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64화 (263/1,132)

< -- 264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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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선 카렐이 머뭇거리는 코리온에게 빨리 뛰어내리라 급한 손짓을 보냈다. 결국 결심을 굳힌 코리온은 두 눈을 꽉 감으며 창 밖으로 무작정 몸을 내밀었다.

"잡아!"

날랜 병사 한 명이 대뜸 몸을 날려 막 뛰어내리려는 코리온의 팔목을 덥석 붙들었다.

"놓지 못하나!"

창틀을 결사적으로 움켜쥔 코리온이 발목을 쥔 병사를 힘껏 차내며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뒤이어 달려온 다른 병사가 코리온의 목을 거칠게 잡아채 안으로 잡아당겼다. 두 명이나 되는 병사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던 코리온은 또 한 명이 다시 달려들면서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마마십니까?"

뒤늦게 달려온 분대장이 코리온의 얼굴에 불을 들이대며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렸다. 그의 얼굴과 귀밑의 선명한 마름모꼴 황족문을 확인한 분대장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찾았다!"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보던 카렐은 코리온이 목이 붙들린 채 다시 끌려들어가는 모습에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썅, 저 답답한 서생 같으니!"

카렐이 입으로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사실 4층 높이에서 엔간한 사람이 갈등조차 없이 무작정 뛰어내리기를 요구한 것 자체가 조금 무리였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망토로 급히 몸을 숨긴 카렐은 감춰두었던 가방을 급히 차에 싣고 호텔 입구 쪽으로 향했다. 한참 소란스럽던 호텔 입구 부근에 차를 숨긴 카렐은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코리온이 끌려나오는 모습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를 태운 치안군 차량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카렐도 급히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코리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예리반 주까지 서둘러 달려온 베흔은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는 순간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지금......뭐라고 그랬지?"

베흔과, 함께 오던 헤즈 사령관은 지사 대행을 하고있던 2기사단장 릴라크 예리노프 경의 뜻밖의 한마디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같이 있는 그 망할 놈이 고급가디언이란 걸 왜 안 알려주셨냐구요!"

릴라크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자신의 아주버님이기도 한 헤즈 사령관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탈라스의 플라칼 가 선발대장직을 정리하고 바로 며칠 전 휴가를 얻어 돌아온 릴라크는 구릿빛으로 탄 날카로운 얼굴을 계속 씰룩거리고 있었다.

"호송하던 치안군 병사 6명이 싹 몰살당했단 말입니다!"

"그럼 놓쳤단 말인가!"

"모르죠, 어디 가서 뒈졌는지."

특유의 독설을 내뱉은 릴라크가 휙 돌아서며 피와 시체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차 사진을 휙 내던졌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본 베흔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호송하다가 적 기습을 가장해서 학장까지 죽여버리라고 하지 않았었나?"

"몰라요, 분대장 놈한테 학장을 죽이라고 비밀지시를 내려놨었는데 그놈까지 죽어버렸으니 알 게 뭐냐구요."

"그럼 학장 생사도 모른다는 거군?"

"제가 병사들 데리고 갔을 때는 이미 이지경이 되어있었다구요."

릴라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베흔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학장하고 함께 있던 녀석 신분은 밝혀졌나?"

"그게......"

릴라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지하게 큰 키에 회색눈, 갈색머리에 걸걸한 목소리를 한 미녀라고 하는데......도대체.....블리크 시어리라는 북부출신 하급귀족이랍니다."

"무, 무어?"

순간 경악한 베흔이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지금.....회색눈에 갈색머리에......큰 키라고!"

지금껏 자신이 전혀 엉뚱한 예상을 해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베흔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짐승 소리를 낸다는 괴상한 '눈괴물'의 정체는 자신이 그리도 미워하는 그 망할 가디언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그 일대 폐쇄하고 수배령 내려놨으니 시체가 나오던 살아서 튀어나오던 하겠죠."

