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2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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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구경꾼들이 모두 사라진 황궁 앞 초승달 모양 광장에는 널린 쓰레기들과 많지 않은 지각 구경꾼들이 어슬렁거릴 뿐 음산한 분위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광장 한쪽 담 옆에 빨랫줄처럼 걸쳐진 긴 막대기에는 추종자들의 참수당한 머리 105개가 각각의 죄목이 붙은 채 걸려있었고, 몸통은 한쪽의 큰 나무상자에 방치된 채 구경꾼들의 비웃음과 조소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높은 계단 위에는 원래대로라면 코리온이 책형을 받으면서 못 박혀 세워졌을 높고 큰 나무판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조금 더 위에는 3명의 태자들의 시체가 몸통과 머리를 붙여놓는, 태자로서의 최소한의 대우를 받은 채 3개의 돌기둥에 높이 걸려 있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삼십여명의 근위대 병사들의 임무는 명목상으로는 시체를 훼손하려는 정신나간 놈들의 접근을 막는 것이었지 시신을 거두어가려는 유가족들을 막는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처형이 끝난 지 채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이 시각에 감히 시신에 접근해 그 수습을 시도할 정신나간 가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자들의 부계가문인 클라투스 가문이나 세닉 가, 세호 가도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감히 돌기둥에 제일 먼저 뻔뻔스럽게 접근한 미친놈들은 그들 가문 귀족들이 아닌, 검은 무명포 차림의 서부 유학자들이었다. 근위대 병사들의 곱지 않은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주페의 시신이 매달려있는 돌기둥에 기어오른 하심이 가슴을 죄고있던 철선을 풀자 밑에서 붙들고있던 두 명의 생도들이 그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받아 미리 깔아놓은 삼베포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주었다.
“숙부님.....”
처참한 몰골로 이동의자에 앉아있던 코리온은 샤드니의 부축을 받으며 죽은 주페의 앞에 가까스로 꿇어앉을 수 있었다. 손가락은 다 잘려나가버린 손바닥으로 숙부의 시신을 더듬던 코리온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 차가운 시체에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부릅뜬 채 죽음을 맞았던 그의 눈은 누군가 친절하게도 눈꺼풀을 덮어놓은 후였지만 코리온을 바라보며 흘렸던 마지막 눈물자국은 이미 하얗게 굳어있는 그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제.....전 어떡하라고.......”
주페의 검푸른 입술에 울먹이며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코리온은 그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온몸을 거칠게 떨고있었다. 주페의 왼손을 더듬더듬 내려간 코리온의 손은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푸른색의 페리도트 반지에 멎었다. 주페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었던 그 반지는 무슨 이유엔지 이미 반쯤 빠져있는 상태였다. 하심이 반지를 뽑아 코리온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학장님께 일부러 남기신 것 같습니다.”
하심에게 받아 쥔 그 반지를 겨우 한마디 남아있던 자신의 왼손 약지에 깊숙이 끼워 넣으며 코리온은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가 반드시 복수해드리겠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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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은 당혹해하는 샤드니를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주페의 핏줄에 그리도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에 속상해했을 샤드니의 심정을 그로서도 이해 못한 것도 아니었고, 카렐의 존재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암담했을 그의 처지를 짐작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간의 행적이 들통나버린 샤드니는 훔쳐간 주페의 관도 당장 되돌려놓겠다며 그의 앞에 꿇어앉아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짓쪼며 싹싹 빌었고, 코리온으로서도 그렇게까지 울며 용서를 비는 샤드니에게 차마 호된 꾸중 이상의 처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샤드니를 돌려보낸 코리온은 어느새 잔뜩 흐트러진 학장실 안을 허탈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라스!”
코리온의 부름에 학장실 밖에서 졸고 있던 라스가 허둥지둥 안에 달려들어왔다.
“내 목욕재개하려 하니 목욕물을 준비해다오.”
“예? 아, 알겠습니다.”
“그동안 넌 방 안을 깨끗이 치워놓거라.”
라스가 준비해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코리온은 복수심 하나만으로 살아왔던 지난 220년이 넘는 세월과, 자신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세네피스 황후에게도 주겠다며 카렐을 죽이려 광분했던 근 몇 달간을 새삼스레 다시 머리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손등을 다시 올려보았다. 중독으로 검게 변해있던 살은 언제부터인가 꽤 많이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약지에 항상 보이던 주페 태자의 연두색 페리도트 반지는 어디로 갔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신의 거무스름한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이를 꽉 악물었다.
