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16화 (315/1,132)

< -- 316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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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드냐.”

네피가 자기 앞에 놓여있는 손바닥만한 비둘기구이를 째려보며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머, 그게 왜 거기갔지?”

깜짝 놀란 솔이 네피 앞에 있던 비둘기구이를 우베 앞에 옮겨놓았다. 하지만 그 뒤에 내려놓은 새 비둘기구이라고 대단하게 큰 것도 아니었다. 제일 큰 덩어리를 받은 카렐만 중간에서 괜히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여간, 자식새끼라고 머리통 커지면 다 헛거라니까.”

네피가 비둘기 날개를 입에 집어넣으며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빠보다 카렐 님이 키가 더 크시잖아요,”

카렐 옆에 자리잡고 앉은 솔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덩치는 내가 더 커, 왜 그래? 목욕탕에 같이 들어가면 내 물이 훨씬 더 많이 넘칠걸?”

“펑퍼짐한 게 퍽이나 자랑이다.”

제네르 옆에 앉아있던 시로가 별 불평 없이 자그마한 비둘기고기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씨, 이건 다 근육이라구, 만져봐,”

네피가 거의 통나무만한 팔뚝을 불끈 들어보이자 자리에 잠시 웃음이 오갔다.

“솔직히 몸매 하면 베아트릭스 경 아냐?”

말없이 고기를 씹고있던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맘먹고 한 농담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네피가 또 분위기파악 못하고 말을 건넸다.

“아참, 15일에 상견례 하러 간다며? 허허, 요즘 이쪽여자들 진짜 잘나가네. 제네르도 괜찮은 남자 꿰차더니. 뭐, 하크로딘 가 상급귀족이라며? 그럼 제네르네 집안 남자네? 카이두 경 입 째졌겠구만.”

“솔 몸매는 어떨까? 솔도 몸매는 끝내줄 것 같은데, 전하께서 말씀을 안하시니.”

라손이 갑자기 능글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에에이, 전하께서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전사단 부하들이 놀리는 뜻인지 갑자기 컵으로 바닥을 탁탁 두들겨대고 있었다. 아침식사시간의 이런 심할 정도로 가벼운 분위기에 하심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는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린 솔을 힐끔 바라본 카렐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정말 몰라. 솔하고 키스한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어. 솔 16살 때인가? 그때 딱 한번 시도해본 게 전부였어. 그나마 솔이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되지도 못했지만. 찐~하게 껴안았던 게 고작이었다구.”

“에에이, 설마.”

라손이 혀를 쑥 내밀며 중얼거리자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말이라니까.”

“솔 너 그동안 뭐했냐? 전하 애만 태운 거였냐?”

라손의 추궁에 솔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냥......아직......준비가......”

“어휴, 키는 나보다 한 뼘은 커 가지고 준비는 무슨 얼어죽을 준비? 말만한 처녀가 말이야......킥킥, 그냥......하면 되지.”

숫기없는 솔을 놀리듯 자리에 모인 녀석들이 일제히 ‘에에이~’를 선창하며 컵으로 또다시 바닥을 두들겨댔다.

“저어......”

아침식사시간이 끝나고 갑자기 카렐에게 다가온 제네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왜?”

“슈트란 가에서 갑자기 절 찾더군요. 15일에......요동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15일에? 거 참......희한한 날이네. 나도 그날 연합군 숙영지에 좀 와달라고 하던데. 그날 베아트릭스도 비번인데.....어쩌지? 라손이 제일 선임이 되나? 하긴, 여기서 먼 거리는 아니니까 괜찮겠지. 다녀오도록 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막사 한쪽에 걸려있는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15일, 바로 베아트릭스가 상견례를 가질 그날까지 이제 겨우 이틀 남아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자신도 연합군 숙영지에서 하룻밤 묵기로 가기로 되어있었다. 근 며칠동안 그와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나누어보려던 카렐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버리고 있었다.

그는 공적인 일 외에는 대답조차 피하고 있었고 드물게 보이던 웃음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한숨을 내쉰 카렐은 15일자 일정표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최악의 하루가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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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을 입었던 오르마즈가 눈을 뜬 곳은 꽤나 허름한, 날파리가 그득히 붙은 거미줄이 쳐 있는 병실 같지도 않은 누추한 방 안이었다. 방 한쪽에는 그가 입고있던 피묻은 옷과 칼이 놓여 있었지만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막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는 창 밖으로는 지저분하고 먼지 날리는, 타르서스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오르마즈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할룩스를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오르 언니, 깨어났어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든 오르마즈는 물수건과 대야를 들고 문가에 서 있는 막내동생, 세네피스와 눈이 마주쳤다.

