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8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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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묵었던 메디스 시의 지하여관에 다시 돌아온 카렐은 제네르와 하심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사뭇 굳은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두 사람을 한번씩 바라본 카렐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그 봉인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이런,”
봉인 밑에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얼른 붙든 카렐은 손바닥에 잡힌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긴 세월 때문인지 조금은 변색되어 있었지만 적갈색의 약간 곱슬진 머리카락은 카렐의 귀 옆으로 늘어진 긴 머리칼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머리칼을 고이 싸서 옆에 놓은 카렐은 파란색 종이에 쓰여진 그 편지를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펼쳐들었다. 깊은숨을 내쉰 카렐은 차마 글을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든 제네르가 대신 읽어주기 시작했다.
“네가 이걸 읽을 무렵에 나는 이미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어 있겠구나.”
카렐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편지 곳곳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얼룩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오래지않아 네 어머니를 적대하는 자들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니......특히 근위대장이 네 어머니를 해하지 못하도록 네가 반드시 지켜주도록 해라......네 어머니는 동부와 샤자한 공에게 힘을 얻으려 할 것이나......비록 신중한 사람이나 의심과 겁이 많은 자이다. 그를 크게 신뢰한다면 낭패를 겪을 것이니 너 역시도 명심하도록 해라.”
탄식을 내뱉은 제네르가 축 처진 카렐의 어깨를 꼭 껴안아주었다. 이 편지가 쓰여지고 한참 후, 샤자한 공이 파병약속을 깨뜨리면서 하임달에서 패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카파키 가와 어머니를 머리에 떠올린 카렐은 꺼질 듯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늦게 뜯었군요. 아니, 전하께서 너무 늦게 나타나셨군요.”
“그래......그렇군......”
카렐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 봉투를 말없이 어루만졌다.
“코리온은 명민하나 아집이 강한 사람이니 네 어머니를 극도로 증오할 것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독단적이고 잔혹한 학자가 되어있을 것이나.....본성은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니......네가 계속하여 정을 준다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네게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 죽어 없어질 나를 대신해 그의 곁에 머무르면서 지켜주도록 해라. 코리온을 네게 부탁한다......그를 꼭 지켜다오.”
코리온을 지켜달라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카렐이 하심을 문득 돌아보았다. 제네르가 계속 글을 읽어내려갔다.
“오르마즈 경은 얼핏 자유분망해 보이는 인물이나 그 심지가 곧고 바른 인물이니 조카인 네가 충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 세상분도 아니시거늘.....”
카렐이 눈을 감으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자 하심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전하 스스로가 그분의 모든 것을 물려받으셨으니 아쉬워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미소 띤 얼굴로 카렐의 얼굴을 올려본 하심은 카렐의 거친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다시 펼쳐든 카렐은 조금 놀란 듯 제네르를 휙 돌아보았다.
“근위대장은.......잔혹하고 권력욕이 강하나.......분별이 확실하고 책임감 역시 강한 인물이니......어머님께서 그러셨듯 항상 의심하고 현명히 통제한다면 유용이 쓰일 수 있는 인물이다......”
카렐은 물론이고 제네르와 하심까지도 주페 태자답지 않은 이 뜻밖의 문장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덕과 인간성의 상징 같던 그가 잔학무도한 베흔을 변호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모두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제네르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카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번지고 있었다.
“너의 장성한 모습을 보고싶지만......내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다되어가고 있어 안타깝구나......누군가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꼭 들어보고 싶었건만 세상이 내 목숨을 원하니 이제 널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구나......아버지로서 그 도리를 다하지도 못하였으면서 네게 큰 짐만 지워두고 떠나니 네가 이를 원망하여도 내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느냐......”
편지의 마지막을 읽어내려가는 카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너를 너무나 사랑하고......보고싶구나.......다가오는 죽음을 피해 도망치고 싶을 만큼......”
