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2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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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이 이제야 자라는구나.”
모렌 박사가 아기의 머리에 듬성듬성 돋아나기 시작한 솜털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다리를 붙들고 일어선 18개월 된 이 귀여운 여자아기는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검은 피부의 엄마에게 까르르 웃음을 지었다. 다른 아이보다 한참 늦게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이 아기 역시 다른 한살배기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한참 이쁜 짓을 보일 나이였다. 하지만 집단 수용되어 자라나고 있는 다른 가디언 아기들과는 달리 이 아기는 모렌 박사의 사실 옆에 따로 보육실을 두고 매일매일의 행동과 성장상태가 정밀 관찰되고 있었다.
“또 이 지경을 해놓다니.”
아기 침으로 범벅이 된 바지를 닦아내며 모렌 박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몇 발짝을 걸어가는 데 성공한 아기가 벽을 짚은 채 ‘엄마’를 돌아보며 또 한번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특별한 아기를 키우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가 되면 스스로 두발로 일어서려 애써야 할 이 아기는 돌을 한참 넘어갈 때까지도 제 발로 설 생각도 않은 채 바닥을 기어다니기만 했고---그것도 너무도 능숙하게---, 적갈색 머리칼이 돋아나야 할 두피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깨끗한’ 상태 그대로였다. 비정상적으로 긴 혀와 특이한 구강구조 때문에 입술을 제대로 다물지 못해 항상 침을 흘리는 문제는 이제서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정도였다.
성장단계에서 드러나는 이런 문제점들을 보면서 모렌 박사는 자신이 저질러놓은 이 잔혹한 결과에 대한 후회를 몇 번이나 반복하곤 했다. 요즘 들어서는 늦으나마 걸음마를 연습한답시고 붙들고 일어서는 물건마다 다 엎어놓는 통에 이곳 보육실이나 소장실의 물건들 치고 제대로 남아나는 것이 없었지만 그가 또 하나의 결함을 스스로 극복해내고 있음을 잘 아는 박사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마냥 기특하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6살쯤 되어서 오팔 형질까지 발현되면......눈이 정말 이쁘겠구나.”
말로는 이렇게 내뱉고 있었지만 사실 이 아기의 눈에서 어두운 밤에 번득이던 파충류 특유의 붉은빛 시색소에 깜짝 놀라 까무러쳤던 황당한 해프닝도 있었다. 어쨌든 평소에는 크고 맑은 회색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이 아기는 머리카락이 늦게 난 것만 빼면 얼핏 다른 아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이의 신체발달은 걸음마와 머리칼만 빼면 그 나이에 딱 적당한 수준이었고, 고집 꽤나 있어 보이는 특유의 성격까지 조금씩 드러나면서 박사의 골치를 썩이곤 했다. 그리고 모렌 박사가 황실에 올린 보고서 역시 ‘특이사항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모렌 박사의 손에 들려있는 이유식 접시---다진 날 양고기와 내장이 담겨있는---을 누군가 본다면 그의 보고서가 엉터리라는 것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또 한번 몇 발짝을 걸어온 아기가 ‘엄마’의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바지에 온통 침을 발라댔다. 박사가 내민 날고기를 꿀꺽 삼킨 아기는 사람다운 이유식을 먹는 보통의 아기와 마찬가지로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박수까지 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식 접시를 내려놓고 아기를 번쩍 안아든 모렌 박사는 얼굴을 더듬으며 재롱을 피우는 여자아기를 바라보며 끔찍할 만큼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복수심에 미쳐 태자를 가디언으로 만들어버렸던 그가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한 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진짜 엄마처럼 대하고 난 후였다. 품에 안겨 노는 너무도 이쁜 아기를 바라보며 모렌 박사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복수극이 한 아이의 운명을 얼마나 처참하게 짓뭉개놓았는지를 그제서야 깨닫고 있었다.
특별보관실에 있던 황후와 황제의 세포로 수정란을 만들었을 때, 사실 그는 술에 취해 제정신도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만든 수정란이 이상하게 조숙하다는 것조차 알아낼 여유가 없었다. 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악어와 뱀의 유전자까지 온통 뒤범벅을 해 놓고 곯아떨어졌다가 깨어난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허둥지둥 분석해 보고 난 아기는 이종합성의 당연한 결과로 200가지가 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수정란을 몰래 폐기하는 쉬운 길을 택할지, 아니면 일단 살려서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을지에 대한 어려운 판단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결국 ‘위험한 길’을 택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그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결함을 고치기 위해 아이는 또 한번 누더기 같은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야 했고, 그 작업에 반드시 필요했던 황후의 ‘예비용 난자’는 무슨 이유엔지 이미 죽어 아무 정보도 건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황후와 가장 유사하리라 생각되는, 특별보관실의 오르마즈 경의 세포까지 훔치는 또 한번의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커서 날 원망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모렌 박사가 상부에 엉터리 보고서를 올린 이유는 확실했다. 이 아이가 ‘특별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사상최악의 끔찍한 방법은 다 동원되어있는 베흔의 ‘훈련계획안’이 실행에 옮겨질 것이 뻔했다. 우연한 기회에 베흔의 ‘계획초안’을 볼 기회가 있었던 모렌 박사로서는 한순간 자신의 잘못으로 장태자의 운명에서 낙오되고 만 이 불쌍한 아기를 그런 끔찍한 구렁텅이에까지 몰아넣을 수는 절대 없었다.
