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79화 (278/1,132)

< -- 279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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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갑자기 코리온을 찾아온 샤드니가 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읽던 책을 옆으로 치워놓은 코리온은 샤드니의 진지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얼 말이냐?”

“이제 가문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하니.......처음에 말씀하셨던대로 두겐 형님 대신 제가......”

“최고제후 말이냐? 그때 상의한 바로는 두겐이 가문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때 차선책으로 네가 최고제후가 되겠다고 했던 것 아니었나?”

얼굴이 조금 붉어진 샤드니가 호소하듯 말했다.

“아시다시피 두겐 형님은 너무 단순하시고 생각도 깊지 못하시니......”

미처 다 끝맺지도 못한 샤드니의 말을 코리온이 다시 가로막았다.

“물론 두겐 공은 내가 원한다면 기꺼이 네게 최고제후직을 선양할 사람이다. 하지만 넌 4차 혼란기 이후로 200여년 간 가문 내에서 요주의인물로 꼽히다가 이제 겨우 가문의 요직을 차지한 것 아니냐? 두겐 공에 비해 가문 내 기반도 취약하고.....날 곁에서 보좌하는 것도 벅찰 것인데 최고제후까지 맡는 건 무리가 있지 않나 싶구나.”

코리온이 최고제후 교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샤드니의 표정이 조금씩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코리온은 그런 샤드니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며 말했다.

“계획대로 된다면 넌 황제의 정식 배우자로 황후위에 올라 황궁에서 날 보좌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자리는 어차피 다른 일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네가 최고제후에 뜻을 둘 이유가 없어 보이는구나. 이해하겠느냐?”

“예......알겠습니다.”

샤드니가 마지못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도굴범 수사는 어찌되어 가느냐?”

“아직은 별다른 진척이 없지만.....빠른 시일 내로 잡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학장실을 나선 샤드니는 학장실 문 앞 하심의 책상을 청소하고 있던 라스를 곱지 않은 눈으로 한 번 쏘아보았다. 코리온의 요구로 마지못해 소유권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서부로 돌아오자마자 목을 매달아 죽여 버리려 했던 놈이었다. 샤드니의 살기어린 눈초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라스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힙겹게 눈을 뜬 하심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익숙한 회색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얼굴 한쪽이 얼얼한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를 않았다.

“다행이요, 생각보다 의식을 빨리 찾아서.”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본 하심은 자신이 여전히 허름한 움막 안에 누워있음을 발견했다. 자신의 집안을 새삼스럽게 다시 둘러본 카렐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가 ㅤㅋㅞㄹ크의 내 집이라오. 뭐 그다지 볼품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내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구려. 방법은 조금 해괴했지만.”

카렐은 얼굴 한쪽과 왼팔, 한쪽 다리에 드레싱을 댄 하심을 조심스레 일으켜 주었다. 하심이 그제서야 가까스로 첫 입을 떼었다.

“어떻게 아시고......”

“부하 녀석 시켜서 황궁에서부터 뒤쫓았소. 루토 녀석한테 감사해야 할거요. 댁 구하느라 그 친구도 양손에 제대로 화상을 입었거든.”

“다리가......”

카렐은 하심의 다리를 덮은 얇은 망사 담요를 들추며 말했다.

“보다시피 왼쪽 종아리가 완전히 으스러졌어요. 뼈가 8조각 나 있더군. 화상도 심하고......상태가 조금만 더 심했다면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을 거요. 왼팔은 단순골절이니 심하지 않고......화상이 심하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으니 염려 마시구려.”

몸 상태를 설명해 주는 카렐의 말을 듣는 것인지 아닌지 하심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카렐이 그런 하심을 품에 꼭 껴안으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자자, 이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아요. 여긴 우리 본부 마을이고 우리 전사단 병사들하고 가디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요. 제네르하고 자이납도 저 밖에 있고. 안심하고 푹 쉬어도 될 거요.”

하심은 그나마 성한 오른손으로 카렐의 목을 꼭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제네르와 아메스, 자이납, 루토가 움막 안에 들어섰다.

