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0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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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를 내보낸 세네피스는 조카의 죽음의 대가로 사면을 받게 된 주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페 역시 꽤 한참 동안 그의 눈을 말없이 올려보고 있었다.
“원하시는 대로......해 드리겠습니다......대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주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페의 침통한 표정에 세네피스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뭘 원하는데요?”
“......”
“못할 것도 없죠.......하지만......저도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자신의 가슴 앞에 바싹 다가선 황후를 올려보며 주페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주페의 귀에 입술을 가져간 세네피스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결코 거부할 수 없으실 겁니다......”
뒤로 돌아선 세네피스는 이곳과 연결된 모든 방의 문을 잠가버렸다. 세네피스의 속을 눈치챘는지 주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세네피스가 또 한번 바싹 다가서자 주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지하 11층의 특별 감방에서 초죽음이 된 채 참혹한 죽음만을 기다리던 코리온을 만나고 온 주페의 무명포 자락에는 군데군데 그의 피가 묻어 있었다.
“사람이 많이 따를 인상이시군요.”
세네피스가 주페의 유난히 큰 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런 세네피스에게 주페가 대뜸 입을 열었다.
“제가 반역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면 코리온을 살려주실 겁니까?”
세네피스가 순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뭐라......하셨습니까?”
“제 목숨을 드릴 테니 대신 코리온을 풀어 주십시오. 책형이든 화형이든 제가 사형대에 설 테니......”
주페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세네피스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가 예상했던 주페의 요구는 기껏해야 코리온에게 은사나 감형을 내려 달라는 정도였지만 주페는 그 대신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은 것이었다.
세네피스가 뒤로 휙 돌아서며 쌀쌀맞게 말했다.
“괜히 오시라 했군요. 빨리 서부로 돌아가십시오.”
“어차피 서부를 대표해 죽을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눈을 내리깔은 주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돌아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세네피스가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제가......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전 태자 저하를 어떡해서든......”
“불의와 타협하고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선례는 절대 남기지 않겠다 이미 말씀드렸는 줄 압니다.”
“당신은 할만큼 했습니다! 저희와 타협하지도 않았고......”
뒤로 휙 돌아서며 주페의 가슴 앞에 바싹 다가선 세네피스가 거의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세네피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페가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아니, 당신의 가문은 황제이신 어머님을 시해했고, 제국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동생 모디아크를 독살해 자살로 위장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치세 하에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며 살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왜요! 그럴 거면 코리온 그 애는 왜 살려달라는 겁니까! 왜 잘난 당신만 순교자가 되겠다고 이 오만을 부리는 거냐구요!”
“앞으로 저의 뜻을 받아 그런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주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런 주페를 똑바로 노려보며 세네피스가 쏘아붙였다.
“궁색하시군요.”
“압니다.”
주페의 너무도 솔직한 대답에 세네피스가 도리어 할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긴 갈색 눈썹에 이미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힌 주페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학자의 잉크가 순교자의 피보다 더 진하다 하였으니......이제 그 아이가 살아남아 먼저 죽은 제 피를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겠죠. 순교자는 저 하나로 충분하니 그 애는 제발 살려주십시오.”
“못합니다!”
세네피스가 다시 악을 쓰며 언성을 높이자 주페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어차피 서부로 돌아가면 제 손으로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
“미쳤군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세네피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페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말았다. 뺨을 맞은 주페는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여전히 눈물만 글썽이고 있을 뿐이었다. 주페의 앞에 힘없이 주저앉은 세네피스 황후는 그의 무명포자락을 꽉 움켜쥔 채 거친 호흡만을 몰아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게......이게 아니었는데......이런 건 아니었는데......”
“같은 유학자로서......당신도 절 이해해 주실 수 있겠죠. 동의는 못하더라도......”
세네피스의 앞에 천천히 꿇어앉은 주페는 흐느끼고 있던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페는 떨리는 입술로 말을 꺼냈다.
“코리온이......당신을 많이 미워하게 되겠군요......누군가 잡아 주지 않으면 그 애는 이제 광적인 원리주의자가 되겠죠......그래도 그 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애도 언젠가는 제 뜻을 깨달을 테니 무슨 짓을 해도 포용해 주십시오.”
