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8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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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제르베 경과 나람 경이 보병사령관인 자신의 명령도 없이 예비대인 마랄루 결사대와 북부용병대에 이동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플로브 경은 대뜸 소리를 버럭 질렀다. 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박한 사정을 이해할 턱이 없는 플로브 경은 이미 샤자한 공의 근위부대가 출동해 막고있는 서부 기습부대와의 전투에 그들이 멋대로 끼어들었다는 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2제후 제르베 경이야 자신보다 상위제후니 함부로 뭐라 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에게 만만한 건 4제후 나람 뿐이었다.
나람 경을 불러낸 플로브 경은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기 시작했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짓이요! 내가 언제 부대를 마음대로 이동시키라 했소!”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보시다시피 저희 부대와 제르베 경의 부대로도 막기가 버거운 상태입니다!”
플로브 경의 신경질에 서부 장갑보병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나람이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직접 창을 쥐고 선두에서 사투를 벌이던 그의 갑주와 무기는 이미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연락을 드리려 했지만 다른 지시를 내리느라 바쁘다고 하셔서 일단 이동을......”
나람의 보고는 사실 그대로였다. 절벽을 눈 깜짝할 새 장악해버린 7천여 서부 장갑보병대는 사르키스의 지휘하에 견고한 대형을 만들고 연합군 사령부와 보병대 후방을 조여가고 있었다. 넓게 방진을 치고 그들의 전면을 차단한 5천의 북부 용병대는 그들의 주특기인 긴 장창을 빽빽하게 앞으로 겨누고 이들 최정예병력과 피 말리는 접전을 벌리고 있었다.
재빨리 자리를 메워준 이들 북부보병이 아니었다면 기습전을 전문으로 하는 경보병인 마랄루 결사대와 사령부는 이미 몇 번은 무너지고 말았을 터였다. 제르베 경이 이끄는 마랄루 결사대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들의 측면을 협공해 들어가면서 양쪽의 힘겨루기는 어느 쪽도 우세를 점칠 수 없는 팽팽한 양상으로 전개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샤자한 공이 중앙에서 양쪽의 정보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으니 플로브 경이라고 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제기랄! 지금 주둔지 무단이탈이란 걸 알기나 하는거요! 나람 부인!”
“지금 여기 상황을 보고 말씀하시란 말입니다!”
“쓸데없이 핑계 대지 말란 말이요! 당장 원위치로 복귀하시오!”
나람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린 플로브 경은 더 언성을 높이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상황이.....”
“명령이란 말이요!”
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린 나람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따를 수 없습니다!”
“명령불복종은 참수형이라는 걸 모르나!”
“맘대로 하시죠!”
제르베 경이 이끌고 나간 마랄루 결사대 역시 저들 장갑보병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을 받은 샤자한 공은 베아트릭스와의 통신을 신경질을 내며 끊어버린 자신의 판단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감정을 앞세워 일을 그르칠 때가 결코 아니었다.
자존심을 억누르고 베아트릭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한 샤자한 공은 뜻밖에 이미 어딘가에 상륙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도대체 어딨는 건가!”
“바툴 가 종가를.......정리중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적 장갑보병대에 대한 측면기습을 명하셨기에 이곳을 통해 적 후방으로 진입하고 퇴로를 차단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곳 불을 빨리 꺼야 아군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 판단되어......”
순간 베아트릭스가 바툴 가 사람이라는 사실을---덧붙여 자신의 아들을 죽였던 그 기습사건의 지휘관이었다는 사실까지--- 머릿속에 떠올린 샤자한 공은 대뜸 이를 드러내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지금 자넨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자기 가문만 챙기고 있는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전 다만......”
너무나 당혹스러워진 베아트릭스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변명을 해보려 애쓰고 있었지만 샤자한 공의 무서운 질책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그 협로로 적들을 후방기습하겠다고? 적들이 그곳을 틀어막아 버리면 돌파가 가능하리라고 여겨지나? 자네가 설마 그것도 생각 못했을 턱이 없고, 그게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전사단 지휘관으로서 기본적인 자세조차 안되어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온 베아트릭스는 쏟아지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나름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함께 온 슬레이프니르 3중대는 바툴 가 출신 병력들이고 이곳 지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습니다. 저 역시도 협로는 물론이고 절벽의 다른 샛길까지 모두 꿰고 있으니......”
