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00화 (299/1,132)

< -- 300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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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십니까? 학장님을 뵐 수 없다뇨?”

릴라크와 함께 코리온을 찾아온 사람은 그의 남편 루시도프 플라칼 경이었다. 남극성당 교리로 있다가 낙향해 가문 영지의 지사를 맡고있는 그는 중도파에서 촉망받는 젊은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기사답게 크고 다부진 체구를 한 부인 릴라크의 눈 높이 정도 올까말까한 크지 않은 키에 선한 인상을 지닌 그는 호전적인 가문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 부인의 말마따나 그다지 플라칼 가 사람 같지는 않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플라칼 가의 군대가 코리온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에 남부에서 남극성당을 잠시 들렀다가 이곳까지 오는 먼길을 달려온 그는 학파는 비록 다르지만 평소 존경하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군인도 아니시고......저도 유학자로서 그분께 문안을 드리려 하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극성당 육서과정 교리인 루시도프 플라칼입니다.”

“무어라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그분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으시고......외부인들과의 접촉을 원치 않으십니다.”

코리온의 숙소 앞을 지키고 선 플레렌 가 장교는 루시도프의 애원에도 사뭇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루시도프의 옆으로 쌀쌀맞은 표정의 샤드니가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에게 급히 달려간 루시도프가 얼른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플라칼 가 6남인 남극성당의 루시도프 플라칼 교리입니다. 학장님을 찾아 뵙고자 이곳까지 왔는데 들여보내주지를 않아서......잠시만 그분을 뵙게 해주신다면......”

“허, 플라칼 가에도 유학자가 다 있었나?”

시가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샤드니의 언사에 릴라크가 보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샤드니는 잔뜩 경계 서린 눈빛으로 릴라크와 루시도프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냥 어중이떠중이 유학자도 아니고 플라칼 가의 종가자녀이고 플라칼 가 기사단장 중 한 명인 릴라크의 남편이라면 괜히 쌀쌀맞게 대해서 감정만 상할 이유는 없었다.

“10분 정도만 뵙고 나가게.”

그제서야 안도한 루시도프는 릴라크와 함께 플레렌 가 병영 안쪽의 코리온 처소에 들어섰다.

‘뭔가 이상한걸,’

군대밥만 200년을 넘게 먹어온 릴라크는 코리온의 숙소를 둘러싸고 있는 낯선 병사들의 눈빛이 ‘서부 정규군’의 그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챌 수 있었다.

‘수베르 용병들이군.’

샤드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던 릴라크는 이중으로 쳐진 방호벽과 용병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이들이 ‘바깥’이 아닌, ‘안’을 지키고 있다는 묘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코리온에게 거의 정신나갈 정도로 충성하는 서부제후군들이 왜 야만족인 수베르 용병들을 불러다가 코리온을 지키게 하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플레렌 가의 정예 장갑보병들이 훨씬 헌신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를 지킬 것을.

“샤드니입니다.”

2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샤드니는 창가에 말없이 앉아 있던 코리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돌린 코리온은 샤드니와 함께 서 있던 루시도프와 릴라크에게도 힐끔 시선을 주었다.

“루시도프 플라칼 교리.”

“저같이 별 볼일 없는 유학자를 알고 계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코리온 같은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데 고무되었는지 그의 앞에 급히 다가간 루시도프는 코리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그 앞에 절을 올렸다. 남편과는 달리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숙이는, 군대식 경례를 올린 릴라크는 조금 전 남편이 입을 맞추던 그의 손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반지가......없어지셨군요?”

창백한 얼굴의 코리온은 릴라크의 언급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방 한쪽에 서 있던 샤드니는 코리온을 찾아온 이 부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도프는 가져간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코리온에게 바치며 말했다.

“학장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13선지자중 한 분인 쿠디안의 유작 필사본입니다. 대제학께서 학장님께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말없이 필사본을 받아든 코리온은 갑자기 그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루시도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고맙네. 나도 처음 보는 것이로군.”

