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4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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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리쿠 학장이......억류당한 것 같다고?”
세네피스 황후는 서부에서 돌아오자마자 남극성당을 찾아온 카렐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끝까지 말을 안듣던 코리온에게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했던 황후는 이번 일을 계기로 서부를 일거에 카렐 편으로 끌어들여 제위경쟁의 완벽한 전환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잔뜩 들떠있던 차였다. 하지만 코리온이 서부 매파들에게 억류당하고 말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는 셈이었다.
“그것도 약혼선언한 샤드니 그놈에게 말이죠.”
“일이 꼬여가는구나.......”
잠시 굳은 표정을 지었던 황후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카렐에게 문득 시선을 주었다.
“왜......그러느냐?”
“다른 사람은 10달을 뱃속에서 키우는 아기를.......어머니께서는 60년간 품고 계셨었다는 걸 압니다.”
창백해진 표정의 황후가 옆으로 휙 돌아서고 말았다.
“벌써......봤구나......”
당혹한 황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제게 주페 태자.....아니, 아버님 묘소를 찾아가 돌보게 하고......그분의 책을 읽어보라 하셨던 겁니까?”
황후에게 바싹 다가선 카렐은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그의 눈가를 조용히 매만지고 있었다. 황후는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는 딸의 태도에 조금 놀랐는지 그의 얼굴을 우두커니 올려보고 있었다.
“어머니께는.......제게 묻어있는 아버지의 흔적만 보이신 게 당연하군요.”
“넌......내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카렐의 대답에 황후가 이 믿음직한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네가 이렇게 이해해줄 줄 알았더라면 조금 일찍 얘기해주는 거였는데......”
카렐은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는 어머니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딸의 든든한 품에 얼굴을 묻으며 황후가 낮게 속삭였다.
“널 보면...... 60년, 아니 감방에서 보낸 그 오랜 시간도 전혀 헛되지 않았구나.”
“이쪽은 우리 플라칼 가의 기사단 사령관인 히르직스 쉐너 타마르 경입니다. 옛 슈로 기사단 출신이며 이번 연합군에서 기병사령관을 맡게 될 맹장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저희 가문 1기사단장인......”
탈라스에서 카렐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새로 결정된 남-서 연합군의 부사령관 겸 보병사령관의 지위로 내려온 헤즈 플라칼 경은 서부 최고제후가 되어 돌아온 연합군 총사령관 샤드니 ‘공’에게 플라칼 가 주요지휘관들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사실 헤즈로서는 샤드니가 서부 최고제후가 되어준 것이 차라리 자존심을 건지는 일이었다. 명색이 플라칼 가의 적장자로서 서부 최고제후 사촌동생에게 명령을 듣느니 차라리 서부최고제후의 명령권하에 놓이는 편이 아예 속 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이미 아시겠군요. 지난번 선발대장이었던 2기사단장 릴라크 라자루스 예리노프 경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온 릴라크는 샤드니와 그 옆에 앉아있는 코리온을 꽤나 어색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까마득하게 높아져버린’ 샤드니는 이제 그에게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맘먹고 납치했다가 다시 놓쳐버린, 그 민망하다못해 황당한 해프닝을 겪은 당사자 코리온은 무슨 일인지 지난 남부에서보다 더 몸이 안좋은 듯 핏기없는 모습으로 플라칼 가 지휘관들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코리온은 릴라크에게 잠시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선을 주기도 했지만 어쨌든 무언가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초기 기획안대로 제 휘하의 보병대는 우리 플라칼 가에서 온 5만의 남부 중장보병과 서부 경보병 4만, 서부 장갑보병 1만 5천이며, 남부 중장보병은 가문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플라칼 경이 맡을 것입니다. 서부 보병대는......”
“2제후 세호 가의 사르키스 이스마엘 세호 경이 서부 경보병대와 장갑보병대를 이끌 것이요. 파예드 아카데미 박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00년이 넘는동안 많은 경험을 닦아온 지휘관이니 일을 훌륭히 해낼 것이요.”