“으, 흠.”

카렐의 품에 안겨 있는 하심을 눈앞에서 본 아메스의 표정이 순간 붉으락푸르락 해지고 있었다. 하심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혀 준 카렐이 루토를 돌아보았다.

“이런, 이런, 내 밑에서 처음 받은 임무에서 부상을 입어 오다니,”

“그냥 액땜이라고 해 두죠.”

루토가 화상 패치를 댄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어떤 놈들 소행인지는 알아냈나?”

“예킨터스 교리께서 그곳에 오시기 1시간 전에 적어도 30명은 되는 도적들이 먼저 마을을 습격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마을 인근 대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도적떼’라는 말에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30명? ㅤㅋㅞㄹ크에 큰 도적떼는 이미 다 소탕된 줄 알았는데? 30명이나 되는 무리가 남아 있었다고?”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ㅤㅋㅞㄹ크의 도적소탕을 담당했던 자이납이 냉큼 대답했다.

“게다가 서부정글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아서 그렇게 큰 도적떼는 원래부터 있지도 않은 곳입니다. 기껏해야 열 놈 정도 패거리가 고작이죠.”

“그럼 거기서 교수를 공격한 놈들은?”

“유전자 분석 결과 ㅤㅋㅞㄹ크 원주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렐이 턱을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심 역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놈들은 진짜 이곳 도적일지 모르지만 그곳을 먼저 습격한 놈들까지 모두 이곳 놈들이라는 법은 없지.......어쨌든 계속 조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무언가 머리에 떠올랐는지 큰 한숨을 내쉰 하심이 집 한구석에 있는 불에 탄 자신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 소중한 문서들하고 유골을 모두 잃었으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학장님을......”

피식 웃음을 지은 카렐은 하심의 병상에 바싹 붙어 앉으며 불에 그을린 금속 상자를 번쩍 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요? 다행히 내용물은 별 이상 없더군.”

그제서야 눈이 번쩍 뜨인 하심은 카렐이 그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금속 탱크 안에 잘 보관되어 있던 주페 태자의 시신 조각은 온전한 형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표정이 굳어진 하심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편지하고 유언장은 불에 타 버렸으니......”

“내 마법을 부려서 타 버린 재에서 유언장을 감쪽같이 복원해 냈소이다.”

카렐이 씽긋 웃으며 품속에서 끄집어 낸 두루마리와 빛 바랜 파란색 편지를 하심의 눈앞에 내밀었다. 순간 어리벙벙해진 하심은 카렐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카렐은 하심의 타 버린 가방과 이젠 재가 되어버린 내용물을 그의 앞에 내보였다.

“내 그래서 가기 전에 나한테 연락 좀 하라지 않았소? 난 최소한 가는 도중에는 편지를 한번쯤 확인해 볼 줄 알았더니, 가방에 쟁여 넣기만 했지 한번 들쳐 보지도 않았구려? 학장이 잔뜩 기대했을 텐데, 기껏 식당 영수증 꾸러미를 받아 봤다면 얼마나 기가 막혀 했을까,”

그제서야 자신의 가방 안에서 카렐이 편지와 두루마리를 미리 바꿔치기 했음을 깨달은 하심은 아메스의 곱지 않은 눈길도 아랑곳없이 또 한번 카렐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전하, 파예드의 코리온 리쿠 학장님입니다.”

문을 열고 고개를 디민 우베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카렐에게서 급히 떨어진 하심이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학장님께서도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할룩스를 연결시켜 주며 우베가 눈가를 쫑긋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연결되자마자 모습을 나타낸 코리온의 얼굴에서는 이미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우베를 통해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카렐이 중상을 입은 하심을 가리키며 말하자 코리온이 대뜸 그에게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네놈 자작극이 아니라는 걸 내 어찌 믿는가? ㅤㅋㅞㄹ크는 네놈 영향권 아닌가?”

