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66화 (265/1,132)

< -- 266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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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 화물셔틀의 철창에 짐승처럼 실려 황제령으로 향하던 제네르는 이미 반쯤 탈진해버린 상태였다. 무려 5일 동안 갇혀있던 사막의 동굴에서 끌려나와 근위대에 인계된 제네르는 지부에서 곧바로 '중앙본부 호송'을 판정받은 후였다. 그곳 유치장에서 '황궁 지하의 무시무시한 고문실'에 관해 무슨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처럼 떠들어대는 말많은 근위대 유치장 경비병녀석에게 갖은 끔찍한 소리를 다 듣고 난 제네르는 이제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져있었다.

"잡혀갈 땐 잡혀가더라도......내 혐의라도 알려주시오. 내가 도대체 왜 근위대에 잡혀가야 하는지,"

제네르가 죄수를 확인하러 온 호송병에게 쥐어 짜내듯 물었다. 파일을 뒤적거린 병사가 건성 대답했다.

"너?......아무 것도 안 써있는데? 가거든 심문관한테 물어봐. 거의 다 왔어. 조금 있으면 도착할거야."

머릿속이 멍해진 제네르는 철창 안에 맥없이 누운 채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감각도 잃은 채 꿈결과 현실을 오가던 제네르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요란스런 고함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나와!"

셔틀 화물칸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근위대 병사가 뛰쳐 들어와 철창문을 열었다. 그들의 손에 붙들려 화물셔틀 밖으로 거칠게 끌려나간 제네르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100층'이라고 쓰여진 이 거대한 주기장 창 밖으로 그림에서나 본 적 있는 몇 개의 별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제네르는 말로만 듣던 '황궁'이란 곳에 자신이 도착해 있음을 깨달았다.

제네르를 끌어낸 병사들은 주기장을 나와 호젓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무시무시한 고문실'에 끌려간다고 생각한 제네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이봐! 이봐!"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제네르를 끌고 가던 호송병사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그 장교는 호송병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유리방입니다."

"잠깐, 변경됐어, 새로 올 '귀빈'들이 많아서 말이야......지하 9층부터 12층까지 모두 비워두랬어."

"누가 오길래 그 많은 방을 다 비워둡니까?"

"내 아나. 지금 갑자기 지시가 떨어져서 나도 정신없어. 이놈이......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제기랄, 완전히 쫄따구 아냐?"

"그럼 도대체 어딜 갑니까? 오늘 저희가 받을 놈들이 스무 명이 넘는데."

벌벌 떨고있던 제네르는 이곳에서 무언가 '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바깥을 내다본 제네르는 건너편 황궁 북쪽 별관의 78층 옥상에 어딘지 눈에 익은 셔틀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마민족 특유의 좋은 시력을 최대한 동원해 그곳을 뚫어지게 살펴보던 제네르는 그것이 주페가 가끔 빌려타고 다니던 파예드 아카데미 셔틀이라는 것을, 그리고 함께 있는 것은 다름아닌 로노 장태자의 개인셔틀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있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제네르의 턱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영빈관 꼭대기층 수용밀실도 3개 비워두랬으니까 그쪽도 얼씬하지 마. VIP들 가실 모양이야. 너흰......서쪽별관 본부 지하 임시유치장으로 가. 잡범들 그쪽으로 몰아놓으라고 지시할 테니까."

"그 먼 데까지 말입니까?"

잔뜩 불만 섞인 표정을 지은 병사들은 방향을 틀어 보통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서쪽 별관'을 외쳤다. 이제 제네르의 걱정은 자신이 어떻게 되느냐에 있지 않았다. 별관과 연결된 브리지 밑을 내려다보던 제네르는 주페와 로노가 있을 북쪽의 별관으로 몰려가고 있는 거의 수백여 명의 근위대 병사들을 바라보며 또 한번 경악하고 있었다.

"뭘 봐!"

호송병이 제네르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계획 때문에 제대로 된 '호송로'가 아닌, 민간인들도 함께 이용하는 보통의 복도를 통해 죄수를 호송해야 하는 이들 호송병들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병사들이 제네르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빨리 따라와!"

근위대에 다른 볼일로 찾아온 민간인들은 검은색 무명포와 학표가 그려진 머플러를 두른 '생도'가 근위대원의 손에 끌려가고 있는, 그 보기 드문 희한한 광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켜! 비키란 말이야!"

복도가 만나는 곳에서 갑자기 앞에 몰려나온 민간인에 병사들이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호송병 중 한 명이 제네르의 팔을 놓고 그 민간인들을 옆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눈치만 살피던 제네르가 한쪽 발로 바로 옆 호송병의 오금을 꽉 내리찍은 건 그때였다.

"이쿠!"

