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9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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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의 3기사단 전면에 카렐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부장의 보고에 낯을 잔뜩 찌푸린 샤드니는 히르직스가 있을 우익을 바라보았다.
“우리 1기사단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히르직스 경은 그 거인괴물하고 20분째 붙어 싸우고 있답니다.”
헤즈 사령관이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꾸했다. 루사의 결전 당시 있었던 일기투에 이어 또 한번 전장에서 마주친 히르직스와 카이두 경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양 서로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싸움부터 붙었던 것이었다.
양측 대장끼리의 정신나간 듯한 싸움 덕에 정작 부하들의 싸움은 꽤나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카렐 그놈이 여기까지 왔다면 일단은 물러날 수밖에 없겠군.”
샤드니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좌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헤즈가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어져버린 건 그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전투를 포기해버리는 건 그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지크에서 퇴각한 낙타병부대하고 우리 2기사단은 어찌된 겁니까? 그들만이라도 여기 쏟아 부으면......”
“2기사단은 멍청이 같은 단장이 잡혔으니 어떻게 지금 적들 앞에 내놓겠소. 낙타병부대도 절반이 넘는 전투력을 잃었으니 수습에만 한참이 걸릴 거요.”
“하지만 이건 너무......”
“전투를 이긴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라오.”
패장의 표정이 맞나 싶을 정도로 씨익 웃음까지 지으며 할룩스를 작동시킨 샤드니는 적 후방에서 분투중인 사르키스를 불러냈다.
“사령관이다. 더 이상 저항은 의미 없으니 최대한 빨리 물러나도록 해라. 부상병 남김없이 챙기는 것 잊지 말고.”
“예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충분히 가능성이......”
“명령이다!”
샤드니의 호통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사르키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잔뜩 굳은 표정의 헤즈가 샤드니를 째려보고 있었지만 명령권이 샤드니에게 있는지라 그로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저 사령관은 이 전투의 처음 시작부터 ‘승리’에는 그다지 집착을 하지 않는 듯한, 희한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망할 놈......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한참 기세를 올려 적들을 몰아붙이려던 카렐은 적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잠시 멍 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허탈한 표정은 몇초 못가 쓴웃음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샤드니.....저 약아빠진 놈,”
전 전선에 걸쳐 파상공세를 퍼붓던 남-서부 연합군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정연하게 대오를 맞춰 전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들과 조금 전까지 맹렬히 싸우던 동부연합군은 물론이고 물러나고 있는 남-서부 연합군들 스스로조차 자신들이 왜 퇴각해야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부 보병대 후방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던 사르키스의 장갑보병들도 샤드니의 지시대로 미리 확보해둔 퇴로를 통해 물러나 1천 개의 케이블을 타고 쏜살같이 절벽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에키트 족 보병들과 슬레이프니르가 급히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녀석들은 마치 싸움보다 퇴각을 더 많이 훈련한 듯 전열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눈깜짝할 새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카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군에서 유목민기병대를 지휘하던 페로가 허탈한 표정으로 물어오자 카렐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했을 따름이었다.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페로 역시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샤드니 저새끼 전쟁을 이대로 질질 끌 생각이군.”
키득거리던 페로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받았다.
“객관적으로 서부가 당장 남부하고 근위대에 비하면 열세인 것이 사실이니까. 지금 당장 이길 필요가 없지. 경제력이 떨어지는 동부를 이렇게 조금씩 소진시키는 걸 노리겠지.”
주변에 흩어진 동부 병사들의 시체를 둘러보며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의 주력인 기병은 충원하기 쉬운 존재들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가난한 동부의 동원력도 이미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카렐은 이제 막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동쪽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하지만......남부가, 아니 근위대가 녀석 뜻대로 순순히 당해줄까? 어차피 플라칼 가도 베흔 입장에서는 소모품일 뿐인데.”
한숨을 내쉰 카렐은 먼 하늘을 올려보았다. 페로가 쓰고있던 투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지며 물었다.
“요즘 베흔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 안 해?”
