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20화 (319/1,132)

< -- 320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

.

.

“하크로딘 가 직계이며 상급귀족인 카라트 노에누스 하크로딘이요. 177살이고 동남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법학과정 교수로 있소.”

베아트릭스와 마주선 붉은 비단포 차림의 남자는 학자다운 곱고 말끔한 얼굴에 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할아버지 카이두 경과 함께 선 베아트릭스는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유목민 전통복장 차림으로 이번 상견례를 맞이하고 있었다.

“플라칼 가와 바툴 가의 방계이고 하급귀족인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입니다. 182살이고 동북 콜로니 아카데미 물리학 박사이며 황실 경기병단 슬레이프니르 단장으로 있습니다.”

카라트라는 이 남자는 ‘바툴 플라칼’이라는, 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 특이한 조합이 기가 막힌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굳어져버린 베아트릭스의 얼굴을 본 남자는 그제서야 무례함을 깨달았는지 급히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물리학 박사시라니.......겉모습과는 딴판이시군요.”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그나마 더 굳어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무례한 말을 연달아 쏟아내고 있는 이 남자가 원래 너무 솔직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종장이라는 인간처럼 오만방자한 것인지 도무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물리학 박사’라는 자신의 학력에 걸맞지않게 마치 노동자처럼 쩍쩍 갈라진 손과 거칠어보이는 매력없는 얼굴을 또한번 거울에 비춰보았다.

“잘 어울리는군.”

카라트의 뒤에 서 있던 하크로딘 가 종장 플로브 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급귀족 손녀사위를 맞는다는 데 정신이 팔려버린 카이두 경은 둘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지 아닌지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럼 양가가 모두 이의가 없는 듯 하니......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조금 주도록 하고......오늘 바로 합방시키면 되겠군.”

카라트의 표정이 보일 듯 말듯 일그러들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이 남자가 자신을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둘이 결혼하는 것에 양쪽 가문의 이해가 일치한다면 그로서도, 이 남자로서도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문득 자신의 머릿속을 되짚어본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이 남자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는 데 꽤나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그럼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한마디를 남긴 플로브 경은 황황히 자리를 떠 버렸다. 겔 앞에 미리 세워두었던 말에 훌쩍 올라탄 그는 협로를 타고 절벽 위 연합군 사령부를 향해 말을 몰았다.

“쳇, 늦었네.”

샤자한 공이 제후들을 급히 불러모은 비밀회의시각이 이미 15분이나 넘어서 있었다.

“저년은 저것도 쌍판대기라고 달고 나왔나,”

말을 몰아가던 플로브 경이 베아트릭스를 떠올리며 혼자서 막말을 늘어놓았다.

“저 망할 간판만 아니면......제기랄, 카라트 녀석 아버지한텐 뭐라 말하지.”

밤새 뒤척거리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솔은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밖에 나와있었다. 절벽에 앉아 발장난을 치던 솔은 조금 전 카렐이 안아 준 어깨를 더듬으며 뜬금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지금 같아서는 비빈 중 한 명이 되든, 설사 그 위치까지 가지 못하든 간에, 최소한 앞으로 카렐의 곁에서 총애받으며 계속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허리에 찬 칼을 만지작거리던 솔은 인기척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더라?”

솔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총총걸음으로 뛰어가고 있는 앳된 젊은이의 얼굴은 어딘지 낯에 익었다. 페로 관에서 언젠가 보았던 그 얼굴을 떠올린 솔이 이마를 탁 쳤다.

“아아, 오르도 슈트란이구나.”

두 손에 웬 물통 같은 것 두 개를 들고 급히 뛰어가고 있는 사람은 보벤 경의 적장자이고 슈트란 가의 후계 2순위자인 오르도 슈트란이었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망토를 뒤집어 쓴, 세 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걷고있었다. 저 세 사람의 기척을 느껴보려 애쓰던 솔은 저들이 가디언 같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다.

“연합군에도 가디언이 있었나? 하긴, 페로 경께서 원래 여기 계시니......”

별 생각없이 고개를 돌리려던 솔은 그 셋 중 선두에 있는 누군가의 망토 사이로 잠시 보이던 짙은 청색의 가디언 팔찌와, 너무도 익숙한 눈빛을 순간적으로 잡아냈다. 한때 제롬에게 자신을 강간하라며 던져주었던 바로 그 배신자의 늑대같은 눈빛을.

“카......카인?”

평소같이 카렐의 숙소 앞을 말없이 지키던 카토는 연합군 숙영지 쪽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에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보벤 경의 적장자인 오르도는 뜬금없이 그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하께선 안에 계십니까?”

“주무십니다. 나중에 가문 윗분들께 허락 받고 오십시오.”

