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4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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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를 상실한 서부 낙타병들, 아니 낙타들이 서부보병대를 향해 차례대로 뛰쳐들면서 서부 보병대까지 일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불붙은 투창은 겁에 질린 낙타들을 향해 계속 날아들고 있었고 혼란은 거의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 다달아 있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보병들은 원래 임무인 적 봉쇄는 고사하고 언제 덮칠지 모르는 우군 낙타병을 피해 멀찍이 도망치느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서부 보병대에는 더 좋지 않은 운명도 기다리고 있었다. 가디언 네피를 앞장세우고 북쪽 언덕에서 몰려 내려온 3천명의 건장한 보병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그들이 기지 안에서 노예처럼 부렸던 그 ‘야만족’들이었다. 도끼와 원형방패 하나씩을 움켜쥐고 헐거운 대형으로 우루루 몰려오던 그들은 흩어져 도망치는 원수같은 서부 보병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리드!”
낙타병들과 보병대 사이를 맴돌며 공격을 퍼붓던 베아트릭스가 한 팔을 번쩍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명령에 지금까지 낙타병들에게 단 한번도 쓰지 않은, 중투장 자리드가 슬레이프니르들의 손에 일제히 들려졌다.
“근접공격 개시!”
기병들과 보병들까지 떨어져나간 데다가 대오까지 흐트러진 둔중한 낙타병들에게 빠른 경기병들은 이제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자리드를 움켜쥔 경기병들은 이제 낙타병들의 코앞까지 서슴없이 쳐오고 있었다. 놀란 낙타병들 중 몇이 경기병들을 향해 긴 창을 겨누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의 3, 40보 앞까지---평소 자리드를 던지는 거리의 겨우 절반에 불과한--- 쳐온 슬레이프니르들은 게임이라도 하듯 낙타병들을 하나씩 조준해서 낙타 등에서 떨어뜨리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썅! 저놈들!”
막막해진 하지즈 장군은 피를 토하고싶은 심정이었다. 평소의 두 배에 맞먹는 무거운 중장갑을 두른 낙타병들은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은 전투용 낙타 등에서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거의 정신조차 차리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병에 대해서는 사살보다는 전투력 상실이 1차 목적인 투창공격의 특성 덕택에 낙마한 낙타병들을 직접 잡아죽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들을 좀 더 헤집어!”
적 낙타병부대가 중앙부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뒤이어 달려온 경기병들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인화물질이 잔뜩 들은 탱크---바로 베아트릭스가 동부연합군 군수품창고를 습격했을 때 썼던---를 낙타병들 중간에 집어던지며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지난번 바얀 오아시스 기습에 이어 야간의 화공에 유난히 취약한 낙타병들의 단점이 또 한번 확인되고 있었다.
주변의 낙타병들을 가까스로 수습한 하지즈 장군은 일단 100여기의 낙타병들만을 거느리고 적 경기병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미 절반에 가까운 낙타병들이 전투력을 상실해버린 상황이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수적인 우세라는 마지막 기댈 언덕이 남아있었다.
“모두 비켜!”
기왕 이렇게 된 판에 흐트러져 있는 보병들까지 모두 챙겨줄 여유는 없었다. 수적인 우세를 동원해 귀찮은 경기병들만이라도 쫓아내고 빨리 남부 기사단을 도와 슈로 기사단만이라도 박살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낙타병들이 돌격해오자 깜짝 놀란 경기병들은 잽싸게 몸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지즈 장군으로서는 그 이상은 할 도리가 없었다. 속도로는 도저히 경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로서는 경기병들을 잠시 쫓아내는 정도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본대 밖으로 돌진해 나온 하지즈 장군의 머리 위로 수십 발의 투창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패를 치켜들고 가까스로 몸을 피한 하지즈 장군은 방패에 박힌 투창을 신경질적으로 잘라내 버렸다. 도망쳤던 경기병들은 그를 놀리듯 또다시 투창을 들고 덤벼들어왔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하지즈 장군이 다시 쫓아 달려나가자 적 경기병들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보란 듯이 놀림을 퍼붓는 황당한 경우까지도 있었다. 앞에서 도망치던 놈이 내던진 인화물질 병이 깨지며 바닥에 온통 불이 번지면서 하마터면 놀란 말에서 떨어질 뻔 했던 하지즈 장군은 급히 말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3천의 적 경기병들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주변을 빙빙 맴돌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가 데려온 8천의 낙타병 중 지금 제대로 낙타에 올라 있는 녀석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고, 남아있는 놈들도 제대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전사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낙타병들은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떨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나마의 기동전력인 기병을 슈로 기사단에 내보낸 8천의 낙타병부대는 저 빠른 적과 변변한 전투조차 벌려보지 못한 채 거의 자멸해버린 것이었다.
“슈로 기사단을 저희 단독으로라도 공격하겠습니다!”
보다못한 릴라크가 하지즈 장군에게 필사적으로 외쳤다. 낙타병부대가 수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그로서는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천여 슈로 기사단과 궁기병 천 기를 양옆에서 포위한, 그럭저럭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릴라크는 이번에야말로 제네르를 요절을 내 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기사단 돌격!”
플라칼 가 2기사단 소속의 4천여 중장기병들이 자신들에게 포위된 적 기병들을 향해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슈로 기사단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며 대비태세를 잡았다. 그리고 릴라크의 고함소리를 선두로 양쪽의 기병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엄호사격!”
