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7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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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칼을 쥔 채 어두컴컴해진 자신의 옛 집에 들어선 베아트릭스는 조심스런 눈길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먼지하나 없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현관 맞은편의 가족들 사진 밑에 놓여있는 어머니 엘룬의 얼굴과, 그 밑에 정성스럽게 놓여있는 생생한 흰 꽃 한 다발에 잠시 멈췄다. 그는 2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발자국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베가 제대로 전하기는 했군."
너무나 반가운 카렐의 목소리에 계단을 막 달려 올라가려던 베아트릭스가 멈칫 하며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그런 베아트릭스를 못 본 척 한 제네르가 계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네르가 입가 가득 웃음을 지으며 계단에서 내려오는 카렐을 맞았다. 제네르를 일으켜 세워준 카렐은 그를 품에 꽉 껴안으며 등을 힘있게 두들겨주었다.
"베아트릭스 경."
결국 다시 카렐의 품에 안긴 베아트릭스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렐은 그의 가슴이 유난히 격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시로와 자이납까지 한번씩 껴안아준 카렐은 한쪽에서 멀뚱하니 서 있는 하심과 라스에게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예킨터스 교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요. 나 때문에 이래저래 꼬여서 고생 정말 많이 했는데......그런데 라스, 넌 여기 도대체 웬일이냐?"
"학장님은......어디계시죠?"
하심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카렐이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옆문 열어보시오."
문을 열고 옆을 돌아본 하심의 표정이 그제서야 환하게 밝아졌다. 응접실 의자에 앉아 지는 석양을 보고 있던 코리온이 무사히 돌아온 심복의 인사에 엷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뒤이어 나타난 제네르의 모습에 곧 굳어버리고 말았다.
"망할 녀석 같으니."
혼잣말로 중얼거린 코리온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허, 누가 할 소리를......"
역시 코리온에게서 냉랭하게 시선을 돌려버린 제네르는 카렐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칼이군요? 혹시......."
카렐의 허리에 달려있는 쿠크리를 보며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페 태자의 유품이라는군."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카렐에게서 칼을 받아든 제네르는 먼 옛날 황궁 옥상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는지 그 붉은빛 칼날을 말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던 카렐과 제네르는 옆에서 들려온 코리온의 놀란 듯한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샤드니 경이?"
하심이 지난번 샤드니와 있었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자 코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샤드니 경이 무언가 크게 오해했던 모양이네. 내 가서 단단히 주의를 줄 터이니 걱정 말게. 예킨터스 교수."
"하지만 학장님, 아무래도......"
"샤드니 경이 자넬 뭣 때문에 해치겠는가. 원래 성격이 날카롭고 행동에 서슴없는 사람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내 가서 호되게 꾸짖을 터이니 염려 말게나."
하심이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샤드니의 '연인'인 학장에게 뜬금없이 그가 수상쩍다는 말이 제대로 통할 턱이 없었다.
답답해하던 하심이 한쪽에서 방 청소를 하고있는 라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노예청년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제 목숨을 살려주느라 도망노예가 되고 말았으니......감히 주인인 샤드니 경을 상해했으니 돌아가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황을 보아서 당연히 용서를 해 주어야 함이......"
"그럴 바엔 제가 데려가죠."
카렐이 불쑥 나서며 말했지만 코리온은 그런 카렐을 쌀쌀맞게 쏘아보며 대꾸했다.
"저 노예는 샤드니 경의 사유물인데 네가 무슨 명목으로 함부로 데려가겠다는 것인가?"
"제가 매입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인은 샤드니 경이다. 네놈에게 팔겠는가."
무려 5일간의 동행에도 불구하고 카렐에 대해 여전히 곱지않은 코리온의 말투에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옆으로 돌아서 버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카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코리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사들여 몸종으로 쓸 테니 걱정 마시게. 예킨터스 교수. 샤드니 경이 설마 내 소유 노예를 함부로 죽이겠는가."
코리온의 깜짝 놀랄 '편법'에 제네르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제네르가 코리온 들으라는 듯 입을 열어 빈정대기 시작했다.
"역시 원리주의자답게 '원리'는 일단 완벽하게 지키시는군요,"
카렐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스를 바라보았지만 뜻밖에도 라스는 코리온의 몸종이 된다는 말에 입가에 잔뜩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라스는 자신의 새 주인이 될 사람이 얼마나 황당한 인간인지 아직 제대로 모르고있는 모양이었다.
"연락 끝났습니다."
