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8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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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좀 합시다."
샤드니에게 다가온 베흔이 뜬금없이 친한 척을 하며 술 한잔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잔뜩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샤드니의 옆에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베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압시다. 학장께선 도대체 어찌되신 거요?"
"왜 그걸 내게 물으시오? 근위대장께서 수색하고 있는 것 아니셨소?"
"학장께서 어쩌다가 원수 같은 카렐 그년과 함께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그 상황은 샤드니 경께도 그리 유쾌하지는 아니하겠소?"
베흔이 어느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려는지를 익히 짐작한 샤드니가 옆에 앉은 이 음흉한 사나이의 눈빛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 망할 남자는 학장이 잡히지 않고 무사히 달아났을 경우를 미리 준비하려 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행여 이 일로 저 망할 반역도당을 쓸어내기 위한 학장님의 의지가 약해지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아니하겠소?"
'다른 걱정거리'로 속썩고있던 샤드니는 베흔의 걱정에 내심 코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코리온을 죽이려 한 근위대의 괘씸한 짓거리를 그냥 넘겨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카렐을 처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급하다는 면에서 베흔과 자신의 이해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학장님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소? 목숨이 아니고 안위 말이요."
베흔이 갑자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샤드니가 왜 '목숨'이 아닌 '안위'라는 단어를 잔뜩 강조해가며 사용하는지를 잘 알고있었다.
"물론."
베흔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난번 같은 말장난으로 날 속이려 한다면......이번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난 이제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베흔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지만 당장은 이놈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요?"
샤드니가 사뭇 냉랭한 말투로 베흔에게 물었다.
"우리도 학장님에 대한 일은 이제 포기했으니.....나중에 그분께서 위치를 알려오시면 우리에게도 알려주시오."
"그러면 어쩌려고?"
샤드니가 잔뜩 의심 섞인 눈으로 묻자 베흔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함께 있는 카렐 녀석만 죽이겠소. 녀석도 한쪽 팔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 하니 나까지 포함해 3명의 특급가디언으로 충분히 제압 가능할거요. 게다가......싸움도 할 줄 모르는 군더더기 유학자들까지 매달고 있다면 일은 훨씬 쉬워지지 않겠소."
샤드니가 입가 가득 미소를 품었다. 카렐을 철천지 원수취급하고 있는 학장이라면 지금의 자신의 선택을 크게 기뻐해 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솔직히......당신에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으니 우리가 학장님을 먼저 빼낸 후에 카렐을 죽이던지 말던지 하시오."
얼굴을 찡그린 베흔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로서도 코리온을 죽이는 것보다는 카렐을 죽이는 편이 더 남는 장사인 것은 사실이었다.
카렐은 코리온의 일로 뾰로통해져있는 제네르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걸며 함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학장 역시 내가 포용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야."
"알고 있습니다."
"학장에 대한 자네 감정은 내 잘 알아."
"......"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주게나. 난 자넬 믿고 사랑한다는 거야."
제네르를 향해 돌아선 카렐이 그를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제네르가 카렐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전하께서 곁에 계셔서 정말 든든합니다."
제네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 카렐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 제네르의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밝게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카렐에게 바싹 다가선 제네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오늘밤에 베아트릭스 경 정말 혼자 자게 놔두실 겁니까?"
"하여간, 이놈의 눈치하고는."
카렐이 기가 막힌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네르를 내려보았다.
"아휴, 그게 전하 문제점이라구요, 때로는 저돌적으로 밀고 나갈 때도 있어야죠. 저 성격에 '날 잡아 잡수세요' 하길 어느 세월에 기다리시냐구요, 이럴 땐 술 한잔 드시고 무조건....."
계단 한구석에 바싹 붙은 채 도저히 '군신지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눈빛으로 히히덕거리고 있는 이 둘에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검은색 그림자가 있었다.
"두 분이 뭐하십니까?"
흑인종 특유의 약간 탁하고도 딱딱한 목소리에 제네르가 훔쳐먹던 것이라도 들킨 양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카렐은 잔뜩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 엉, 장자가 호접몽을 꾸었을 때 옆에 여자가 누워있었을까 아닐까에 관해 진지한 토론 중이었다네."
제네르가 갑자기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베아트릭스는 주 침실이 있는 꼭대기 펜트하우스로 올라가고 있었다.
