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18화 (317/1,132)

< -- 318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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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에 탈라스를 떠나 4시간만에 요동에 도착한 제네르는 이곳이 이미 초저녁에 접어들고 있자 시차 적응할 생각에 머릿속이 지끈지끈해져왔다. 가뜩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전사단 셔틀을 개인 목적으로 한나절이나 빌려타기가 미안했던 그는 슈카른 계곡의 동부연합군 사령부에서 이곳 종가 부근 슈트란 가 제후군 보급기지로 직접 오는 셔틀을 얻어타고 도착해 있었다.

“하크로딘 단장님 오셨군요.”

종가 동쪽 입구를 지키던 수문장이 그를 알아보고는 꾸벅 경례를 올렸다. 애마인 얼룩무늬 말 아타르에 올라 종가 안에 들어서려던 제네르는 경비병이 갑자기 말고삐를 붙들자 화들짝 놀랐다.

“뭐 잘못됐나?”

“저어, 무기와 말은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무기를? 무슨 소리인가?”

“며칠 전에 경비수칙이 변경되었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해져서 그런지......가문 직계 종원과 그 배우자, 경비병과 제후군 고급지휘관급 외에는 말과 무기를 맡기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약혼자이신 건 알지만.......아직 배우자는 아니시니.....”

“참, 나 그 양반도.”

샤자한 공의 뜬금없는 걱정에 쓴웃음을 지은 제네르는 말에서 내려서서는 허리에 차고있던 장검과 단검까지 모두 끌러 안장 옆에 걸었다. 말을 끌고가려는 경비병의 손길을 막은 제네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까다로운 녀석이라 다른 사람 손길을 싫어하네. 내 직접 매두지. 어디 두면 되나?”

제네르의 질문에 경비병이 초소 한켠에 새로 지어진 듯한 작은 마구간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말을 끌고간 제네르는 보드라운 짚단이 깔린 안에 말을 집어넣었다. 낯선 마구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타르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제자리에서 발을 굴러대고 있었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너도 ‘세네프’하고 같이 있더니 그놈 닮아가냐?”

제네르가 녀석의 갈기를 손으로 빗어주며 중얼거렸다. 130여년 전, 연인이던 제롬과 함께 남부 델루지 가 종가를 찾아갔던 제네르는 그를 알아본 네페티 부인과 두 번째의 만남을 가졌던 일이 있었다.

자신의 부탁 때문에 제네르가 10년 동안이나 근위대에서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은 네페티 부인이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내준 선물은 ‘말’ 이었다. 놀라운 기마실력에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정작 자기 말은 한 마리도 없던 제네르에게 ‘종가 마구간에서 마음에 드는 말 한 마리를 마음대로 골라봐라’는 제안은 귀가 확 트이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서부 수베르 산의 이 얼룩무늬 암말은 마치 위장무늬 같은 그 특이한 외모와 탄탄하고 날렵한 몸매 덕택에 말 전문가 제네르에게서 낙점받아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고 있었다.

제법 무게가 될 마구와 무기들을 끌러놓고 갈까 말까 고민하던 제네르는 슈트란 가 사람들을 대할 때 각별히 조심하라는 카렐의 주의를 문득 머리에 떠올렸다. 작은 단검이라도 몰래 가져갈까 고민하던 그는 자칫 잘못 행동하면 꼬투리만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결국 그는 말과 무기들을 그대로 놔둔 채 고삐만 대강 옆에 걸쳐놓고 뒤로 돌아섰다.

아니나다를까, 말을 만지작거리다 돌아나오는 제네르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문장에 그의 몸을 샅샅이 검사했다. 신발 속까지도 모두 검사하고 괜찮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야 제네르는 슈트란 종가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자신을 낯선 곳에 놔둔 채 멀어져가는 주인이 못내 야속한지 마구간 안에서 계속 발을 굴러대며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아타르의 울음소리와 발굽소리가 꽤나 요란스러웠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인 샤자한 공이 종가에 잠시 돌아와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제네르는 제일먼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손자 보벤 경과 함께 앉아있던 샤자한 공은 오랜만에 문안을 올리는 손자며느리감에게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왔다. 내 네가 성치않은 몸으로 전장에서 고생만 하는 것 같아 하루쯤 쉬었다 가라고 특별히 불렀다.”