2층에서 내려온 베아트릭스가 적어온 메모를 카렐에게 넘겨주었다.
"내일 아침 7시에 외계 항해 면허가 있는 셔틀 2대가 이리로 올 겁니다. 한 대는 서부 5제후 이스마엘 가 영지로 갈 테고 한대는 황제령으로 갈 테니......어디에 타셔야 하는지는 각자 잘들 아시겠죠?"
베아트릭스의 그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에 카렐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베아트릭스도 기분이 꽤 좋은 것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하심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코리온을 올려보고 있었다.
자이납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헤헤헤, 전 그럼 서부 가는 거 타는 거죠?"
"닥쳐 이놈아."
카렐이 또 헛소리를 늘어놓는 자이납의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아휴, 귀 늘어나요......아야야, 이거 탈라스에선 잠자리하자는 뜻인지 잘 아시죠?"
"그래, 자알 안다. 이놈아. 그러니 너 오늘밤 나하고 한방에서 자자."
시로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틀어막으며 제네르를 힐끔 돌아보았다. 새빨개진 귀를 어루만지며 자이납이 계속 투덜거렸다.
"왜 맨날 내 귀만 갖고 그러셔. 하크로딘 단장님 귀도 있고.......플라칼 단장님 귀도 있는데......"
"이놈아, 저 동네에선 귀 만지는 거하고 섹스하는 거가 동의어인데, 탈라스 사람 귀를 내가 꼭 만져야겠냐? 그러니 니 귀만 만지지."
잠시 웃음을 터뜨렸던 하심은 여전히 무표정한 코리온의 눈치를 보고는 급히 얼굴을 가다듬었다.
"전하 지난번에 제 귀도 만지셨으면서."
제네르가 피식 웃으며 지난번 카렐이 꿰매준 귀를 더듬거렸다. 카렐이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 그랬던가? 그럼 내 승은 한번 받은 걸로 해 둬. 어쨌거나, 오늘밤은 그럼 어떻게 자지? 베아트릭스 경, 침실이 모두 몇 개지?"
"주 침실까지 6개입니다. 방 2개에는 2인용 침대가 있고 침대 두 개 짜리 방 2개, 침대 한 개 짜리 방 2개입니다.."
"흠, 그럼 집주인이 당연히 주 침실에서 자야 할 테고......오라버니하고 예킨터스 교수하고 침대 2개 짜리 방에 함께 주무시오."
"엑,"
자이납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가 카렐의 괜한 꿀밤만 또 한대 얻어맞고 있었다.
"예킨터스 교수께선 절대 방 비우지 마시오, 언제 이 치한이 들어가서 오라버니를 노릴지 모르니. 그리고오......제네르 경은 시로하고 한방을 쓰도록 하고......라스는 천상 혼자 자야겠군."
"전요?"
자이납이 뚱한 얼굴로 묻자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하고 같이 자자니까."
"쳇, 승은 내려주실 거 아니면 차라리 혼자 잘래요."
"맘대로 해라."
'방 배정'을 끝내고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 카렐에게 코리온이 갑자기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다."
"예?"
"내게도 1급 셔틀면허가 있으니.......셔틀을 내가 직접 몰고 갔으면 한다."
카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리온은 아직 자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믿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코리온에게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제네르가 그의 까탈스러움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무언가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이 베아트릭스에게 물었다.
"셔틀 기종이 뭐라던가?"
"정확히는 모르겠고......낙농품 무역으로 허가받은 소형 화물셔틀이라고 합니다. 조금 오래된 구형이라고 합니다만......"
얼굴을 살짝 찡그린 카렐이 코리온에게 말을 건넸다.
"화물셔틀은 승용셔틀보다 조작이 힘들고 체력도 많이 소모됩니다. 족히 12시간은 걸릴텐데......워프비행 자체도 몸을 꽤 갉아먹는데 그 몸으로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한쪽 다리도 거의 못쓰시지 않습니까."
"못할 것도 없지."
코리온이 여전히 카렐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카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저도 1급 면허가 있으니 제가 몰겠습니다. 이스마엘 가 영지에 내려드릴 테니......그럼 안심하시겠습니까?"
"전하, 그곳은 전하께 적대적인 곳입니다. 학장이 나쁜 마음으로 이스마엘 가에 전하 위치라도 노출시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위험합니다. 가지 마십시오."
제네르가 즉시 반기를 들고나서자 베아트릭스 역시 걱정스런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심은 '옛 친구'의 뜬금없는 의심이 조금 섭섭한지 대뜸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제네르! 넌 학장님을 그렇게 못 믿는거냐?"