코리온의 입가에 뜬금 없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필사자의 이름과 수결 부분이 지워져있는 그 복사본 표지에는 그다지 서툴지 않은 해서체로 또박또박 쓴 필사 개요사항이 몇 장 적혀져 있었다. 물론 코리온은 언젠가 본 일이 이 글씨체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필사자 이름이 왜 지워져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코리온은 100여 쪽 정도 되는 그 필사본을 한 번 죽 살펴 내려갔다. 세네피스 황후가 건넸다는 말에 잔뜩 경계심에 사로잡힌 샤드니가 코리온의 뒤로 다가와 글들을 함께 바라보았지만 죽 넘겨 내려가는 속도 때문에 거의 읽을 수도 없었다.

“자네도 보겠는가?”

코리온은 필사본을 불안해하고 있는 샤드니에게 넘겨주고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본을 빼앗듯이 냉큼 넘겨받은 샤드니는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곳은 전혀 없었다. 루시도프에게 미소지어 보인 코리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내 답례로 서화와 글 한 점을 써 줄 테니 잠시 기다려주겠나.”

루시도프 부부를 내보내고 혼자 방에 앉아있던 코리온은 오전에 갑자기 없어져버린 라스 녀석 때문에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사막 한중간의 이 병영에서 녀석이 도망쳤을 리도 없겠지만 무슨 일인지 거의 반나절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간만에 완전히 혼자 있게 된 코리온은 탁자에 앉아 샤드니가 압수해가 버린 그 필사본의 ‘개요사항’ 문장을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리며 손으로는 공용어로 된 전혀 엉뚱한 내용의 문장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회귀수열.......간단한 등비수열에......함수방정식을 조합시켰으니.......획수로 이 장난을 치다니.”

기가 막힌 듯 웃으며 펜을 내려놓은 코리온은 자신이 다시 정렬해 써 내려간 새로운 문장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훗,”

한 장 정도 되는 카렐의 편지글에는 사실 그다지 대단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째 외부와 단절된 채 외로이 지내고 있는 코리온에게는 충분히 힘이 될 것들이었다. 게다가 평소의 그 차가워 보이는 외모답지 않게 글의 절반 이상을 가득 채운 우스개 소리들은 그 뻣뻣하던 코리온의 표정도 잠시나마 풀릴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라 했으니 다음엔 아버지 침실스타일도 좀 알려주시구려.’ 라는 문장에 코리온도 황당함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에 얼른 편지를 찢어 삼켜버린 코리온은 문 쪽을 휙 돌아보았다. 흐느적거리는 라스의 뒷덜미를 움켜쥔 채 안에 들어온 샤드니는 그를 방 안에 거칠게 동댕이쳐버렸다.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자신 소유의 노예를 멋대로 거칠게 다루는 모습에 코리온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바닥에 쓰러진 라스는 어찌된 일인지 거의 사색이 다 된 채 사타구니를 붙들고 끙끙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샤드니.”

“이 앞의 공동화장실에서 병사들에게 멱살이 잡혀서 왔더군요.”

“......”

“아직 거세를 안시키셨더군요?”

샤드니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코리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곧 시킬 생각이었다. 이 달 13일까지만 시키면 되니.”

“이젠 됐습니다. 지금 의무실에서 거세해 데려오는 길이니까요.”

샤드니는 거세도 않은 어린 노예가 그간 코리온의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부아가 난 모습이었다. 샤드니의 황당한 질투에 기가 막혀진 코리온은 찡그린 얼굴로 방 구석에 웅크려 앉아 힘겹게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라스를 바라보며 입가를 약간 일그러뜨렸다. 수술 후 적어도 하루이틀정도는 쉬어야 하는 것을 잘 아는 코리온은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후에 수술을 시키기 위해 미루고 있던 것 뿐이었다.

“잘했다만 데려갈 때 내게 미리 얘기할 정도의 여유도 없었나?”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샤드니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코리온에게 다가섰다.

