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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287화 (285/1,132)

< -- 287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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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표정 좀 풀어. 누가 보면 초상맞은 사람인 줄 알겠다.”

제네르의 농담에도 하심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연신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성치않은 몸을 생각해 안에서 자고 있으라는 권고에도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며 계속 서성거리고만 있는 하심을 카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그래도 워프비행동안 하심의 얼굴이 눈에 띌 만큼 창백해져 있었다. 그것이 워프비행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도 모를 하심의 ‘걱정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가 원인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저렇게 계속 있다가는 도착하자마자 병원신세부터 져야 할 판이었다.

“얼마나 남았나? 베네루스?”

“아직 5시간은 더 가야 합니다.”

“훗, 이거 사람 하나 잡겠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카렐은 창가에서 서성거리던 하심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쪽방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거 참, 저항 한번 안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속으로는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하고있는 게 아닐까요?”

‘서부여인’ 하심에게 내내 눈을 떼지 못하던 우베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리자 제네르가 대뜸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여간, 넌 노상 생각한다는 게 그거냐.”

“아휴, 맨날 나만 갖고 그러셔......아씨......근데......저 유학자 교수님 리쿠 학장처럼 정말 숫처녀시라면서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어?”

제네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우베가 갑자기 두 손을 모아쥐며 쪽방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 원리주의자라서 그런가 품행으로 봐선 솔직히 단장님보다 훨씬 더 유학자다운 건 사실인데요 뭐, 헤헤헤, 애꾸눈에 짝 째진 흉터에 창칼 휘둘러대는 유학자라니.....그런데 어떤 운 좋은 놈이 저런 아리따운 유학자 교수님 처녀딱지를 떼어줄 수 있을까나......숫총각 리쿠 학장하고 숫처녀 교수님하고 딱 맞을 것 같긴 한데 정말로 둘 사이에 아무 일 없었을까?”

“이 망할 놈, 생각한다는 거 발칙한 꼬라지 좀 보게,”

미처 도망가지도 못하고 제네르 손에 붙들린 우베는 이번엔 한두 대도 아닌 수십 대의 꿀밤을 계속 얻어맞고 있었다.

“반지가 잘 어울리시네요.”

쪽방 침대에 누운 하심은 카렐의 약지에 끼워진 페리도트 반지를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카렐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주면 안되는 거요?”

“도착하시면 학장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실 겁니다.”

하심이 피곤한 눈을 비비며 카렐의 손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카렐은 품속에서 파란색 종이에 쓰여진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표지에 주페 태자의 수결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 편지는 이곳에 오기 직전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잠시 들렀던 남극성당에서 세네피스 황후가 건네준 것이었다. 다른 편지와는 달리 수신인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이 편지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던 카렐에게 황후는 ‘리쿠 학장과 만나거든 그 때 열어 보라’며 신신당부를 했던 터였다.

“어머님도 영 이상한 말씀만 하시고......”

씁쓸한 미소를 지은 카렐은 편지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하심의 가슴에 담요를 푹 덮어주며 카렐이 말했다.

“좀 자요. 나도 여기 엎드려 잠깐 눈 좀 붙일 테니. 전같이 내 가슴에 억지로 안겨 자라는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소.”

침대맡에 쭈그려 앉은 카렐은 하심의 손에 얼굴을 가져가며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심이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거기서 그러지 마시고 그냥 저기 누워서......”

카렐의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하심은 카렐의 얼굴을 내리덮은 적갈색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올렸다. 단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순간 동안에 그대로 잠들어버린 카렐은 그 긴 속눈썹을 까딱거리며 엷은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심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약간의 진동에 눈을 뜬 하심은 머리맡에 놓여있는 에너지음료 병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워프비행에서 막 빠져나왔는지 밖으로 별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카렐이 놓아주고 간 음료를 들이킨 하심은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며 쪽방에서 나섰다. 우베와 나란히 서 있던 카렐이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하심을 돌아보았다.

“잘 주무셨소?”

“무슨 일 있습니까?”

