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9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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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하급제후가문에서 온 4명의 귀족여인들과 원탁에 나란히 둘러앉은 카렐은 이번의 상견례 역시 지난번 북부제후가 여인들과의 만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미 카렐에게 충분히 익숙해져있는 탈란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여인들은 막상 마주한 태자의 살기등등한 모습과 희한하다못해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데려온 각 가문 종장들은 자신의 가문 여인과 태자를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작 이 ‘괴물‘과 함께 살아야 할 여인들 스스로의 입장은 그것과는 사뭇 엇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어부지리‘를 챙기고 있는 탈란은 기분이 꽤 좋은지 카렐에게 연신 미소를 보내며 찻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물론 카렐도 ‘차이기 위해’ 나온 건 사실이었지만 자신을 괴물 보듯 하는 시선들이 기분 좋을 턱은 없었다. 어쨌든 ‘미모’와 ‘매력’이 반드시 함께 붙어다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또 한번 확인되고 있는 자리였다.
“키가......꽤 크시군요......”
9제후 클라투스 가에서 온 아가씨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 뒤에 있는 카이두 경보다는 조금 낫지 않소?”
그의 빈 잔에 차를 부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던 카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큰 손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그의 모습에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카렐이 두 팔을 쫙 벌려보이며 말했다.
“난 그대로 날씬하기는 하잖소? 이상적인 신체비례에. 아참, 손만 빼고.”
“그렇죠. 몸매가 매력적이시죠.”
탈란이 갑자기 끼여들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카렐의 예민한 귀에 10제후 첸 가 출신 아가씨가 중얼거리는 ‘그럼 너나 가져라’라는 혼잣말이 작게나마 흘러들어왔다. 그 말을 못들은 척 다시 찻잔을 들이킨 카렐은 8제후 나라 가에서 온 자그만 아가씨가 입을 여는 모습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외모는.......평소 들어오던 무서우신 이미지하고는 조금 틀리시군요. 인상은 매서우시지만......”
“고맙소.”
씽긋 웃음지은 카렐이 그에게 잔을 들어 보였지만 아버지의 눈짓을 받아 마지못해 한 그 여인의 말이 백 퍼센트 진심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다.
카렐의 뒤에 서 있던 우베는 ‘동부에도 이런 미인들이 있었다니’를 연발하며 혼자 넋이 나가 있었고 카렐의 무기들을 품에 안은 채 함께 서 있는 카토는 얼음같이 굳은 얼굴로 가뜩이나 어색한 이 자리를 더 썰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대강 상견례는 끝난 듯 하군요......잠시 후에 만찬을 함께 할 것이니 30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렐은 카토가 내민 무기벨트를 다시 허리에 두르고는 이 부담스러운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갔다.
“정말 천하에 못할 짓이군.”
제네르가 내민 주스잔을 받아 들이키며 카렐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지크 산악지대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이 ‘임시캠프’에도 어둑어둑한 저녁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기하학,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이런 외모는 물론이고 그 위에 걸친 검고 화려한 비단포와 황실문장이 새겨진 위엄 넘치는 머플러, 악세사리와 같은 치장으로도 ‘찜찜한 과거사과 희한한 유전자’를 지닌 이 가디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 맘대로 되지만은 않는것이 문제였다.
카렐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제네르는 카렐의 목에 두른 황실문양 머플러를 바로잡아주며 말을 건넸다.
“그냥 눈 딱 감고 넘어가시죠. 어차피 탈란 바툴 부장을 제외하면 다 도망갈게 뻔하니까요. 지금 도망가든, 잠자리 가진 후에 ‘속궁합 안 맞는다’고 도망가든.”
“뭐 다 거절한다면 속은 편하겠지만 그게 무슨 개망신이냐구.”
“속궁합 안 맞는다고 도망가면 더 망신스럽겠죠.”
“난 아마 배우자감으로는 인기 최악의 황제로 역사에 남을거야. 훗,”
키득거리던 카렐은 여자들이 있는 겔 한쪽에서 긴장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각 가문 원로들과 종장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음? 저게 누구죠?”
제네르가 갑자기 가리킨 곳에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페로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페로 역시 그를 맞아주는 카렐만큼이나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제네르 경 자네도 좀 와 주겠나?”
두 사람을 데리고 외진 곳으로 무작정 온 페로는 갑자기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큰일이야.”
“뭐가?”
“샤자한 공이 단단히 열이 났던걸. 내가 사우드 부인을 가까이한다고 말이야.”
“훗,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카렐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벤 경 그놈이지? 요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더니 결국 집에 와서 한방 터뜨린 모양이네.”
“썅, 진짜......”
페로가 대뜸 그다운 욕지거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최측근 보좌관으로 두고있던 보벤이 샤자한 공에게 불만을 터뜨린 것이라면 다른 내용들이라고 함께 오가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페로는 이번에는 카렐 옆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는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제네르 경. 혹시 네자드 형님 만난 일 있나?”
“아뇨......요즘 바빠서 통......”
“아니, 그쪽에서 연락 온 일 있냐고.”
그제서야 고개를 번쩍 든 제네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틀 전부터 아버지하고 슈카른 계곡에 와 있는 사람이, 바로 부근에 있는 자네한테 연락한번 안했다고?”
“사실입니까?”
상황을 눈치챈 제네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문제가 단순히 제네르와 네자드 경 사이의 문제 수준이 아닌, 동부제후세력과의 협력관계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임을 자리에 모인 세 사람 모두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샤자한 공이 또 한바탕 밥그릇시위를 하려는 모양이군.”
