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11화 (310/1,132)

< -- 311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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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부 제후군들을 ‘일단’ 물리치고 난 동부연합군 사령부에는 이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일만 남아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보병사령관 플로브 경은 들어오자마자 나람 부인부터 찾고 있었고 샤자한 공은 베아트릭스가 어딨냐며 있는대로 성을 부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페로 앞에서 한참을 씩씩거리던 플로브 경은 흙투성이가 된 투구를 털며 들어온 나람을 보자마자 대뜸 달려가 멱살부터 움켜쥐었다.

“감히 군령을 멋대로 어기다니! 여기 올 때 군법을 따르겠다고 서약했으니 이제 책임 질건가!”

눈살을 찌푸린 나람은 멱살을 붙든 플로브 경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언성을 높였다.

“군령이요? 군령이 군령 같아야 지키죠! 7천명이나 되는 적 기습병력이 지휘부를 위협하고있는데 명령 떨어지기만 기다리면서 손가락 빨고있는 게 군령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적하고 한참 죽을둥살둥 교전중인데 대기위치로 돌아가라는 게 그게 명령입니까!”

“이것이 어디 상위제후한테 눈을 부라리는 건가!”

“성질도 낼 데 가서 내시죠! 순발력 있게 대응했다고 치하는 못할망정 명령 불복종이라구요? 허, 지금 제르베 경한테 당한 거 저한테 화풀이하고 계신 겁니까?”

순간 열이 뻗친 플로브 경이 허리에서 정말로 칼을 뽑아 치켜들자 지휘부 막사 안은 순식간에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이를 꽉 악문 나람은 자신을 향해 칼을 치켜든 플로브 경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칠테면 쳐 보시죠!”

“뭐 하는 짓입니까! 플로브 경!”

이성을 잃은 플로브 경의 앞을 서슴없이 가로막은 검은 머리칼의 미남자는 칼을 치켜든 그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을 억지로 빼내려던 플로브 경은 상대의 강한 손아귀힘에 벌벌 떨며 그만 칼을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상급제후답게 행동하시오. 여기 모인 눈들이 안보입니까.”

페로의 번득이는 눈동자에 압도당한 플로브 경은 결국 손목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페로는 이번엔 나람 부인 쪽을 돌아보았다.

“나람 부인, 이유야 어쨌든 명령 없이 병력을 이동시킨 건 틀림없이 잘못이었소, 보병사령관에게 사후보고도 못한 건 부인의 부주의함이었으니 지금이라도 플로브 경에게 사과하도록 하시오.”

페로가 나람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나람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린 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철저하게 처리할테니......”

말을 마친 나람은 울분을 참을 수 없는 듯 페로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막사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사람들 눈치를 한번씩 둘러본 페로는 그를 따라 급히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허, 옛 정이 남아있긴 하신가보네. 이젠 누구 무서워서 4제후도 못 건들겠군.”

플로브 경이 다른사람들 들으란 듯 빈정거리자 제르베 경이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플로브 경과 나람 부인 사이의 다툼 덕택에 썰렁해진 막사의 분위기는 베아트릭스를 동반한 카렐이 안에 들어서면서 또 한번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모두 수고들 하시었소.”

짐짓 웃음지은 카렐은 이곳에 있는 제후들이나 지휘관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오늘의 수고를 치하해 주었다. 샤자한 공 역시 마지못해 허리를 굽혀보이며 베아트릭스를 살짝 째려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뭐 할말이라도?”

눈을 휘둥그레 뜬 카렐에게 샤자한 공이 사뭇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슬레이프니르의 지휘관 선임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말씀드리려 합니다.”

카렐이 매서운 눈으로 샤자한 공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금의 베아트릭스 건이 단순히 방금전의 ‘바툴 가 종가 사건’ 때문만은 아님을 카렐도 잘 알고있었다. 즉위 전 미리 새 황제 카렐의 기를 죽이고 들어가려는 샤자한 공의 계산된 도전장임을 잘 아는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샤자한 공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종가에서 있었던 암살사건 이야기는 굳이 꺼내고싶지 않습니다.”

순간 베아트릭스의 입가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반응을 재빨리 살핀 샤자한 공이 말을 이었다.

“죄책감과 보상심리가 있지요. 베아트릭스 경에게는 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릴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대의와 가문의 이익이 충돌했을 때 언제든 가문의 이익을 위해 큰 일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전......”