“글쎄.”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일단 저들의 첫 번째 공세는 찜찜하게나마 막아냈지만 라마단 이후 너무도 조용한 근위대가 계속 그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럴 때, 베흔은 항상 뒤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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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황실 사람들과 대신들이 피신해있던 타르서스의 지방정부 청사에서 열린 ‘세나우스 2세’의 대관식은 초라하기가 짝이 없었다. 유평 옹주는 대관식이 왜 이 모양이냐며 당일 아침까지 울며 떼를 써서 황실 사람들을 꽤나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테나스 태후가 나서서 ‘황궁에 돌아가게 되면 근사하게 다시 대관식을 올려주마’라는 말로 가까스로 이 철딱서니 없는 옹주를 달래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황실대표로 목잘려 죽어야 할 운명인 옹주에게 정말 그럴 날이 오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타르서스 지방정부 청사 부근에서는 테나스 태후가 자칭 남부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한참 세우고 있는 ‘타르서스 별궁’의 기초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의 설계도면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궁전’에 왜 황제 처소가 없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었다. 남부 양식으로 지어지고 있는 이 건물에는 놀랍게도 태후와 황실 사람들의 처소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을 설계한 남부 건축가는 이곳이 남부가 황제령을 장악하고 난 후 테나스 태후를 비롯한 구 황실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질 건물이라는 사실을 꽤나 눈치 빠르게 파악해버린 것이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옹주마마, 아니......이제 폐하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옹주의 그 왜소한 몸에 걸친 화려한 면복을 바로잡아주며 오르마즈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옹주의 앞에 꿇어앉아 그의 옷고름을 직접 매주는 오르마즈의 눈시울이 무슨 이유엔지 조금 붉게 변해 있었다. 문 건너편 홀 안에서는 황제의 입장 전의 이런저런 행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오르마즈.”
옹주가 오르마즈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사고 당시 입은 화상으로 물크러져 있는 그의 오른손을 바라본 오르마즈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잘 할 수 있을 테니.......”
“그러셔야죠.”
자리에서 일어선 오르마즈는 한쪽에 놓여있던 면류관을 조심스럽게 들어 이 ‘황제’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얹어주었다. 그의 작은 몸집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긴 이 면류관의 앞뒤에는 옥을 엮어 만든 화려한 줄 12개씩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번만......안아줘요. 황제가 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인 오르마즈는 역시 울먹이고 있는 옹주를 품에 힘껏 안아주었다. 그는 이 강인한 옹주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야 할 지금 이 순간 왜 울고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난 이제 딴사람이 될 거예요. 내가 절대 성군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 난 잔학하고 배신을 밥먹듯이 한 못된 황제로 역사에 남겠죠. 사방에 적을 만들 테니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지만......그런 내 뒤를 이을 새 황제는 내가 만들어놓은 뿌리 위에서 성군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그러면 만족할거예요.”
“혼자서 그 두 역할을 모두 다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죠.”
옹주의 우둘두둘한 뺨에 입을 맞춰준 오르마즈는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옹주의 슬픈 눈동자를 한동안 응시했다.
“황상께서 드십니다!”
베흔의 고함소리에 오르마즈는 옹주를 안았던 팔을 풀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위엄넘치는 면복과 면류관을 걸친 유평 옹주, 아니 세나우스 2세 황제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청사 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대배!”
오르마즈와 베흔이 그의 뒤를 지키며 함께 걷는 가운데 콜로니 곳곳에서 모여든 호족세력 대표들---물론 황궁을 차지하고 있는 북부만을 제외한---이 불쌍한 새 황제에게 형식적으로나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국의 대통을 이으신 폐하께 유학자들을 대표해 그 충성을 다짐하나이다.”
단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극성당 대제학이 그의 앞에 꿇어앉으며 황제의 옥패를 바쳤다. 포고령에 따라 대관식은 제국 양대교인 남극성당과 파예드 아카데미의 수장이 주도해 유학자들의 손에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패를 말없이 받아든 ‘황제’는 다시 뒤로 돌아서며 이 크지않은 홀에 모인 자칭 세력가들을 한번 죽 돌아보았다. 비록 이 누추한 홀에서,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즉위하는 그였지만 최소한 갖출 것은 다 갖춘 제대로 된 대관식이었다. 물론, 그를 어떻게 죽여야 할 지만 생각하고 있을 저 호족들의 계산에 따른 것이겠지만.
등뒤에서 장문의 즉위문을 읽고 있는 대제학의 성의없는 목소리를 들이며 옹주의 표정은 조금씩 더 굳어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폐하의 즉위의 정당성과 권위를 유학자들을 대표해 알리옵니다.”
