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5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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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코리온은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제위도전 포기와, 원리주의 유학자들을 대표해 카렐에게 보내는 지지를 담아놓은 큰 격문은 학장실 서가 한쪽에 잘 말려진 채 세워져 있었다.
오늘 오전에는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들 전원을 불러모아 저 격문을 공개할 비상회의가, 그리고 오후에는 서부의 모든 제후들을 불러모아 가질 큰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곁에서 큰 도움이 되던 하심이 자리에 없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 저녁부터는 평소처럼 든든하게 그의 곁을 지켜줄 터였다.
요즘 들어 종종 샤드니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하심이었지만 자신과 샤드니와의 관계를 빤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대담하게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곧고 우직한 그의 성격 때문일 뿐이었다.
하심의 빈자리를 새삼스럽게 실감한 코리온은 평소에 그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을 조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측근으로 갖은 힘들고 위험한 일은 도맡아 해야 했던 하심에게 코리온이 그간 변변하게 해 준 것도 없었다.
“이 정도면 좋은 선물이 되겠지.”
코리온은 탁자 위에 곱게 접어 올려놓았던 하심의 새 머플러를 펼쳐보았다. 무려 9년이나 늦은 나이에 생도생활을 시작한 제네르가 남극성당에서 상급교수인 직제학까지 승급할 동안 하심은 아직 평교수인 교리에 머무르고 있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하심의 학문적 역량만으로 따지자면 이미 충분히 응교나 상급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정도였지만 남극성당에 비해 원로교수가 많은 파예드 아카데미의 분위기에서 아직 젊은 하심의 승급이 자칫 ‘측근만 배려한다’는 오해의 여지가 있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하심도 그간 스스로의 능력을 많이 증명해 보였으니 이제 이의를 할 인물은 없을 것이 확실했다.
줄 4개가 있는 응교의 머플러를 다시 곱게 접어 탁자 한쪽에 올려놓은 코리온은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학장님,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 응교님이십니다.”
“알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샤드니는 특이하게 검은 무명포에 보랏빛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남극성당의 흰색 무명포 위에 파예드의 보랏빛 머플러 차림으로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들곤 하던 샤드니가 웬일로 완벽한 파예드 아카데미 응교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코리온까지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런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낯설기까지 하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코리온과 가벼운 포옹을 주고받은 샤드니는 그의 조금은 거칠해진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밤 새셨습니까?”
“예킨터스 교수가 없어 모든 걸 혼자 하다보니 그렇구나. 오늘 저녁이면 교수가 카렐과 함께 돌아올 테니 괜찮아질 거다.”
“교수회의와 제후회의를 소집하셨다구요?”
“그래, 이젠 내 뜻을 확실히 해야하지 않겠느냐.”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샤드니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코리온 역시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돌아가 자리잡고 앉았다.
“태자저하께 이미 장성한 자녀가 있었으니.....이제 내가 제위를 탐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자는......”
코리온과 마주앉은 샤드니가 마지막으로 설득해 보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코리온은 그를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내 그 어미의 만행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가문은 이미 거의 멸족되었고 카렐은 그 어미와 무도한 가문의 손을 떠나 키워졌으니.....일단은 지켜보자꾸나. 스스로 유학자들을 포용하는 정치를 하겠다 말했으니 내 태자저하 뜻대로 카렐의 곁에서 바른 길을 잡아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하겠구나.”
“학장님, 제발,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그자가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지른 잔학무도한 자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나간 옛일을 들춰서 뭣하겠느냐. 어려운 젊은 시절을 거쳐 그리되었으나 그 본성은 태자저하를 그대로 닮은 듯 하니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난감한 얼굴로 앉아있는 샤드니에게 빙긋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코리온이 미리 준비한 메모와 일정표를 내보였다.
“학자들은 당연히 내 결정을 따를 것이나 잇속에 밝은 동부와 서부제후들이 문제구나. 내 생각엔 나를 비롯한 학자들은 카렐을 공개 지지하되 서부제후들은 제위문제에서는 일단은 중립선언을 하는 것이 제일 현명할 것 같다. 탈라스의 전쟁은 어차피 전부터 계획되어왔던 것이지만 이런 시기에는 자칫 제위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제위의 향방이 결정될 때까지는 일단 동부와 휴전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제국의 큰 지도를 작동시킨 코리온은 앞에 앉아있는 샤드니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면 서부제후들은 중립을 지키고, 유학자들은 모두 카렐을 지지하고, 동부제후들 역시 사실상 카렐을 지지하니 저 근위대의 무도한 녀석들과 충분히 상대할 수 잇게 될 거다. 그렇게 된다면 먼 옛날 주페 태자저하께서 장태자를 지지하기 위해 구성하시던 그 구도 그대로 되는 것 아니겠느냐.”