“배려 감사하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조금 힘든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서쪽 별당에서 다히르하고 네자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 네자드를 특별히 불러왔으니 오랜만에 회포도 나누고.....따뜻한 방에서 하룻밤 편히 묵고 가거라.”

“감사합니다.”

제네르는 네자드 경과 또다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 내심 시로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도리가 없었지만 일단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간 네자드와 자신과의 만남을 막아왔을 샤자한 공이 뜬금없이 이런 자리를 주선한 것도 조금 의아스런 일이기는 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샤자한 공이 조심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다......내 네게 물을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네가 얼마 전 파예드 아카데미에 전하의 선물을 들고 찾아갔던 일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순간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한 제네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왔다고 믿고있는 샤자한 공에게 카렐이 서부와 친목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로서도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태자선언 결과를 그쪽에 알리고 제위선언 포기를 독촉하기 위한 극히 형식적인 방문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랬구나......결과는 어떠하였느냐?”

“그 앞뒤 꽉 막힌 원리주의자와 말이 통했겠습니까.”

제네르가 짐짓 웃음까지 지으며 대답하자 샤자한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앉은 보벤 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래......그랬구나. 내 이런 결과를 꼭 먼저 물어서 네게 들어야겠냐. 너 역시 가문 사람이 될 몸이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거든 내게도 꼭 알려다오.”

“황공하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네르와의 인사를 마친 샤자한 공이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다시 탈라스로 가야겠구나. 그럼 하룻밤 푹 쉬고 돌아오도록 해라.”

종가 사랑채를 나선 샤자한 공은 주기장 쪽으로 바삐 사라져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배웅한 보벤 경 역시 다른 곳으로 바삐 가버리는 것을 보아 다른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메스가 여기 있을 텐데?”

이곳에서 금족령을 받아 머무르고 있을 아메스를 머리에 떠올린 제네르는 그가 있을 안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왕 같은 데 갈 거면 같은 셔틀 타고가라구. 무슨 차는 차야, 위험하게.”

연합군 숙영지가 있는 슈카른 계곡으로 떠나는 카렐의 아르다가 셔틀에 네피가 베아트릭스를 억지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혼자 차를 타고가겠다고 우기던 베아트릭스는 카렐과 동행하는 솔이 웃음 띤 얼굴로 빨리 들어오라 손짓하자 마지못해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차피 같은 데 가는데 왜 따로 가려고 그러세요.”

속모르는 솔이 아직 먼지 묻은 갑주차림 그대로인 베아트릭스에게 시원한 넥타 한 잔을 내밀며 친절하게 말했다. 상석에 앉아있던 카렐은 베아트릭스에게 잠시나마 억지미소를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 그대로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베아트릭스에게 ‘한번만 더 생각해달라’며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했던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철저한 무응대에 또한번 실망했을 따름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카렐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그를 볼 면목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출발합니다.”

베네루스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셔틀은 카렐의 친위부대들이 있는 나지크 산악을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카렐이 함께 앉은 솔에게 말했다.

“지난번같이 위험한 일선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돌아다녀도 돼. 아무래도 병영이라 좀 지저분하겠지만 나지크나 ㅤㅋㅞㄹ크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늦어도 자정까지는 돌아오도록 해.”

“예.”

카렐과 함께하는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에 잔뜩 들뜬 솔은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씽긋 웃음을 지었다. 요즘 부쩍 검술연습에 열심이인 솔은 자기가 카렐의 ‘최측근 경호원’이라며 넉살까지 떨 정도로 전보다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 지난번 외숙부 사르키스가 그에게 선물한 주페 태자의 시미터를 허리에 찬 솔은 아버지 네피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당당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동부연합군 숙영지에 도착한 카렐을 맞아준 건 연합군 기병대장으로 있는 토로 경과 보병사령관 플로브 하크로딘 경이었다.

“오늘은 경호원이 많이 데리고 오셨군요.”

플로브 경이 카렐을 뒤따라 내리는 3명의 가디언들을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평소 카토 한 명만을 궁색하게 데리고 다니던 카렐은 오늘은 2명이나 되는 가디언들을 더 거느리고 서 있었다.