"누구요?"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발을 닦고있던 베아트릭스가 급히 물었다.
"날세."
"잠깐만......기다리십시오,"
카렐의 목소리에 조금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맨발을 급히 신발 속에 감추며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카렐은 침대 밑에 놓여있는 세숫대야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전에 발 닦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 그래, 탈라스 사람들은 자기 전에 꼭 발을 닦는다고 들었어. 다 닦았나?"
"아뇨....."
카렐이 물이 질척질척한 채로 신발을 신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발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계속 닦아. 뭐 목욕하는 것도 아닌데......"
카렐은 마치 다락방처럼 꾸며진 이 자그만 펜트하우스를 둘러보았다. 벽과 천장을 겸하는 비스듬한 박공지붕 밑에는 매트리스만 놓은 제법 큰 침대가 놓여있었고 반대편 박공 밑에는 베아트릭스의 옛날 모습이 들어있는 카드들과 자잘한 소품들, 장식품들이 놓여있었다.
"박공지붕 밑의 다락방은 참 기분을 묘하게 만든단 말이야."
카렐이 탁자에 기대서며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는 발을 닦던 물을 앞에 둔 채 매트리스에 앉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의아해진 카렐이 질문을 던졌다.
"발 왜 안 닦나?"
"고향에선......다른 사람에게 발을 절대 보이지 않는 게......"
"어, 그건 아는데......자네도 그럴 줄은 몰랐네, 미안하네. 안볼테니 닦아."
뒤로 돌아앉은 카렐은 뒤에서 들려오는 물 첨벙거리는 소리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몸도 안좋으신데, 난방도 되지 않고 더운물도 나오지 않아 죄송합니다. 집이 좀 춥죠?"
'집주인' 베아트릭스가 조금 미안한 듯 말했다.
"뭐, 내가 이 정도야 뭐. 집 뒤에 우물물로 목욕까지 했는데도 참을 만 하던걸."
탁자 위의 자잘한 소품들을 만지작거리던 카렐은 저 거친 유목민 전사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나무를 깎고 색칠해 직접 만든 작은 인형들 밑에는 만든 날짜와 받는 사람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는 이제 저세상 사람이라는 것이 탈이겠지만. 이 집에 들었던 도둑에게는 쓰레기였겠지만 베아트릭스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도 한 그것이었다.
발을 다 닦은 베아트릭스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목각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카렐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흐르는 자신에 대한 반가움과, 그 차갑고 엄한 겉모습 뒤에 숨어있는 외로움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으음,"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는 손길에 움찔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큰 키의 장태자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이마를 기대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허리를 돌려안은 카렐의 손등을 짚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시면......"
"왜? 탈란 이모에게 가라고?"
고개를 떨군 베아트릭스는 한참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허리를 안은 카렐의 팔을 급히 떨쳐내며 탁자 위의 목각인형들을 급히 챙겨들었다.
"집이 언제 팔리던지 털릴지 모르니까.....중요한 물건들은 다 챙겨가야겠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침실의 소소한 물건들을 모아 가방에 허겁지겁 넣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것들만 챙겨. 내 북부길드녀석들 시켜서 물건들 ㅤㅋㅞㄹ크로 실어오게 할 테니. 그러니까 지금은 나나 쳐다봐."
카렐이 베아트릭스의 탄탄한 허리를 뒤에서 다시 당겨안으며 속삭였다. 카렐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잠시 아무 말 없던 베아트릭스는 뒤로 돌아서며 그의 얼굴을 문득 올려보았다. 베아트릭스의 떨리고있는 입술을 바라보며 카렐이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전하를 놓치고싶지 않고......탈란 이모한테 가시라는 말도 진심이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전......어머니처럼 살고싶지는 않다구요......"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내뱉은 한마디에 카렐이 순간 할 말이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반대한 만남의 대가로 평생을 외로움 속에 살다간 어머니와, 지금의 베아트릭스가 어쩌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구요......양쪽 모두에서 축하를 받으면서......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평범하게 살고싶은 것뿐이었는데......제 소원은 그뿐이었는데......"
주변에 대한 설득도, 별다른 노력도 없이 무작정 베아트릭스에게 접근할 생각만 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철없던 것이었는지를 깨달은 카렐은 숨고싶을 정도의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카렐이 베아트릭스의 떨고있는 어깨를 꼭 품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제 속마음이 알려지면 가문 사람들이 모두 날 증오할 거예요. 이제 제 곁에 남은 그나마 유일한 사람들인데, 그들까지 잃을 거라구요.....그럼 전 어떡해야 하냐구요."