“너였구나......”

미소를 지은 오르마즈가 삐그덕거리는 침대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침대맡에 다가온 세네피스가 그의 머리 밑에 베개를 대 주며 말했다. 고개를 조금 든 오르마즈는 이제 갓 앳티를 벗은 막내동생의 예쁜, 아니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유학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 동생은 아직 7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벌써 남극성당 수찬의 자리에 올라 유난히 자식욕심 많은 아버지를 든든하게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빼어난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깜짝놀랄 정도로 명석한 두뇌까지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이 동생은 특히나 맏언니인 오르마즈를 그대로 빼다 박은 외모로 사람들에게서 ‘혹시 쌍둥이가 아니냐’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머리칼, 눈동자 색깔까지 똑같은 이 자매의 얼굴에서 그나마 차이라면 오르마즈의 짙은 눈썹과 움푹 패인 눈이 있는 강인한 외모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 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정부청사는?”

“저도 몰라요. 웬 처음 보는 사람이 언니가 여기 있으니 가서 돌보아주라고 말한 것밖에는요. 저도 어젯밤에 왔어요. 와봤더니 의사만 있더라구요. 의사는 아침에 갔어요. 지금 오후 5시나 됐다구요.”

“내 할룩스는?”

“아, 제가 갖고있어요.”

오르마즈의 뜨거운 얼굴을 찬 물수건으로 식혀주던 세네피스가 품 속에서 기계를 꺼내보였다.

“폐하께는......아무 연락 없었니?”

오르마즈의 질문에 잠시 움찔 한 세네피스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한 번 왔던 것밖에는 없어요. 깨어나셨냐길래 아직 의식이 없으시다고 했죠.”

오르마즈는 늦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묘한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누워 계세요, 저녁식사 챙겨 올께요.”

웃음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막내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르마즈는 저 특이한 동생과 자신이 처음 만났던 먼 옛날,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그때의 기억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태어났던 기원 원년에 제니안의 간부였던 아버지 투르케스크는 궐석 종교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오르마즈를 키워준 어머니 아지드 레즐린은 아주 평범한 얼굴에 차가울 정도로 침착한 성격을 가진 분으로 그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단자로 낙인찍힌 아버지 때문에 정규학교에서도 쫓겨나야 했던 오르마즈와 동생들은 그런 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배워야만 했다. 사실 오르마즈가 아직까지 놀라워하고 있는 건 어머니 아지드 레즐린이 문학과 철학, 역사와 예술은 물론이고 자연과학까지 거의 전문가 수준의 어마어마한 지식을 갖춘 인텔리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단자 혈통이라는 주변의 곱지않은 눈길과 아버지가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르마즈를 비롯한 7명의 남매들이 훌륭히 장성할 수 있던 것도 그렇게 똑똑하고 엄한 어머니의 덕분이었다.

그렇게 현명하신 어머니가 수배령을 받고 쫓겨다니던 별 볼일 없는 제니안 광신도 아버지와 왜 결혼했는지는 오르마즈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코윈 제일의 갑부라는 카파키 가문 차남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별 의미는 없었다. 초기 TSG의 지도자이고 혁명가였던 증조할아버지 타리프 때만 해도 총애를 받았던 아버지였지만 그분이 돌아가시고 사업가인 할아버지 빌루이가 가문을 물려받은 이후로는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다. 이 골칫덩이 아들은 사업을 위해 가문의 ‘정치색’을 떨쳐내고 싶어하는 할아버지에게는 지독한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할아버지는 이 골칫덩이 둘째아들의 가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의 얼마 안되는 지지자들이 몰래 갹출해 보태주는 몇 푼 안되는 돈이 사실상 수입의 전부였다. 서부 아라무트의 고아 출신이었던 어머니에게도 변변히 기댈 친정이 없었고, 이단자의 부인이라는 위험한 신분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날품팔이와 노점으로 7남매들을 길러내야 했고 가족들은 그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아버지도 없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제니안을 버리고 돌아오면 네 가족들도 거두어주고 중역으로 써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으름장도 무시하고 가족을 어려움에 몰아넣은 아버지 투르케스크였지만 사실 부모님의 금실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유난한 고집과 발끈 하는 성미에 잔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너그러운 분이셨다. 그리고 도망생활로 지친 남편이 기껏해야 몇 달에 한 번 가족들을 몰래 찾아오셨을 때에도 초췌해진 그에게 몸에 좋다는 것들과 그동안 직접 만든 새 옷을 꼼꼼히 챙겨드렸을 정도로 속정이 깊으신 분이셨다.