“그러신가? 그러면 당장 녀석들 후방에 모습을 나타내보게! 그곳에서 불끄는데 시간 허비하고있지 말고!”
또다시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리는 샤자한 공의 모습에 베아트릭스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옆에 함께 있던 네피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거야? 저 중늙은이 떠드는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리 직속상관도 아니니까.”
“예.”
애써 고개를 끄덕인 베아트릭스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급히 투구를 눌러쓰며 말에 달려있던 자신의 퀴버를 끌러 등에 짊어졌다.
“에키트 보병 200명이 남아 이곳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른다! 협로는 이미 놈들이 가로막았을 테니 나는 협로 측면의 다른 샛길을 따라 올라가겠다! 위험한 지형이니 조심해 따라오도록! 우리가 협로를 확보하고 신호를 보내는 대로 슬레이프니르 3중대가 협로를 통해 적들을 공격한다!”
동부연합군 주공부대의 상황도 사실 그다지 좋지 못했다. 페로가 이끄는 유목민 경기병과 연합해 남부 중장보병대를 저지하던 동부 보병대는 지금까지처럼 조금씩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고 토로 경이 이끄는 양익의 기병대 역시 근근히 현상유지만 하고있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지지부진한 전황에 대한 불만은 상대편인 남-서부 연합군을 지휘하고 있는 샤드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부 예비보병들의 생각 외의 빠른 대응 때문에 나름대로 결정타라고 보냈던 장갑보병들이 아직 적 보병대의 후방을 제대로 위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만 바툴 가 종가를 초토화시키면서 동부녀석들의 집중력을 무너뜨렸다는 것과, 녀석들의 정예보병인 북부용병대와 마랄루 경보병대를 후방에 묶어둘 수 있다는 것 정도가 불만족스러우나마 수확은 수확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지구전으로 나가면 동부 놈들이 질 수밖에 없겠군요. 기병들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헤즈가 초콜렛 쿠키를 입 안에 던져 넣으며 남의 일처럼 건성 중얼거렸다. 적의 중군인 동부 보병대는 이번에도 역시 남부 중장보병대에 밀리고 있으니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녀석들은 절벽을 이미 장악한 서부 장갑보병들과의 사이에 꼼짝없이 끼어버리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가면 이긴다’는 말에 샤드니는 희한하게도 별로 기쁜 표정을 짓고있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적진을 바라보던 샤드니는 절벽 건너편, 바툴 가 종가 쪽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눈에 띄게 약해진 데 의아해하고 있었다. 바툴 가 종가에 불을 질러 사방에 연기를 피우라는 건 적들의 사기를 떨구기 위한 샤드니의 특별한 지시사항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연기가 벌써부터 약해진 건 그쪽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녀석들 지원병력이 나지크에서 벌써 도착한 건가?”
가파른 언덕을 거의 매달리듯 기어올라간 베아트릭스는 절벽 위로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그가 나온 곳은 아군 후방을 기습한 서부 장갑보병대 후방이었다. 서로가 기습에 기습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전장이 되어버린 이곳엔 이미 꽤 많은 동부연합군 보병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북부용병대, 마랄루 결사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장갑보병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대로 오긴 왔군,”
옆에 함께 매달린 네피가 씨익 웃으며 제일먼저 위에 뛰어올랐다. 뒤이어 뛰어오른 베아트릭스의 뒤로 이들을 따라온 에키트 족 보병들이 그 날렵한 몸놀림을 과시하며 벌떼처럼 순식간에 그 숫자를 불려가기 시작했다. 협로 입구만 단단히 지키고있던 500여명의 서부 장갑보병들은 등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병들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급히 이쪽을 향해 무기를 돌렸다. 하지만 샛길을 타고 절벽 밑에서 몰려 올라오고 있는 이 야만족 보병들의 숫자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이놈들아! 후방기습은 너희만 하는 줄 알았냐?”
도끼를 움켜쥔 네피가 그다운 넉살을 떨며 대뜸 그들을 향해 달려가자 에키트 족 병사들이 질세라 그의 뒤를 따라 몰려가기 시작했다. 때맞춰 협로를 치고올라오기 시작한 슬레이프니르 궁기병들이 던지는 수백발의 투창이 공중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아올랐다.