굳은 얼굴의 샤드니는 코리온의 설명을 듣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탈라스에 진주한 플라칼 가는 우리의 지원이 없으면 고립되어버리니 그곳 유목민 게릴라들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끌며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리어 남부에게는 그곳에 묶여버리는 자충수가 되겠지. 그리고 때가 되어 동부와 전사단이 총 공세를 개시할 때, 중립을 지키던 우리 서부의 제후세력이 그 때 기습적으로 합세하면 저들도 손쓸 수가 없을 것이다.”
코리온의 머릿속에 이미 새로운 세력구도가 모두 잡혀있음을 확인한 샤드니는 또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코리온이 말하고 있는 것은 먼 옛날, 주페의 기습진공계획의 그대로의 재현일 뿐이었다.
“물론, 그 이상의 자세한 사항은 카렐과 직접 만나 논해야하겠지. 오늘 저녁에 모두 모여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테니 너도 꼭 참석하도록 해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코리온의 말을 듣고있던 샤드니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의 조금은 무례한 태도에 얼굴을 살짝 찡그린 코리온이 샤드니를 올려보며 낮게 쏘아붙였다.
“뭐하는 짓이냐, 샤드니. 내 너를 믿고 모든 것을 논의하고자 하고 있거늘......”
“‘논의’라고요? 이게 지금 일방적인 통고지 논의입니까?”
자신의 앞에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언성을 높이는, 난생 처음 보는 샤드니의 모습에 코리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세부적인 건 너와 상의를 할 것이니......”
“주페 태자저하 시절에 학장님께서 저지르신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코리온의 검은 눈썹이 갑자기 긴장과 함께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샤드니의 푸른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코리온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들어가고 있었다.
“너......네가......감히......”
굳어진 코리온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씰룩거린 샤드니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주페 태자를 억류해서라도 일을 강행해야 한다는 제 조언을 묵살하셨던 겁니다.”
입가에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지은 샤드니가 문밖에 대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모두 들어와라!”
샤드니의 명령에 밖에서 대기하던 무려 이십여 명의 플레렌 가 직속 용병들과 가디언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학장실 밖을 지키던 교리와 라스 역시 이미 그들에게 포박된 채 자리에서 벌벌 떨고있었다.
“네 뭐 하는 짓이냐! 샤드니!”
아직 불편한 다리를 붙들고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코리온의 양팔을 병사 두 명이 거칠게 낚아채 벽에 밀어붙였다. 병사들의 힘에 밀려 벽에 쾅 부딪힌 코리온이 거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네 이놈들! 감히 내게 무얼 하는 짓이냐!”
학장실에 난입한 병사들에게 코리온이 호통을 쳤지만 제대로 된 서부병사들이라면 옴짝달싹도 못할 그 고함소리에 병사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샤드니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샤드니가 망연한 표정의 코리온에게 중얼거렸다.
“소용없습니다. 학장님. 이놈들은 수베르에서 사들인 야만족 용병들입니다. 학장님이 어떤 분인지, 이 학교가 무얼 가르치는 곳인지도 까맣게 모르는 자들입니다.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거친 녀석이니 행여 저항하실 생각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학장실 주변 치안대들도 다 저희가문 파견병력인 것은 아시겠죠?”
“샤드니, 네가......네가 날......”
너무나 충격을 받은 코리온은 용병들 중앙에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샤드니에게 같은 말만을 의미 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두 명의 건장한 병사들에게 붙들린 채 거칠게 저항하고 있던 코리온에게 가까이 다가선 샤드니가 사뭇 밝은 표정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먼 옛날 학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당신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당신이 미워서라거나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죠.”
학장실 중앙에 성큼성큼 나선 샤드니는 이들 용병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지시했다.
“학장실 안에는 4명의 가디언이 항상 상주하도록 한다. 학장실 입구에도 2명의 가디언과 7명의 용병이 상주하며 나머지 용병들은 이 탑의 지정된 위치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도록 해라! 이제부터 이곳에 드나드는 자들은 모두 내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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