카렐은 흥분한 베아트릭스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것을 조용히 가로막았다. 이런 약아빠진 인물에게 말주변도 그다지 좋지 않은 베아트릭스가 섣불리 대꾸해봤자 약점만 더 잡힐 뿐이었다. 카렐의 입가에 ‘남말하고 있군’이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지만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게다가......이번에 재량권을 부여받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았습니다. 남부 기사단과 대적중인 기사단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쉬운 판단이었지만 그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플라칼 가와의 충돌을 스스로 피한 것이지요. 듣자하니 나지크에서도 슬레이프니르는 기사단과 교전하지 않았다면서요?”

샤자한 공의 눈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던 카렐은 열심히 떠들고있는 그가 ‘스스로 도를 넘어’ 반격할 타이밍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점을 공격당한 베아트릭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카렐을 야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의보다 자신의 종가부터 먼저 챙긴다는 건 절대 전하 직속 경기병단장으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저자를 당장 경기병단장에서 해임하시옵고 새로운 지휘관을......”

순간 경멸섞인 표정을 지은 카렐이 기다렸다는 듯 반격을 개시했다.

“내 인내력을 테스트하려는 건 아닐 테고.......말도 안되는 억지로 내 직속 부하를 모욕하려는 것인가? 그대가 뭐라고 내 직속조직의 인사권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인가? 내가 현장 지휘권을 부여한 지휘관이 무슨 선택을 했건 그건......”

순간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 샤자한 공이 베아트릭스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리고 저런 천박한 출신의 남부 혼혈을 어찌 믿겠다시는 겁니까? 동부 출신 탈란 바툴이 훨씬 더 적임자임은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있습니다. 왜 저런 자를 단장으로 삼아 전하의 가장 큰 지지세력인 동부제후들의 불만을 자초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 이를 드러낸 카렐은 울분을 참지 못한 베아트릭스가 결국 막사에서 뛰쳐나가는 모습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썅!”

눈앞에 있던 탁자를 걷어차 산산조각내버린 카렐은 말리는 다른 제후들을 거칠게 뿌리치며 밖으로 휙 나가버리고 말았다.

“말씀이 심하셨군요. 그렇게까지......”

마지막까지 카렐을 붙들려 했던 2제후 제르베 경이 곱지않은 눈길로 샤자한 공을 째려보았다. 카렐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키득거린 샤자한 공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저쯤은 되어야 저 다혈질 잡종년이 제 발로 자리를 때려 칠 것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는 제르베 경을 바라보며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저 가디언 출신 황족님께서도 제 주제를 깨달을 테고. 어차피 우리 아니면 기댈 데도 없는 신세 아닌가. 우리가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없지.”

“참, 나 가디언 팔자에 빈집털이라니,”

콜로니 아카데미의 ‘사단의 탑’에 잠입한 카인이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무려 40층 높이나 되는 계단을 정신없이 달려 올라온 카인은 함께 올라온 2명의 근위대 가디언에게 안쪽을 살펴보라 수화를 보냈다.

황궁에서 한참 집안단속에 신경쓰고 있는 베흔은 그와 아울러 탈라스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서부와 한판 붙어야 할 상황에 대비하는데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서부의 제위후보 코리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온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곳 사단의 탑을 미리 조사하는 데 주인이 자리를 비워버린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안쪽을 살펴본 가디언이 아무도 없다는 수화를 보내자 안심한 카인은 학장실 바깥의 응접실에 걸음을 들여놓았다. 한때 하심이 코리온을 보좌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곳에는 몇 장의 의미 없는 서류들과 책들이 먼지만 잔뜩 앉은 채 빈집 티를 제대로 내고 있었다. 함께 온 근위대 가디언이 잠겨있던 학장실 문을 능숙하게 따고는 안에 들어섰다.

“황제자리를 노리는 사람 처소 치곤 꽤 수수한걸.”

학장실 안을 둘러본 카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크지 않은 나무탁자와 책들이 꽉 차 있는 여러 개의 서가들, 옷장과 서류함 정도가 이 큰 학장실 안의 조금은 휑 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류함을 열어젖힌 그들은 중요한 자료가 없는지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개인컴퓨터부터 조사해라.”

카인의 시야와 연결되어있는 베흔이 제일 먼저 내린 지시였다. 시키는 대로 탁자 위의 개인컴퓨터에서 모든 자료들을 복사한 카인은 칩을 품안에 조심스레 챙겨 넣고는 학장실에 딸린 침실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학장도 별로 할건 못되는군.”

