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96화 (295/1,132)

< -- 296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

.

.

“어서오렴, 보벤.”

슈카른 계곡의 동부연합군 본영에 도착한 보벤 슈트란 경은 조부이며 최고제후인 샤자한 공과 가벼운 포옹을 주고받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페로의 보좌관 역할로 그간 계속 페로 관에서 머물러온 보벤 경은 라마단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이제서야 참으로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총리께선 어디계시죠?”

보벤 경이 먼저 와 있던 숙부 다히르 경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마랄루의 1차 전투에서 히르직스의 손에 중상을 입어 동부연합군 기병사령관에서 물러나야 했던 다히르 경이었지만 그간 건강을 회복했는지 혈색은 꽤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다히르의 뒤에는 제네르의 약혼자이기도 한 아들 네자드 경이 문관다운 말끔하고 단정한 자태로 서 있었다.

“총리께선 지금 나지크에 계시다. 태자께서 거기 계시니 먼저 인사드리고 오시는 모양이다. 곧 오시겠지. 오랜만에 3대가 모두 모였으니 술이나 한잔씩 하자꾸나.”

샤자한 공은 든든한 아들과 두 손자들을 이끌고 사뭇 의기양양하게 사령관 막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네자드가 아버지 다히르 경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그럼 저도 잠깐 나지크에 다녀와도 될까요?”

“후훗, 어지간히 보고싶은 모양이구나.”

아들의 속셈을 눈치챈 다히르 경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얼굴을 붉힌 네자드는 고개를 떨구며 입가에 웃음만 짓고 있었다. 보벤은 제네르에게 푹 빠져버린 이 사촌형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내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먼 곳이 아니니 그 애보고 오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어차피 가족이 될 사람이니 모두 모여 술 한잔 같이 하면 좋지 않겠냐. 안 그렇습니까? 아버님?”

아들 다히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샤자한 공은 손자 보벤이 갑자기 팔을 붙들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저어, 제네르 하크로딘 단장이라면 부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벤의 뜻밖의 태도에 조금 놀란 다히르 경과 네자드 경이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문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네자드 경은 자신의 정실부인이 될 사람을 쏙 빼놓고 ‘가문의 긴한 이야기’를 한다는 사촌동생의 태도에 내심 불쾌감을 애써 감추며 아버지 다히르 경을 말없이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막사에 둘러앉은 이들 4명의 남자들은 곡주 몇 순배가 돌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히르 경과 네자드 경은 방금 전의 일로 조금 ‘삐져 있는’ 상황이었고 보벤 경 역시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샤자한 공의 장손자이기도 한 보벤 경은 아버지 아르군 경이 지난 대제례 행사장에서 베아트릭스 부하들의 손에 피살당하면서 슈트란 가의 차기 후계 1순위자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르군에 이은 차남 다히르 경이 아무리 숙부라지만 종손이며 최고제후 후계자인 보벤 경에게 버릇없다며 막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조금 껄끄러운 관계이기는 다히르 경을 대하는 보벤 경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랄루 1차 전투에서 제네르가 ‘예비 시아버지’인 다히르 경의 목숨을 구해내면서 단단히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제네르는 아직 가문 사람은 아니니 중요한 대화라면 당장은 빼놓는 것이 좋겠구나. 아직 초저녁이니 보벤 이야기가 끝나면 그때 불러 술자리를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아버님.”

샤자한 공이 후계자인 장손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다히르 경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자신감을 되찾은 보벤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십니까? 총리께서 서부 3제후 사우드 발 부인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 말씀입니다.”

보벤 경의 말에 갑자기 표정이 굳은 샤자한 공이 장손자의 얼굴을 휙 돌아보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게 사실인 거냐?”

“이미 잠자리까지 여러 번 함께하셨습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부부인까지도 서부 출신이 차지할 공산이 큽니다.”

주변을 둘러본 보벤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령관 막사의 초라한 모습과, 밖을 돌아다니는 동부 병사들의 지저분한 모습을 바라보며 샤자한 공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챙긴다더니......”

“섣불리 넘겨짚을 일이 아닙니다.”

다히르 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직 총리각하의 진짜 뜻이 확실치 않으니 두고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서부의 발 가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냐, 아냐, 이건 우리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샤자한 공이 아들 다히르의 말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내 틀림없이 막내 구르베스를 정실부인으로 삼아달라 말씀드렸거늘 그 여우같은 서부 년을 가까이 하신다니......”