축복받는 만남을 그리도 갈구했을 베아트릭스에게 자신이 너무도 이기적으로 굴었음을 깨달은 카렐은 솟구치는 죄책감에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자넬 이해 못했어......."
베아트릭스가 카렐을 껴안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카렐이 힘있게 말했다.
"내 절대 탈란을 곁에 맞지는 않겠네. 내 반드시 다짐하지. 내 어떻게 해서든 자네 가문을 설득해 문제를 해결할 테니.....조금만 기다려주게나. 응?"
카렐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기댄 베아트릭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젖은 눈가와 뺨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이 키 큰 주군을 말없이 올려보던 베아트릭스는 그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무작정 입술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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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황제령에 진입해 들어가는 10만의 북부 정예병들의 선봉에는 곧 황후가 될 세네피스 카파키 태자빈과 토로 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골치아픈 로노 장태자와 주페 태자까지 무너진 지금, 근위대의 묵인을 받으며 황제령에 진입하고 있는 그들을 감히 막을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 시각으로 어제 오후, 태자들이 전격 체포되기가 무섭게 북부를 출발한 이들은 이제 환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황궁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황궁입니다."
토로 경이 수송선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쌀쌀맞은 표정의 세네피스는 그쪽에 한 번 가벼운 시선을 주었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오늘 오후 늦게라도 즉위식을 올려야 할 테니 준비에 빈틈이 없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오빠 일라드가 세네피스에게 말을 건넸다.
"잡혀있는 태자들은 이제 어쩔 거냐?"
"글쎄요."
세네피스가 즉답을 피하며 6남매 중 유난히 난폭하고 잔혹한 성격으로 잘 알려진 첫째오빠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타바진 손도끼를 가지고 혼자 장난을 치던 일라드는 곧 황후가 될 동생의 그답지 않은 밋밋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삐죽거렸다.
"아버님은 다 죽여야 한다고 그러시던데, 나도 동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죽여버려야 할거다."
"장태자는 당연히 죽여야겠지만 주페와 타니토 태자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생각은 무슨 생각이야! 남겨뒀다가 무슨 후환을 당하려고!"
일라드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세네피스는 오빠의 신경질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울린 할룩스에 깜짝 놀란 세네피스는 얼른 자리를 옮기며 기계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가 서부로 특별히 파견했던 요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찌되었나?"
"코리온 리쿠 대군을 비롯한 39명의 교수들은 10시간 전 황궁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내 명령한 건?"
"그게......말씀하신 캡슐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크게 놀란 세네피스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코리온 대군 숙소에도?"
"예. 그런데 저희 말고도 캡슐의 행방을 찾는 녀석들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태자 주변사람들에게 캡슐의 행방을 묻고 다니는 수상쩍은 녀석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근위대들이 눈치챘구나......"
세네피스의 표정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짓던 요원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코리온 대군의 수하에 있는 하심 예킨터스라는 생도가 무언가 큰 병같이 생긴 것을 들고 대군을 면회 온 일이 있다고 합니다. 태자가 캡슐을 그 생도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생도가 지금 어디있나?"
흥분한 세네피스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동료 생도들에게 알아봤더니 황제령에 간다고 말했다 합니다. 개인 할룩스로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을 보니 스페이스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레곤에게 가는 게 틀림없다......"
제자리를 빙빙 맴돌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세네피스가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캡슐을 절대 근위대에 뺏겨선 안된다! 근위대 역시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테니 녀석들도 그 생도를 쫓고있을 거다. 황제령이건 서부건 그 생도를 근위대보다 먼저 찾아서 내게 데려와라. 다시 말하지만 캡슐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 알겠나?"
하심과 함께 자신의 개인셔틀을 타고 황제령으로 향하던 샤드니는 승무원이 내민 셔틀의 할룩스 안에서 돌연 베흔의 얼굴이 나타나자 허겁지겁 화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옆에 앉아있던 하심은 캡슐이 든 가방을 껴안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렸던 샤드니가 대뜸 짜증을 부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평소엔 연락하지 마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베흔은 샤드니의 짜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바로 질문부터 던졌다.