"너라면 손님이라고 사람 불러다놓고 학살한 사람을 믿겠냐고!"
"네놈 도움 필요 없다. 나 혼자서도 몰 수 있으니."
자존심이 상한 코리온이 쌀쌀맞게 쏘아붙이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제네르 경, 그만하게."
카렐의 한마디에 제네르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카렐이 코리온의 팔을 붙들며 다시 말했다.
"그 몸으로는 혼자 못 모십니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 역시도 밀수꾼 조종사 손에 오라버니 안전을 맡기고싶지는 않습니다. 제 부하들은 모두 싸움에 능하지만 오라버니 일행은 지켜줄 사람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코리온과 카렐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숨을 한 번 내쉰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하심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돌아선 카렐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스마엘 가 영지하고 발 가 영지가 같은 인근에 있으니까 학장만 내려주고 바로 발 가 영지로 가겠네. 베네루스한테 연락해서 내 셔틀 몰고 미리 거기 가 있으라고 해야겠지. 그러니 별 걱정할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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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령으로 떠난 주페 태자가 장태자, 타니토 태자와 함께 근위대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학교에 알려지면서 파예드 아카데미는 벌집 쑤신 듯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학교에 찾아와 보았던 샤드니는 주페 태자가 코리온을 학교 감옥에 가두어놓고 떠났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코리온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쁨을 주체못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코리온이 갇혀있다는 학교 감옥으로 급히 찾아갔다.
"대군마마?"
육중한 나무문 중간의 작은 창구멍으로 눈을 디민 샤드니는 차가운 감옥의 한쪽 구석에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있는 코리온의 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감방 한쪽에는 따로 챙겨준 듯한 저녁식사가 놓여 있었지만 손을 댄 흔적은 전혀 없었다.
"대군마마, 접니다. 샤드니입니다."
그제서야 잠시 그를 바라보았던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없이 시선을 되돌려버리고 있었다. 샤드니가 틈새로 애써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코리온이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힘내십시오, 저희 아버님을 비롯한 가문 원로들이 지금 학장님을 만나뵙고 있습니다. 곧 여기서 풀려나실 겁니다."
"풀려난들 나 혼자 무슨 의미로 살아가겠나......어차피 근위대가 날 잡으러 올 것이니 황궁에 가서 태자저하나 한번 더 뵈어야겠구나."
코리온이 갑자기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샤드니의 목구멍으로 '당신은 절대 안전하니 걱정 말라'는 말이 입술 끝까지 쳐올라오고 있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샤드니는 치안대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는 또 한 명의 면회객이 있음을 깨달았다.
"수찬님, 잘 계십니까?"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온 하심 예킨터스 생도가 샤드니 옆에 쭈그려 앉았다. 샤드니에게 잠깐 아는 척을 해 보인 하심이 가방을 끌러놓으며 말했다.
"수찬님, 접니다, 예킨터스 생도입니다. 모디아크 아씨를 모셔왔습니다."
그제서야 눈을 번쩍 뜬 코리온이 급히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방에서 큰 술병 만한 캡슐을 꺼낸 하심은 식사를 넣는 구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계십니다. 제가 계속 살펴드리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 이애는 잘 있었구나......"
캡슐 뚜껑을 연 코리온은 안에서 살아 숨쉬는 딸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시 아기를 바라보던 코리온은 캡슐에 이마를 댄 채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수찬님, 아씨를 보아서라도 제발 힘내십시오."
손을 밀어넣은 하심이 떨고있는 코리온의 손을 힘있게 붙들어주었다. 학교 감옥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건 그때였다. 거친 고함과 무언가 다투는 듯한 소음에 고개를 번쩍 든 코리온은 캡슐 뚜껑을 닫아 급히 하심에게 돌려주었다.
"부탁이 있네, 예킨터스 생도, 난 곧 근위대에 잡혀갈 테니 모디아크를 어머님께 데려다주게. 누구 아이인지를 반드시 알려드리고......행여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손녀를 꼭 부탁드린다고.....아이 부모코드는 자네가 가지고 있지?"
"예.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학교 감옥 문이 요란스런 소음과 함께 홱 열리더니 교내 치안대 병사 두 명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하심은 캡슐을 허둥지둥 가방 안에 감추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감방 안의 코리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대군마마."