“학장님과 저 사이의 유전자 비교표가 완성되었습니다.”

밝아진 표정의 샤드니가 손에 들고 온 두툼한 책자를 들어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코리온에게 뻔뻔스러울 정도의 미소를 지은 샤드니는 책 앞부분들을 들쳐보며 중얼거렸다.

“근친도는 낮고......뭐, 전 순수한 서부혈통이고 학장님께선 황제령과 남부혈통이니 당연하신 노릇이지요. 2세에게서의 열성질환 발생률은 극히 낮습니다. 한마디로 유전적으로 완벽합니다.”

“내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그 문서에 크게 기뻐했겠지.”

“그러실지도.”

여전히 밝은 얼굴의 샤드니는 책상에 앉아있던 코리온을 반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대공주저하께서 종친회 소집안을 오늘 발송하셨다는 소식입니다. 50일의 여유를 두고 발송하게 되니 다음달 말에 처리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깜짝 놀랄 소식하나 전해드릴까요?”

자신을 돌아보는 코리온의 입술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선 샤드니는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카렐 그놈과 페로의 딸년, 그리고 네페티 누님과의 혼인도 함께 의제에 올라있죠.”

“어차피 예상했던 것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만......그날엔 그 중 한 건의 혼인동의안밖에 통과되지 못할테니 서글플 뿐이죠. 이미 죽은 녀석 혼인안을 통과시켜 뭣하겠습니까.”

“이거야?”

우베가 카렐에게 들고 온 건 두툼한 문서였다. 그리고 그 표지에는 ‘S-7-13 카렐 카파키 리쿠 - 상급귀족 아메스 로퍼크 자이센 형질비교표’ 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예, 조금 전에 모렌 박사가 보내온 데이터를 출력한 겁니다.”

카렐은 사뭇 긴장된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제네르와 하심을 돌아보았다. 우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모렌 박사님 기분이 꽤 좋으시던데요? 전하 형질에 이상한데가 많아서 걱정했는데 생각 외로 결과가 잘 나왔다구요.”

우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든 카렐은 그에게 잠시 나가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 양반 술김홧김에 나 합성한 거 보고 눈치챘어야 하는데, 은근히 정신없는 성격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즉위하면 유전자은행 소장으로 다시 복직시켜주려고 했더니, 재고해봐야겠는걸. 근친도도 안보고 순 엉뚱한 것만 봤구만.”

카렐이 긴장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농담을 늘어놓았다. 비교표를 집어든 카렐은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그 표지를 열었다. 제일 앞에는 두 사람의 계보표가 그려져 있었다. 리 리쿠를 정점으로 파냐드, 에르네스토 리쿠, 세나우스 1세부터 3세까지,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카렐의 ‘숙부’에 불과한 주페 태자는 샤미르 리쿠 등과 같이 ‘옆에 따로’ 표시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장을 넘긴 카렐은 그곳에 쓰여져있는 아메스의 계보표를 응시하고 있었다. 페로와 마리안 부인, 외조부모인 카를 로퍼크와 뤼렌 세호, 바로 이 뤼렌 세호 부인 옆으로 자신의 조부이기도 한 라바니 세호 경의 이름이 똑똑히 쓰여 있었다.

“휴,”

한숨을 내쉰 카렐은 조심스럽게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일 중요한 각종 표들이 들어있었다. 이런저런 유전질환 발생률을 비교한 그 표의 끄트머리에는 바로 카렐이 그리도 걱정하던 ‘근친율 환산수치’가 붉은 표시가 된 채 똑똑히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살펴본 카렐의 표정이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깜짝 놀란 제네르가 급히 다가왔다.

“그렇게 높습니까? 그럼 이걸......어쩌죠?”

고개를 가로저은 카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둘에게 페이지를 들쳐보였다.

“근친도 0.04. 근친관계는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유전적으로 완벽한 다양성을 확보했음을 확인합니다......나하고 아메스는......아무 피도 섞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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