결국 편지를 떨군 카렐은 제네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카렐의 등을 어루만져준 하심은 머리카락과 함께 편지를 곱게 접어 카렐의 떨리는 손에 쥐여주며 그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젊은 시절, 함께 주페를 받들었던 두 명의 충직한 유학자는 주페가 세상에 남긴 이 유일한 혈육을 사이에 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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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와의 수정란은 물론이고 증거가 될 태자의 세포까지 모두 손에 넣은 세네피스였지만 정작 착상을 시킬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남편 세나우스 3세의 ‘치료’는 무려 11명의 황실의사를 갈아치워가며 계속 시도되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빈번히 실패만 하고 있었다. 물론 세네피스는 그것이 자신이 태자를 생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저 망할 근위대장의 농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지만 문제는 세네피스 스스로도 그것에 그다지 괘념하지 않았다는, 아니 어떤 면으로는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세네피스는 저 망할 남편과의 잠자리는 물론이고 그의 아이를 갖고싶은 생각 역시 털끝만큼도 없었다.
세네피스가 말로만 듣던 황실 유전자은행 특별보관실에 처음 들어와 본 건 그가 황후로 즉위하고 무려 60여년 가까이 지난 기원 256년의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빨리 태자를 생산하라’는 내외의 압력이 계속 커져가는 가운데 있은 황후의 이번 방문이 인공수정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검토라는 사실은 이곳 유전자은행 사람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곳이었구나.”
크지 않은 보관실 안을 바라보며 세네피스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나 되는 신분확인과 철통같은 감시망을 통과해 들어온 이 음산한 방안에는 황실시조인 리 리쿠부터 시작해 S-6세대인 오넬론에 이르기까지 황제와 그 직계조상, 그리고 그 공식 배우자들의 세포가 각 세대에 따라 벽에 차례대로 걸려있었다.
“황실 세포들은 모두 이곳에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건 황상과 황후폐하, 그리고 저와 제 밑의 팀장 3명뿐입니다.”
그를 이곳까지 안내해준 유전자은행 총책임자 자그룰라 모렌 박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는 세나우스 1세 시절부터 이곳 황실 유전자은행에서 일해온 충직한 유전학자 겸 의사였고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디언 합성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나 세나우스 2세 시절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근위대 강화사업의 핵심작업을 맡아했던 그는 특별한 전공(戰功)이 없는 과학자의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하급귀족에서 상급귀족으로의 수직 신분상승을 이루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혈질의 드센 성격과 할 말은 꼬박꼬박 해야만 하는 고집 때문에 정작 자신의 ‘피조물’인 근위대 가디언들과 걸핏하면 충돌을 빚고있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돌고 있었다. 30년쯤 전인가는 가디언의 세력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별도 편성되어있는 황실 가디언부대를 해체해 근위대 정규군으로 모두 통합시켜 운영할 것을 황제에게 제안했다가 베흔과 거의 잡아먹을 듯 싸워댄 일 역시 있었다.
“저희 은행은 기원전 39년 유전자 개량사업 시작부터의 자료를 모두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보관되어있는 분들의 유전정보는 모두 암호화해 외부에서는 비교나 검색이 불가능하게 되어있고, 물론 돌아가신 분의 자료는 더 이상 복제나 이용이 불가능하도록 자물쇠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아참, 저기, 보시다시피 황후폐하와 황상의 세포는 언제든 인공수정을 할 수 있는 정상상태로 대기중입니다.”
“그래, 잘 알고있네. 그런데......저건 또 뭔가?”
눈이 휘둥그레진 세네피스가 가리킨 곳에는 황실 중시조이며 세나우스 1세의 형이었던 ‘핏빛 비수’ 샤미르 리쿠와, 그 곁에 함께 놓여있는 작은 캡슐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캡슐의 앞에는 너무나 낯익은, 뜻밖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아아, 저건 황후폐하의 맏언니이신 오르마즈 경의 세포입니다. 이 방에는 황실분들뿐만이 아니고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공신분들의 세포 역시 반대편 벽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분의 세포는 그분을 특별히 아끼셨던 샤미르 리쿠 님의 유지에 따라 황실 세포들과 함께 보관되고 있습니다.”
모렌 박사의 대답에 세네피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잔혹한 성격에 걸맞지 않게 유독 오르마즈만은 끔찍이 총애했던 샤미르 리쿠는 오르마즈에게 그 유명한 검은 갑주와 제국 제일의 명마 ‘절영’을 선물한 사람이기도 했다.