코리온이 당연히 풀려나려는 것으로 생각했던 샤드니는 감방 문을 연 치안대 병사들이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워 밖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에 순간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코리온을 끌어낸 치안군 병사들은 교문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가던 샤드니는 교내에서 치안군 병사들의 손에 끌려나오고 있는 몇 명의 다른 교수들도 발견하고 있었다.
끌려나가는 코리온을 쫓아 교문에 도착한 샤드니는 뜻밖의 광경에 그만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고 말았다. 수천 명에 달하는 중무장한 근위대 서부 파견군 병사들이 공권력 진입이 불가능한 이 학교를 새카맣게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교문 앞에는 먼저 끌려나온 수십 명의 파예드 교수들이 근위대에 넘겨져 수갑이 채워진 채 호송차에 강제로 실리고 있었다.
"하, 학장님이 근위대에 굴복한 모양입니다!" 모두 태자저하를 따르던 교수님들 아니십니까!"
하심이 발을 동동 구르며 치안대 손에 끌려나오는 코리온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교문까지 코리온을 끌고 나온 치안대 병사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던 쿠베와 근위대 병사들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히죽거리고 웃음지은 쿠베가 씩씩거리는 코리온의 턱을 덥석 움켜잡았다.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 후, 이제야 알짜배기를 잡았군, 일단 황궁으로 데려가야겠다."
베흔과의 약속만을 철석같이 믿고있던 샤드니는 코리온이 잡혀가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놀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대뜸 쿠베의 팔에 매달리며 언성을 높였다.
"여보시오! 나, 난 플레렌 가의 샤드니 플레렌이요! 그리고 이분은 코리온 리쿠 대군이시란 말이요!"
"그런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샤드니를 바라본 쿠베가 그를 바닥에 떨구어내 버리며 코리온을 호송차 안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샤드니는 대뜸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근위대장님!"
몇 번만에 가까스로 베흔과 통신을 연결한 샤드니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흥분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대군마마께서 잡혀가시는 거냐구요!"
다른 일로 한참 바쁜 듯한 얼굴의 베흔은 샤드니의 항의에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이씨, 걱정 말라니까. 주페를 체포했으니 요식행위로 일단 체포한 거고, 며칠 잡아뒀다가 적당한 이유 붙여서 곧 풀어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구. 내가 언제 약속 안지키는 거 봤나."
"정말이죠! 약속하셔야 됩니다!"
"알았어, 알았어,"
베흔이 귀찮은 표정으로 곧 통신을 끊어버렸다. 그의 무성의한 태도에 내심 격분한 샤드니는 이 상황에서 코리온을 곧 풀어준다는 그의 말에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썅, 저 개새끼,"
차에 앉은 샤드니가 계기판을 쾅 두들기며 신경질을 부렸다.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망연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선 샤드니는 캡슐이 든 큰 가방을 껴안고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던 하심을 급히 불러 세웠다.
"어딜 가나?"
"황제령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레곤 공주저하께 캡슐을 전해드리려면요."
"내 셔틀을 타고 같이 가세. 나도 황제령에 가야 할 것 같으니."
샤드니와의 통화를 끊은 베흔은 이런저런 정리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한 반대파 추종세력들은 물론이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분적인 저항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류들을 정리하던 베흔은 쿠베에게서 갑자기 들어온 연락을 짜증스럽게 받아들었다.
"주페 녀석 떨거지는 다 잡아들였나?"
"예. 지금 황제령으로 이송을 준비중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교내로 들여보낸 요원에게서 주페 태자의 숙소에 이상한 물건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물건?"
베흔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그곳에서 빈 태아캡슐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수정란을 아기로 키우는 장치 말입니다. 알아본 바로는 2개월마다 한번씩 좀 더 큰 것으로 교체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 있는 건 6, 7개월용이라고 합니다."
"이, 이런!"
소스라치게 놀란 베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주페 그놈한테 자식이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 같아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쿠베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베흔이 머리를 감싸쥐며 고민에 잠겼다. 나중에 문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태자의 2세들까지 모두 제거하는 일은 태자들을 잡아놓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로노의 자녀 8명은 이미 동부 파견군들을 동원해 싹 잡아넣은 후였고, 타니토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지만 미혼인 주페에게 숨겨둔 2세가 있었다는 것은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뜻밖의 상황이었다.
세네피스와의 혼인을 거부한 주페의 행동이 어쩌면 태자의 '다른 연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퍼뜩 스쳐지나갔다.
"제기랄! 캡슐을 당장 찾아내! 캡슐만 찾으면 유전자를 분석해서 다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반드시 찾아내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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