세네피스는 주페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이 고집쟁이 남자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이 현실을,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요.”
주페의 가슴에 기댄 채 거칠게 떨고 있던 세네피스가 그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소원대로 해 드리지요.”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세네피스의 시선에 주페가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제 마지막 부탁은 들어주십시오. 그마저도 거절하신다면, 당신이 서부에서 자결을 하든 말든, 전 코리온 그 아이를 목판에 못박아 죽여버릴 겁니다. 어차피 제가 못 가질 남자라면.......남에게만 그 좋은 추억을 남기지는 않겠습니다.”
눈을 부릅뜬 세네피스가 주페에게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제게도, 그 녀석에게도 당신이 남긴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
주페는 황후 침실의 문을 열며 자신을 돌아보는 이 여인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세네피스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평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로 남을 이 매혹적이고도 잔혹한 여인을 더듬거리며 품에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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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몇 달 전 40명이 넘는 동지들을 잃었던 파예드 아카데미에 결국 다시 발을 들여놓은 제네르는 그 참혹했던 지하 대강당과 ‘사단의 탑’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중 나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셔틀에서 내려선 제네르는 그 콧대높은 코리온이 몸소 주기장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대뜸 빈정거렸다. 유학자의 성장을 차려입은 제네르는 문서와 유해 상자가 얹혀 있는 검은 빌로오드를 두 손에 곱게 받쳐들고 코리온 앞으로 다가섰다. 사뭇 차가운 시선으로 제네르를 내려다보던 코리온도 그에게 쏘아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하크로딘 교수를 마중하러 나와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요.”
“어련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퉁명스럽게 받아친 제네르는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앞장서는 코리온을 따라 탑 안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꼭대기의 학장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코리온도, 제네르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학장실에 코리온과 단둘이 들어선 제네르가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샤드니 경이 없는 것이 뜻밖이군요.”
“교수가 상관할 바 아니요.”
코리온이 상석에 자리잡고 앉으며 제네르에게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의 앞에 꿇어앉은 제네르는 가져온 빌로오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덮여 있던 천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코리온의 손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선명한 금속 상자로 제일 먼저 향하고 있었다.
“이, 이런......”
살점이 그대로 붙어 있는 뼛조각을 눈앞에 마주한 코리온은 잠시 숨을 멎었다. 옛 연인의 시신에서 일부나마 되찾은 코리온은 사뭇 밝은 표정으로 병을 일단 옆에 내려놓았다.
“이 두루마리는 황후 폐하께서 처음 입수하셨을 때 무엇인지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내용을 잠깐 보셨던 것으로 압니다.”
두루마리의 뜯긴 봉인을 보며 얼굴을 찡그린 코리온에게 제네르가 짧게 덧붙였다. 220년만에 주페가 남긴 비단 두루마리를 펼친 코리온은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제네르 앞에서 눈물을 애써 보이지 않으려는 듯 그는 붉어진 눈을 그대로 부릅뜬 채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아주 ‘개인적인’ 글이로군.”
글씨 위를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코리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무릎 위에 소중하게 올려놓은 코리온은 마지막으로 파란색의 편지를 집어들었다. 주페 태자의 지문이 선명한 봉인을 꼼꼼하게 확인해본 코리온은 편지에 다른 사람이 뜯어본 흔적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칼을 집어들고 봉인을 잘랐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을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들었다.
“허......허, 헉.......”
코리온의 느닷없는 신음소리에 깜짝 놀란 제네르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코리온의 두 손이 마치 경련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거의 울먹이는듯한 표정의 코리온은 결국 편지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무슨......잘못이라도......”
당황한 제네르가 급히 물었지만 멍 한 표정의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충격에 휩싸여 있는 코리온을 앞에 둔 채 제네르 역시 그대로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주페 태자가 내게 남긴 글이다.”
남극성당을 찾아온 카렐에게 황후가 파란색 편지를 넘겨주며 말했다.
“봐도......됩니까?”
“이제와서 네 앞에 감출 것도 없겠지.”