카토가 평소같은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는 기껏 최고제후 증손자인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마치 친구라도 찾아오듯 이곳에 갑자기 나타난 데 보란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32살인 오르도는 관직은 고사하고 콜로니 아카데미의 학부생 신분에 불과했다. 물론 가문에 전쟁이 벌어지면 참전하는 동부의 전통에 따라, 학교를 잠시 쉬고 가문 근위보병대에서 비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문 후계자인 보벤 경의 하나뿐인 성년 자식이고, 가문 후계서열 2위라는 그 지위 때문에 차마 일선에는 내보내지 못하고 후방에서 지원업무나 하는 정도였다.

“이게 가디언 주제에 건방지게.”

오르도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카토에게 쏘아붙였다. 그의 1차 임무는 이 녀석과 시비를 벌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위험한 임무에 오르도가 투입된 이유는 한가지였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가문 내 사람이라는 것과, 그리고 카렐을 죽이는 자에게 걸려있는 무려 3억 골드의 거금, 그리고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꿈에서 그려보았을 ‘신분상승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 때문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슈트란 가에서 후계서열 2위라고 그런데 뭐? 어른 말이 어쩌고 어째?”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시비를 거는 오르도 덕분에 카렐의 막사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카토와 함께 온 2명의 가디언들과, 이곳을 함께 지키던 십여명의 슈트란 가 근위병들 역시 갑자기 어색해진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의 시비에 카토는 얼굴을 찡그렸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쭈, 무시해?”

카토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자 오르도가 대뜸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려던 카토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낯선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냐!”

카토가 칼을 뽑아들며 뒤로 휙 돌아섰다. 그 때, 그의 눈앞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웬 놈이 확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

위에서 내리치는 그 강력한 양손검의 위력에 카토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카인!”

함께 온 2명의 가디언들에게도 역시 황금빛 팔찌의 웬 가디언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재빨리 물러난 오르도가 약간 떨어진 곳에 숨어있던 병사들에게 째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시작이다! 빨리 와! 놈이 깨서 나오기 전에!”

그의 명령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옆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굵은 철골을 끌어올린 병사들은 대뜸 막사의 문을 밖에서 틀어막아 버렸다. 이젠 천하의 등급없는 가디언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터였다. 세 명의 동부 병사들이 막사 주변에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화물질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런 썅! 이 동부 개새끼들!”

기선을 제압하고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카인의 칼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카토가 비명을 질렀다. 무려 3명의 동부 근위병들이 사방에서 창을 들고 그를 함께 위협하고 있었다. 원심력을 받아 카인이 왼쪽에서 힘껏 돌려친 칼을 가까스로 미끄러뜨린 카토는 갑자기 얼굴을 덮치는 뜨거운 기운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저, 전하!”

오르도가 던진 횃불이 옮겨 붙으면서 카렐의 막사가 검은 연기를 내고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판 카토의 정강이를 카인이 힘껏 걷어차면서 그는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썅!”

카인의 양손검 폼멜에 이마를 얻어맞은 카토가 피를 흩뿌리며 다시 뒤로 몇 발짝을 밀려났다. 하마터면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카토에게 카인이 칼을 치켜들고 마지막 돌격을 가해왔다.

“뒈져! 이 귀찮은 놈!”

아찔해진 카토는 불타기 시작한 막사와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카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렐의 호위가디언으로 결국 그를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처절하게 원망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운명을 기다리던 그는 조금 떨어진 절벽에서 필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쳐오는 카인의 칼을 막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았냐!”

거세게 내려치는 카인의 칼날을 자신의 어깨로 대신 받아낸 카토는 카인의 배를 향해 힘껏 칼을 내질렀다.

“아아악!”

왼쪽 어깨가 떨어져나간 카토는 공중에 피를 뿌리며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질렀던 칼은 카인의 배를 그대로 관통한 채 남아있었다. 카토를 떨어뜨린 카인은 배를 움켜쥐며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토는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밑 어둠 속으로 바위에 차례차례 부딪히며 온몸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를 남기며 멀어져갔다.

깊이 잠들었던 카렐이 눈을 뜬 건 밖에서 느껴져 온 수상쩍은 소음 때문이었다. 급히 무기벨트를 허리에 찬 카렐은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보고 난 후에야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밖에서 보이는 모습은 틀림없는 카인 녀석이었다.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나가려던 카렐은 문이 꼼짝도 하지 않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뭐, 뭐야!”

순간 솟구치는 뜨거운 열기에 카렐이 급히 뒷걸음질쳤다.

“문 열어! 문 열란 말이다!”

카렐이 손이 데는 것도 아랑곳없이 이미 뜨거워진 문짝을 힘껏 두들겼지만 바깥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뒤로 한참 물러난 카렐이 있는 힘껏 문을 들아받았지만 한쪽이 조금 찌그러들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카렐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엔간한 보통 문짝은 물론이고 심지어 타르서스 별궁의 보안문까지도 들이받아 부수어버리는 카렐의 힘에 이런 보통 막사의 문이 버틴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당했다.......”

