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69화 (268/1,132)

< -- 269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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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고유 면허코드입니다. 이것과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특별한 이상징후만 없다면 통과될 겁니다. 드물게 표본수색을 하지만 대개는 화물칸에 달린 적재물품 감시센서에서 문제없다는 정보를 송출하면 바로 통과신호를 보내옵니다.”

조그만 화물셔틀을 몰고 온 북부길드 프락치가 카렐에게 셔틀 키와 서류들을 내주고는 바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건너편에서는 제네르와 부하들이 또 다른 셔틀에 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셔틀에 오르던 베아트릭스는 다른 셔틀에 타고 가는 카렐의 모습이 못내 불안한지 끝까지 시선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따가 보세.”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카렐이 화물셔틀 조종석에 앉았다. 문을 닫고 막 셔틀을 출발시키려던 카렐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화물칸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조종석 뒤에 앉아있던 코리온이 의아한 얼굴로 그런 카렐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카렐이 화물칸 구석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자이납의 귀를 잡아당겨 질질 끌고 나왔다. 자이납이 연신 비명을 지르며 투덜거렸다.

“아휴, 저, 저도 테나토 가야 된다구요. 제 가족들이 거기에......저도 라마단 휴가 좀 주시면.......”

“이번엔 가족타령이냐?”

“제발 한번만요, 헤헤헤,”

자이납이 있는 대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카렐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찡그린 카렐이 마지 못하는 척 그를 놓아주며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너, 학장님 주변 다섯 보 안에 접근하면 귀를 확 뽑아놓을 줄 알아.”

셔틀 제일 구석자리를 차지한 자이납은 자기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코리온을 멀찍이에서 쳐다보며 혼자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코리온은 조종석의 카렐이 꽤 복잡한 계기판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갑니다. 12시간 20분 정도 걸리겠습니다.”

부하들이 탄 셔틀이 무사히 이륙해 떠나는 것을 확인한 카렐이 이쪽 셔틀을 출발시키며 말했다.

“테나토 2번 행성. 이스마엘 가 영지. 발 가와의 경계에 위치한 헤수스 산. 현지시각으로 저녁 6시 30분. 학장님과 카렐, 하심 예킨터스 교수와 자이나브 카메네이, 노예녀석 하나가 타고 있소.”

대공주를 따라나서던 샤드니가 미리 기다리던 베흔에게 귀엣말로 알려주었다. 고개를 조금 끄덕인 베흔이 뒤로 휙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왔던 20여명의 플레렌 가 경호원들과 함께 전용 셔틀에 오른 샤드니는 함께 탄 대공주 부처에게 상석을 가리키며 최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들을 만나러 간다는 데 잔뜩 들뜬 대공주는 간만에 샤드니에게도 싫은 표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샤드니가 대공주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제 셔틀은 고속셔틀이니 저희가 먼저 도착할 겁니다. 다치신 학장님을 위해 의사도 그곳에 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했으니 이젠 아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아들을 위해 나름대로 애써줘서 고맙네.”

코리온의 아버지 예르마크 세닉 경이 부인의 눈치를 보며 샤드니에게 치하의 말을 던지고 있었다. 샤드니를 별다른 이유도 없이 원수 보듯 하는 대공주에 비해 예르마크 경은 그나마 그를 ‘아들의 연인’ 정도로는 인정해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플라칼 가 영지를 박차고 오른 샤드니의 셔틀은 코리온을 맞이할 테나토 행성계로 기수를 돌리고 있었다.

창 밖으로 말없이 밖을 내다보던 샤드니는 먼 옛날, 아직까지도 마치 원죄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는 떠올리기 싫은 철없던 시절의 옛 기억에 자기도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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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안 지부에 들어선 하심은 캡슐이 들은 가방을 꼭 끌어안고 긴장된 마음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두 분 피를 물려받았으면 참 이쁜 아이가 나올 것 같지 않아요? 특히나 대군마마는 정말 미남이시잖아요.”

하심의 질문에 샤드니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머릿속에는 ‘대군마마와 나 사이의 아이라면 훨씬 더 이쁠 거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캡슐 창을 열어본 하심은 안에서 간간이 움직이고 있는 손바닥만한 아기가 정말 신기한지 캡슐을 연신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돌려보며 혼자 키득거리고 있었다.