대제학이 바친 즉위문을 받아든 옹주가 단하에 모여든 호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유평 이그나토 리쿠는 제니안의 지도자셨던 리 리쿠와 아버님이신 세나우스 1세 폐하의 뜻을 이어 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제국의 모든 이는 나의 발밑에 있으니 그 누구도 지엄한 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못할지어다.”
“복종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며,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나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모인 호족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 삼창을 올렸다.
옥좌 뒤에 서 있던 테나스 태후는 이 덜떨어진 옹주가 지난밤을 꼬박 새워 달달 외우게 한 것을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해내자 그나마 다행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서를 마친 황제가 옥좌에 자리잡고 앉자 각 지역 호족들이 차례대로 나와 새 황제의 앞에 미리 준비한 선물과 함께 절을 올리고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황상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복인 검은 무명포 차림으로 황제의 앞에 절을 올리고 있는 건 자칭 ‘서부제후연합’을 이끌고 있는 플레렌 가문의 종장 바니샤드 플레렌이었다. 선명한 푸른빛 눈동자와 매혹적인 다갈색 머리칼을 지닌 이 크고 잘생긴 외모의 유학자는 파예드 아카데미의 교수답지 않게 중도파에 속해있는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발 가 여인과 결혼해 이미 슬하에 장성한 아들까지 두고 있는 그는 ‘서부제후연합‘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세력가이기도 했다.
무심코 고개를 든 바니샤드는 자신에게 씨익 웃음짓는 새 황제의 희한한 태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뭐지?”
“아, 예, 플레렌 가 종장인 바니샤드 아유브 플레렌이라 합니다.”
“잘생겼네,”
황제가 갑자기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하자 테나스 태후가 그만 황당함에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나하고 결혼할래요?”
“에.......예?”
순간 즉위식이 열리는 홀 안에는 갑자기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당혹스런 표정의 바니샤드는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까스로 대답을 토해냈다.
“소인은 이미 결혼했고......자식도 있습니다.......”
“이혼하면 되지.”
“황상께서 오늘 조금 피곤하신 모양이네, 상견례는 이만하도록 하지.”
보다못한 테나스 태후가 재빨리 끼어들면서 호족들과의 상견례는 여기서 끝을 맺고 말았다. 옥좌에 앉아있던 새 황제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뭐예요, 나도 황제가 됐으니 결혼을 해야할 것 아니냐구요. 내가 잘생긴 남편 고르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제발 진정하십시오, 황제, 지금은 그럴 자리가 아니니......”
테나스 태후가 이 철없는 황제를 겨우겨우 달래며 억지로 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휴우.”
십년감수한 바니샤드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함께 온 다른 호족들에게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좋으시겠수, 잘생긴 덕에 황제의 총애도 받게 되셔서,”
누군가의 농담에 홀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주제에 결혼하고싶다는 거 보니 아주 바보가 된 건 아닌가보구려. 근데, 내친 김에 황후위 한번 차지해보시지 그걸 걷어차셨수?”
델루지 가에서 온 테번 델루지의 농담반 진담반에 바니샤드가 혀를 쑥 내밀며 대꾸했다.
“하이고, 댁이나 해보시지. 누구 눈은 장식품인 줄로 아쇼?”
“하기사, 밤중에 잠자리에서 저 끔찍한 얼굴 봤다가 놀라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저 얼굴보고 어디 물건이 서기나 하겠수? 선 것도 팍 죽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테번이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자 자리에 또 한번 폭소가 오갔다.
“하이고, 서고 말고를 떠나서 난 명줄은 채우고 죽고싶소이다.”
바니샤드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황황히 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축하만찬도 있다며요? 그때 봅시다. 또 한번 프로포즈 받으면 나 술 한잔 사기요.”
명색이 황제에게 하는 말이 맞나 실을 정도로 불경하기 짝이 없는 호족들의 농담을 한 귀로 들어 넘기며 오르마즈는 단상 한쪽에 내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오르마즈를 힐끔 바라본 테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잘 나가는 놈은 바로 옆에 두고 왜 바니샤드는 가지고 저러신담.”
“맞아, 맞아, 정말 그렇네.”
호족들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하나둘씩 홀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다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오르마즈는 갑자기 칼을 움켜쥐고는 홀 뒷문으로 잽싸게 달려나갔다. 홀에 마지막으로 남은 베흔은 그런 오르마즈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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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 예약마감이 내일 5/20 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