사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을 접어두고 자세히 보면 이 아이는 정상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아기라면 돌 무렵에 절정을 보일 낯가림을 이미 6개월 무렵에 건너뛰고 난 후였고, 이미 성인 가디언의 수준에 다다른 이 아이의 놀라운 시력은 보통의 가디언의 두 배 가까운 넓은 파장대를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자신의 눈에는 빨갛고 노란 정도가 고작일 ‘꽃’은 아마도 이 아이의 특이한 눈에는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이 감도는 환상적인 물체로 보일 터였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기를 안고 황궁 정원에라도 산책을 나갈라치면 이 아기는 거의 넋나간듯한 얼굴로 꽃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라면, 근육과 골격의 본격적인 발달은 그의 추정에 따르자면 10세 정도는 되어야 개시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 프로젝트를 입안한 멍청이들의 관심사는 ‘지금 당장 얼마나 크고 힘센’ 아기가 나오는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사실 요즘 모렌 박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벌써부터 글을 읽고 해석해낼 정도의 놀라운 지능발달을 보이는 이 아기가 ‘혹시 발현된 S혈통이 아닐까’하는 데에 있었다.
“너하고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젖살이 남아있는 아기의 통통한 뺨을 어루만지며 모렌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18개월이 가까와지도록 아기에게서 아무런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자 근위대에서는 며칠 전 ‘프로젝트 실패’를 공식 통보해놓은 후였다. 이 아기를 황실 수련장에 집어넣어 남자 가디언 아이들과 함께 키우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결정내린 그들은 프로젝트를 공동진행한 자이센 가 수련장에 반 강제로 떠넘기기로 해놓았다는 소식이었다.
어쨌든 열흘정도 후에는 그간 소중히 키워온 이 아기는 황궁을 떠나 3번 도시의 자이센 가 수련장으로 보내질 운명이었다.
아기에게 정이라는 정은 다 들어버린 모렌 박사도 이 아이를 자신에게 입양 혹은 분양이라도 시켜 곁에 둘 수 있도록 나름대로 꽤 애를 써보았지만 황실과 근위대에서 보내온 답변은 ‘가디언 아기의 일반가정분양은 절대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 아기에게서 정을 떼어야 할 모렌 박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아기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치솟는 죄책감과 텅 빈 듯한 허전함으로 거의 미칠 지경까지 가곤 했다.
“박사님, 황후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조금 긴장된 표정의 연구원이 아기와 놀고있는 모렌 박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아기를 도로 내려놓으려던 모렌 박사는 목을 꽉 껴안은 채 ‘엄마’와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 않는 이 고집 센 아기와 씨름 끝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네 핏줄을 한번이라도 보고싶은 거구나......”
아기의 고집을 멋대로 해석해버린 모렌 박사는 갑자기 울컥 하는 기분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아기를 황제와 황후에게 내놓고 싶었지만 그러는 날에는 황실의 세포로 감히 장난을 친 자신과, 집안의 목숨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안은 채 밖에 나선 모렌 박사는 사색이 다 된 채 벌벌 떨고있는 세네피스 황후를 문득 바라보았다. 사실 어젯밤, 이곳 특별보관실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사고가 있었다. 물론 내부 보안장치에 의해 불은 곧바로 진화되었고 안에 있던 세포들도 모두 무사했지만 공교롭게도 불이 난 바로 위에 있던 황후의 난자캡슐만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고 난 후였다.
다행히 그곳의 보안책임은 근위대 소관이니 그로서는 크게 신경 쓸 바 없는 일이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듯한 황후의 표정은 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여 보였다.
“난자는 다시 채취하면 되니 크게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보안을 강화하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세네피스 황후가 나름대로 위로라고 말을 꺼낸 모렌 박사에게 이곳 로비가 떠나가라 소리를 내질렀다. 평소 온화하기로 소문난 이 황후의 너무나 낯선 모습에 모렌 박사가 순간 멈칫 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째지는 고함소리에 놀란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얘야, 제발, 아가야, 착하지,”
얼른 뒤로 물러난 모렌 박사가 악을 쓰며 울어대는 아기를 애써 달래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기를 노려본 세네피스 황후가 다시한번 소리를 질렀다.