순간 무릎이 꺾인 병사가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뭐, 뭐야!"

민간인을 밀쳐내던 병사가 급히 팔을 뻗어 제네르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한손에 수갑을 찬 제네르는 잽싸게 온 길을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잡아! 잡으란 말이야!"

병사들의 고함에 제네르를 가로막으려던 민간인들은 그가 입고있는 무명포와 머플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며 물러나고 있었다. 제네르는 막 문이 닫히려던 브리지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제네르를 뒤쫓던 호송병이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문이 닫혀버린 후였다.

"북쪽 별관! 옥상!"

방금 전 호송병들이 엘리베이터에 지시를 내리던 것을 머리에 떠올린 제네르가 센서에 대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제네르를 실은 발판은 브리지를 통해 그 '문제의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브리지 밑으로 내려다본 '북쪽 별관' 밑의 근위대 병사는 족히 1천 명은 넘어 보였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제네르는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뭐냐!"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팔에 수갑을 찬 채 뛰어내리는 제네르의 모습에 대뜸 칼을 뽑아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 도대체 뭐야!"

병사들에 빙 둘러싸인 채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살핀 제네르는 그들이 동부 전우들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로노 장태자를 호위하고 온 동부 병사들임에 틀림없었다.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그, 클라투스 가 근위기병대 중장기병 제2중대 소속이고 군번 83976-1364입니다! 긴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네르가 소속과 신분을 밝히자 그제서야 칼을 거둔 그들은 여전히 의심스런 눈으로 제네르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제네르의 신분을 검색한 병사가 지휘관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다만......파예드 아카데미 진학으로 현재 휴직중입니다."

"제발! 주페 태자저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 계신 걸 알고있습니다! 제 담당교수님이십니다!"

"불가능하다."

지휘관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순간 분통이 터진 제네르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저 밑에 근위대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자그마치....."

"뭔가?"

소란에 놀라 달려온 시로가 손목에 수갑을 맨 황당한 몰골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제네르를 힐끗 돌아보았다. 제네르가 그의 발목을 붙들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주페 태자저하의 문하생도 제네르 하크로딘입니다! 저 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발! 주페 태자저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제 이름을 대시면 틀림없이 아실 겁니다!"

이 낯선 생도의 거의 발악하는 듯한 태도에 놀란 시로가 급히 어디론가로 연락을 취해보고 있었다. 제네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따라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린 시로는 제네르를 이끌고 아래층으로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꽤 많은 로노의 호위병들이 이 북쪽 별관 구석구석을 채우고 서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주페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로는 한쪽의 큰 밀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안에서 들려온 다정한 목소리에 제네르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하고 말았다. 형인 로노 장태자, 동생인 타니토 공주와 나란히 서 있던 주페는 오랜만에 본 제네르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왜 여기 있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주페에게 제네르가 숨을 헐떡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태자저하! 무언가 음모가 있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지금 밑에 근위대 병사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알고있네."

주페가 놀랄 만큼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난 오늘 근위대에 넘겨질걸세."

주페 태자의 황당하기까지 한 대답에 제네르는 멍한 표정으로 로노 장태자를 올려보았다. 한때 자신이 그리도 지지했던 그의 이 추악한 모습에 제네르의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씩 분노로 일그러들어가고 있었다. 로노가 민망한 표정으로 옆으로 돌아섰다.

"설마......장태자전하께서......"

"시로 대장. 내 문하생 제네르의 수갑을 풀어주겠나? 근위대에 쫓길 짓을 한 인물이 아니니......일단 자네들이 좀 챙겨주게나."

주페의 지시에 시로가 제네르의 손목에 매여있던 수갑을 도끼로 찍어내 주었다. 하지만 절망섞인 표정을 짓고있던 제네르는 한때 자신이 충성을 바치던 '장태자'의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에 넋을 놓은 채 서 있을 따름이었다.

"증인이 한 명 늘었군요. 형님. 근위대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전 그럼 내려가겠습니다."

"태자저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네르가 막 방에서 나가려는 주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비키게. 하크로딘 생도. 나 하나 희생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 때, 호송병과 장교의 대화를 떠올린 제네르는 자신을 밀치고 나가려는 주페의 옷자락을 붙들며 갑자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 이건 함정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을 모두 잡으려는 함정이란 말씀입니다! 주페 태자저하 한 분을 잡아서 끝날 상황이 아닙니다!

주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네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지하 9층부터 12층이 모두 비워져있답니다! 영빈관 꼭대기층 밀실 3개를 비워놓으라는 특명도 내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페 태자저하 한 분만을 잡는다면 이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인가?"

갑자기 표정이 굳어져버린 주페가 놀란 얼굴로 제네르를 바라보았다.

