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21화 (320/1,132)

< -- 321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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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걸려서야 약속장소인 샤자한 공의 막사 앞에 도착한 플로브 경은 허둥지둥 플랩을 걷고 안에 들어섰다. 퉁퉁 부은 얼굴의 최고제후 샤자한 공이 한참 늦게 들어온 플로브 경을 잠시 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가문 녀석 상견례에 참석하느라.......”

“베아트릭스인가 그년하고 하는 상견례 말인가.”

“아셨군요. 지금 한참 진행중입니다.”

플로브 경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보였다. 샤자한 공이 싸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됐군......오늘 합방까지 하는 건가?”

“뭐, 그래야겠죠.”

샤자한 공의 입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그 표정에 플로브 경은 물론이고 자리에 모인 상급제후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샤자한 공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밤, 3명이 죽음을 맞을 겁니다.”

“예에?”

황당한 표정의 제르베 경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미안하네, 플로브 경. 그 중 한 명은 자네 가문 사람이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할 입장이니 날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주게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4제후 나람 부인이 대뜸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제네르 하크로딘과 토로 로버넬, 그리고......가짜태자 카렐 리쿠가 오늘 저세상으로 가게 될 겁니다.”

“지......지금.......농담하시는 겁니까?”

플로브 경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부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남-서부 연합군은 와해되고 저희들끼리 싸우게 될 겁니다. 우린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고 우리들의 땅을 지켜내게 되었습니다.”

“태자전하를.......배신한다는 말씀이십니까?.......우리 동부가?”

충격을 받은 2제후 제르베 경이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 샤자한 공이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표현이 과격하시구려, 제르베 경. 배신이 아니고......가장 합리적인 길을 선택한 겁니다. 그리고 그자는 태자가 아니요. 그자는 주페 그 작자의 사생아이니 우리가 태자로 불러 줄 하등의 이유가 없소..”

샤자한 공이 내놓은 증거자료들을 바라보며 4명의 제후들은 턱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바쁘게 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결론을 내린 제르베 경이 탁자를 꽝 내리쳤다.

“지금 이게 배신이 아니고 뭡니까! 주페 태자라면 세나우스 2세 폐하의 제2태자셨으니 어차피 서열상 1번 제위 후계자라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제르베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청을 높였다. 새파랗게 젊은 제후의 언동에 얼굴을 찡그린 샤자한 공이 사뭇 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당장 자리에 앉으시오, 제르베 경.”

“아뇨!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배신 때문에 이미 두 번이나 제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던 우리가 또다시 배신을 한다뇨!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그것도 최고제후님 개인 감정 때문에......”

“앉으라니까!”

샤자한 공의 굵은 목소리가 순간 막사 안을 쩌렁 하고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젊은 제후는 꿈쩍도 않은 채 최고제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저희 양민 4천만을 학살했던 그 망할 남부 놈들하고 저희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그 말씀은 아니시겠죠?”

“250년이나 지난 일이야. 아직까지도 그 일을 붙들고있다니......종장으로서 좀 더 배워야겠군. 제르베 경.”

샤자한 공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이를 악문 제르베 경이 입고 온 망토를 홱 걷어들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문을 가로막고 있던 슈트란 가 근위병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이놈들이 감히 어딜!”

제르베 경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4제후 나람 부인, 그리고 이 둘을 따라온 가문 근위병들이 일제히 허리에 차고있던 칼을 뽑아들며 슈트란 가 병사들에게 겨누었다. 한술 더 떠 눌레딘 가에서 온 북부용병들은 한 손에 도끼를 뽑아 쥔 채 당장 머리를 다 깨부수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 나람 부인이 그들을 급히 가로막으며 샤자한 공을 노려보았다. 팽팽한 회의장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자리에 태연히 앉아있던 샤자한 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나가야 소용없소. 이미 때가 늦었으니.”

카라트와 마주앉은 채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머뭇거리던 베아트릭스는 갑자기 겔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 웅성대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빠져나온 베아트릭스는 종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절벽 윗쪽, 연합군 숙영지 조금 떨어진 한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의 외진 곳에서 어두운 하늘로 피어오르는 검은색의 매캐한 연기는 언뜻 보기에도 ‘화재’는 아닌 듯 싶어보였다. 누군가 기름에 불을 붙여 무언가를 태우는 모양이었다.

“뭐죠?”

“글쎄, 저긴 숙영지도 아닌데? 누가 뭐 태우나봐. 무슨 정신없는 놈이 저렇게 요란스럽게 태우지?”

“자료폐기하나보죠.”