기세가 오른 보벤 경이 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보십시오. 타르서스도 말씀입니다. 우리가 천거한 동부출신들을 모두 제치고 중앙귀족으로 지방장관을 삼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서부에서 쫓겨난 네페티 부인 말씀입니다. 지금 그 여자가 타르서스 별궁에서 사실상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직할군 사령관까지 서부에서부터 따라온 자기 심복으로 두고 말입니다.”

샤자한 공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벤 경이 계속 언성을 높였다.

“카렐 그자도 황제령에 있을 때는 빼놓지 않고 그 여자에게 들러 시간을 보내고 있고......녀석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듯 합니다. 제위에 오르면 그 여자를 최고제후에 복권시키겠다고 까지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황비를 최고제후로 둔다는 게 무얼 뜻하겠습니까? 서부를 사실상 직접통치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경칭도 없이 장태자인 카렐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 보벤의 태도에 다히르 경이 보일 듯 말듯 얼굴을 찌푸렸다. 보벤이 계속 언성을 높였다.

“아메스가 비록 우리집안 피가 섞이긴 했지만 서부 세호 가의 피 역시 비슷하게 섞이지 않았습니까. 엄밀히 말해 그 애는 동부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억지 부리지 말게나. 보벤. 아메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동부사람으로 컸어.”

듣다못한 다히르 경이 결국 한마디 쏘아붙였다.

숙부의 말을 그대로 무시해 버린 보벤 경은 여전히 샤자한 공에게만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하긴 조금 뭣하지만......솔직히 아메스가 그다지 미인도 아니고......나이도 어린데다가 그렇게 나긋나긋하고 매력 있게 구는 아이도 못되는데......나중에 황후가 된다해도 이미 능구렁이가 다되어있는 절세 미녀 네페티 부인을 상대해서 제대로 황제의 사랑을 받아가면서 내명부 수장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아버님께서 동부출신 황빈을 두자고 하신 것 아닌가?”

다히르 경이 다시 끼어들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그것도 문제입니다. 카렐 그자가 나머지 황빈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누군지 아십니까? 기껏 가디언 사생아인 솔이라는 년입니다. 아비가 가디언이고 어미가 서부여자니까 따지고 보면 서부 세호 가 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억지 좀 그만두지 못하겠나!”

다히르 경이 버럭 화를 냈지만 보벤 경은 여전히 숙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할아버님,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빈까지도 서부와 동부가 하나씩 나누어 가지는 셈입니다. 아니, 아메스가 세호 가 손녀인 것까지 합쳐보면 세호 가에서만 내명부 비빈을 두 명이나 두는 셈입니다. 세호 가가 어떤 가문입니까? 로노 장태자전하를 몰락시킨 주페 태자 그 썩을 작자가 난 바로 그 가문입니다!”

“그 때 잘못했던 건 서부가 아니고 우리 동부였다는 걸 알아야지! 근위대장 그놈 거짓말을 아직까지도 믿고 있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흥분한 다히르 경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강경론을 주장하는 장손자 보벤 경과, 아들 다히르 사이에서 샤자한 공이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이들 둘 사이에 눈에 보이는 단순한 의견차이를 넘어선 묘한 견제의식이 있는 것을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 둘의 싸움은 전통적으로 가문의 군을 장악하고 강경한 독립 세력론을 주장해 온 장남 아르군의 계보와, 가문의 내치 분야를 장악하고 북부, 서부지역과의 유화책과 실질론을 주장해 온 온건한 다히르 계보간의 근본적인 의견대립이기도 했다. 다히르가 가장 총애하는 셋째아들 네자드까지 내놓으면서 유학자이면서도 무장인 제네르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샤자한 공은 마치 잡아먹을 듯 서로 노려보고 있는 보벤 경과 다히르 경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흥분한 보벤 경은 씩씩대고 있는 숙부 다히르 경의 매서운 시선도 전혀 상관 않은 채 샤자한 공에게 계속 말을 퍼부어댔다.

“할아버님, 황빈 2위는 모두 동부가 가져와야 합니다. 북부도 안됩니다. 그 잘나고 똑똑한 세네피스 황태후가 좀 휘둘러대려 하겠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가능한 타협을 해야지!”

