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1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나우스 1세의 첫째부인이었던 테나스 이그나토 황후, 아니 태후는 지금 ‘남부제후’라고 불리고 있는, 비엔 농업콜로니 지역의 대지주가문의 딸로 당시 80세의 나이로 14살의 어린 남편과 결혼해야 했던 꽤나 불운한 여인이었다.
이 여인 역시 옹주의 어머니 유레트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집권기 후반부 동안에는 거의 독수공방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실상 정치판에 있어서는 거의 남편에 맞먹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댔던 강인한 여인이기도 했다.
테나스 태후는 절룩거리며 들어온 이 추한 몰골의 자그만 생도를 무표정하게 바라만보고 있었다. 마주서있는 옹주와 마찬가지로 이 여인 역시 남편의 죽음에 그다지 개의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만이구나, 옹주.”
프라임 지역의 황궁을 ‘북부제후’들에게 빼앗기고 타르서스로 허겁지겁 도망쳐왔던 태후는 이곳 지방청사로 쓰이던 크지않은 건물에 옹색하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녕하세요,”
태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유평옹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전혀 황족답지 못한 그의 철없는 태도에 태후와 함께 있던 신하들이 낯을 조금씩 찡그리고 있었지만 테나스 태후만은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폐하의 소식은 들었느냐?”
“예.”
짧게 대답한 옹주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조차 없었다.
“네가 장자니......상주가 되어야겠구나.”
“그러죠 뭐.”
옹주가 또 한번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지었다. 조금 모자란 건지 아니면 돌아버린 것인지 전혀 생각 없이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 분개한 황실 신하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지만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 손짓한 테나스 황후는 앞에 서 있는 이 첩의 소생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서는 품에 꼭 껴안았다.
“이제 내겐 너 뿐이구나. 네가 아버지를 잃어 슬픈 만큼 나도 남편을 잃어 슬프단다.”
“......”
“폐하께서 그리되시면서 황실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 되고 말았구나. 누군가 황실을 떠받치고 부흥시킬 인물이 필요하니 지금 너밖에 그럴 인물이 없단다.”
“그런데요?”
신하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와중에도 그 제일 안쪽에 있는 단 한사람, X-5-3918 베흔만은 묘한 광채를 번득이는 그 초록색 눈동자를 번득이며 이 덜떨어진 옹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겨우 1천명 정도나 남아있을까 말까 한 이 X들은 ‘두 번째의 대멸망’ 폐허 속에서 나타난 숱한 돌연변이들 중 체력적으로 우수한 쪽으로 발전한 극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당시 발견된 십여 명의 특이한 돌연변이들을 조합해 인위적으로 창조된 이들 X들은 그 탄생의 근원으로만 따지자면 지금 황족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S들과 별 차이도 없었다. 다만 놀랍도록 발달된 전사로서의 육체가 그간의 숱한 분쟁들에서 그들이 소모품으로 죽어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는 비참한 현실이 문제일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합성된 5천명의 X들 중 겨우 1천명만이 살아남았다는 것만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힘겹게 그 피의 명맥을 유지해온 것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강력한 형질을 자손에게도 물려주는 탓에 이런 운명을 겪은 X들에 비하면 후손들 중 드물게 깜짝 놀랄 천재가 태어나는 정도가 고작인 S들은 이런 극단을 피해갈 수 있었던 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베흔 대장, 어떻게 생각하시오? 유평옹주를 황실의 새 후계자로 삼는 것이?”
테나스 태후의 물음에 베흔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혀 보였다.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태후 폐하.”
옹주를 데려온 오르마즈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고있는 저 건장한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옛날 샤미르 리쿠의 휘하에서 전우로 함께하기도 했던 저자는 대개 단순하고 무식한 보통의 X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X-5 세대의 최종개량형인 소위 ‘8그룹’ 출신인 저자는 합성순서로 서로간 서열을 매기는 X들의 원칙적인 방식에 따르자면 사실 최하의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기원 59년 있었던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저들 '8그룹‘들은 그와는 별도로 X내에서도 일종의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8그룹의 리더이기도 한 저자는 그 많은 선배들을 발 밑에 거느리고 지금 ’근위대장‘의 지위에까지 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합성된 X 개체 중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저 8그룹들은 X-5-3901부터 3918인 베흔 저자까지, 겨우 18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특징은 외형상으로도 뚜렷했다. 기형적으로 큰 손발과 6척 반이 넘는 가디언으로서도 큰 키는 그들의 특징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다른 신하들도 폐하의 뒤를 이어서 네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데 모두 찬성했단다.”
테나스 태후가 우둘두둘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갑자기 정색을 한 옹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로요? 제가 황제가 되는 거예요? 다 찬성했다구요?”
“그래, 네가 장자니 당연히 네가 되어야하지 않겠느냐.”
“오르마즈, 들었죠? 내가 황제가 된대요.”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이는 유평옹주에게 오르마즈는 씁쓸한 미소만을 지었을 뿐이었다. 오르마즈는 이 기가 막힌 연극이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의 손에서 큰 이 젊은 옹주가 내심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일 폐하의 장례를 치를 테니 그게 끝나는 대로 네 대관식준비에 들어가자꾸나.”
말을 마친 테나스 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저 늙은 구렁이 같으니,’
오르마즈는 내심 이런 발칙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테나스 태후는 설사 친자식들 세 명이 모두 살아있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제위를 넘겨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제위에 오르는 것이 스스로 기름통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었다.
“오죽하면 황손 12명이 모두 제위에는 죽어도 못 오르겠다고 내뺐겠소.”
