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4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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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편히 주무셨소?”
카렐의 앞에 끌려나온 릴라크는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줄곧 시선을 바닥에만 고정시키고 있었다. 막사 안의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카렐은 그의 손목을 묶은 수갑을 풀어주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내 최대한 융숭하게 대우해 주라 지시했는데.......워낙 우리 사는 곳 자체가 이모양이라오.”
“다른 말 필요 없으니 빨리 목을 쳐 주시오.”
눈을 부릅뜬 릴라크는 카렐의 시선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날 웃음거리로 전락시키지 말고 무사답게 죽게 해 주시오.”
“성질 급하긴......”
혀를 끌끌 찬 카렐은 따뜻한 차 한잔을 잔에 담에 그의 앞에 내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릴라크는 카렐이 내민 푸른빛 찻잔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남편 루시도프 플라칼 경이 크게 놀랐을거요. 하지만 걱정마시오. 내 어머님을 통해 경의 안부를 전해주라 했으니. 아, 거기 편히 앉으시오.”
잔학무도한 ‘검은 마귀’로만 알고있던 카렐이 뜻밖에 자신에게 꽤 친절하게 대하자 릴라크도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여우털 방석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최대한 당당한 자세로 앉은 릴라크는 바로 앞의 상석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은 카렐의 모습을 조심스레 올려보았다.
“가슴 다친 건 좀 어떠시오? 듣자하니 늑골에 금이 가서 좀 쉬어야 될거라던데.”
카렐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자 릴라크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왼손에 빛나고 있는 연두색의 페리도트 반지였다. 얼마 전까지 코리온의 손에서 빛나고있던 이 반지를 똑똑하게 기억하는 릴라크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줄곧 반지에 멎어있음을 눈치챈 카렐이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소? 리쿠 학장 손에 있던 것이 잘 어울리오? 아니면 이게 낫소? 솔직히 손은 리쿠 학장 손이 나보다 백배는 곱고 예쁘지만 말이요......후훗,”
“그게 어떻게......”
“당신 집 3층 침실에 갇혀있던 리쿠 학장을 끄집어내간게 바로 나였소. 발현된 S혈통을 원하는 거야 본인 맘이겠지만 방법이 어째 좀 거칠더군.”
순간 표정이 창백해져버린 릴라크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가문에 알려진다면 그는 파문, 아니 어쩌면 참수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대역죄인이 되는 셈이었다.
“후후, 걱정 마시오, 내 그걸 약점삼아 경을 협박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아니, 도리어 그 일 때문이 이 지경을 당하게 되었으니 도리어 내가 동정해야 되게 생겼지 뭐요.”
“그......일 때문에라뇨......”
“샤드니 그놈이 경을 내게 보낸 것 말이요. 감히 연인을 농락했으니 한번 엿먹어보라고.”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릴라크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열받은 듯 훌쩍 들이켜버린 그의 빈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워준 카렐은 탁자 위에 그의 무기들을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돌아가시오.”
“예......에?”
“경의 말은 막사 앞에 대기중일거요. 갑주와 창은 거기 실려있으니 소지품은 다 챙겨준 셈이구려. 플라칼 가로 돌아가시오. 가능하면 전장에서는 경의 얼굴을 다시 볼 일이 없으면 좋겠구려.”
“절......놓아주시는 겁니까?”
“델루지 가에 이용만 당하는 불쌍한 플라칼 가 사람을 내 뭣때문에 미워하겠소, 지난번 콜로니 아카데미 사건 때도 델루지 가의 자작극 때문에 애ㅤㄲㅜㅊ은 플라칼 가만 망신거리가 되었지 뭐요. 오죽하면 내가 학장을 직접 구했겠소.”
모든 상황을 깨달은 릴라크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나 달리야 남은 가족이 없으니 내 밑에 들어왔지만......경에겐 착한 남편과 갓난아기까지 있잖소. 경 역시 내 밑에 오기를 스스로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주겠지만 포로로 데리고있고 싶지는 않소. 몸값은.......외상으로 해 두지.”
무기를 받아든 릴라크는 몸값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을 순순히 풀어주는 카렐의 모습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먼저 일어선 카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릴라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렐의 반짝이는 회색빛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릴라크를 내려다보며 카렐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플라칼 가도 내 밑의 충성스런 제후가 될 것이니. 잘가시고, 언제든 내 필요하면 연락하시오. 도움을 줄 테니.”
카렐은 적장인 릴라크를 가슴에 안아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카렐의 자신만만함에 자기도모르게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숙여버린 릴라크는 막사를 나서는 카렐을 따라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카렐의 말대로 갑주와 창이 실려있는 그의 말이 작은 셔틀과 함께 막사 앞에 대기중이었다.
“이 셔틀을 타고 돌아가시오. 자기 와이어가 있으니 기지 부근까지는 곤란하고 최대한 가까운 거리까지 실어다줄거요.”
“감사합니다......”
말고삐를 붙든 릴라크가 머뭇거리며 결국 입을 열었다.
셔틀에 올라 서쪽하늘로 멀어져가는 릴라크의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고 있던 카렐은 갑자기 옆으로 다가온 제네르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저자를 왜 풀어주신 겁니까?”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니 어차피 한동안 전장에 나오려 들지 않을게야. 설사 나온다해도 우리에게 전처럼 대하지는 못할걸. 그리고......”
“그리고요?”
“샤드니놈하고 원수가 되겠지.”
“풋,”
카렐이 플라칼 가 일선 지휘관들과 샤드니와의 관계악화를 노리고 그를 일부러 풀어준 것임을 깨달은 제네르는 결국 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탐날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긴 해. 하지만 내게 올 사람과 아닐 사람 정도는 구분해야겠지. 하지만.......내 확신하지만 언젠간 틀림없이 내게 돌아올걸세.”
