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06화 (305/1,132)

< -- 306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

.

.

“태자전하께 항복해라! 태자 전하께서 계신데 너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델루지 가를 위해 피 흘려야 하는가! 태자전하께선 항복하는 자에게는 관대한 용서를 내리실 것이다!”

궁지에 올린 플라칼 가 기병들에게 슈로 기사단의 기병들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가운데 2기사단과의 난전은 이미 반쯤 결판이 나고 있었다. 가디언 호위기병들과 함께 2기사단 중앙을 이미 수십 번은 헤집어놓은 카렐은 잠시 멈춰서서 물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각 외로 질기군.”

카렐이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적들이 전면 퇴각할 때도 되었건만 대장까지 포로로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들 중 자진투항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빨리 슈카른으로 가야 되는데,”

걱정스럽게 북쪽 하늘을 한 번 바라본 카렐은 주머니에 있던 양고기조각을 입에 집어넣고는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카렐의 호위기병들이 따라붙었다.

“전하! 적들이 물러납니다!”

베아트릭스의 보고에 카렐이 얼른 스캐너를 살폈다. 무리에서 먼저 빠져나온 낙타병들을 선두로 적들이 들어온 길을 되돌아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즈 장군은 퇴각하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말에 사령관 샤드니가 그다지 화도 내지 않은 채 순순히 승낙하자 조금은 허탈해하고 있었다. ‘수고했다’는 말로 도리어 그를 위로해 준 샤드니가 그에게 지시한 건 ‘부상병들과 낙타들을 빠짐없이 챙겨서 되돌아 오라’는 것 정도였다.

“우린 시간끌기용이었나......”

동쪽으로 말을 몰아가며 하지즈 장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단순히 적들을 잡아놓기 위한 공격치고는 피해가 너무도 컸다.

슈로 기사단, 카렐의 근위기병과 격전을 벌인 플라칼 가 2기사단은 부상자 포함하면 1천 명 가까운 병력을 잃었고 서부 보병 역시 3천명이 넘는 전사자 혹은 포로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르직스에 이어 플라칼 가의 손꼽히는 기병 지휘관 중 한 명인 릴라크까지 적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 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낙타병부대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많은 부상자에도 불구하고 적 경기병들이 비교적 소극적인 원거리공격만 펼친 탓에 정작 전사자나 중상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집단성이 강한 낙타들 역시 본대가 움직이면서 호출신호만 보내면 알아서 따라올 테니 크게 염려할 건 없었다.

퇴각하는 아군에 대한 적들의 추격 또한 예상만큼 맹렬하지는 않았다. 1천 5백 정도씩의 슬레이프니르 경기병들과 슈로 기사단들이 뒤를 쫓을 뿐이었고, 나머지 적군들은 즉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들 역시 이곳에서의 승리보다 같은 시간, 슈카른에서 벌어지고 있을 양측 주력부대간의 전투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혹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지즈 장군은 낙타병들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붙고 있는 플라칼 가 2기사단을 힐끔 바라보았다.

교활하게까지 보이는 연합군 사령관 샤드니에게는 ‘전투의 승리’ 보다 ‘전쟁의 승리’를 더 생각하는,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지금 이 시간, 슈카른에서 페로, 샤자한 공과도 대적하고 있을 샤드니에게 이곳 나지크의 전투는 서전에 불과했다.

“천하에 바보같이......”

샤드니가 옆에 있는 헤즈 들으라는 듯 이를 드러냈다.

“릴라크 경이 그렇게 미련한 사람이었소? 덤빌 상대가 없어서 카렐 그놈한테 정면으로 대들다니? 내 그리 안봤는데......”

샤드니의 일갈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헤즈 사령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었겠죠.”

“훗,”

샤드니가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짐짓 성난듯한 그의 태도와는 달리 그는 내심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가 3개 기사단 중 하필 릴라크의 부대를 하지즈 장군에게 딸려보낸 건 별 생각 없이 결정한 건 틀림없이 아니었다. 그는 하지즈 장군의 조공 부대가 굳이 승리를 거둘 필요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경기병부대를 그쪽에 딸려보내자는 히르직스의 제안을 미리 막은 것 역시 실상 샤드니의 결정이었다. 그들은 적당한 시각까지 카렐의 정예부대들을 나지크에 잡아두기만 하면 그것으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저지른만큼 받는거지.”

샤드니가 코웃음을 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초’중무장한 낙타병부대는 얼핏 절반의 전투력을 손해입은 듯 싶어보였지만 어차피 적들이 그런 낙타병들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투창을 쓰는 경기병들 뿐인 이상 부상자는 많아도 전사자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기병전력을 소중히 키우고 있는 카렐이 8천의 낙타병들에게 3천의 슈로 기사단을 돌진시키는 무모한 전술을 쓸 턱이 없고, 단병기인 도끼를 쓰는 에키트족 보병대 역시 낙타병들에게 덤빌 상대가 아니었다. 적들은 틀림없이 ‘제일 만만한’ 남부 기사단과 서부 보병대를 목표삼아 절단내려 들 것이 뻔했다.

결과적으로 낙마한 낙타병들이야 치료하면 늦어도 한달 이내에 다시 동원할 수 있고, 전사한 경보병들은 충원하면 되지만 혼전중에 전사한 남부 기사단은 플라칼 가, 아니 남부에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손해로 남을 터였다.

릴라크가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에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진 샤드니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입가를 애써 땜질하고 있었다. 공적으로는 신경쓰이는 남부 지휘관 한명을 매장시켜버렸다는 점에서, 사적으로는 감히 코리온을 농락했던 그 괘씸한 계집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그로서는 기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번 혼이나 나 봐라’며 그를 보낸 샤드니였지만 포로까지 되었다는 기대밖의 수확에 그도 표정관리에 어지간히 애를 먹고 있었다.

