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0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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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장에 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바니샤드의 앞을 대뜸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오르마즈였다. 그의 조금은 무례한 태도에 얼굴을 살짝 찡그린 바니샤드가 옆으로 비켜나가려 하자 오르마즈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황상께서 잠깐 뵙자 하십니다.”
‘황상’이라는 말에 대뜸 얼굴을 일그러뜨린 바니샤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까 할 말은 다 해 드렸는 줄 아는데?”
“황상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십니다. 친히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강제로 모셔가야 하겠습니까?”
오르마즈의 사뭇 위협적인 태도에 흠칫 놀란 바니샤드는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긴 카타나와 단검에 문득 눈이 멎었다. 날씬하고 다부진 몸에서 뿜어나오는 민첩성과 어느 순간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으로 잘 알려진 오르마즈의 놀라운 무공은 콜로니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지금 그대가 날......”
“예. 협박하는 겁니다.”
오르마즈가 바니샤드를 똑바로 노려보며 냉큼 대꾸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 듯 한 그의 태도에 침을 꿀꺽 삼킨 바니샤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 서부제후연합 대표이신 바니샤드 플레렌이십니다.”
“들어오시게.”
쭈뼛거리며 ‘황제 집무실’에 들어선 바니샤드는 그 초라한 모습에 내심 황당해하고 있었다. 지방장관 집무실로 쓰이던 방을 개조한 황제 집무실은 책상과 책장, 몇 개의 기본적인 가구 정도가 고작이었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던 황제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오르마즈가 뒷걸음치며 말했다.
“나가있겠습니다.”
“아냐, 계속 있게.”
세나우스 2세 황제가 그 묘한 광채의 검은색 눈동자를 번득이며 오르마즈와 바니샤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니샤드는 방금 전 즉위식에서와는 너무나 다른 그의 매서운 눈빛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푸른빛 비단포에 용이 새겨진 금빛 머플러를 두른 황제의 외모는 비록 많이 추했지만 그에게서 묻어 나오고 있는 건 강한 자신감과 위엄이었다.
황제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바니샤드에게 천천히 돌아섰다.
“바니샤드 아유브 플레렌. 119세. 파예드 아카데미 수찬이고 플레렌 가의 종손. 원리주의에 기운 중도파 유학자. 발 가 출신의 부인이 있고 브라코 발 플레렌이라는 제법 똑똑한 아들이 있지?”
“예......그렇습니다. 폐하.”
바니샤드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즉위식에서 내 추태를 보고 실컷들 비웃었겠지?”
굳어진 표정의 바니샤드가 뒤에 서 있는 오르마즈를 확 째려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가에 웃음까지 지으며 짧게 덧붙였다.
“오르마즈를 괜히 의심하지 마시게. 저 친구는 아무 말 한적 없으니. 자네들이 내 등뒤에서 무슨 소리를 떠들었을지 그 정도도 예상 못할 바보는 아니니까.”
바니샤드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분위기를 압도해가고 있는 저 작은 몸집의 추한 사람이 과연 조금 전 보았던 그 ‘바보황제’가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황제는 탁자 위에 놓은 두 개의 술잔에 리커를 채우며 말했다.
“다시 묻겠네. 나와 결혼하겠는가?”
“무슨 말씀이시온지.......전.......”
바닥에 꿇어앉은 바니샤드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다가선 황제가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조만간 남부 아니면 북부 손에 목이 달아나 죽을 황제와 결혼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결코 아니지, 암.”
황제가 손에 든 리커 한 모금을 들이키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난 지금 혼인하자는 게 아닐세. 황후위를 조건으로......내게 투자를 하라는 것 뿐이지.”
순간 온몸이 오싹 해진 바니샤드는 차마 대답도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예컨대......황실의 남부 대리인인 늙은 구렁이 테나스를 몰아내는 것이라던가.....”
순간 눈을 치켜 뜬 바니샤드는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일그러든 얼굴을 힐끔 올려볼 수 있었다. 씨익 웃음지은 황제가 다시 물었다.
“내게 투자해서 황후위와 태자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얻겠는가? 아니면 남부의 테번 녀석이 새 황제가 되고 나면 그 발바닥이나 핥는 쪽을 택하겠는가?”
바니샤드는 지금 이 순간 상황파악을 충분히 할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이 추한 황제의 진짜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제게......무얼 원하십니까?”