“이제야 당신을 이해하겠군요......저도 이제 같은 길을 가겠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라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깨끗한 새 옷으로 모두 갈아입은 코리온은 학모까지 눌러쓴 단정한 성장을 한 채 자신의 탁자로 돌아왔다. 한쪽의 서가에서 큰 종이를 꺼내든 코리온은 그것을 바닥에 넓게 펴 놓고 붓과 벼루, 먹을 차례대로 그 옆에 내려놓았다. 직접 정성스럽게 먹을 갈며 코리온은 여전히 같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가있거라.”
라스를 내보내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코리온은 자신의 큰 붓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그의 평소 글씨체대로, 힘이 넘치는 큰 초서체로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 5일간 북부지역을 비롯해 황제령과 동부에서 들어온 지원병은 모두 2만 1천명입니다. 보병지원자는 만 5천명이고 기병지원자가 6천명입니다. 기병은 대부분 2차 혼란기나 291년에도 참전했던 경력자들이어서 당장 전력화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보병지원자 중 6천여는 전혀 훈련을 받은 바 없는 청년들입니다.”
“나쁘지 않군요.”
아메스의 보고를 침착하게 파일에 정리해 넣으며 카렐이 대답했다.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한 지원자들과 후원금품들로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늘어나 버린 병참부장 아메스의 피곤한 표정은 병부에 속해있는 나머지 사람들의 밝은 얼굴과 사뭇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피곤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아메스가 말을 이었다.
“경력자는 1개월, 무경력자는 3개월의 훈련을 통해 일선부대에 배치할 예정입니다. 기병은 40일간의 적응훈련 후 3천명은 슈로 기사단에, 3천명은 슬레이프니르에 편성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이미 훈련에 들어간 병력들까지 모두 합치면......5월 중순 정도면 전하의 직속병력은 보병 10만과 기병 2만을 합쳐 12만을 넘어서게 됩니다.”
카렐 옆에 앉아있는 제네르와 라손이 휘파람을 불며 서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물론 반대편에 앉은 베아트릭스가 평소같은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의 파일만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꽤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카렐이 시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위대쪽에선 다른 조짐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베흔이 외부문제보다는 집안단속에 바싹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카렐이 내심 가장 크게 원했던 건 로노 장태자시절 시로가 그랬듯 근위대가 단위부대 차원으로 대거 귀순해오는 것이었지만 이미 한 번 당한 바 있던 일이 또 벌어지게 베흔이 놔둘 턱이 없었다. 시로를 비롯한 근위대 고급가디언 출신들로 나름대로 공작을 펼치고 있기는 했지만 태자선언을 한지 채 5일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참 서슬퍼런 분위기의 근위대에서 당장 어떤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도 조금 이른 것이기는 했다.
“아메샤 스펜타 군단이나 근위대 남부파견군과 틈나는 대로 한번 직접 접촉해봐야겠다.”
자신이 지휘했던 옛 부대를 머리에 떠올린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장태자선언’ 직후 불안감을 느낀 베흔이 제일 먼저 메스를 들이댄 곳이 바로 이 두 부대들이었다. 아메샤 스펜타 군단은 선언 직후 북극으로 주둔지가 급히 이동되었고 자신이 남부파견군 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 측근들은 모두 좌천되어 한직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남부파견군이 많이 소속되어있는 이곳 ㅤㅋㅞㄹ크 토벌군 쪽에도 관심을 두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남부 파견군 출신들이니 동시에 동요하는 상황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냉큼 입을 연 건 루토 녀석이었다. 근위대 중앙본부와 보안국, 아메샤 스펜타 군단 참모장과 베흔의 직속 참모직 등등을 두루 거친 엘리트형 가디언인 루토는 근위대 1급에서도 특등급에 가장 근접해있는 녀석 중 한 명이었고, 독자적인 지휘능력과 공작능력, 리더쉽을 고루 갖춘 근위대 최고의 재원 중 하나였다.
“그래......그럴 거야. 어차피 그놈들이 그놈들이니까......한동안은 토벌군들과 교전은 최대한 피하도록 해.......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결국은 효과가 나올 테니 조금만 참아봄세.”
믿음직한 옛 부하의 조언에 카렐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라마단이 끝나면 나와 제네르, 베아트릭스 경은 탈라스로 돌아가야 할 테니 그동안 이곳은 조페와 루토 자네들이 책임지고 맡아주게. 탈라스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오는 대로 그 뒤에는 황제령에서 대결이 벌어질 테니.”
“예! 알겠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오두막에 돌아온 카렐에게 하심이 불쑥 말을 건넸다.
“이렇게 많은 비가 오는 건 처음이네요.”