“뭐죠?”

하심이 갑자기 시끄러워진 지부 입구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이곳 보안요원과 실랑이중인 근위대 요원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 하심 예킨터스라는 생도가 신분확인을 하고 지나가지 않았나?”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은 유학자 분들이 모이시는 신성한 곳입니다.”

“썅, 이 새끼가 말이 안 통하네!”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심은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나 가방을 둘러메고 2층 자료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기다! 저 여자 잡아!”

십여 명의 근위대 요원들이 앞을 가로막는 보안요원들을 강제로 떠밀고 지부 안으로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하심은 먼저 도망친 샤드니를 쫓아 자료실로 급히 뛰어들어 문을 무작정 걸어 잠궜다.

“샤드니 님! 여, 여기! 캡슐하고 문서를 갖고 기다리세요! 지놈들이 절 이미 본 것 같아요! 지금 저만 따라오고 있으니 전 이 가방을 메고 녀석들을 따돌릴게요! 공주저하 수행원들 오거든 아기를 꼭 넘겨주세요!”

캡슐과 문서를 샤드니에게 거의 떠넘기듯 맡긴 하심은 빈 가방을 메고 창문을 넘어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그것들을 떠안은 샤드니는 사람들 달려오는 소리에 급히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눈 깜짝할 새 문을 때려부수고 난입해 들어온 근위대 요원들은 다행히 가방을 메고 도망가는 하심을 쫓아 창을 넘어 달려가고 있었다.

“휴우,”

그들이 사라지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 샤드니는 자신의 손에 쥐여있는 캡슐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주페의 씨로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불쾌감이 퍼뜩 스친 건 그때였다. 그는 앞으로도 코리온의 곁에 그림자처럼 존재할 이 망할 주페의 씨를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페의 피가 섞인 이 망할 계집아이는 곧 죽을 주페의 망령처럼 코리온의 곁에 계속 머무를 것이 확실했다. 이 아이에게 빠져버린 코리온은 어쩌면 자신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설사 소원대로 코리온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해도 자기에게 와야 할 애정을 그 곁에서 영원히 갉아먹을 것이 확실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의 군더더기 아이까지 떠안아야 하지?”

샤드니가 캡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것.”

캡슐을 내려다보며 한참동안 이런저런 갈등, 양심의 가책과 씨름하던 샤드니의 머릿속에는 코리온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주페를 닮은 계집아이의 모습과, 다 큰 이 녀석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자신에게 덤비는 황당한 상황까지, 그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엉켜 돌아가고 있었다. 샤드니가 무언가에 홀린 듯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샤드니, 새 사자가 무리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알아?”

샤드니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자료실 안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쪽 선반을 장식하고 있던 뾰죽한 수석을 손에 단단히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먼저 있던 놈의 새끼를 죽여버리는 일이지.”

수석을 높이 치켜든 샤드니는 눈앞에 있던 태아 캡슐을 온 힘을 다해 내리찍었다.

“그래, 이 길밖에 없어.”

샤드니가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중간이 찌그러든 태아 캡슐에서 비상상황을 알리듯 붉은 등이 깜박대면서 요란스런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기겁을 하고 놀란 샤드니는 캡슐을 또 한번 세게 내리쳤다. 망가진 캡슐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휴우,”

캡슐이 조용해지자 샤드니는 수석을 도로 선반에 올려놓고는 캡슐 창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마음 같아서는 도저히 안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죽은 것을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생각보다 질기군.”

샤드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캡슐 내부용기가 깨졌는지 안에 차 있던 양수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양수 속에서 살아 숨쉬던 자그만 생명은 다가오는 죽음을 피해보려는 듯 끔찍하게 으스러진 몸으로 미약하나마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주페와 코리온 사이의 소중한 생명은 결국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채 이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꺼져가고 있었다.