무어라 한마디 더 하려던 릴라크의 입을 베흔이 급히 틀어막았다. 사색이 다 되어 뛰쳐들어온 레곤 대공주는 이들의 옆에 놓여있는 끔찍한 '현장 사진'에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코리온은! 코리온은 어떻게 된 건가!"

"모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망할 녀석이 호위하던 병사 6명까지 모두 죽이고 학장님을 다시 납치해간 모양입니다."

헤즈 사령관이 사진을 얼른 치우며 민망한 표정으로 둘러대고 있었다. 대공주를 뒤따라 들어온 샤드니는 사뭇 의심섞인 표정으로 베흔을 째려보았다. 녀석의 속셈이 어차피 납치인질극을 가장해 코리온을 죽이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코리온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고 호들갑을 떨다가 어느 순간 '납치범의 소행'이라며 코리온의 시체를 공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심 카렐이 선전해서 코리온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샤드니로서는 이것이 좋아해야 되는 사건인지, 아닌지, 정말로 습격을 당하기나 했던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대공주저하, 학장님은 명민하신 분이시니 틀림없이 아직 살아 계실 겁니다."

샤드니가 울고있는 대공주의 팔을 붙들며 사뭇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대공주는 그의 팔을 거칠게 뿌리쳐 버렸다.

우산을 들고 나온 집사가 차 문을 열어주자 릴라크가 옷에 행여 빗물이 튈까 조심조심 차에서 내려섰다. 전장에서 입던 기사단장의 갑주와 무기를 벗어놓은 릴라크는 남부 제2제후가의 종가 며느리이며 이곳 예리반 대륙을 책임지고 있는 세련된 귀부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는 가끔 내리치는 천둥번개와 함께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사를 동반한 릴라크는 검푸른 숲 한가운데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세련된 저택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사님께 별다른 연락 없었나?"

흰 드레스와 여우털 케이프로 한껏 멋을 낸 릴라크가 망토를 받아주는 집사에게 사뭇 사무적으로 물었다.

"손님접대에 각별히 신경 쓰시라는 말씀밖에는 없으셨습니다."

"알았다."

릴라크는 집사 뒤에  서있던 유모의 팔에서 한참 칭얼대고있던 아기를 받아들었다. 아기가 어머니인 릴라크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어대고 있자 유모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껏 잘 노셨습니다. 졸려서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재워드리겠습니다."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왔는데 재롱은 못 피울망정 울어대고나 있다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릴라크는 아기를 유모의 품에 돌려주었다. 육아실로 돌아가는 유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릴라크가 다시 집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은?"

"3층 서쪽 침실에 계십니다. 30분 전 의사가 다녀갔습니다."

"상태가 어떻다지?"

"비교적 양호하시다고 합니다. 상처처리도 놀랄 정도로 잘 되어있고.....긴장과 피로 때문에 체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신 것 빼고는 괜찮다고 합니다. 며칠만 쉬시면 괜찮아질 것이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릴라크는 즉시 3층으로 향했다. 3층의 제일 구석진 침실 앞을 지키던 두 명의 가디언이 릴라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릴라크는 화려한 침실 중앙에 놓인 큰 침대로 다가갔다.

두툼한 비단이불을 덮고 누운 채 빗물이 흘러내리는 큰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코리온은 그에게 형식적인 눈길을 한 번 주었을 따름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도대체 알 수 없이 행동하는 게 플라칼 가문이군."

릴라크의 물음에 코리온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플라칼 가문이라 하지 마시고 제 남편 루시도프라고 해 두죠."

"남극성당 교리 출신. 중도파 유학자."

"그래도 학장님을 정말로 열렬히 존경하죠. 서부하고 매번 아웅다웅대는 집안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원리주의 쪽으로 갔을 사람이죠. 제게 행여 학장님을 잡더라도 절대 가문에 넘기지 말고 빼돌리라고 먼저 말한 게 그이니까. 뭐 사실 천사표가 따로 없는 남자죠."