오르마즈 옆에 서며 말을 건넨 건 근위대장 베흔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타르서스를 1달, 아니 2달이나 버틸 수 있겠소? 새 황제 할일이래야 북부놈들한테 먹히고 나면 황실대표로 모가지 잘려줄 어릿광대 역할 뿐일텐데.”
“태후폐하 생각은 조금 틀린 것 같은데?”
오르마즈의 대꾸에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똑똑하신 분이시니......실질을 택하시겠죠. 고향이 있는 남부를 이곳에 끌어들일 생각이신 것 같소. 그런데, 그런다고 새 황제가 모가지 안 달아날 것 같소? 테번 그 새끼 옥좌 한번 앉아보고 싶어 환장했던데, 남부에 황제령과 황제의 모가지를 내주는 대신에 황후폐하 당신과 다른 황실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하겠죠.”
베흔의 말을 듣고있던 오르마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오르마즈를 향해 돌아서며 베흔이 다시 물었다.
“똑똑하신 옹주께서 정말로 저런 바보가 되신 건지, 아니면 그런 척만 하시는 건지 내 잘 모르겠지만.......”
오르마즈가 옆에 선 이 음흉한 남자를 흘끗 째려보았다.
“지금 상황을 모르시지는 않을텐데, 저 연기를 해가며 제위에 오르시겠다는 건 야망이 크신 거요? 아니면 죽기 전에 한번 굵게 놀아나 보자는 거요?”
베흔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오르마즈는 신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짐짓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유평옹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추한 외모 속에 감추어진 두 얼굴의 옹주가 간사한 신하들과 태후, 황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 대신 죽어줄 희생양이 되어줄지, 아니면 그들을 희생양으로 요구할 죽음의 사신이 되어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라마단도 끝난 4월 4일 자정이 갓 지난 어둠 속을 한 필의 말이 바삐 달려가고 있었다. 온몸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그 기병은 짧은 창과 시미터 한 자루, 그리고 몸통만 겨우 가리는 흉갑과 등에 멘 작은 방패, 간단한 캡과 위장복을 입고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빈약한 무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해상 망원경와 정밀스캐너, 다른 제후군에는 없는 공간통신장비와 고감도 스코프는 이 기병이 첨단장비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서부제후군의 정찰기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다지 높거나 가파르지 않은 바위산들이 척박한 반사막 한가운데 드문드문 흩어져있는 이곳 나지크 산악지대는 동부연합군 주력이 주둔한 슈카른 계곡보다는 확실히 공략하기 쉬운 곳임엔 틀림없었다. 이곳을 공격할 임무를 맡은 서부제후군 낙타병부대장 하지즈 장군 입장에서 첫 번째 문제는 놈들의 조공부대인 카렐의 정예기동병력이 이 넓디넓은 산악에서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왔습니다!”
말에서 뛰어내린 정찰병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지휘관 하지즈 장군 앞에 급히 달려가 꿇어앉았다. 8천기에 달하는 서부의 정예 낙타병들과 릴라크의 2기사단 4천기, 1만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그의 휘하부대는 나지크 산악 귀퉁이의 한 절벽 밑에서 몇 시간째 비박을 하며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찾았나?”
“찾기는 찾았습니다만......”
“그런데?”
지도를 꺼내놓은 정찰병은 파악된 부대들의 위치가 표시된 화면을 즉시 작동시켰다.
“적들의 본진은 지난번 정찰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중앙지대의 바위산자락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들을 빙 둘러 오십명 정도씩의 동부 보병이 주둔한 보루가 산 정상부마다 산재되어 있습니다.”
“에너지장벽으로 포위해버리긴 힘들겠군요.”
릴라크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즈 장군은 조금 성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기병을 찾아내라지 않았나?”
지난번 루쿠스탄에서 제네르가 이끄는 슈로 기사단에 호된 맛을 보았던 그로서는 그때보다도 더 보강되었을 그 망할 기사단에 또 한번 뒤통수를 얻어맞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슈로 기사단은 본진 맞은편 고원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경계가 삼엄하고 교란장치까지 작동되고 있어 숙영지 자체를 확인은 못했지만 이곳에서 적어도 100여기 이상들의 중장기병들이 본부와 오가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문제는 경기병들인데......곳곳의 길목마다 흩어져서 언제든 집결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동력이 뛰어난 놈들이니......”
“됐어. 슈로 기사단만 찾았으면.”
하지즈 장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도 내용을 자신의 스코프에 입력해 넣었다. 그의 태도에 릴라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나 동부 경기병들의 기동력이 워낙 뛰어나니......”
“남부 중장기병들이라면 경기병들한테 쉽사리 당했을지 모르지만 낙타병들은 틀려. 낙타병의 장점이 뭔가. 말보다 힘과 지구력이 좋으니 무게가 엔간히 늘어나도 기동성에 큰 차이가 없다는 거지. 이번에 추가장갑으로 크게 보강했으니 녀석들 주무기인 투창공격도 거의 통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릴라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기사단만 무너뜨리면 보병들로 계곡을 틀어막고 경기병들을 한쪽으로 토끼몰이해서 몰살시켜버리면 돼. 경기병 주제에 중장기병한테도 벅찬 낙타병에게 근접전으로 달라붙어 오지는 못할 테니 우린 경기병 따위는 무시하고 슈로 기사단에 집중하도록 한다. 모두 출동준비!”
+++++++++++++++++++++++++++++++++++++++++++++++++++++++++++++++++++++++++++++++++++++++++++++
<소설 이 회의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편이 끝나는대로 그림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