“지금 별궁 건축비용을 놓고 남부와 태후가 옥신각신하고 있지. 이틈에 서부의 이름으로 이곳의 별궁을 지어주게. 서부냄새 풀풀 풍겨도 상관없으니 위엄있게만 지으면 돼. 장기전을 대비하려면 황실의 위엄을 세우는 만큼 중요한 게 없겠지.”
‘장기전’이라는 말에 바니샤드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번지고 있었다. 이 두얼굴의 황제는 북부, 혹은 남부와의 길고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별궁 건축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남부와 태후 사이에 서부가 끼어들라는 건 그 둘을 이간질하겠다는 교묘한 수작이었다.
“그리고요?”
“제니안과 TSG민병대 대부분이 성전 후에 서부로 이주했네. 불쌍한 노릇이지. 자기들 이곳에서 피 흘리며 싸울 동안 돈 되는 북부와 남부지역은 엉뚱한 놈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떨거지 사막밖에 갈 데가 더 있었겠는가. 물론 그 덕에 자네 지역이 가장 종교적이고 엘리트로 넘쳐나는 지역이 될 수 있었지만.”
“......”
“솔직히 내 가진 것이 없으니 자네에게 많이 요구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아. 내가 원하는 건 그들 옛 주전파 열성 민병대원들을 내게 돌려달라는 것 뿐이야. 3,4만이 족히 넘을 것으로 아네. 나도 내 목줄은 지켜야 할 것 아니겠나.”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서부에 정착해서......돌아가란다고 정말로 돌아오겠습니까......”
바니샤드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하자 리커 한 모금을 들이킨 황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다시 말하지만 날 아버지 같은 바보로 보지 말게. 성전이 끝나고 샤미르 숙부까지 죽고 나니까 10만의 민병대를 기다렸다는 듯 와해시켜서 황실을 종이호랑이로 전락시킨 게 자네들 아닌가. 자네가 지금까지처럼 황실 재건을 원하는 옛 민병대 녀석들을 아둥바둥거리며 억압하지만 않는다면 말일세.......그럼 자넨 골칫거리를 더는 거고, 난 힘을 얻는 거지. 자네로서는 강대한 남부나 북부의 비위를 최대한 덜 거스르고 실속을 챙기는 길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악역은 내가 맡을 테니.”
“그들을 다시 통제할 수단이......있으신 겁이옵니까?”
“그 일은 오르마즈가 할 것일세.”
바니샤드는 아직까지 자신의 뒤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오르마즈를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그는 성전의 영웅 오르마즈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족히 10만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오르마즈가 이 새 황제에게 정말로 충성을 바치고 있다면 그의 이름으로 민병대를 재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황제의 판단은 절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옛 주전파 민병대원들을 대상으로 별궁을 건축하는 노역자들을 서부에서 모집하게. 황실을 위한 일이고, 보병에 준하는 급여를 지급한다면 앞다투어 지원할 것일세. 물론, 별궁 건축주체가 자네이니 급여는 자네가 지급해야겠지.”
“소인이 왜 그 위험을 감수해야하는지 설명해주시죠.”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대가를 바라고 이해 못하는 척 하는 건가.”
빈 리커잔을 내려놓으며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북부나 남부가 콜로니를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데 자네와 내 이해가 일치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야. 때론 상황을 너무 복잡하지 보지 않는 게 현명한 법이거든. 물론, 내 외모가 이 모양이어서 결혼을 고사한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겠지. 그때가선 자네가 아니어도 남자는 많을 테니.”
오만하게 웃음지은 황제는 물크러든 손으로 다른 리커잔을 집어들었다.
“어떡할 텐가? 기왕 내 정체를 알았으니 나도 자넬 그냥 내보내줄 수는 없겠는걸. 걱정은 말게. 난 바보황제고, 자네와 결혼하겠다고 떼쓰다가 홧김에 죽여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충분히 멍청한 놈이라네. 내 어차피 죽을 팔자인데 자네 목숨 따위에 연연할 이유야 없지.”
바닥에 꿇어앉은 바니샤드는 등뒤에 있는 오르마즈가 이미 칼을 뽑아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이것이 황제가 스스로의 단호함을 보이기 위한 연출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목을 치겠다는 뜻인지 구분 못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있는 바니샤드에게 여전히 웃음띤 황제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짧게 덧붙였다.
“난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처지네. 어떤가? 나와 결혼하겠는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만 바니샤드가 더듬거리며 대답을 토해냈다.
“폐하의......뜻에 따르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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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붙여 내일 연재하려 했던 부분이지만 예약마감일을 기념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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