돌진해 가는 슈로 기사단의 등뒤에서 슬레이프니르 3중대가 날리는 엄호사격이 슈로 기사단 위를 넘어 플라칼 가 기사단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렸다. 투창공격이 플라칼 가 기사단의 집중력을 빼앗아놓은 그 순간에 바로 뒤이어 창을 움켜쥐고 돌진해 온 슈로 기사단들이 일제 함성을 올리며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돌격!”
어디선가 들려온 제네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뒤이은 함성에 파묻혀 더 이상은 들리지조차 않았다. 자욱한 사막의 먼지와 충돌의 굉음, 찢어지는 고함소리들 속에서 수백의 양측 중장기병들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제기랄!”
릴라크가 첫 충돌에서 상처를 입은 가슴을 꽉 움켜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두 발이나 되는 투창이 충돌 직전 방패에 박혀버렸던 그로서는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누고 달려드는 적 기병에게 똑바로 방패를 겨눌 여유가 없었다. 매서운 공격에서 가까스로 급소만 비껴낸 그는 적의 창날이 흉갑과 목 사이의 틈새에 미끄러지면서 적지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썅! 어떤 새끼야!”
급히 말을 돌린 그는 자신을 찌르고 달아나 버린 괘씸한 적 기병을 찾았지만 자욱한 먼지 속에서 어디로 갔는지 분간이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신,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150기의 낯선 기병들과, 그 중앙에서 검은 말에 올라 창을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는 키 큰 무사를 똑똑히 구분하고 있었다.
“이런 제길할!”
기겁을 하며 급히 말을 돌린 릴라크는 정신없이 도망쳐 부하들 중앙에 뛰쳐들었다.
“적 수괴 카렐이다!”
누군가의 고함소리는 마치 사형선고문처럼 2기사단들 사이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갑주도 전혀 입지 않은 150기의 호위기병과 함께 시알피에 오른 카렐은 한때 오르마즈가 쓰던 그 검고 육중한 창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슈로 기사단을 포위공격하던 2기사단 측면을 눈 깜짝할 새 파고들었다.
“적 지휘부 숨통을 끊어라!”
카렐의 그 특이한 음성으로 울려 퍼진 우렁찬 고함소리는 적들의 심장까지 함께 뒤흔들었다. 군데군데 말을 탈 줄 아는 가디언들까지 섞여 있는 150의 정예 기병들은 카렐의 뒤로 재집결해서는 릴라크가 있는 쪽을 향해 서슴없이 돌격해 들어왔다.
“최대한 밀집해서 막아라! 말을 공격하란 말이다! 일단 말을 공격해 놈을 떨어뜨려라!”
어처구니없이 돌파당하는 부하들을 보다못한 릴라크가 하는 수없이 그쪽으로 말을 몰아 달려가고 있었다. 카렐을 저대로 돌파시켜준다면 안쪽에서 포위당한 채 난전을 벌이고 있는 슈로 기사단에 살길을 뚫어주는 셈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라도 카렐을 일단 저지시켜야 했다. 말을 급히 몰아가고 있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검은 튜닉과, 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구분될 선명한 황금빛 황룡무늬 머플러를 두른 카렐이었다.
“릴라크 예리노프 경?”
릴라크로서는 미처 대비할 시간여유조차도 없었다. 피범벅이 된 창을 움켜쥔 카렐은 십여 기의 근위기병들만을 거느린 채 서슴없이 그의 코앞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릴라크도 바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돌격!”
카렐을 향해 돌진하는 릴라크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바보는 결코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뒤를 따르는 무려 50기의 호위기병들이 자신의 양옆을 빽빽하기 에워싸고 함께 돌진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천하의 카렐이어도 혼자 돌파하러 달려드는 미친 짓을 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부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장이 앞장서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모두 내 곁을 지켜라!”
악을 쓰며 달려나가던 릴라크는 몇 발짝 가지 못해 자신이 처한 황당한 처지를 깨달았다. 부하들은 그의 기대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카렐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고 있는 건 ‘무모한 대장’인 자신과, 그 뒤를 쫓은 겨우 십여 기의 똑같이 멍청한 부하들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녀석들은 뒤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마지못해 쫓아오고 있었지만 언제든 말을 돌려 달아날 태세였다.
“이.....이.....”
릴라크는 절망감에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젠 저 무서운 ‘검은 마귀’를 피해 달아날 시간조차 없었다.
“망할 놈들! 그래! 대장인 내가 죽어주마!”
지독한 울분에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릴라크는 달려오는 카렐을 향해 무작정 창을 치켜들었다.
“아악!”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의 무서운 충격이 그의 가슴을 직격하면서 릴라크는 피를 토하며 말 옆으로 튕겨나가고, 아니 날아가고 말았다. 이대로 바닥에 그대로 동댕이쳐지며 목이 부러져 절명하기를 바랐던 그는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확 낚아채는 느낌에 겁에 질려 감았던 눈을 번쩍 치켜떴다.
“부하들이 말을 잘 안 듣나 보지?”
릴라크를 한 손에 번쩍 치켜든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허억......”
순간 그에게 압도당해버린 릴라크는 단 한마디의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릴라크의 허리에서 무기벨트를 냉큼 뜯어낸 카렐은 그를 다시 말 안장에 앉혀주었다.
“우리 포로가 되신 걸 환영하오. 릴라크 라자루스 예리노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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