황후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빛바랜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읽어 내려가던 카렐은 입을 쩍 벌린 채 어머니를 휙 돌아보았다.
“이, 이게......”
창 밖을 내다보던 황후는 몇 번이나 읽었는지 이 장문의 편지 내용을 그대로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당신의 시신과 입던 옷가지, 유전자 은행에 보관 중인 세포는 딸 모디아크와 함께 화장해서 학교 부근에 묻어 달라 되어 있지.”
“하지만 시신은......”
“그래. 리쿠 학장이 그랬지.”
황후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학장에게는 그동안 편지가 전달되지 못했으니 학장은 당연히 시신을 태자의 평소 뜻대로 학교 부근에 매장했겠지. 그래, 나도 인정하마. 태자 시신을 화장하는 건 나도 원치 않았어. 그래서 태자의 유지를 뻔히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 그 뒤의 내용들은......”
카렐도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황후가 카렐에게 돌아서며 침착하게 말했다.
“두 번째는 새 태자가 태어나면 파예드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리쿠 학장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라는 거지. 그 둘이 각별한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고......빈 주페 태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황후는 차마 말을 더 잇기가 부담스러운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씁쓸한 표정의 황후는 한숨만 계속 내쉬었다. 어머니의 비밀을 알고 만 카렐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황후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2세가 혼자 남을 리쿠 학장의 새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하지만 다 헛된 바램이 되고 말았구나......아이는 유산되었고.......아이 때문에 썼던 이 편지도 결국은 학장에게 전해 줄 이유가 없어져 버린 거였지.”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본 카렐이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세 번째를 보니 그분의 뜻이 단순히 학장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군요.”
“나와 학장이 화해하라는 것 말이냐? 복수심에 미친 학장이 행여 조금 과한 짓을 해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그래, 그렇긴 하지. 나와 당신의 피가 모두 섞인 태자를 리쿠 학장의 곁에 가까이하게 되면 나와 학장도 결국은 자연스레 화해하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랬겠군요.”
카렐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표면에서 염분이 느껴지는군요......쓰면서 땀을 많이 흘리신 모양입니다. 아니면.....눈물이던지......”
황후는 편지를 읽고 있는 딸 쪽으로 문득 시선을 돌렸다.
제네르가 넘겨주고 간 병을 어루만지며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코리온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짐짓 표정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문이 열리고 허리를 굽힌 채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콜로니 아카데미 인공수정실 책임자였다. 기자재가 가득 들어있는 듯 한 큰 상자를 들고 들어온 그는 코리온에게 큰 절을 올리며 자리에 꿇어앉았다. 코리온은 그의 앞에 제네르가 가져온 병을 내놓았다.
“이것이로군요.”
코리온의 손에서 병을 받아든 의사는 병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는 조심스럽게 그 뚜껑을 열었다. 조금은 역한 보존액 냄새가 학장실 안에 퍼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상태가 꽤 좋사옵니다.”
병 안에 집게를 집어넣은 의사는 비교적 성한 부분에서 살점 약간을 채취해 가져온 작은 캡슐에 넣어 단단히 밀봉했다.
“됐습니다.”
병을 밀봉해 코리온에게 돌려주며 의사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이걸로 새 생식세포를 만들면 되겠습니까?”
“생각이......조금 바뀌었다.”
병을 움켜쥔 코리온의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생식세포를 만드는 일은 일단 접고......”
“예?”
뒤로 돌아선 코리온은 자신의 옷장 속을 급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내든 건 다름 아닌 주페 태자의 쿠크리였다. 칼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피던 코리온은 손잡이 끝의 술 부분에 묻어있는 선명한 혈흔---바로 자신이 이 칼로 카렐을 쳤을 때 튀어 올랐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코리온은 칼끝의 술을 풀어내더니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의사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 혈흔의 주인과 주페 태자저하와의 관계가 어찌되는지 밝혀내서.....최대한 빨리 내게 알려다오. 최대한 빨리. 대신......이곳 서부에 있지 말고 동부나 북부로 가서 검사하도록 해라. 내 머물 곳을 알아봐 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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