“”명색이 장태자이니 경호원 숫자도 격을 좀 맞춰야 하지 않겠나.“

이번엔 토로 경에게서 인사를 받은 카렐은 함께 온 베아트릭스에게 말했다.

“내일 10시에 출발할 때 여기에......”

말을 꺼낸 카렐이 무안해질 정도로 별 대답도 없이 등을 휙 돌려버린 베아트릭스는 바툴 가 종가로 내려가는 협로 쪽으로 가 버리고 있었다. 허탈해진 카렐은 토로 경을 거느리고 사령부 막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 내린 솔은 끝도 없이 넓은 거대한 숙영지가 신기한지 입을 멍 하니 벌린 채 호기심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왔구나,”

종가에서 베아트릭스를 기다리던 카이두 경은 네 명의 부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중 제일 끝에 앉아있던 베아트릭스의 외할머니는 좋은 신랑감을 만나게 된 이 외손녀를 사뭇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급제후가문의, 그것도 첩실의 손녀 출신으로 3제후가의 상급귀족 남자와 결혼한다는 건 여지껏 ‘야만족 제후’로 취급받던 바툴 가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리 준비를 해 둔 듯 한쪽에는 따뜻한 물이 담겨있는 목욕통과, 갈아입을 유목민 전통의 여자예복이 곱게 정리된 채 걸려있었다.

“전통에 따라 할머니들이 네 몸단장을 해 줄 거다.”

입고 온 갑주와 무기들을 끌러놓고 목욕통 안에 몸을 담그는 이 손녀를 카이두 경이 꽤나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몸에 묻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씻겨주는 할머니들의 손길을 느끼며 베아트릭스가 눈을 감고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금족령을 받은 채 슈트란 종가의 안채에 사실상 갇혀있던 아메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새 황실의 황후가 될 그를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당연한 이유였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말을 타고 달리며 전장을 누비던---물론 그 스스로 생각하는 ‘누볐다’는 것에 조금 과장이 있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그가 어느날 갑자기 새장이 갇혀버린 새 신세가 되었으니 속이 터지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제네르는 너무나 반가운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기랄, 이럴 바엔 차라리 ㅤㅋㅞㄹ크로 돌려보내 달라구요, 제 꼴이 이게 뭐냐구요.”

아메스는 제네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불평부터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넓지도 않은 마당을 혼자서 서성대고만 있던 아메스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전하께선 그러자고 하신 모양인데, 총리께서 여기가 안전하니 이편이 낫다고 그랬다던데?”

“진짜, 아버지도.......으휴.”

아메스는 발에 걸린 돌멩이 하나를 괜히 뻥 차내며 연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조금만 눈 딱 감고 참고 기다려 봐. 그땐 황궁에서 떵떵거리고 살게 될 테니까.”

피식 웃음지은 제네르가 풀죽은 아메스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었다.

“심심해 죽겠는데 전하께서도 안오시구......무슨 감방도 아니구......”

아메스는 당장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아메스의 눈앞에 제네르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전하가 전해주라고 하셨어.”

“뭔데요?”

“열어봐.”

생각없이 상자를 열어본 아메스는 그 안에 들어있는 손바닥만한 분재소나무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예요?”

“전하께서 지난번에 서부에 계셨을 때 직접 만드신 거야. 주페 태자저하 묘소 부근에 있던 소나무로. 살아있는 거니까 잘 관리해.”

카렐이 직접 만들어서 줬다는 말에 대뜸 표정이 풀어진 아메스는 길쭉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그 작은 나무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머리맡에 잘 둬야겠네요. 헤헷, 아참, 네자드 숙부 저기 서쪽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같던데, 가보세요, 아까 낮부터 교수님 언제오시나 계속 마당에서 서성거리시는데 불쌍해서 못 보겠던걸요.”

분재를 소중하게 껴안고 방으로 돌아가는 아메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제네르는 네자드 경이 기다리고 있을 서쪽 별채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연신 하품을 늘어놓던 카렐은 지금 자기가 이 자리에 왜 와있나 하는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제후들간의 알력이 요즘 부쩍 심해졌으니 좀 말려달라며 자신을 불렀던 샤자한 공은 정작 이곳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페로는 베라카스로 가버린 후였고, 제후들은 시작부터 싸워대고 있었다.