카렐과 그 수하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묘한 기운을 감지한 하심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이게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소만......오늘 오전에 리쿠 학장이 직접 소집을 명했던 교수회의가 갑자기 취소되었고......오후에 학장이 제후들을 불러 만나기로 했던 건 늦은 저녁 만찬으로 대체었다고 하오. 말로는 학장의 건강이 갑자기 안좋아졌기 때문이라는데......아까 보아서는 멀쩡한 것 같던데......교수께서 학장에게 한번 직접 연락해보시겠소?”

순간 표정이 파랗게 질려버린 하심은 카렐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셔틀의 할룩스로 다가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학장실의 코드를 입력한 하심은 안에서 나타난 동료 교리의 모습에 그나마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이봐! 학장님 건강이 안좋아지셨다니! 무슨 소리지?”

“벼, 별것 아냐. 지난번 남부에서 다치신 상처가 갑자기 나빠지셔서......”

짐짓 태연하게 대답하는 교리의 입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지금 자네만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시게나.......아참......학장님께서 자네 선물도 준비해두신 모양이야......”

“선물?”

다른 사람이라면 눈이 확 뜨였을 그 말에 하심은 도리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며 되묻고 있었다.

“으, 응, 학장님께서 자넬 응교로 승급시켜주시려고 머플러를 준비해두셨어. 내일부터는 자네에게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겠는걸?”

‘응교 승급’이라는 깜짝 놀랄 소식에도 하심의 관심사는 묘하게 불안해하고 있는 동료 교리의 표정에만 줄곧 멎어있었다.

“학장님 좀 연결해주겠나?......지금 황제령에서 출발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미 아켐의 코앞까지 와 있는 하심이 ‘지금 출발한다’는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카렐과 제네르가 사뭇 굳은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 주무시는데......밤새 뭣 좀 하시느라고 꼬박 새신 모양이야......”

“그래?......그럼 어쩔 수 없지......예정대로 오늘 저녁에 도착할 거라고 좀 전해드려.”

짐짓 웃음 띤 얼굴로 통신을 끊은 하심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깜짝 놀란 카렐이 거의 이성을 잃고 흐느끼는 하심을 꽉 껴안았다.

“왜 그러는 거요? 왜 그래요?”

“학교에 가지 마세요......가지 마시라구요......”

카렐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하심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로 카렐의 소매를 적시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내게 제발 말해달란 말이요!”

카렐의 고함에 그의 회색빛 아름다운 눈동자를 빤히 올려보던 하심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누구 핏줄이신지를 학장님께서 좀 더 일찍 깨달으셨어야 했는데......”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카렐은 품속에 들어있던 편지를 자기도 모르게 더듬고 있었다.

양아버지를 비롯한 5명의 가문 원로들과 50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종가를 바삐 걷고 있는 샤드니는 그 중앙에 위치한 최고제후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야 때가 되었구나.”

양아버지 칼림 플레렌의 격려를 받은 샤드니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찬 시미터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초대 서부 최고제후였던 샤드니의 친아버지 바니샤드 아유브 플레렌 공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하고, 둘째 아들이던 두겐의 아버지 역시 노예폭동세력에 목숨을 잃으면서 셋째 아들이던 칼림은 가문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원로 세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어차피 두겐 그 녀석은 널 가문에 복귀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눈을 부릅뜬 샤드니가 힘있게 대답했다. 칼림이 이 순간 자신을 이렇게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유는 말하나마나였다. 계획대로 코리온을 제위에 올리고 자신이 그 배우자가 된다면, 황후위의 겸직을 금지하는 황실법도에 따라 자신과 코리온과의 사이에 서부최고제후를 물려받을 태자가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칼림이 ‘최고제후 대리’가 되어 사실상 서부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 희한한 가문이 운영되어온 대로, 최고제후를 농락하면서 그들의 기득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샤드니는 큰 돔이 얹힌 최고제후 집무실에 성큼 들어섰다. 안에서 서류를 살피고 있던 두겐은 마치 적진에라도 쳐들어가는 양 들이닥친 샤드니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샤드니는 평소에도 항상 검은 무명포 차림에 파예드 아카데미의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이 사촌형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샤드니가 두겐을 몰아내야 하는 건 단순히 최고제후가 되고 말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코리온이 시키기만 한다면 칼날 위에라도 기꺼이 뛰어들 이 충직한 유학자는 코리온이 변심해버린 지금 서부 최고제후의 지위에 절대 놔둘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웬일이냐, 샤드니?”