신발과 케이프를 벗어놓은 릴라크는 거리낌없이 침대 위로 올라와 코리온의 옆자리에 파고들었다. 순간 당혹한 코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릴라크가 그를 거칠게 내리눌렀다. 베테랑 무장인 릴라크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한 코리온은 목이 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따름이었다.

"안전하게 쉴 공간과 이 편안한 잠자리를 누가 드렸죠?"

씨익 웃어보인 릴라크가 코리온의 목을 쥐고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이 키 큰 유학자의 곁에 비스듬히 누운 릴라크가 그의 몸을 연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일 남편이 올 겁니다. 그러면 그이 셔틀로 아켐으로 돌아가시면 되죠. 그러면 만사 조용히 마무리되는 거지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코리온은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고 있는 릴라크를 그대로 가로막았다.

"정중히 부탁하는데 침대에서 나가주겠나?"

"글쎄요, 나갈까요? 말까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코리온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고 있는 릴라크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코리온의 손을 홱 떨궈내며 릴라크가 중얼거렸다.

"후훗, 두 시간 전에 제가 저지른 짓을 보셨을텐데요? 언제든.....맘만 먹으면 당신을 시체로 만들어서 숲에 내다버리고 납치범 손에 죽었다고 뒤집어 씌워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아시겠죠?"

"내가 그까짓 것으로 겁먹을 줄 알았다니,"

코리온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깔깔대고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선 릴라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오죠. 그때는 마음이 변해있으시길 바라죠. 내일 아침엔 당신 곁에서 눈을 뜨고 싶군요."

되돌아나가는 릴라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누워있던 코리온은 고작 저런 여인의 농락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스스로의 신세에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컴컴한 숲을 가로질러 빠르게 걷고 있는 키 큰 사람의 입에서 입김이 거칠게 뿜어 나왔다. 뒤집어쓰고 있는 회색빛 망토에서도 체온 때문인지 하얀 수증기가 보일 듯 말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벼락맞아죽을라."

또 한번 내리친 번개에 카렐이 움찔 하며 투덜거렸다.

호텔에서 치안군들에게 잡힌 코리온을 쫓아 미행해온 카렐은 릴라크와 그가 이끄는 3명의 가디언들이 6명의 치안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잡아죽이는 광경을 멀리서 똑똑히 목격하고 난 후였다. 그때 거의 코리온을 구할 뻔했다가 놓친 카렐은 결국 이렇게 릴라크의 저택까지 찾아오는 생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뭔 놈의 집이 이런 데 있냐."

카렐이 숨을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흑림'으로 잘 알려진 이 망할 놈의 빽빽한 숲은 차를 타고는 도저히 지날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을 뿐더러 단 하나 뚫려있는 도로로 '나 보아줍쇼'하고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도 이래저래 바보짓이었다. 도로 입구의 첫 검문소 부근에 차를 세워놓은 카렐은 지금까지 무려 3시간째 이 어두컴컴한 숲을 정신없이 걸어오고 있던 참이었다. 날은 어두워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기온까지 쌀쌀해지고 있었지만 얼음물처럼 차가운 폭우는 멎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

"저긴가,"

멀찍이 보이는 불빛에 카렐이 몸을 조금 움츠렸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3층 정도의 꽤 화려한 남부풍 저택이 폭우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제길, 살아나 있으려나,"

몸을 숨긴 채 저택을 바라보며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코리온을 납치한 차가 들어간 곳이 이곳이었으니 찾아볼 만한 곳은 당장은 저기밖에 없었다. 카렐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며 몸을 낮추었다.

"근데......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거지?"

카렐은 주페 태자의 쿠크리를 바라보며 갑자기 새삼스러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침실에 말없이 누워있던 코리온은 여전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식사라며 나왔던 음식들은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채 옆에 치워져 있었다. 쫓기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편안하고 고급스런 잠자리에 누워있었지만 그는 이곳의 자신의 존재에서 어딘지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폭우가 몰아치는 바깥의 저 사나운 날씨에 비하면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이 침실 안은 천국이 따로 없었지만 코리온에게는 이마저도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왔다.