적 사령부를 기습하려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아 선 북부용병대의 놀라운 견고함은 북부인들과 처음 싸워보는 사르키스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지금껏 남부와의 크고 작은 경계분쟁에서 견고함으로 유명한 남부 중장보병대와는 몇 번 싸워본 일 있었지만 한때 그 남부마저 압도했던 북부보병대와 이곳에서 마주치리라고는 그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키의 족히 2, 3배는 되는 장창을 마치 단병기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들의 기량에 서부 최정예보병이라는 장갑보병들조차도 함부로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임달의 결전에서 근위대가 괜히 박살난 게 아니었군,”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던 사르키스는 쓸데없는 혼잣말로 스스로의 긴장감을 풀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코아 전사단엔 저런 놈들이 9만이랍니다.”
부장의 한마디에 온몸이 오싹 해진 사르키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쨌든 이 템포로 조금만 더 버티면 적 보병대는 남부보병과 서부보병 사이에 완전히 묶어버리게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전투는 사실상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미와 측면을 맡겨놓은 중대장에게서 급박한 연락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적 경보병 3천명입니다! 바툴 가 종가를 다시 장악하고 이쪽으로 접근중입니다! 에, 에키트 족들 같습니다! 그리고......처음 보는 시커먼 경기병들도 1천 기정도 됩니다! 협로를 돌파당했습니다!”
“뭐라구?”
당혹한 사르키스는 칼을 쥐고 후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수천의 야만족들과 경기병들이 무시무시한 함성을 지르며 서쪽 절벽 밑에서 몰려 올라와 장갑보병들의 후방을 위협해오고 있었다.
“제기랄!”
보병들의 선두에서 ‘솔의 아버지’ 네피를 발견한 사르키스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냈다.
“3연대! 후미를 지켜라! 2연대는 만일을 대비해 측면을 확보해둬!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승리란 말이다!”
필사적으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는 사르키스의 머리 위로 1천발의 투창이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으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사르키스는 자신의 8천 장갑보병대에 드디어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고 있었다.
라손이 이끄는 슈로 기사단 1천여기를 데리고 도착한 카렐은 토로 경이 적 기사단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연합군 우익 부근에 수송선을 착륙시켰다. 카이두 경의 부장 탈란이 지휘하는 2천기의 탈라스 궁기병들이 측면을 견제하는 가운데 3천기의 중장기병과 4천기의 경기병이 4천의 남부 3기사단과 서부 경보병 1만5천명을 상대로 제법 우세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서부 경보병들은 동부 경기병과 궁기병의 견제에 막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고, 3기사단은 토로 경의 계속된 공격에 이미 그 힘을 거의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그맘때 힘이 넘치는 1천기의 슈로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난 카렐의 모습에 동부기병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기 시작했다.
“이곳을 돌파해 샤드니 놈이 있는 후방의 적 사령부를 직격한다!”
“알겠습니다!”
카렐의 지시에 힘있게 대답한 토로 경은 200기의 근위기병을 손수 이끌고 선두로 박차고 나섰다. 그의 무모하다싶을 정도의 끝도 없는 기개에 카렐은 잠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여간, 타고난 중장기병이시라니까요.”
농담처럼 중얼거린 라손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근데, 총리각하는 어디계시려나?”
손목에 아직까지도 매고있는 페로의 손수건을 더듬으며 라손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보병대 중앙에 있을 페로가 여기서 보일 턱이 없었다.
“젠장”
꺼질 듯 한숨을 내쉰 라손은 중장기병치고는 조금 작은 자신의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토로 경의 뒤를 이어 달려나갔다.
궁기병들 쪽으로 달려간 카렐은 부하들에게 바삐 공격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탈란과 마주쳤다.
“곧 이곳을 돌파해 적 후방으로 치고 나갈 테니 준비하시오! 탈란 바툴 대장!”
“예. 알겠습니다.”
씽긋 웃어보인 탈란은 창을 쥐고 멀어져 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5백의 기병진 선두에 선 카렐은 창을 번쩍 치켜들며 이미 와해 직전의 상황에 빠져있는 적 3기사단에 돌격을 감행했다. 3기사단은 또 한번 모습을 나타낸 저 무시무시한 ‘검은 마귀’의 모습에 제대로 싸울 의지조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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