“이크,”

인기척에 얼른 바깥을 내다보았던 샤드니는 조금 전 자신들을 ‘공주의 수행원’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보안요원을 밀치고 안에 들어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캡슐 주변은 흘러나온 양수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깨진 부품들로 이미 엉망이 되어 정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제기랄, 내가 왜 이랬지?”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샤드니는 이런 공공장소에서 ‘일’을 저지른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부주의를 탓하며 망가진 캡슐을 끼고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욱!”

캡슐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양수에 발이 미끄러진 샤드니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요란스런 소음이 이 조용한 제니안 지부 건물을 뒤흔들었다. 손에서 미끄러져 굴러간 캡슐과 문서를 다시 집으려던 샤드니는 소리를 들은 ‘공주의 수행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서가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망할!”

“무슨 소리야?”

느닷없는 굉음에 자료실로 달려 들어온 그들 다섯 명은 자료실 안쪽 바닥에 부서진 채 뒹굴고 있는 캡슐과 웬 문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맙소사!”

“세상에! 어떤 놈 짓이야......이게......”

급히 캡슐에 달려들며 뚜껑을 열어 본 한 사람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트, 틀렸어......”

“이걸 어쩌지?”

“근위대 새끼들 짓인가? 이미 도망갔나 본데.”

나머지 한 명이 격앙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제기랄, 아씨께 뭐라 말씀드리지?”

‘공주저하’가 아닌, ‘아씨’라는 말에 서가에 숨어있던 샤드니의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고 있었다. 저들의 발음과 생김새, 말하는 태도로 보아 저들은 공주 수행원을 사칭한 북부 녀석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범인’을 찾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벌벌 떨던 샤드니는 옷자락을 들어올려 얼굴을 감추고 잽싸게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저기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겁을 한 그들은 창을 넘어 2층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샤드니를 쫓아 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잡아!”

얼떨결에 바닥에 뛰어내린 샤드니는 쫓아오는 북부 요원들을 피해 지부 뒷편, 작은 정원으로 무작정 뛰쳐들었다. 소리를 내지르며 추격하는 그들을 피해 결사적으로 내달려 야트막한 언덕과 담을 뛰어넘은 그의 눈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대로가 들어왔다.

“휴우!”

거친 숨을 헐떡이며 대로에 확 뛰어든 그는 사람들 틈에 숨어 그들의 눈을 빠져나가며 망연한 얼굴로 대로를 바라보는 북부 요원들을 마음껏 조소하고 있었다.

“젠장할,”

북부 요원들의 손을 가까스로 빠져나가 헐떡이며 골목에 들어선 샤드니는 가쁜 숨을 잠시 가다듬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그의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몰골로 죽어가던 그 손바닥만한 아기의 되새기기도 싫은 모습이 떠돌고 있었다. 격앙된 감정에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한 걱정이 갑자기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심이 자신에게 캡슐을 맡기고 떠났으니 자신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의심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엉?”

생각없이 손을 펴 본 샤드니는 손바닥과 팔뚝에서 흐르고 있는 꽤 많은 피에 지레 놀라고 말았다. 캡슐을 부수면서 튀어오른 파편에 다쳤던가 아니면 급하게 끌어안고 도망치다가 부서진 금속 모서리에 베인 모양이었다.

상처를 말없이 바라보던 샤드니의 입가에 갑자기 악마적인 엷은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별 수 없지.”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그 예리한 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술을 살짝 깨문 그는 칼로 자신의 몸 곳곳을 긋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며 그 아픔을 참아낸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왼쪽 옆구리에 단검 끝을 살짝 박아넣었다.

“이이익,”

지독한 고통에 주저앉아 잠시 신음하던 그는 단검을 뽑아 다시 칼집에 꽂아넣었다. 이제 그의 몰골은 영락없이 누군가와 거친 싸움 끝에 가까스로 탈출한, 끔찍한 피투성이의 꼴이 되어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옆구리를 꽉 쥐고 비틀거리며 대로로 돌아나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서는 낮은 신음인지, 자기최면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모디아크는 북부놈들 손에 죽은 거야, 그렇지? 샤드니? 북부놈들 손에 죽은 거야.......”

피를 흘리며 길가에 나동그라진 그의 주변으로 놀란 표정의 행인들이 우루루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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