"휴,"

몸을 일으킨 코리온은 침대맡에 세워져있던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릴라크가 온다는 시간은 이제 겨우 한시간 남아있었다.

"녀석은 잘 도망갔으려나......"

코리온은 자기도모르게 카렐 걱정을 하고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창가에 선 그는 유리창과, 그 밖에 쳐진 단단한 철창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직 자유의 몸이 아님을 새삼스레 다시 느끼고 있었다. 코리온은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서 몰려들어오는 차고 거친 바람에 그의 긴 머리칼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멍 하니 바깥을 내다보던 코리온은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세상에, 여기 계셨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밑에서 올라온 웬 큰 손이 철창을 확 움켜잡자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네 놈......"

"무사하신가 확인하러 왔습니다."

찬비에 흠뻑 젖은 카렐이 철창 틈새로 눈을 들이밀며 말했다. 카렐은 건물 뒤쪽의 3층 창문 난간에 한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카렐의 집요함에 코리온은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보이시는군요.......드레싱도 새로 하셨고. 방도 따뜻하군요. 응? 먹을 것도 있군요? 어찌된 겁니까? 릴라크 경이 죽이려는 줄 알았더니."

카렐이 웃옷을 벗고있던 코리온의 가슴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코리온이 짐짓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곧 여길 나가게 될 거다."

"......잘됐군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카렐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찬 빗물을 훔쳐냈다. 꽤나 추운지 그의 입으로 하얀 입김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제 도움은 필요 없으시겠군요......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참, 칼은 아직 필요한 듯 하니 나중에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죠. 여기까지 확인하러 찾아온 성의를 봐서 웬만하면 신고는 말아주시구려."

눈가의 빗물을 털어낸 카렐이 내려가기 위해 밑을 내려보았다. 그런 카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코리온이 안 열리는 입을 겨우 움직여 말을 꺼냈다.

"자, 잠깐....."

"예?"

"날......여기서 데리고 나갈 수 있겠나?"

떨리고 있는 코리온의 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렐이 결국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거 벌려드릴 테니 제 등에 업히십시오."

잔뜩 기대를 안은 채 3층 서쪽 침실로 향하고 있는 릴라크는 기분이 꽤나 좋은 상태였다. 문을 홱 열고 안에 들어선 릴라크는 침대에서 코리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절 기습이라도 하시려구요? 제가 기사단장이란 걸 잊으셨나요?"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릴라크는 침대 밑과 벽 틈새, 벽장까지 속속들이 뒤졌지만 코리온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놀란 시선이 창문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건......"

무언가 강력한 기계라도 동원한 듯 크게 벌어져있는 쇠창살을 발견한 릴라크는 대뜸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가디언의 멱살을 움켜쥐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 도망갔잖아! 빨리 찾아내! 찾아내란 말이다!"

"비는 안 들어가죠?"

카렐이 등에 업힌 코리온에게 물었다.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발이 자꾸 미끄러지고 있었지만 이런 깊은 숲 속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코리온에게 칠흑같이 어두운데다가 비까지 쏟아지는 이런 곳에서 지팡이를 짚고 자신을 따라오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등에 업고 그 위에 망토를 덮은 카렐은 비가 코리온에게까지 들이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기랄, 썩을 놈의 비 같으니."

올 때만 해도 시냇물이던 곳이 어느새 세찬 급류로 변해 있는 건 다반사였고 어떤 곳은 당장이라도 사태가 일어날 듯 위태로운 곳도 있었다. 코리온을 앞에 안은 채 허리까지 빠지는 급류를 가까스로 건넌 카렐은 한쪽의 바위 두 개 틈새에 만들어진 좁은 공간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올라갔다. 두 명 들어가기는 좁았지만 한 명이 비 피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잠깐만 앉아 계시오."