혹시나 한 카렐은 일단 벽에라도 무작정 돌진해 들이받아보았지만 금속제 골조로 단단히 보강된 벽은 끄떡조차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넘실대며 번진 불은 어느새 천장까지 모두 점령해버린 후였다. 녹아내리기 시작한 천장에서 불꽃이 눈송이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썅!”

침대 프레임을 뜯어 손에 든 카렐은 창문을 있는 힘껏 휘둘러 때렸지만 프레임만이 ㄱ자로 휘어져버렸을 따름이었다.

카렐은 마지막으로 천장을 올려보았다. 보통의 막사이고, 카렐 정도의 점프력이라면, 어느정도의 화상을 각오하고 지붕을 부수고 뛰쳐나갈 수 있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장을 올려본 카렐은 천장이 녹으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거의 틈새가 없을 정도로 꽉 짜여진  거대한 금속제 골조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있던 곳이 보통의 막사가 아닌, 안의 사람을 잿가루로 만들어버리기 위한 거대한 금속상자임을 깨달았다.

“썅! 지독한 놈!”

카토의 칼에 찔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은 카인은 배에서 흐르는 피를 더듬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장을 갈갈이 찢어놓은 치명상이었지만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가디언의 피는 이 정도에 쓰러질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제기랄.”

칼을 짚고 몸을 일으킨 카인은 등뒤로 다가오는 또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옆에 함께 있던 슈트란 가 근위병이 깜짝 놀라며 창을 내질렀지만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한 팔로 창자루를 내리치며 몸을 반바퀴 휙 돌린 솔의 시미터는 그 근위병의 가슴을 뼛속까지 갈라냈다.

“이제야 만났구나!”

다른 근위병이 내지르는 창을 밟고 공중으로 뛰쳐오른 솔은 그 섣부른 근위병의 머리를 힘껏 내리찍어 두토막을 내어버렸다.

“하, 학......”

카인이 비틀거리며 칼을 치켜들었지만 이미 그의 두 팔은 힘이 반쯤 빠져나가 버린 상태였다. 솔의 목표가 누구인지는 말하나 마나였다. 힘을 잃은 카인의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이 썅년, 그래봤자 네년은 노리개감일 뿐이야.”

애써 큰소리를 치는 카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솔은 이 배신자에게 더 이상의 큰소리를 칠 시간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다 떠들었냐?”

서슴없이 카인에게 달려든 솔의 시미터가 카인의 칼과 부딪히면서 노란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솔의 참격을 가까스로 받아낸 카인이 비틀거리며 다시 중심을 잡았다. 상처입은 옆구리 때문에 칼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카인으로서는 힘껏 내휘두르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인의 칼이 공기를 갈랐지만 힘이 실린 위력적인 검풍이 아닌, 마지못해 휘두르는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 둔한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낸 솔은 눈 깜짝할 새 카인의 근거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같은 놈을 편하게 죽여줄 수밖에 없구나!”

카인이 순간 소매 속에서 빼든 단검이 솔의 윗가슴을 베고 지나가며 혈흔을 남겼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솔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른 채 그의 팔을 힘껏 내리찍었다. 잘려나간 카인의 팔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솔은 아랑곳없이 칼날을 위로 꺾었다.

“악!”

잘린 손목을 쥐고 비명을 지르려던 카인의 목은 하지만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위로 솟구친 솔의 칼은 카인의 강인한 턱뼈를 지나 그의 목을 정확히 갈랐다. 주인 페로를 배신하고, 가디언으로서 최악의 오명을 남겼던 이 배신자의 머리는 제대로 잘리지도 못한 채 그 반쯤이 남아 그 추악한 몸뚱아리에 그대로 붙어있었다.

“헉, 헉,”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죄고 멍 하니 선 솔은 그제서야 자신의 가슴을 타고 흐르고 있는 혈선을 발견했다. 바닥에는 카토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며 남긴 잘린 한쪽 팔이 그 처참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제롬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유린당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솔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특등급 가디언의 시체가 지금 그의 발 앞에 늘어져 있었다.

순간 얼굴을 화끈하게 하는 화기를 느낀 솔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카렐의 막사에 불을 놓고 있는 오르도와 십여명의 슈트란 가 근위병들, 뒤엉켜 싸우고 있는 두 가디언, 이미 죽어 시체가 되어있는 이쪽과 적 가디언 한 명씩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아직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썅! 이놈들!”

피묻은 칼을 다시 치켜든 솔이 오르도와 슈트란 가 병사들을 향해 미친 듯 내달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