“그 망할 핏덩이는 도대체 뭔가!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지 못해!”
황후의 차가운 태도에 또 한번 울컥 해버린 모렌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이 불쌍한 아기를 품에 꼭 껴안았다.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채 황후의 앞을 서둘러 물러나오던 모렌 박사는 웬 큰 키의 사람이 자신을 가로막고 우는 아기를 넙죽 안아들자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 정말 예쁜데. 웬 아기지?”
“오, 오르마즈 경께서 웬일로 오셨습니까.”
당황한 모렌 박사가 급히 허리를 굽혔다. 울어대는 아기를 능숙하게 품에 안아든 오르마즈는 아기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귀에 무어라 속삭여 주었다. 이미 4명의 아이를 키워낸 사람답게, 오르마즈는 마치 마술처럼 품에 안긴 이 아기의 입에 웃음을 되돌려 놓았다. 아기는 마치 모렌 박사에게 하듯, 오르마즈의 목을 껴안고 얼굴을 부비며 딴에는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이 고귀한 영웅의 얼굴과 옷자락에까지 아기가 침을 발라대는 모습에 기겁을 한 모렌 박사가 얼른 팔을 뻗었다.
“제게 주십시오. 옷 더러워지십니다.”
“싫은데 어쩌지?”
오르마즈는 마치 자기 아기라도 되는 양 박사의 손에서 장난스럽게 아기를 휙 빼앗아들었다.
“여자아이로군......이 아기가 지난번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졌다는 그 여자 가디언 아기인가보지?”
“예, 그렇습니다.”
아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오르마즈는 그 회색빛 눈동자에 문득 시선이 멈추었다.
“너도 나중에 훌륭한 전사가 되겠구나. 훗, 그래서 그런가? 얼굴이 친숙한걸?”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모렌 박사의 눈앞에서 오르마즈가 아기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아기 이름이......”
“카렐입니다.”
“카레르 강에서 받았나? 생사를 넘나든다는? 이름대로 살면 절대 안되겠는데?”
오르마즈가 그다운 폭소를 터뜨렸다.
“각하께서 이 아기에게 축복을 내려 수호자가 되어주신다면......커서 각하를 꼭 빼닮은 훌륭한 전사가 될 겁니다.”
조금 용기를 낸 모렌 박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호, 내가 더 영광인걸, 제국 최초의 여자 가디언의 수호자라, 괜찮지.”
박사의 말에 넉살좋게 웃음지은 오르마즈는 아기를 번쩍 안아들며 나이어린 전사에게 축복을 내리는 제국의 전통대로 아기의 이마와 가슴, 손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고는 번쩍 들어올렸다. 오르마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아기가 공중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 제1공신인 나 오르마즈가 네게 축복을 내리니, 나를 그대로 닮은 제국 최고의 용사가 되도록 해라. 아참, 바람기만 빼고.”
마지막 말에 몇몇 연구원들이 큭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들의 웃음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뻔뻔스런 얼굴의 오르마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다, 취소하마. 영웅호색이니 바람기도 있는 게 용사한테는 제격이지. 내가 네 수호자가 되어주마. 전사, 가디언 카렐 오르마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오르마즈가 아기의 입에 피 한 방울을 흘려넣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르마즈의 손에서 다시 아기를 받아든 모렌 박사는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황후에게 다가서는 오르마즈의 뒷모습을 문득 바라보았다.
“언니, 어떡해요......이제 어떡하냐구요.....”
오르마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세네피스 황후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모렌 박사는 겨우 난자 2개, 아니 사실상 1개를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 황후가 왜 저렇게까지 슬퍼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마라, 아직 그분 세포가 남아있으니.....인공수정으로 또 얻을 수 있지 않겠냐.”
오르마즈가 동생의 등을 두들겨주며 나름대로 위로해주었지만 세네피스 황후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실성한 사람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그게, 그게 아니라구요, 바로 그 아기......바로 그 아기가 제겐 얼마나 소중한데......”
울고있는 황후와 오르마즈 경을 뒤로하고 보육실로 돌아가며 모렌 박사가 품에 꼭 안고있는 이 소중한 아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기 계신 분은 황후폐하이시고.....저분은 오르마즈 경이란다. 모두 네게 피를 물려주신 분들이시니 꼭 기억해둬라......꼭......”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나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아기를 바라보며 모렌 박사의 검은 눈동자에 또 한번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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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엔딩에 후기까지 넣으려니 넘 많군요.....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