베흔의 혼잣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200년은 넘어 보이는 낡아빠진 침대와 허름한 침구들, 개인물품들이 들은 상자들 서너 개가 이 ‘서부의 정신적 지도자’의 소지품 전부였다. 바닥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연 카인은 안에 가득히 들어있는 편지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 몇백 년은 된 듯 색이 잔뜩 바래 있었지만 하나같이 뭔소리인지도 모를 고대어로만 쓰여 있었다.

“제기랄, 이게 뭐죠?”

“주페 태자와 주고받았던 편지로군.”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 베흔이 즉시 대답해주었다.

“태자놈은 이미 옛날에 조사한 적 있으니까 그쪽에 시간허비하지 말고 딴 거 뒤져봐. 서부제후들 최근동향에 관한 거나.”

“알겠습니다.”

카인이 침실 안을 뒤적거렸지만 역시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서 도로 나서던 카인은 베흔의 갑작스런 지시에 자리에 급히 멈춰섰다.

“잠깐, 잠깐, 유리창 자세히 좀 봐봐.......유리창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거지?”

“강화섬유가 들어간 특수유리 같습니다. 훗, 셔틀이 와서 들이박아도 끄떡 없겠는걸요.”

창을 똑똑 두들겨 본 카인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내가 갔을때만 해도 저런 거 없었는데?”

“설치한지 얼마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두 고정창이군? 안팎에서 모두 열 수가 없게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만......”

무언가 이상한지 카인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까......아까 문도 희한하게 밖에서만 잠그는 장치가 세 개나 설치되어 있더군요. 안에 갇혀있으면 불나도 꼼짝없이 타 죽겠는걸요.”

“자네 보긴 학장실이 아니라 무슨 감방같지 않나?”

“정확한 표현이시군요.”

카인이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샤드니 놈하고 학장 사이가 왜 그리 어색했는지......뭔가 감이 오는 것 같지 않은가?”

“학장의 심복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지난번엔 왜 카렐하고 함께 있었을까요?”

눈치빠른 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베흔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학장 탁자에 다가간 카인은 그 안쪽에 개어져있던 보랏빛 머플러를 들어올렸다. 금색 줄 4개가 그려져 있는 머플러 안쪽에는 또 한번 그 정신없는 고대어인지 지렁이 기어가는 낙서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도 날 위해 최선을 다해주게. 내 가장 진실한 문하교수인 하심 예킨터스 응교에게. 학장 코리온 세닉 리쿠.”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학장을 배신하고 달아난 건 아닌 것 같군요?”

“후훗, 학장을 구하겠다던 카렐 그놈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근데, 학장 그놈한테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억류라도 당한 거야?”

“카인 대장님, 이것 보십시오.”

서가 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달려간 카인은 서가 한쪽에 둘둘 말려있는 거의 사람 가슴높이는 옴직한 두루마리를 가리키고 서 있는 부하를 바라보았다.

“먹 냄새가 아직 생생한 걸 봐서 쓴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열어볼까요?”

“양쪽에서 붙들고 조심해 풀어, 상해서 티나면 안되니까.”

“예.”

두루마리 양쪽을 조심스럽게 붙든 가디언들은 돌돌 말려있는 그 큰 종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꽤나 큰 붓으로 썼는지 이번엔 무척이나 굵고 힘있는 필체였다. 고대어에는 까막눈인 카인이었지만 그 힘이 넘치는 붓놀림만으로도 제국 최고의 명필이라는 코리온의 글씨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헉!”

베흔의 그답지 않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조금 놀란 카인이 얼른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이런......맙소사......”

카인의 질문에 베흔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베흔의 목소리가 다시 카인의 귓전에 올렸다.

“그 종이 한쪽 구석에 있는 조그만 거는 뭐냐?”

“편지 같습니다. 아니, 보고서인가?”

카인이 집어든 그 편지에는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코드가 가득 적혀있었고, 그 밑에는 작성자의 서명이 남아있었다. 공용어로 쓰여진 그 문장은 카인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그것이었다.

“의뢰하신 늑골 근세포 표본의 유전자는 섬유에 남아있는 혈흔의 가디언 유전자의 생물학적인 친부의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서부 콜로니 아카데미 유전자연구소 소장......”

순간 이 상황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베흔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간의 그 많은 고민을 한번에 털어낼 열쇠를 얻어낸 그의 통쾌한 웃음소리는 듣고있는 카인을 어리둥절하게 하며 몇 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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