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17화 (316/1,132)

< -- 317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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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투에서 카렐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릴라크는 카렐에게 감히 돌진한 그 ‘영웅적인 용기’를 치하받으며 가문이나 동료들에게서 꽤나 대단한 환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축하와는 무관하게, 릴라크는 며칠간을 근심과 눈물로 꼬박 새운 남편 루시도프와 갓난아이를 차마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너그럽게 풀어준 카렐과 전장에서 다시 마주하고싶지는 않았다.

결국 귀환 직후, 2기사단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던 그는 결사적으로 만류하는 헤즈와 히르직스, 시아버지이며 종장 카나르 경 때문에 며칠간의 ‘영내 휴식’ 정도로 만족하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그 외에도 사실 그가 이곳을 떠나고싶어했던 하나의 이유가 또 있었다.

“망할 기생오래비새끼,”

13일자 연합군 지휘관회의를 끝내고 돌아오던 릴라크는 자기도 모르게 욕을 뱉어내고 있었다. 풀려난 이후, 사령관 샤드니의 얼굴만 봐도 치밀어오르는 울화통 때문에 그는 사실 홧병에 걸려버릴 지경이었다.

“제기랄, 죽을 뻔한 지 애인 구해준 게 누군데 지랄이야?”

그다운 욕지거리를 실컷 늘어놓던 릴라크는 도도함이 넘치는 코리온의 그 매력적인 얼굴을 또한번 머리에 떠올렸다.

“훗, 잘난 발현자들은 다 잘난 놈들만 차지하시는군. 그래, 둘이서 잘먹고 잘살아봐라. 썅.”

종종걸음을 내딛던 릴라크는 이번엔 카렐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하긴, 듣자하니 그 녀석도 발현자라던데.......잠깐, 같은값이면......X까지 섞인 발현자라면 금상첨화일거야? 그 정도 녀석 피가 섞이면 자식도 엔간한 가디언 그냥 때려잡을 정도로는 나오겠지? 키도 크고......인물도 그 정도면......”

혼자 이런저런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며 걷던 릴라크는 자신의 막사 앞에서 기다리던 웬 녀석과 마주쳤다. 검은색의 제후군 정보부서 제복을 입고있던 녀석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릴라크에게 다가와 짧게 말을 건넸다.

“15일 비상대기하십시오.”

“뭐, 뭐?”

“종장님의 특별한 명령이십니다. 영내에 와 계신 민간인 가족들도 돌려보내십시오. 서부제후군측에 알려지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시라는 지시입니다.”

잽싼 걸음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릴라크는 잠시 멍해져 있었다. 다만 한가지, 그 날 무언가 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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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의 황궁을 빼앗긴 이후 다시 개시된 북부의 공세소식에 테나스 태후는 남부와의 ‘양위협상’에 더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태후와 남부 사이 협상의 가장 큰 이해가 걸려있던 별궁 건설문제가 서부의 개입으로 조금 이상하게 꼬여버리면서 더 골치가 아파진 태후는 남부제후연합 수장인 테번에게 ‘그럴 바엔 아예 현금으로 달라’며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태후와 남부 사이 협상에서 지금껏 합의된 내용이래야 ‘황제령을 황폐화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죄’라는 말이 되는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명분으로 황제를 참수형에 처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태후는 양위와 함께 타르서스를 별도의 행정권과 군권을 가지는 자치구로 선포해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구 황실 사람들의 손에 넘겨달라 요구하고 있었지만 테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하고 있었고, 1천명의 X들이 포진해있는 현 근위대의 지휘권을 계속 가지고 있겠다는 태후와, 근위대는 당연히 새 황제에 충성해야 한다는 테번과의 의견대립 또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부에서 황제령의 ‘건설노역’을 자원한 만여명의 옛 열성 민병대원들은 황제령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또다른 만여명의 파견이 예견되어 있었다.

“오르마즈 어디 갔어요?”

황궁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말고 자신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는 황제에게 태후가 대뜸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참, 나, 도대체 몇 번째 물어보시는 겁니까? 황제, 얼마 전에 행방불명되었다니까요.”

“그거 없어졌다는 말이죠?”

황제가 그 검은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구요, 행, 방, 불, 명.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구요. 이제 아시겠어요?”

“이상하다, 어제 나한테 칼싸움 가르쳐준다고 했는데......베흔이었나?”

머리를 긁적거리며 멀어져 가는 한심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후가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을 싸쥐었다.