다히르 경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건 숙부님이 솔 그년을 못 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 어미를 그대로 빼닮은 절세 미녀란 말씀입니다. 페로 관에서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보물 취급했을 정도로 제국 제일의 미녀란 말입니다. 카렐 그자도 눈이 있는데 그런 년에게 정이 안가겠습니까? 동부 출신으로 황빈 둘을 모두 삼고 그년은 그 아래인 귀인이나 소의 정도로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자네 뭘 모르는군, 미모라는 건 처음 3일만 지나고 나면 다 소용없는 것이야.”

보다못한 네자드 경까지 결국 끼어들면서 술자리는 이들 셋의 설전으로 번지고 있었다.

“아메스하고 태자전하하고도 멀쩡히 좋은 사이를 왜 그리 혼자 폄하하려 하는 거지?”

“의무감에서 그랬겠죠. 우리 도움이 궁한 건 자기 쪽이니.”

보벤 경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다히르 경이 빈 술잔을 채우며 중얼거렸다.

“괜히 삐딱하게 굴지 말게. 내가보긴 태자전하께서 아메스를 많이 아끼고 계셔. 딱 보면 그것도 모르나?”

“보십시오, 숙부님, 지금 카렐 그자를 위해 피 흘려가며 싸우고 있는 건 우리 동부사람들입니다. 그 서부 놈들이 하는 게 뭡니까. 발 가는 기껏 팔짱끼고 있어주는 대가로 부부인까지 노리게 되었는데, 우리 동부가 피 흘려 싸워 얻는 게 뭐라는 말씀입니까. 기껏 먼다리로 걸친 황후하고 총리 하나 내는 게 우리가 바란 겁니까?”

“이봐, 보벤, 지난 4차 혼란기 때 우리가 쓸데없이 큰 욕심부려 얻은 게 뭐였나? 우리가 주페 태자와 아웅다웅하는 새에 북부만 어부지리를 챙겼을 뿐이야. 지금 같은 어려운 때 당장 승리를 챙겨야지 밥그릇타령만 해서 될 일인가.”

숙부를 설득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보벤 경은 다시 할아버지 샤자한 공을 돌아보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님, 가장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동부가 더 큰 몫을 당당히 요구할 때입니다. 부부인은 물론이고 황빈 2위까지 우리가 받아내야 합니다! 내각에서 우리가 할양받을 대신직도 미리 못박아둬야겠죠. 타르서스 장관을 중앙귀족출신에게 주었다면 직할군 사령관만이라도 우리 동부출신이 가져가야 합니다.”

“자넨 지금 이 어려운 상황에서 집안싸움이라도 일으키자는 건가!”

네자드 경의 고함소리도 못들은 척 한 보벤 경이 할아버지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즉위 후에도 우리 동부가 제국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왜 여기서 피를 흘리고 있어야 합니까?”

다히르 경과 사촌형 네자드를 한번씩 째려본 보벤 경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건넸다.

“근위대에서 우리가 카렐 저자를 버리면 지금까지의 제재조치를 모두 풀고 막내고모님을 황비, 아니 실질적인 황후로 삼겠다 제안했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우리도 근위대쪽 제안을 카렐 그자에게 당당히 공개하고 더 큰 몫을 요구해야 합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근위대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나가야 합니다.”

“보벤 너 미쳤구나! 네 아버지 아르군 형님이 누구 손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냐!”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지금 카렐 밑에서 경기병단장으로 있는 그 망할 년 손에 돌아가셨지.”

보벤의 빈정거리는 듯 한 대답에 순간 격분한 다히르 경이 술잔을 집어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샤자한 공이 노기 띤 얼굴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네 감히 아비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

순간 얼굴이 붉어진 다히르 경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얼른 다시 앉았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보벤 말도 일리가 있다.”

한숨을 내쉰 샤자한 공이 술잔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태자가 서부 쪽에 꽤 신경쓰고 있다는 소식이구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가 자칫 이용만 당하고 실속도 놓쳐버릴 수 있을 거다. 한번쯤 제대로 못을 박아야 할 것 같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던 샤자한 공은 손자 네자드 경을 돌아보며 조금 쌀쌀맞게 말했다.

“한동안은 너도 제네르 그 애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눈치가 빠른 애니 우리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챌 거다. 그러니 내 허락할 때까지는 그 애와 가까이하지 말거라.”

“하, 하오나......”

당혹한 표정을 지은 네자드 경이 무어라 하려던 말은 밖에서 들려온 경비병의 목소리에 가로막혀버리고 말았다.

“페로 자이센 총리께서 드십니다.”

눈치를 보며 자리를 정돈한 네 사람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며 나지크에서 막 도착한 페로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턱이 없는 페로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에 고개만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