샤드니의 부름에 라바니 경의 뒤에 서 있던 사르키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남부 지휘관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숙부 라바니 경의 그늘에 가려 변변한 빛을 보지 못하고 가문 군대에서 2인자 신세를 면치 못하던 그는 지난번 카렐을 거의 ‘잡을 뻔했던’ 놀라운 전공을 인정받아 무려 5만 5천의 대규모 서부 보병대를 총괄하게 된, 어마어마한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델루지 종가에서 조카 솔을 일부러 놓아주었던 그는 그 사실에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던 어머니 뤼렌 부인의 묵인 덕에 다행히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사르키스의 그다지 군인답지 않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헤즈 경이 히르직스를 돌아보았다. 마랄루의 결전에서 제네르의 손에 중상을 입었던 히르직스도 제법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우리 플라칼 가 기병은 현재 중장기병 1만 3천과 경기병 3천입니다. 현재의 편제를 유지하되 서부에서 낙타병을 제외한 기마 기병은 중장기병 8백, 경기병 6백으로 그 숫자가 매우 적으니 우리 중장기병대에서 3기병대와 경기병대 예하 1개 중대씩으로 편성해 통합관리하겠습니다.”
히르직스의 보고에 별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샤드니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하지즈 장군을 힐끔 돌아보았다. ‘전형적인 군인’의 단호한 태도로 성큼 나선 그는 자신만만한 투로 입을 열었다.
“낙타병부대 1만 1천기를 이끌게 된 아쉬드 플레렌 하지즈 장군이요.”
“하지즈 장군 역시 파예드 아카데미 경세학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우리 플레렌 가에서 엘리트코스를 밟아 착실히 승진해온 백전노장의 인재이니 큰 힘이 될 것이요.”
헤즈 사령관이 보일 듯 말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 ‘기생오래비 같은’ 사령관놈이 계속 ‘학벌’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말하나마나였다. 워낙 평균학력과 학구열이 높은 서부의 고급 지휘관들은 아무리 못되어도 콜로니 아카데미 졸업장 하나 정도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모인 놈들은 저 황당한 사이코 학장놈부터 시작해서 제국 최고명문이라는 남극성당이나 파예드아카데미의 간판 하나정도씩은 다 가진 놈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어릴 때부터 ‘전쟁기계’로 가다듬어져 군사훈련만 받고 자라온 플라칼 가 지휘관들은 공립학교 졸업이 고작인 케세크 경과 2명의 기사단장부터 시작해서 콜로니 아카데미를 졸업 혹은 중퇴한 헤즈 자신과 히르직스 경, 경기병단장 루코프 정도였고, 남극성당 사장지학 과정을 중퇴한 릴라크 경이 그나마 체면을 세워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망할 ‘서부 최고제후’ 놈이 시작부터 이쪽의 기를 죽이기 위해 학벌부터 들고 나온 것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한 헤즈 사령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지휘관 중에 그나마 가장 뻔때나는 학벌이었던 베아트릭스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데 괜한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제 저 동부놈들과 맞닥뜨려야 할 테니 샤드니 공께서는 참으로 안타까우시겠습니다. 남극성당을 졸업한 페로 녀석이나 샤자한 공이나 플로브 경, 제네르 하크로딘 같은 동문 졸업생들과 싸울 수밖에 없으실 테오니......그래도 적의 수괴인 카렐 그놈이 ‘깡그리 무학’이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죠. 물론 제일 똑똑하고 무서운 건 정작 그놈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학벌을 과시하던 자신을 은근히 비꼬는 헤즈의 뜻을 모를 턱이 없는 샤드니는 내심 부아가 잔뜩 돋았지만 상견례 첫날부터 싸움으로 물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표정을 애써 가다듬은 샤드니가 모두를 돌아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라마단도 거의 끝났고, 4월이 시작되는 즉시 저 무도한 동부녀석들을 축출해내는 대공세를 개시할 것이니 각 군은 동원태세를 완비하고 있도록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무려 13만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대병력을 두 손에 움켜쥔 샤드니는 새로 보강된 병력들까지 다 합쳐야 8만 정도의 동부연합군에 비해 확실한 우세를 점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 있는지 형체조차 찾기 어렵던 바툴 가 놈들에 비해 샤자한 공과 페로가 이끄는 ‘정규 연합군’들은 비록 대규모지만 차라리 상대하기에 속편한 면도 있었다.
그런 샤드니를 비웃듯 헤즈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동부기병들의 정예도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있으시겠죠? 특히나 자칭 슈로 기사단 놈들은 동부와 북부출신 정예 지원자들로 이루어져있어서 녹녹한 상대가 결코 아닙니다. 아아, 하지즈 장군께서는 이미 ‘경험’이 있으시니 잘 아시겠군요?”