20여일 전에 행방불명된 오르마즈는 아직껏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베흔 말로는 혼자 두 명의 X들을 쓰러뜨리고 절벽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라 했으니 큰 이변만 없다면 놈은 이미 죽었음이 확실했다. 그런 이상 지방정부청사 주변에 수만명이 머무를 가건물들과 부대시설들을 짓고 땅을 고르는 정지공사를 한참 벌이는 데 동원된 1만여명의 옛 민병대들을 보면서도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따를만한 지휘관이 없다면 저 걱정스러운 놈들도 결국은 모래알같은 오합지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서부에서 구매한 5천명 분의 갑주와 무기가 어제 입고되었습니다. 기초공사용 파일에 함께 들여왔습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황제에게 문 옆을 지키던 경비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흐릿하던 황제의 눈동자가 갑자기 번쩍 하며 빛을 뿜었다. 문득 시선을 돌린 황제는 경비병이 쓰고있는 투구 속에서 빛나고 있는 회색빛 눈동자를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사일까지 몸이 다 나을 수 있겠나?”

“애쓰고 있습니다.”

오르마즈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저 안락의자 펴서 누워있도록 해.”

“괜찮습니다. 전......”

“명령이다. 그때까지 못 나으면 책임질텐가?”

한숨을 내쉰 오르마즈는 쓰고있던 투구를 벗으며 푹신한 의자에 힘겹게 자리잡고 앉았다.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왼쪽 뺨의 상처에는 꿰맨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누구 만나봤나?”

“옛날 제 휘하에 있던 3명의 군단장들입니다. 그 외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황제가 품에 품고있던 조그만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 내용들을 차근차근 살펴본 오르마즈가 사뭇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입니까?”

“그래, 다 없애라.”

무표정하게 대답한 황제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치세엔 쓸모 없는 존재들이다.”

오르마즈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려 60여명에 달하는 그 명단에는 테나스 태후를 비롯한 8명의 세나우스 1세의 처첩들과, 19명의 배다른 형제자매들, 그리고 30여명의 신하들 명단이 들어있었다.

“종친들은 베흔이 처리할 테니 넌 신하들을 제거해라.”

“알겠습니다.”

오르마즈는 태연한 얼굴로 집무를 보고 있는 세나우스 2세, 아니 유평 이그나토 리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즉위식 날 그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성군’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오르마즈 스스로도 그가 절대 성군이 될 수 없음을, 아니 성군이 될 수 없는 운명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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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동향이 어떤가?”

전사단 보급 문제를 핑계삼아 근 며칠간 우베를 요동에 보내놓았던 카렐은 모처럼 돌아온 그에게 저으기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별다르게 이상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둘째아들 다히르 경이 여전히 종가 운영을 총괄하고 있고 네자드 경이 이번에 연합군 지원 총괄을 맡게 되었습니다. 문관인 네자드 경이 요직으로 발령난 걸 보아서 다히르 경 계보도 여전히 건재한 것 같습니다.”

별다르게 이상한 보고가 없자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는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샤자한 공의 모습에 더 의아해하고 있던 차였다.

“보벤 경은?”

“별다른 보직 없이 종가에서 쉬고있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연합군 보직이라도 달라고 샤자한 공에게 조르고 있다는 모양입니다만 장남 아르군 경이 죽은 이후로 샤자한 공이 장손자 보벤 경은 전장 일선에 내놓기는 꺼리는 모양입니다.”

요동에서 가져온 우베의 보고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우베 역시 답답한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동부쪽 정보망은 지금까지 전적으로 총리각하의 라인을 이용하고 있던 차여서......그분 도움 없이 이런 조사를 단독으로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 카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총리께선 아직 별 말씀 없으십니까?”

카렐의 눈치를 살피던 우베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베라카스의 영지에 갑자기 도적떼가 발호해서 그것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오늘 베라카스로 잠깐 내려갔네. 내일 밤이나 오거든 다시 재촉해 봐야지.”

“제가 보긴 도적떼 이야기는 핑계에 가까운 듯 하군요.”

우베의 한마디에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슈트란 가 처리문제를 놓고 요즘 페로와 심심찮게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페로가 거의 매일 ‘결단’을 졸라대고 있는 자신을 피해 도망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보면 사실상 동부인이며 슈트란 가 직계인 페로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내일 연합군 숙영지에 가신다면서요?”

우베가 14일자 달력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이 대답했다.

“2제후 트라티누스 가하고 4제후 눌레딘 가는 어떡해서든 내 충복으로 만들어야 돼. 설사 슈트란 가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까지는 몸을 낮추고 살았지만......이젠 내 힘도 조금씩 갖춰져 가니 알곡과 쭉정이는 가려내서 쳐낼 밖에.”

입술을 꽉 깨무는 카렐이 눈가에 불길한 예감에 대한 걱정과, 그리고 지금까지 세력을 키우는 동안 철저히 감추었던 옛 가디언 시절의 잔혹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시계는 12시를 넘겨 15일 새벽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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