"제 귀로 근위대 장교에게서 똑똑히 들었습니다! 모두 빨리 달아나십시오! 여기 계시면 안됩니다!"

주페가 당혹스런 얼굴로 멍 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린 로노는 도리어 제네르를 의심어린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근위대장은 신용 하나는 확실한 사람인데......"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주페가 제네르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자네 영빈관 최상층 밀실이 어디 쓰이는 곳인지 아나?"

"아뇨......전.......황궁엔 처음입니다."

제네르의 대답에 결심을 굳힌 주페가 형을 휙 돌아보았다.

"형님, 타니토를 데리고 빨리 달아나십시오."

주페의 말에 로노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뭐냐! 지금 저런 어린 생도녀석 말에 변심하다니! 네가 틀림없이......"

"영빈관 최상층 밀실 용도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생도가 미리 그것을 알았을 리가 만무하니 지어낸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의 방 3개를 비워 놓으라 말했다는 정도면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주페 네 이놈! 성인군자인 척 하면서 여기까지 오더니 도망갈 구멍을 다 만들어놨었구나! 이런 연극으로 나와 근위대를 이간시키려 했던 거냐!"

흥분한 로노가 동생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페는 형의 기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애타는 얼굴로 대답했다.

"형님! 제발 진정하십시오! 빨리 달아나셔야 합니다! 의심스러우시면 절 인질로 데려가십시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무언가 이상합니다!"

"닥쳐라! 이 망할 놈아! 시로! 주페에게 수갑을 채워라!"

흥분한 장태자의 명령에 시로 역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장태자전하, 저 생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 생각에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비록 근위대장이 신용은 있는 인물이나 100% 장담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을 뜨심이......"

평소에는 약속이라면 철석같이 잘 지키다가도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뒤집어엎는 베흔의 스타일을 잘 아는 시로에게도 이런 상황이 어딘지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주페가 계속 억지를 쓰는 형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발, 형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바로 옥상 주기장이니 타니토와 함께 빨리 빠져나가십시오! 그러시면 제가 동부 근위병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아 뒤를 지켜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페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느꼈는지 로노가 동생을 그대로 바닥에 팽개쳤다. 타니토 공주를 동반한 로노가 급히 밀실을 박차고 걸어나가고 있었다. 바닥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주페가 거추장스러운 검은 무명포와 머플러를 벗어던지며 허리에 차고있던 자신의 긴 쿠크리를 뽑아들었다.

"하크로딘 생도, 자네도 여길 빨리 떠나게."

"저도 태자저하와 함께 있겠습니다."

제네르가 병사 한 명에게서 칼을 받아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페를 따라 머플러와 무명포를 벗어던진 제네르는 어느새 옛날의 당당한 동부 근위기병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으아악!"

위층에서 들려온 셔틀 소음과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며 주페와 제네르가 서둘러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이 망할 놈 어딜!"

옥상에 막 내려앉은 강습셔틀에서 베흔이 훌쩍 뛰쳐내리며 땅이 울릴 정도의 함성을 버럭 내질렀다. 셔틀에 오르려던 로노와 타니토는 갑자기 공중에서 셔틀로 강습해온 베흔과 십여 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쫓겨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단 몇십 초 차이로 달아날 길을 잃어버린 로노는 주페의 말을 빨리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제 다른 길이 없었다.

시로의 가디언들이 베흔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지만 공중에서는 몇 대의 셔틀들이 더 강습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뒤늦게 근위대의 배신을 깨달은 로노 장태자가 순식간에 막혀버린 퇴로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래층에서도 근위대들이 쳐옵니다!"

로노의 근위병 한 명이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달려올라와 소리를 질렀다. 황궁 북쪽 별관의 옥상 일대는 눈 깜짝할 새 아수라장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기장이 있는 옥상에서는 달아나려는 로노 장태자 일행과 그를 막으려는 베흔 사이에서 일대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주페와 제네르가 이끄는 몇십명의 병사들이 그 와중에 또다시 뛰쳐들었다.

"네 이놈! 감히!"

주페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가디언의 칼을 쿠크리로 힘껏 쳐냈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디언의 칼이 산산조각나며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태자의 놀라운 힘에 기겁을 한 가디언이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내려선 근위대 강습셔틀에서 제파를 선두로 다시 수십의 병사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이 무엄한 것들!"

주페가 필사적으로 휘두른 쿠크리에 앞을 가로막던 가디언 한 명의 머리가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있었다. 그 뜻밖의 광경에 놀란 제네르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유학자인 주페가 칼을 놀랄 만큼 잘 쓴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가디언을 꺾을 정도라는 건 그로서도 너무나 뜻밖이었다.

"너희는 왼쪽으로! 측면을 막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 정면으로 밀어붙인다! 셔틀이 착륙할 자리를 만들어!"