2제후 트라티누스 가와 4제후 눌레딘 가는 계속 자신의 부대를 따돌림하고 있는 보병사령관 플로브 하크로딘 경에게 불만투성이였고 5제후 카나 가는 가문 기병대의 숙영지의 위치가 안좋아서 병사와 말들의 컨디션이 최악이라며 연신 볼멘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승용셔틀 주기장이 쓸데없이 너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보급셔틀 주기장하고 합쳐버리고 카나 가 기병대에 주는 쪽으로 해보지. 그쪽을 담당하고 있는 슈트란 가의 샤자한 공이 없으니까 내가 내일 회의 때 직접 말해주겠네.”

일단 제일 간단한 일부터 처리해놓은 카렐이었지만 샤자한 공과 또 한바탕 벌여야 될 건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자신의 아랫사람을 공개적으로 그렇게 씹어댔으니 이번에 ‘제대로’ 한번 두들겨놓을 건수를 찾던 참이었다. 안그래도 슈트란 가는 최고제후라며 보급이며 다른 지원에서 너무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고 주기장 문제 말고서도 책잡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감정싸움으로 번져버린 트라티누스 가, 하크로딘 가, 눌레딘 가의 갈등은 쉽사리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카렐로서는 대규모의 보병사령관을 맡을 능력이 되지 않는 2제후 제르베 경을 원망할 수도, 화풀이감으로 전락해버린 4제후 눌레딘 가에 무조건 복종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플로브 경이었지만 저자는 카렐의 말이라고 들어먹을 정도로 말이 통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잘됐군, 안그래도 보병대의 형태나 지휘체계가 너무 산만해서 걱정이었어. 이번에 적 장갑보병을 막아낸 결과를 보니까 장창보병대하고 마랄루 결사대의 컴비네이션이 꼭 하임달의 결전 때 북부보병대하고 민병대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던 게 이거다 싶더군. 마랄루 결사대와 북부용병대를 통합시켜 제2보병대를 만들도록 하고 제르베 경이 사령관, 나람 경이 부지휘관을 맡도록 하게.”

순간 플로브 경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잔소리를 비로소 벗어나게 된 제르베 경과 나람 부인이 서로 마주보며 눈웃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럼 제1, 2보병대, 정규기병대, 유목민기병대, 궁기병대의 5개 편제로 훨씬 간단해지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오나 통합력이 생명인 보병대를 분리함은......”

“통합력? 저 두 부대는 마랄루에서부터 정규보병대와 함께 싸운 적이 단 한번도 없어. 그게 경의 보병대 운영방침 아니었나?”

카렐이 핵심을 집어내자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진 플로브 경은 마땅히 답변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는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그의 변명을 들어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판단한 카렐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피곤하니 나머지 얘기는 내일 하세.”

“저희도......그렇군요,”

카렐의 눈짓을 받은 제르베 경과 나람 부인도 허둥지둥 자료들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큰 기지개를 켜고 막사를 나선 카렐은 깜깜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하품을 한 번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렐을 뒤따라 회의실을 나선 제르베 경과 나람 부인이 이례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 둘도 카렐이 동부 상급제후들 중 자신들을 유난히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나람 경은 야전경험이 더 풍부하고 제르베 경은 운영과 통합력이 있으니 둘이 서로의 강점을 인정해가면서 운영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후, 난 샤자한 공 오거든 단둘이 한판 결정지어놓을 일들이 산더미겠구먼.”

느긋해진 표정으로 다시한번 기지개를 켠 카렐은 오늘밤 묵을 숙소가 있는 하크로딘 가 보병대 막사 바깥쪽을 향해 걸었다. 멀어져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각자의 숙소로 흩어지려던 제르베 경과 나람 부인은 갑자기 자신들에게 다가온 사령부 장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최고제후님의 개인막사로 모이시라는 명령이십니다.”

“명령? 누가?”

“최고제후님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그분이 벌써 오셨다고?”

나람 부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30분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다른 곳에 일체 연락하시지 말고 조용히 모이시라는 특명입니다.”

서로 마주본 두 사람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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