이런 두 분이 드물게 부부싸움을 벌인 건 항상 종교 때문이었다. 제니안 광신도와 결혼했으면서도 정작 종교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당시 국교였던 ‘침묵의 자매들’ 성전에 가끔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사제들에게서 설교 몇 마디를 듣고 오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사실 그 정도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이단자 가족으로 낙인찍힌 이들의 삶이 더 어려워졌겠지만 그렇게 ‘적당히’ 현실에 적응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그 교단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쫓기시던 아버지에게 곱게 보였을 턱이 없었다.

오르마즈가 8살 되던 해, 콜로니 어린이들이라면 모두 받아야 하는 ‘신의 간택’에서  그가 기껏해야 2, 3백명 중 한 명 받는다는 주신(主神) 다하카르의 간택을 받았던 건 다른 부모들이었다면 까무러칠 듯 기뻐했을 일이었겠지만 어머니로서는 불운에 가까웠다. 오르마즈는 이마에 머리 셋 달린 화려한 용의 문장을 박은 채 돌아왔고, 뒤늦게 그 모습에 격분한 아버지는 그걸 왜 받았느냐며 어머니에서 얼토당토않은 화를 냈던 터였다. 어머니는 ‘간택을 거치지 않으면 아이까지 교단에 잡혀가는데 그렇게 하고 싶냐’며 당연한 응수를 했지만 앞뒤 꽉꽉 막힌 아버지에게 통했을 턱이 없었다.

어쨌든 오르마즈는 그날 씩씩대며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영문도 모른 채 밤새도록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뼈를 뚫고 단단히 박혀진 문장은 45살이 되는 해, 수술을 받아 겉부분만이라도 제거할 때까지 그의 이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생명까지 위험하다’며 차마 빼내지 못했던 그 뿌리 부분은 아직까지 오르마즈의 두개골에 남아 가끔씩 욱신거리는 통증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큰 오르마즈의 운명이 뒤바뀐 건 16살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난 아버지는 맏딸 오르마즈를 병사로 쓰라며 함께 온 TSG 게릴라들의 손에 자진해 넘겨주었고,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어머니가 받은 충격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소년병으로 끌려가던 딸을 보며 실성한 듯 울부짖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르마즈의 머리에 마치 상처처럼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TSG의 게릴라 암살수로 변신한 오르마즈는 ‘침묵의 자매들’ 교단에 최악의 수배자로 낙인찍혔고, 2명이나 되는 악질적인 수배자를 낸 이 불경스런 가족은 결국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살아있는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성전의 해’로 더 잘 알려진 기원 52년 말, 수용소가 민병대의 손에 넘어오면서 갇혀있던 가족들도 모두 풀려났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의 구출 소식을 받고 36년만에 급히 귀향한 민병대 사령관 오르마즈의 앞에는 멍한 얼굴의 아버지와 이미 다 커 어른이 되어버린 5명의 동생들, 난생 처음 보는 막내동생 세네피스, 그리고 석방 직후, 누군가에게 목졸려 살해당한 어머니의 차가운 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왜 어머니를 죽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딸과의 재회를 코앞에 두고 비참하게 죽은 어머니는 그의 손에 장례가 치러졌고 죽음에 얽힌 비밀과 함께 땅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례 직후,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던 오르마즈에게 아버지 투르케스크는 막내동생 세네피스를 황제령으로 데려가 직접 보호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날 이후로 저 쌍둥이 같은 특이한 동생은 이 맏언니를 지나치리만큼 헌신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물수건을 챙겨들고 방을 나서던 세네피스는 텅 빈 듯한 시선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오르마즈를 한번 돌아보았다.

“입만 열면 ‘폐하’밖에 모르시는군요.”

문을 나서던 세네피스가 혼잣말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거의 한시간마다 한 번꼴로 오르마즈의 안부를 확인하던 황제의 연락을 일부러 받지 않은 것도, 청사에서 일부러 찾아온 황제의 사절도 ‘절대안정이 필요하니 나중에 와라’며 돌려보냈던 것도 오르마즈에 대한 유난한 집착을 보이는 이 동생의 특이하기까지 한 소유욕 때문이었다.

청사 부근 큰 병원으로 옮겨졌던 오르마즈를 이곳 촌구석 빈집으로 옮겨온 것 역시 정적의 위협을 걱정한 황제의 특별한 배려였지만 그 사실 역시 오르마즈에게는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오르마즈의 저녁식사를 챙겨들며 세네피스가 계속 중얼거렸다.

“설마 그 추한 년에게 맘을 주신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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