루쿠스탄에서 페로에게 당한 패전을 빈정거리는 듯한 헤즈의 태도에 당시 제네르와의 일기투에서 패하는 망신을 당했던 하지즈 장군이 대뜸 눈을 흘겼다. 피식 웃음지은 샤드니가 대신 복수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참, 듣자하니 카렐 녀석 휘하에 슬레이프니르라는 경기병단이 창설되었다 하던데, 그 지휘관 이름이 참으로 특이하오? 베아트릭스......플라칼? 이거 당신네 가문의 그 플라칼 혹시 아니요?”
순간 열이 뻗친 헤즈 경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히고 있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슬레이프니르의 궁기병대 지휘관이란 놈 이름은 또 ‘달리 플라칼’이니 이건 도대체 어찌된 조화요?”
입술을 굳게 다문 헤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부 잡종년’ 베아트릭스야 그 어미까지 자기 때문에 자살해버렸으니 도망갔어도 할말이 없는 지경이기는 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가 카렐을 죽이려 ‘시도’ 했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기특하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제거계획을 접었던 플라칼 가문이었다. 그랬던 가문은 라마단이 시작되었을 무렵에 전해진, 녀석이 카렐 휘하에 영입되었다는 뒤통수치는 소식에 아연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가문의 예봉을 피해낸 베아트릭스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눈 깜짝할 새 적의 고위급 지휘관까지 올라버려서 당장은 가문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플라칼 가에 남은 유일한 궁기병 지휘관이었던 달리까지 그쪽에 붙어버린 건 가문으로서는 이만저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달리가 아메스와의 일기투에 패해 포로로 잡혔다고 믿고있던 플라칼 가에서는 남편과 두 자녀를 전장에서 잃고 과부로 살고있던 달리의 어머니와, 중장보병대 하급지휘관으로 있다가 라마단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갔던 그의 여동생이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난 후에야 그의 배신사실을 눈치챘던 터였다.
샤드니의 말을 못들은 척 한 헤즈가 자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슬레이프니르의 모태가 된 바툴 가 정예 궁기병대와 북부 게릴라부대, 동부 근위경기병대 모두 놀랄 만큼 정예부대들이니 이들 역시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리고 동부 보병대도 예전 같지 않고 많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2제후 트라티누스 가 소속의 마랄루 결사대들과 4제후 눌레딘 가에 소속된 북부용병대, 그리고 이곳에서 ‘애석하게도’ 놓치셨던 에키트 족 경보병 3천은 참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죠.”
헤즈의 ‘반격’에 이번엔 서부 출신 참모장 라바니 경의 표정이 확 일그러들었다. 에키트 족들을 놓친 일 덕에 한 달 동안 지휘권을 박탈당하는 개망신을 당했던 라바니 경은 헤즈의 말을 무시한 채 혼자 술잔만을 들이키고 있었다. 샤드니가 파일을 들쳐보며 중얼거렸다.
“듣자하니 황제령에 있는 카렐 녀석 직속 정규군 보병대 병력이 7만을 넘어섰다고 하오. 옛 북부 밀집장창보병대 스타일로 재건했다는데......거기에 녀석의 가디언부대도 3천에 육박한다고 하고. 여기에 페로 녀석의 가디언부대 만 명까지 합치면 가히 어마어마한 전력인데 놈들이 근위대들 덕에 못 움직이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소, 하기사 뒤집어놓으면 그놈들 때문에 근위대가 못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헤즈 경이 한마디 덧붙이며 서부 지휘관들을 돌아보았다.
“3만5천 타르서스 직할군을 빼먹으셨군요. 녀석들 사령관이 네페티 부인의 충복인 수레드 알 유시프라는 놈이라죠? 서부 사람 같기는 헌데.....어째 저희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 같군요?”
남부와 서부 지휘관들의 끝도 안나는 ‘기세싸움’을 말없이 지켜보면서도 코리온은 여전히 아무 변화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그간 국지전 정도 수준에 머무르던 서부와 카렐과의 대결은 이렇게 남부와의 연합군 결성을 계기로 이제 완전한 전면전에 접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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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편은 간만에 복습격이군요. ^^
* 아참, 밀집꽃(Helichrysum)은 관상수로 쓰이는 보라색, 노란색의 꽃으로,
'과거를 잊지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