얼굴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주페가 직접 동부 근위병들의 선두에 서서 탈출할 셔틀이 접근할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제네르 역시 주페의 등뒤로 칼을 휘둘러오는 근위대 병사 한 명을 걷어차 쓰러뜨리며 그의 목에 힘껏 칼을 질러 넣었다.

"주페 태자저하! 저쪽은 어차피 어렵습니다! 혼자라도 떠나십시오!"

제네르가 주페를 거칠게 떠밀며 악을 썼다. 주기장 한쪽에 몰려있는 로노의 근위병들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근위대 병사들과 가디언들에게 무참하게 쓰러져가고 있었지만 주페를 선두로 반대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이미 셔틀에 거의 다달아 있었다.

"저게 뭐야!"

시로와의 결판을 빨리 짓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던 베흔이 그런 주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머뭇거리다가는 자칫 주페를 놓치고 말 상황이었다.

"제파! 네가 시로를 맡아라!"

베흔이 피로 물든 플람베르주를 움켜쥐고는 부하들을 헤치며 주페에게 결사적으로 달려갔다. 근위대 병사 한 명을 또다시 쓰러뜨린 주페가 등뒤에서 달려오는 베흔을 향해 휙 돌아섰다.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태자저하!"

베흔이 주페를 향해 그 무서운 흉기를 힘껏 내리찍었다. 엔간한 보통의 시민이라면 막는 무기까지 산산조각 내버릴 그 흉악스런 공격을 주페는 자신의 쿠크리로 옆으로 힘껏 쳐내버렸다. 이 뜻밖의 상황에 너무나 놀란 베흔도 잠시 입을 벌린 채 주페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얼굴에 피를 가득히 뒤집어쓴 주페가 베흔에게 갑자기 처절할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근위대장......난 싸우고싶지 않네......"

"겁나시면 항복하시면 됩니다!"

베흔이 또다시 칼을 거칠게 휘둘렀다. 베흔의 무자비한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주페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태자저하!"

주페를 도우려 달려들었던 제네르 역시 베흔의 발길질에 가슴을 걷어차이며 옆으로 맥없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늑골이 부서졌는지 그의 가슴에 끔찍한 통증이 엄습하고 있었다. 고통을 무릅쓰고 다시 일어나려 버둥거리던 제네르의 오른쪽 팔이 뒤이어 달려든 근위대 병사의 도끼에 찍히면서 그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아악......"

거의 잘려나가 너덜거리는 오른팔에서 왼팔로 칼을 옮겨들며 결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제네르는 이마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가격하고 스쳐간 피묻은 프레일과 '잡았다'는 고함소리가 그의 귓가를 웅웅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페를 결국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처절하게 원망하며 마지막 울부짖음과 함께 제네르 역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만 포기하시죠. 제가 태자저하를 해하는 건 그다지 모양이 안좋지 않습니까?"

칼을 움켜쥔 베흔이 킬킬거리며 주페에게 접근해갔지만 이미 수십의 근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주페는 고집스럽게 칼을 손에 쥔 채 베흔과 맞서고 있었다. 로노를 따라온 3백여 명의 동부 근위병들은 이미 거의 시체 혹은 포로가 되어버린 후였다. 그 때 로노가 있던 쪽에서 큰 함성소리와 함께 제파의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장태자와 타니토 태자를 잡았습니다! 시로도 생포했습니다!"

"것 보십시오. 어차피 틀렸다니까요."

베흔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제국의 태자가 어찌 불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겠는가!"

이미 머리를 다친 주페가 눈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소리치자 베흔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정말 답답하신 분이군요."

베흔이 결국 큰 기합소리를 지르며 마지막 남은 주페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칼을 단단히 쥐고 그의 공격을 막아보려던 주페는 결국 힘에서 밀리며 뒤로 튕겨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려는 주페에게 태연하게 다가온 베흔은 칼을 쥐고있던 그의 손목을 발로 꾹 밟아버렸다.

"그 기상은 놀라우시나 이젠 웬만하면 그만두시죠."

근위대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쓰러진 주페의 손발을 단단히 포박했다. 강제로 들것에 실려 옮겨지던 주페는 주기장 옥상을 온통 붉게 물들일 정도로 꽉 찬 시체들과 부상자들, 바닥에 냇물처럼 고여있는 검붉은 피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팔이 잘리고 이마가 깨진 채 쓰러져 죽어가는 제네르의 모습을 발견한 주페는 침통함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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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내일과 모레까지는 원고마무리 작업으로 사정상 연재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지 가예약하신 분들께서도(안하신 분들도 물론....^^;;)

http://vein.zio.to/로 가셔서 본예약 양식을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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