피식 웃음지은 카렐은 셔틀이 사라져버린 서쪽 하늘을 아쉬운 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제네르에게 고개를 돌린 카렐은 큰 흉터가 남아있는 제네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상처는 좀 어때?”
“참을만합니다.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시력도 거의 원상회복된 것 같고......일기투도 끄떡없을 것 같습니다.”
제네르가 왼쪽 눈의 상처를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
나지크의 숙영지를 제네르와 나란히 걷던 카렐은 멀리 언덕 밑에서 오늘도 투창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슬레이프니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제네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베아트릭스 경이 조금 이상하더군요. 종일 말도 없고......”
“하크로딘 가에서 베아트릭스 혼담을 청한 모양이더군.”
“예에?”
소스라치게 놀란 제네르는 얼른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허탈한 표정의 카렐은 눈을 반 쯤 내리깐 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겠.......답니까?”
“15일에 비번신청했더군. 그 다음날 오전까지 말이야.”
“그랬군요.....”
잠시 머뭇거리던 제네르가 굳어진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술을 마신 카렐이 인사불성이 되어 탈란의 막사에 실려갔던 그 다음날부터, 연합군 내에는 ‘바툴 가 적장자 탈란 바툴이 장태자의 승은을 입었다’는, 출처 모를 소문이 쫙 퍼져버렸던 차였다. 게다가 그날 밤 함께했던 탈란 본인도 그 소문이 사실인지 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매번 묘한 웃음과 함께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놓으면서 더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제네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탈란 바툴 대장 일 때문이겠군요.”
“기억이 없으니 할 말도 없고......”
“전하를 믿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
“어떡하실 겁니까? 바툴 가에서 황빈 책봉을 계속 재촉할텐데.”
한숨만 내쉰 카렐은 분위기전환이라도 하려는 듯 이번엔 제네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자드 경에게서는 아직 아무 연락 없나?”
“예.”
“자네야 전장에서 그나마 정신없이 살고있지만 네자드 경 그 친구가 더 죽을 맛이겠군. 가문이 뭐라고......”
“차라리 잘됐죠......”
카렐의 말에 제네르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 언덕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샤자한 공 그자를 아무래도 그냥 놔둬선 안되겠는데......”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제네르의 물음에 카렐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슈트란 가를 길들일 방안에 고심하던 카렐은 바로 어제, 페로를 만나 상의한 일이 있었다. 요즘 부쩍 돌발행동이 많아진 보벤 경이 군에 복귀하고 싶어하는 것을 역이용해서 그에게 연합군 그럴싸한 지위를 던져주고, 약간의 음모를 꾸며 그 계보 사람들과 함께 외진 곳으로 쫓아내 버리는 것이 당장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보벤 경과 그 계보를 약화시키고 차남 다히르가 가문의 실세를 잡도록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 카렐의 의견이었다.
슈트란 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보벤과 그 계보를 몰아낸다면 동부연합군 내에서 슈트란 가 세력이 힘을 잃을 테고, 그렇게 되면 지난 샤레이의 전투로 군 조직이 대폭 강화된 2제후 트라티누스 가가 약진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당장 실행해서 문제의 싹을 없애야 한다는 카렐의 의견에 이번엔 페로가 조금만 더 두고 보자며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페로를 카렐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가문에서 쫓겨났던 그를 거두어 친아버지처럼 길러준 사람이 샤자한 공이었고, 이미 죽은 보벤의 아버지 아르군 경과도 각별한 친분을 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심하고 꼼꼼한 성격의 다히르 경은 거친 페로와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카렐이 제위에 오른 후에 권력가 페로의 가장 큰 지지세력이 되어 줄 사람도 바로 샤자한 공과 슈트란 가였다.
“페로가 다음달까지만 두고보자고 했으니 그럴 밖에. 페로가 결심을 굳혀주지 않으면 실행할 수가 없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카렐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긴장감과 묘한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카인과 함께 동부로 향하고 있는 베흔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베흔을 힐끔 바라보았던 카인이 웃음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이 되겠군요.”
셔틀 창밖을 내다보던 베흔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황궁에 찾아왔던 세 명의 태자를 기습해서 혼란기를 일거에 수습하셨던 그날처럼 말이죠.”
가벼운 손장난을 치던 베흔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워프비행을 마친 셔틀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탈라스가 아닌, 동부제후지역의 수도인 요동 행성계였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근위대장인 베흔이 있어 어울릴만한 곳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늘은 조금 틀렸다.
“샤자한 공이 대장과의 비밀회동을 흔쾌히 승낙한 게 더 신기하군요.”
“동부도 꽤 많은 피를 흘렸지.”
그제서야 입을 연 베흔이 씽긋 웃음을 지었다.
“전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지고 있으니......샤자한 그놈도 슬슬 더 큰 대가를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겠나. 잇속에는 꽤 예민한 놈이거든. 그게 지금까지 큰 탈없이 동부를 이끌어온 힘이기도 했고......때로는 정말 큰 것을 눈앞에서 놓치는 원인이기도 했지만.”
“카렐에게서요?”
“듣자하니 지난번 내 황비위 제안 덕택에 그 반대급부로 황빈위 한자리를 동부에서 삼는 걸로 얻어냈다지? 이번에도 우리 제안을 받아서 그 반대급부로 카렐에게 또 다른걸 얻어낼 궁리를 하고 있겠지.”
“이번에도 그 궁리대로 될까요?”
“천만에.”
피식 웃음지은 베흔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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