천둥번개가 치는 모습에 깜짝 놀란 하심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엔간해서는 비가 오지 않는 서부에서 250년의 삶을 살아온 하심에게는 하늘을 찢을 듯이 내려치는 열대의 뇌우가 꽤나 무서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오두막 앞의 카우치에 앉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는 하심의 손에는 카렐이 선물해 준, 희귀한 고문서 필사본들이 잔뜩 쥐여있었다.
“서부에선 그렇겠죠. 금새 멈출 테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요.”
하심의 카우치를 조금 안쪽으로 당겨 빗물을 피하게 해 준 카렐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으며 함께 하늘을 올려보았다.
손에 쥔 필사본과 카렐의 얼굴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았던 하심이 갑자기 물어왔다.
“글씨를 도대체 언제 배우셨죠?”
하심의 질문에 카렐이 갑자기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배우긴 뭘 배웠겠소. 그냥 사람들 쓰는 거 어설프게 따라 한 거지......후훗. 리쿠 학장의 절륜의 명필만 보던 하심 눈엔 가소롭게 보여도 할 말 없지 뭐요.”
“그래도.....가디언이 고대어를 공부했다는 것부터가......”
“리쿠 학장이 2살 반 때 제일먼저 읽은 책이 소학이라고 했소? 나 태어나 2살 때 제일 먼저 읽었던 책은 ‘어린이를 위한 꽃과 나무가꾸기’ 였다오.”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던 하심이 얼른 입가를 추스렸다. 카렐의 평온한 표정을 잠시 올려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장님을......이해해주세요. 220년이 넘게 복수심 하나만으로 버티어오신 분이세요. 속으로 고마움을 느끼셨어도 쉽게 표현하기는 어려우실 거예요.”
“알고 있소.”
카렐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하심을 내려다보았다.
“아픈 건 좀 참을 만 한 거요?”
“그럭저럭이요.”
하심이 으스러진 자신의 왼쪽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태자로 제대로 크셨더라면 학장님 같은 훌륭한 유학자가 되셨겠군요.”
“글쎄, 제국 제일의 정원사가 되는 게 내 어릴 적 꿈이었으니 황궁 정원은 꽤 예쁘게 다듬었겠지.”
카렐이 자기 집 앞의 잘 가꾸어진 화단을 가리키자 하심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참, 학장님께서 몸에 조금 무리가 가도 빨리 돌아오라고 그러시네요. 그분답지 않은 지시를 내리신 걸 봐서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심이 아직 프레임에 의지해 있는 왼쪽 다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심한 화상으로 물크러들어 패치까지 댔던 얼굴 한쪽과 팔은 이젠 많이 나아져 약과 가벼운 드레싱만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의 위아래를 바라보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조금 무리일텐데......”
“가서 병원신세를 좀 지더라도 어쩔 수 없죠. 내일 그냥 떠나려고요. 학교에서 셔틀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하심의 충직함을 잘 아는 카렐은 학장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몸을 돌보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것 없소. 내 타르서스에서 의료셔틀 한 대를 수배해 줄 테니 그거 타고 가시구려. 좀 느리지만 뭐, 서너 시간밖에 차이 더 나겠소.”
카렐의 호의에 하심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비릿한 비냄새를 가슴깊이 들이키며 카렐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전......”
말을 더 이으려던 하심은 마을 아래쪽에서 비를 피하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우베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우베의 손에는 붉은 벨벳에 곱게 싸인 큼직한 것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게 뭔가?”
눈을 휘둥그레 뜬 카렐이 묻자 우베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리쿠 학장님께서 페로 관 쪽에 급송으로 보낸 것이라 합니다. 전하께 꼭 직접 전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물품이라 되어 있는데 무언지는......”
“리쿠 학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카렐은 하심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벨벳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너무도 뜻밖의 물건이 불쑥 나타났다.
“이게.......”
카렐의 손에는 지난번 제네르 손에 들려 코리온에게 보냈던 불에 그을린 금속제 상자가 고스란히 돌아와 들려있었다.
“이게.....왜.......”
코리온이 보낸 탱크를 다시 열어본 카렐은 그 안에 여전히 들어있는 주페 태자의 유해 조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 뭐가 또 있는데요?”
우베가 안에 손을 밀어 넣더니 자그만 상자 한 개를 꺼내 카렐에게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생각 없이 상자를 열어본 카렐은 그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코리온이 주페의 유해와 함께 보내온 건 그의 손에서 항상 빛나고 있던, 바로 그 오래된 페리도트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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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잘려있던 파일을 앞뒤로 잘못 이어붙여서.....순서가 약간 뒤집혔습니다. 앞에 보
셨던 분들께 죄송합니다. ㅠ.ㅠ
<그래도 추천과 코멘트는 아낌없이 ^^;;;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