코리온에게 망토를 벗어 덮어준 카렐은 갑자기 옆에 서 있는 큰 잣나무에 기어올라  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힘에 몇 개의 약한 가지들이 동강나기는 했지만 나무에 달려있던 거무스름한 덩어리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다시 나무에서 뛰어내린 카렐은 떨어진 덩어리들을 주워 품에 끌어안고 돌아와 구멍 앞에 비를 맞으며 쭈그려 앉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이거라도 드시오. 아직 썩지는 않았군요. 지방이 많아서 추운 때는 제격일겁니다."

잣나무 열매를 깨물어 몇 개의 잣알을 벗겨낸 카렐은 그것들을 안쪽의 코리온에게 내밀었다. 잣을 말없이 받아든 코리온은 먹지도 않은 채 그 노란 알갱이를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가죠."

코리온을 다시 등에 업은 카렐은 한쪽 손과 이로 여전히 잣을 까며 걸음을 재촉했다. 찬비와 추위 때문인지 코리온이 심하게 떨고있었다.

카렐은 코리온이 그 따뜻하고 편안한 침실과 손쉬운 탈출로를 놔두고 왜 위험한 이 길을 따라나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묻고싶지 않았다.

카렐은 새로 깐 잣 20여 알을 다시 코리온에게 넘겨주었다. 잣을 바라보던 코리온이 낮게 물었다.

"넌?"

"나 육식동물인 거 모르셨소? 근데, 릴라크 경이 오라버니를 뭐 하러 납치한 거요?"

"내게 음탕한 짓을 하려 하더군."

마땅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이 '철천지원수'가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코리온은 결국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이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푸하하!"

카렐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시었소? 잘못하면 평생 지켜온 동정......흠, 표현이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소만, 뭐, 적당한 단어가 없으니......여자하고의 동정을 잃을 뻔했지 뭐요?"

카렐이 추위에 떨고있는 코리온을 바싹 추켜올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잠시 카렐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있던 코리온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동정? 내 언제 여자와 한번도 살을 섞은 일이 없다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순간 깜짝 놀란 카렐이 자리에 우뚝 멈춰서며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카렐이 알기로도 코리온은 세간에는 틀림없이 숫총각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고, '여자'를 사귀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뭔 소리요?"

"원리주의 유학자가 된 이후로 여자를 멀리했을 따름이다."

처음으로 듣는 코리온의 '비밀아닌 비밀'에 카렐이 땅이 떠나가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사촌남매는 하늘을 찢을 듯 쏟아지는 비를 뚫고 어두운 숲을 걸으며 처음으로 그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몇 살 때였던 거요?"

"16살."

코리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훗, 그 나이에 재주도 좋으셨구려."

"재주? 도적에게 붙잡혀 북부 매음굴에 팔려가는 데 반반한 외모 말고 별다른 재주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

코리온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또다시 자리에 우뚝 멈춰선 카렐이 웃음을 멈추고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너도 잘 알텐데?"

코리온의 대답에 침을 꿀꺽 삼킨 카렐은 마지못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기......얼마나 있었던 거요?"

여전히 몸을 떨고있던 코리온이 카렐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3년."

코리온이 한때 북부의 사창가에서 윤락부로 있었다는,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카렐은 마땅히 달래줄 말조차 잊은 채 그냥 걸음만을 옮길 뿐이었다.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 겨우 돌아온 나를 거두어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분이 주페 태자저하셨다."

코리온의 꺼질 듯한 한숨이 카렐의 등에 느껴져 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코리온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도저히 끝이라고는 없을 듯 싶어 보이던 이 깊고 어두운 숲 너머 희미하나마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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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출판 경과>

표지작업 : 표지안 확정. 시범출력까지 완료

조판안 : 확정

원고작업 : 75% 정도 완료

인쇄소에 원고 인계는 다음주 수요일 정도 예정. (이번 주말에는 광필모드로!!!)

예약게시판 http://vein.zi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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