“기사단 측면에서 적 궁기병들의 공격입니다. 기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서부 보병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부장의 보고에 샤드니는 이번에는 ‘정말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퇴각한 경기병대 수습이 끝났으면 우익의 히르직스 경에게 보내라.”

샤드니의 지시에 부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중군에서는 남부 중장보병들이 유목민 경기병과 연합한 동부보병들과 또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고 양익에서는 중장, 경기병이 골고루 섞인 동부기병 만 5천과 서부보병 2만 2천, 남부기사단 9천이 어울려 한참 교전을 치르고 있는 참이었다.

샤드니 옆에서 잔뜩 불만섞인 표정을 짓고있던 헤즈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서부보병 2만 2천에 기사단 9천하고 경기병대만으로 동부기병 만 5천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조금만 기다려보라니까 그러네.”

샤드니가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샤드니의 앞에 사르키스의 모습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목적지 도착했습니다.”

“좋아. 이쪽도 한참 분위기가 익어가니까......당장 개시한다.”

8천여명의 장갑보병들을 데리고 심야의 사막을 가로질러 행군해온 사르키스가 도착해있는 곳은 지금 한참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슈카른 계곡의 반대편, 절벽 밑이었다. 조금 위로는 거의 비어있는 듯한 바툴 가의 종가가 보이고 있었고 그보다 더 높은 꼭대기 절벽 뒷편에서는 남-서부 연합군 주공부대와 동부연합군이 피말리는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높이만도 거의 1스타디아가 넘는 이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는 그 누구도 그다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다만 절벽 중턱에 있는 바툴 가 종가 쪽에 몇십기의 경기병들과 보병들이 어슬렁거리며 경계를 하고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랑장들을 불러모은 사르키스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저기 보이는 협로를 통해 바툴 가 종가로 올라갈 수 있고 종가 뒷켠에 절벽 위로 올라가는 좁은 협로가 다시 있다. 1연대 2천명은 가져온 리프트를 설치하고 이곳에 대기하고 나머지 5천명은 바툴 가 종가를 기습해 협로를 통해 올라간다. 바툴 가 종가가 기습당하면 적 예비병력이 총동원되어 협로를 즉시 봉쇄할 테니 1연대 2천명은 그때 리프트를 타고 절벽을 올라가 그들의 후미를 치도록 한다. 설치한 리프트는 퇴로로 활용할 테니 나머지 천 명은 이곳에 남아 퇴로를 지킨다.”

사뭇 긴장된 표정의 4명의 중랑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동성과 힘을 겸비한 최정예 중무장보병인 이들 장갑보병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위험한 작전임을 그들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지시한 샤드니는 무슨 이유인지 ‘작전실패해도 무방하니 어떤 경우에도 빠져나올 수 있게 퇴로는 반드시 확보해두어라’ 라는, 군 지휘관의 명령으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 듯한 지시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가면서 사르키스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던 터였다.

어쨌거나 계획을 확인시키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르키스는 그들 하나하나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일단 진격로가 확보되면 1연대는 적 보병대 후방의 지휘부를, 나머지 5천명은 적 보병대 후방을 친다. 모두 행운을 빈다.”

사르키스의 짧은 명령에 8천의 장갑보병이 두 무리로 갈라졌다.

“돌격한다!”

사르키스가 이끄는 5천명의 장갑보병들은 일제히 4열 종대로 밀집정열하며 바툴 가 종가 쪽으로 몰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두열의 보병들 손에는 특별히 마련한 큰 방패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거의 걷듯이 이동하는 둔한 남부 중장보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무기 하나씩을 지고도 마치 경보병처럼 날렵하게 오르막을 ‘달려’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구보하듯 달려 올라오는 그들을 뒤늦게 발견한 바툴 가 종가에서 큰 소리로 종을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는데는 채 3, 4분도 걸리지 않았다.

“비상! 비상!”

종가 안에 있던 바툴 가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우루루 몰려나왔다. 대부분 노인들이거나 아이들, 혹은 임신한 여자들이었고 종장 카이두의 부인들 또한 섞여있었다.

“모두 피하십시오! 절벽 위의 본진으로 피하십시오!”

종가를 경계하던 20여기의 경기병들이 몰려 올라오는 서부 장갑보병들에게 일제히 투창을 던졌지만 큰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오는 무려 5천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 앞에 그들의 저항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막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

창을 들고 돌격하는 그들의 앞을 일단 막아보려던 100명의 경비 보병들은 그 위력에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본 채 어처구니없이 휩쓸려 밟혀죽고 말았다. 가족들의 퇴로를 지키려 저항하던 가문 경기병들 역시 할버드를 든 병사 수십명에 둘러싸인 채 말에서 억지로 끌어내려졌다.

“노약자들이나 어린이, 임산부는 해치지 마라! 알겠나! 명령이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포박만 해라!”

큰 횃불을 겔 안쪽에 던져 넣은 그는 팔을 휘저으며 휘하 장교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겔들엔 모조리 불을 질러! 저 위서 싸우고 있는 적병들을 놀라게 해야 한다! 알았나! 최대한 크게 불을 질러라! 본대는 협로를 타고 올라가!”

종가를 어렵지 않게 돌파한 5천명의 본대는 그대로 종가를 돌파해 절벽 위로 올라가는 협로를 치고 올라가고 있었고 100명의 장갑보병들이 흩어져 겔들을 뒤지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끄집어내고 모조리 불을 질렀다. 200여 채의 겔로 이루어진 바툴 가 종가는 단 몇 분도 되지 않을 잠깐 새에 초토화되어가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