"물어볼 게 있는데, 주페에게 혹시 아이가 있었나?"
"에......예? 아, 아이라뇨?"
샤드니가 하심의 팔에 안겨있는 캡슐을 힐끗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주페 태자의 숙소에 태아캡슐이 있었을 텐데 자네 그 행방 몰라?"
샤드니가 순간 뜨끔하고 말았다. 그는 베흔에게 캡슐에 관해 사실대로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페 녀석한테 여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뭐 아는 거 있으면 얘기 좀 해봐."
"글쎄요.....그건 저도 금시초문인데......왜 그러시죠?"
"그럼 하심 예킨터스라는 생도 놈이 어디 있는지 혹시 알아?"
"그, 글쎄요? 학교에 없나요?"
"제기랄, 모르면 됐어! 나중에라도 얘기 듣거든 연락해!"
베흔과의 통화를 끝낸 샤드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심의 팔에 들려있는 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근위대 놈들이 저 캡슐의 존재를 이미 눈치채버린 모양이었다.
"저 썩을 놈의 핏덩이 같으니."
샤드니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가 캡슐의 행방을 부인한 건 저 안에 들어있는 아기가 이뻐서는 결코 아니었다. 저 망할 놈의 캡슐이 행여 근위대 손에 들어간다면 코리온과 주페와의 관계가 밝혀질 테고, 그렇게되면 코리온은 '주페의 보좌관'이라는 죄 외에 '주페의 연인'이라는 죄까지 겹으로 뒤집어쓰게 될 테니 자칫 코리온이 큰 위험에 휘말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캡슐을 공중으로 증발시켜서 증거를 깨끗이 인멸해버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얼마 후 셔틀이 황제령이 접어들 때까지도 샤드니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줄곧 고민에 빠져있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승무원의 고함소리에 샤드니가 얼른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궁이 있는 1번 도시 북쪽 외곽에 수십 대의 수송선이 내려서 있었고 그 안에서는 중무장한 북부제후군 수만 명이 대오를 맞춰 내려서고 있었다.
"이런, 망할. 저게 다 뭐야?"
그제서야 잠에서 깬 하심이 캡슐을 허겁지겁 챙기며 내릴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레곤 공주저하가 어디 계실까요? 그분 할룩스로 연락도 되지 않는데."
"글쎄다."
샤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모습을 감추고 계신 것 같다. 레곤 공주저하도 오넬론 태자를 지지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전적이 있으니.......어쩌면 그분도 근위대에 잡혀 계실지 모르겠다."
하심이 난감한 얼굴로 캡슐을 품에 끌어안았다.
"태자저하 아버님이 계시는 세호 가가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요?"
"그 기회주의 가문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샤드니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샤드니와 하심이 탄 셔틀은 1번 도시의 제니안 지부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엉?"
셔틀에서 내려서던 하심은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자신의 할룩스를 얼른 받아들었다. 하심은 웬 낯선 남자의 얼굴이 안에서 불쑥 나타나자 깜짝 놀라고 있었다.
"누구......시죠?"
"파예드 아카데미의 하심 예킨터스 생도시오?"
"예, 그런데요......"
"휴, 다행이요. 지금 레곤 공주저하를 찾아가고 계시죠?"
"누, 누구시죠?"
하심이 잔뜩 의심 섞인 얼굴로 묻자 그들이 냉큼 대답했다.
"공주저하의 지시로 캡슐을 찾고있는 중입니다. 저흰 공주저하의 수행원들입니다. 공주저하께선 약간의 문제로 지금 바깥출입을 못하고 계십니다. 지금 계신 위치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심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샤드니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공주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과, 캡슐을 가지고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있다면 이들의 신분은 어느 정도 확실해지는 셈이었다.
"그럼 1번 도시 제니안 지부에 있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오세요."
샤드니와 동행한 하심은 아기가 들어있는 캡슐과 주페의 마지막 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종종걸음으로 제니안 지부 안에 들어섰다. 유학자들의 친목클럽인 제니안 지부는 생도급 이상의 등록된 유학자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이런 난리통에도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곳 출입을 위해서는 신분확인이 필요한 것이 당연했다. 입구에서 생도 신분임을 등록한 하심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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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 편집이 최종마무리되어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제1권 : 391쪽, 원고지로 1,808장 분량입니다.
-제2권 : 403쪽, 원고지로 1,878장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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