“학장님의 명으로 왔습니다.”

코리온이 보냈다는 말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두겐은 다시 샤드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샤드니가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학장님께서 형님께 이제 최고제후직을 제게 선양하고 학교로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제후직에서 물러나라는 느닷없는 샤드니의 말에 낮은 한숨을 내쉰 두겐은 그다지 크게 놀라지는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학장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그래야겠지......그런데......학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게 직접 하지 않으시다니......”

“학장님께선 남부에서 입으신 부상이 악화되어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갑자기 눈을 부릅뜬 두겐이 샤드니를 향해 돌아서며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없다. 학장님께선 새벽에 내게 직접 제후회의에 와 달라 연락하셨다. 그때까지 건강해 보이셨단 말이다!.”

“제후회의 역시 학장님의 건강문제로 연기되었다 연락드렸을 텐데요?”

그다지 눈치가 빠르지는 않은 두겐이었지만 무려 50명의 병사들과 원로들까지 이끌고 이곳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샤드니가 정말로 학장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샤드니 네놈! 네가 감히 학장님의 명을 사칭하려 들다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던 두겐을 향해 샤드니 양옆의 병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놈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십여 명의 집무실 경호원들이 두겐의 앞을 막아서면서 서부 최고제후 집무실 안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살생이 절대 금지되는 라마단 기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없는 규칙이었다. 두겐을 지키려던 경호원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밖에서 계속해 몰려드는 샤드니 측 병사들의 함성이 뒤엉키면서 크지않은 집무실 안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덤벼야 소용없다! 이미 2군단 병력 3천명이 종가를 포위하고 있다!”

칼을 뽑아든 샤드니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경호원 한 명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쓰러진 두겐 경호원의 목에서 튀어오른 피와 살점으로 집무실 책상은 붉게 물들었다. 열 명의 경호원들만으로 샤드니가 섞인 50여명의 반란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들을 도와야 할 종가 경비병력은 단 한명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샤드니는 자신에게 덤비는 마지막 경호원의 칼을 쳐내고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끌려가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소용없어. 바깥 놈들도 어차피 우리편이니까.”

바닥에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는 경호원 시체들을 돌아본 샤드니는 창백한 표정으로 벌벌 떨고있는 형 두겐 앞에 바싹 다가섰다.

“이젠 인정하시죠.”

맘껏 빈정거린 샤드니는 집무실의 큰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소란을 눈치챈 종가 외부의 경비병력들이 이곳 집무실 부근으로 몰려드는 가운데 하늘을 덮은 수십 대의 병력수송셔틀들은 언제든 종가에 상륙할 태세로 대기 중에 있었다.

“어쩔까요? 저들 중 몇 대를 파예드 아카데미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샤드니 이 망할 놈! 학장님을 어쩐 거냐!”

이미 목에 칼이 들어온 두겐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악을 쓰자 샤드니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계십니다. 제가 어찌 학장님을 해치겠습니까. 어쩌시겠습니까? 최고제후직을 선양하시겠습니까?”

샤드니가 이미 학장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두겐 역시 더 이상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가문 원로들의 지도자격인 샤드니의 양아버지 칼림 역시 아들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종가의 경비와 일선 군단의 명령권까지도 어처구니없이 뚫려버린 것 역시 막강한 원로들과의 야합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로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두겐은 책상 위에 있던 최고제후 옥패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 샤드니의 손에 내밀 수밖에 없었다.

“새 최고제후의 탄생을 경하드립니다!”

칼림 플레렌의 선창으로 5명의 가문 원로들이 일제히 샤드니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병사들 역시 피묻은 무기를 내려놓으며 그의 앞에 엎드렸다. 득의양양한 표정의 샤드니는 피묻은 시미터를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함성을 토해냈다. 먼 옛날, 최고제후가 되려던 첫 번째의 시도가 오르마즈의 손에 무위로 돌아간 이래, 그리도 갈구하던 재기를 이제야 코리온의 이름을 앞세워 달성한 것이었다.

네페티 부인을 몰아내고 제4대 최고제후에 올랐던 두겐 역시 5달만에 밀려나면서 서부 최고의 명문가인 플레렌 가는 또 한번의 격변에 휘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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