 받아줄 테니 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미쳤군, 4층에서?"
코리온이 황당한 표정으로 카렐을 다시 노려보았다.
"지난번 라호르의 호텔에선 5층에서도 뛰었수."
카렐은 코리온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거리낌없이 4층의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놀란 코리온이 밖을 쳐다보았을 때 바닥에 이미 사뿐히 착지한 카렐은 순찰하던 치안군 병사의 뒷덜미를 덮치고 있었다.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병사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창 밑으로 달려온 카렐이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손에 쥐며 빨리 뛰어내리라 손짓을 보냈다.
"저, 저기요!"
바 안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머뭇거리던 코리온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그 여종업원이 두 명의 치안군 병사들에게 코리온을 손짓해 가리키고 있었다. 저 망할 종업원이 그새 신고한 모양이었다.
"코리온 리쿠 대군마마십니까?"
치안군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코리온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들었다. 이젠 이 4층 높이의 까마득한 창문에서 카렐을 믿고 뛰어내리느냐, 아니면 저들에게 잡히느냐의 문제가 걸려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