카렐이 어깨를 으쓱 했다.
“어차피 언젠가 넘어가야 할 문제였으니까 그리 심각할 거 없어.”
“샤자한 공이 곧 올거야. 이번 상견례 결과 본다는 명목인데......너한테도 한마디 꺼낼 거 뻔하지.”
찡그린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린 카렐은 이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등장한 악재에 내심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코리온을 통한 서부와의 협력도 불가능해진 이 상황에서 샤자한 공의 ‘무리한 요구’에 마땅히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에 속만 바싹바싹 타들어갈 따름이었다.
“차남 다히르 경 쪽은 말이 좀 통할 테니까 그쪽하고 좀 얘기해봐야겠어. 내치는 그쪽이 장악하고 있으니 그 수밖에 없겠어. 보벤 그놈은 조만간 쫓아내야겠어.”
페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렐이 한마디 덧붙였다.
“황제령에 알려서 앞으로 중요한 정보는 차단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 중요 정보가 그 녀석 통해서 샤자한 공한테 다 흘러드는 모양이니까. 열흘 후에 암호코드 변경 있는 것도 함수 빠져나가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그래야겠지.”
“전하와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웃음 띤 얼굴로 카렐과 마주앉은 샤자한 공은 만찬장 원탁에 함께 둘러앉은 동부 하급제후들과, 이번 상견례를 위해 찾아온 4명의 여인들을 한번씩 빙 둘러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샤자한 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에게 샤자한 공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황빈 2위 중 나머지 1위는 아직 어느 지역 출신으로 할지 결정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카렐은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겉으로는 아무 티를 내지 않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있을 따름이었다.
“하크로딘 가에서 종가 손녀 중 한 명을 전하께 기꺼이 바칠 의향이 있다 하옵니다.”
미간을 조금 찡그린 카렐이 제네르를 휙 돌아보았다. 제네르 역시도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가문에서 나왔다는 뜻밖의 의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그건 내 지금 답변해주기가 곤란하구려. 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물론 찬찬히 생각해보시고 그 결과를 알려주시옵소서, 하크로딘 가 내부사정이 있사오니 30일 이내로 답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은 부드럽게 하고 있었지만 실상 한 달의 기간을 준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카렐의 사뭇 굳은 표정에 만찬장 분위기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카렐은 동부 하급제후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장태자인 자신에게 거의 공개적인 망신에 가까운 치욕을 주고 있는 샤자한 공에게 내심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샤자한 공은 시작한 김에 끝까지 밀어붙일 양인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제 장손자인 보벤은 아버지였던 아르군의 휘하에서 경기병대장까지 지낸 일이 있을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인재입니다.”
“그런데요?”
주스를 훌쩍 들이킨 카렐이 쌀쌀맞게 되물었다.
“이제 페로 경의 보좌관직을 떠나 다시 군문에서 일하고 싶어하옵니다. 평소 중앙군에서 일해보고 싶어하던 뜻이 있었사오니......그 애를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으로 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3만 5천의 타르서스 직할군은 지금 황제령에서 카렐과 페로가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공식 편제’의 군대였다. 베흔의 근위대나, 중립을 지키고 있는 아메샤 스펜타 군단 정도의 최정예군은 되지 못했지만 제후군 수준으로 비교적 탄탄하게 편제되어 있는 그들은 이후 전사단의 배후지원부대로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중요한 전력이었다.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은 수레드 알 유시프 장군이 이미 맡고 있소. 타르서스 직할군은 그 구성과 체계가 서부제후군과 극히 유사하여 서부 출신 지휘관이 유리하다 판단한 것이요. 게다가 보벤 경은 유시프 장군에 비해 군문의 경험 또한 짧으니 3만5천의 대군을 거느리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요. 허나 중앙군에서 일하기를 원한다면 일단 부사령관격인 참모장 정도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소.”
합리적인 설명을 곁들인 카렐은 나름대로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샤자한 공은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더욱 더 높이며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서부출신 인물입니다. 타르서스는 원해 친서부적인 지역이었으니 그 자 역시 언제 전하를 배신할지 모릅니다. 확실히 하는 차원에서 전하께 충성하는 동부출신으로 군을 장악하게 하심이 타당할 것입니다.”
눈을 부릅뜬 카렐은 이 만찬장에 모인 4명의 동부 하급제후들과, 샤자한 공에 포위당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자신의 편을 들어줄 제후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카렐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굳어진 표정의 카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자 제네르가 급히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카토에게서 무기를 받아든 카렐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무 말 없이 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런 카렐의 등뒤로 샤자한 공의 노기어린 시선이 내리꽂혔다.
“아버님을 팔아넘기던 로노 장태자 심정이 이랬을까.”
씁쓸한 얼굴로 절벽 끄트머리에 한참을 서 있던 카렐은 어느새 자신의 등뒤에 다가와 있는 제네르의 존재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하께는 전하께만 충성하는 무려 7만, 아니 곧 12만이 될 충성스런 전사들과 북부, 타르서스가 있사옵니다. 그분과는 완전히 틀리십니다. 힘내십시오. 어차피 한번쯤 길들이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전하를 만만하게 보았던 샤자한 공도 이번에 정신이 퍼뜩 들었을 겁니다.”
제네르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카렐이 잔뜩 성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긴 한데.......왜 그게 하필 지금이냐는 말이지.......하필 이런 중요한 때 발목을 잡냐고. 똘똘 뭉쳐도 부족한 때에.”
한숨을 내쉰 카렐은 동쪽하늘에서 떠오르는 별들을 바라보며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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