“자작극도 득이 있어야 벌이는거지 이런 걸로 제가 무슨 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카렐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편지들도 어머님이 드린 거고, 유골 존재도 제가 알려 드린 건데 새삼스럽게 탐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카렐이 문서들과 금속제 탱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의 코리온이 카렐 옆에 누워 있는 하심을 돌아보았다.

“예킨터스 교수는 언제쯤 워프비행을 할 수 있는가.”

“다른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23일 정도에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들은......안전보장만 해 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제 사람 편에 학교로 보내드리죠.”

“알았다.”

오만하게 대답한 코리온은 그대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 코리온의 방자하기까지 한 태도에 제네르가 여전히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카렐이 그런 제네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키지는 않겠지만......의미 있는 물건들이니 자네가 파예드에 직접 좀 다녀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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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오르마즈는 깨질 듯한 두통으로 잠시 멍 한 상태였다. 그런 오르마즈의 눈앞에 물약이 든 컵을 불쑥 내민 건 이젠 황후가 된 동생 세네피스였다.

“고맙다.”

형식적으로 중얼거린 오르마즈는 동생이 내 준 술 깨는 약을 벌컥 들이켰다.

“마에두 형부가 걱정이 태산이더군요. 언니가 계속 술독에 빠져 산다고.”

“내가 언제는 술 안 처먹고 살았나.”

오르마즈가 침대 기둥을 붙들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세네피스 황후가 그의 손을 꼭 붙들며 간곡하게 말했다.

“이젠......절 도와주세요. 제발. 예? 언니. 제발.”

한숨을 푹 내쉰 오르마즈는 황후 침실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1번 도시의 전경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꿇어앉은 황후는 오르마즈의 거친 손에 뺨을 부비며 말했다.

“이런저런 일들 많았지만......결국 절 정말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라는 거 잘 알아요.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다른 언니나 오빠들도......결국은 절 이용하려는 것뿐이라는 것도......”

“장태자하고 타니토 태자 운명은 어차피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지만.....주페 태자하고 코리온 대군은 어떻게 된 거냐?”

황후의 할룩스가 갑자기 울린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혹스러워 하는 쿠베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주페 태자 저하께서 서부로 돌아가시기 전에 황후 폐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어떡할까요?”

순간 불안한 듯 눈가를 찡그린 세네피스 황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모셔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즉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르마즈가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동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 따라오세요.”

앞장서는 동생을 따라 오르마즈가 들어선 곳은 황후 침실과 연결된 작은 알현실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이 작은 방에는 황후가 앉을 수 있는 크고 화려한 의자 한 개가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코리온 대군과 태자를 어찌할 거냐고 물었다.”

오르마즈의 거듭된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세네피스는 갑자기 언니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여 주었다. 술기운으로 아직 흐릿하던 오르마즈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너......미쳤구나!”

아연질색한 오르마즈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대체......태자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리겠냐!”

“비참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아니긴! 그게......”

더 소리를 지르려던 오르마즈는 알현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두 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에 둘러싸인 주페가 단정한 태도로 서서 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오르마즈가 주페에게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세네피스 역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찾아온 주페를 맞고 있었다. 알현실 안에 들어온 주페가 작은 목소리로 오르마즈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황후 폐하와 독대하고 싶습니다만.”

동생과 주페 태자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오르마즈는 그냥 밖으로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그 둘을 놔둔 채 알현실을 나선 오르마즈는 주먹으로 벽을 힘껏 후려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벽에 이마를 기댄 거칠게 떨고 있는 그의 두 눈으로 굵은 눈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희 둘도 결국은 그 저주를 못 벗어나다니......”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오르마즈의 입가에서는 반쯤 뭉개진, 희미한 목소리가 계속 반복해 흘러나왔다.

“제발......이 저주스런 눈동자가 세상에 또 나오지만 않기를......”

바닥에 이마를 기댄 오르마즈의 양 어깨가 울음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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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입니다.>

현재 어덜트에 연재중인 내용을 삭제하겠습니다. 불펌 사이트에 관련되어 몇가지 안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 문제로 더이상의 어덜트 연재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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