S혈통 최초의 완전 발현자이며 TSG 지도자였고 강력한 독재자이기도 했던 샤미르 리쿠는 사실 오르마즈와 베흔을 비롯한 서너 명의 최측근을 제외하면 그 생김새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한 베일 속에 숨어 살았던 괴이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보니 흉측한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억측부터 시작해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인물일지 모른다는 별의별 소문들이 다 떠돌았던 터였다.
세간에서는 그런 샤미르 리쿠가 눈만 높아서 오르마즈를 찍었다며 웃음거리로 삼기도 했었지만 정작 그 소문을 전해들은 오르마즈는 '샤미르 님이 뭐 어때서?‘ 라는 대답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 덕택에 오르마즈는 또 하나의 자랑스런 스캔들을 얻기는 했지만.
그 때, 보관실 조명이 갑자기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렌 박사의 앞으로 보관실 밖에서 연구원 중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황후와 함께 있던 모렌 박사에게 창백해진 얼굴로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진 모렌 박사는 세네피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화, 황공하옵니다, 황후폐하, 제가 급한 일로 잠시......이곳의 보안시스템들이 갑자기 작동을 멈추었다고 하니 나갔다오겠습니다. 혹시 외부침입자나 안전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안전한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래, 내 여기 있을 테니 다녀오게나.”
세네피스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모렌 박사를 데리러 달려온 연구원이 혼자 남는 황후에게 눈을 쫑긋거리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바로 이번의 작업을 위해 거액을 들여 매수한, 유전자 자물쇠 담당자였다. 그리고 오늘 ‘작업’할 그 소중한 수정란에 태자의 황족문이 발현될 수 있도록 손을 보아준 인물이기도 했다.
모렌 박사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세네피스는 품속에 숨겨온 두 개의 캡슐을 얼른 꺼내들었다.
“20초, 20초다. 빨리, 빨리 해야 된다. 세네피스.”
긴장된 숨을 가다듬은 황후는 ‘S-6-3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호지 리쿠‘라고 써 있는 캡슐의 뚜껑을 능숙하게 열고는 그 안에 들어있는 튜브를 준비해온 주페 태자의 것과 재빨리 갈아치웠다. 비슷한 기자재로 이미 며칠에 걸쳐 연습한 세네피스에게 이 작업은 채 5초도 걸리지 않을, 간단한 일이었다. 이제 황제의 캡슐 안에는 오넬론의 것이 아닌, 이미 60여년 전 죽은 그 형 주페 태자의 세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휴,”
긴장한 세네피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의 작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집어든 건 바로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남편의 것보다 약간 큰 금빛 캡슐이었다. 다시 한번 바깥을 확인한 세네피스는 얼른 그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가는 빨대 모양의 튜브 2개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바로 자신의 몸에서 채취했던 난자가 각각 한 개씩 안에 들어있었다.
“이제서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세네피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주페의 아이를 갖고자 하는 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남편 세포를 바꿔치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되는 것이겠지만 세네피스에게는 자신이 주페와 함께 했던 바로 그 순간에 만들어진, 무려 60여년간 이 때만을 기다리며 껴안고 보듬어온 둘 사이의 진정한 결실이 장태자로 세상빛을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10초, 10초.”
낮게 중얼거린 세네피스는 그 2개의 튜브를 모두 뽑아내 품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다른 2개의 비슷한 튜브를 그 안에 조심조심 집어넣었다. 이 2개 중 1개에는 그 오랜 동안 목에 걸고 소중히 간직해온 수정란이, 예비용인 1개에는 이미 죽은 자신의 난자가 들어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얘야......곧 엄마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입가 가득 미소를 지은 세네피스는 캡슐의 뚜껑을 급히 닫아 제 위치에 걸어놓으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제 조만간 종친회에서 인공수정을 허락한다는 결의만 나온다면 이 소중한 아이는 오르마즈와 자신의 완벽한 시나리오대로 제국의 당당한 장태자로 세상 빛을 보는 것이었다.
마치 마술처럼, 깜박이던 불이 다시 환해지며 방의 보안장치들이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네피스는 곧 자신의 배로 키우게 될, 주페의 핏줄을 떠올리며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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