누군가 옆에서 냉큼 끼어들었다.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 못 가 관심을 거둔 채 사방으로 흩어져버리고 있었다. 연기를 잠시 바라보던 베아트릭스 역시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고는 그대로 관심을 끊어버렸다. 한 번 한숨을 내쉰 베아트릭스는 별로 들어갈 맘이 내키지 않는 그 겔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일에 항상 지나친 열성을 보이는 연합기병대 사령관 토로 로버넬 경은 오늘도 이 늦은 시각까지 기병대 지휘관들을 모아놓고는 지나치리만큼 꼼꼼한 체크로 회의시간을 이미 한 시간 이상 넘겨버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숙소에서 쉬고있었을 지휘관들은 파김치가 되어버린 몸으로 이 열성적인 사령관의 질문에 가까스로 응대하고 있었다.

보통의 군복 차림인 다른 지휘관들과는 달리 이 ‘열성파 사령관’은 잠잘 때만 빼놓고는 항상 갑옷까지 몸에 두르고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까지 갖추고있는 꽤나 피곤한 사람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나머지는 내일 계속 보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휘관들은 내일도 ‘또’ 이 지경을 당해야 된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자료들을 챙겨들었다. 망토를 챙겨입고 그들과 함께 막사를 나선 토로 경은 시원한 저녁공기를 가슴깊이 들이키며 숙영지 바깥쪽, 멀찍이에 보이는 카렐의 숙소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엉?”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려던 토로 경은 큰 탱크 두개씩을 손에 들고 카렐의 숙소로 달려가고 있는 몇 명의 슈트란 가 근위병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목에 걸고있던 스코프를 눈에 끼고 그곳을 확대해 바라보던 토로 경의 눈은 근위병들이 손에 들고 달려가고 있는 인화물질 통에 순간 경악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쪽에 정신을 팔고있던 토로 경은 정작 자신의 뒤로 다가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것들이!.......”

큰 소리를 지르려던 토로 경은 누군가 자신의 등뒤를 덮치자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거의 동시에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 마찰음이 부근에 울려퍼졌다.

“어, 엇......”

토로 경을 뒤에서 덮쳤던 자객은 자신이 마음먹고 찌른 독을 바른 단검이 그의 갑옷에 미끄러져 버리자 잠시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전시도 아닌 때에 망토 밑에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입고 있으리라고는 그 역시 생각 못했던 모양이었다.

“네 이놈!”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든 토로 경이 뒤로 홱 돌아서며 달아나려는 자객의 등을 무지막지하게 내리찍어 두 토막으로 갈랐다. 순간 또 한 명의 자객이 뒤에서 토로 경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경비병! 경비병!”

버둥거리던 토로 경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평소 자리를 지키던 사령관 근위기병들은 오늘따라 어디 갔는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독이 묻은 단검을 치켜들며 목을 찌르려 하자 토로 경이 큰 기합소리와 함께 최대한 몸을 비틀며 등뒤에 매달렸던 자객을 앞으로 힘껏 동댕이쳐버렸다.

“이 죽일 놈!”

장검을 치켜든 토로 경은 바닥에 떨어진 자객의 가슴을 칼로 힘껏 내리찍었다. 몸을 거칠게 떨던 그 자객은 결국 힘없이 축 늘어지며 곧 숨이 끊어졌다.

“이, 익.”

손가락에서 가벼운 통증을 느낀 토로 경은 그제서야 단검에 베인 자신의 왼쪽 손가락 한쪽에서 약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에게 가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자신의 몸에도 독이 번져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고개를 휙 돌린 토로 경은 슈트란 가 근위병들이 건물에 인화물질을 끼얹으며 불을 붙이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또 한번 바라보았다.

“아, 안돼.....”

토로 경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려왔다.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든 그는 손에 낀 건틀렛울 벗고는 왼손을 땅바닥에 댄 채 이를 꽉 악물었다.

“에익!”

토로 경의 비명과 동시에 땅바닥에 박혀버린 단검과, 검게 변한 그의 손가락 두 개가 흙바닥에 굴렀다.

“전하! 전하!”

손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말에 뛰쳐오른 토로 경은 한 손에 창을 뽑아들며 카렐의 숙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슈트란 가가 또다시 배신을 했음은 단순한 그의 머리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상! 비상!”

목이 터져라 외치며 숙영지를 가로질러 말을 몰아가고 있는 토로 경을 따르는 병사는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 불이 붙은 카렐의 숙소에서는 이미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망할 동부 놈들아! 빨리 날 따라오란 말이다!”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의 두 눈에서는 분통함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객과 필사적으로 싸우고있을 그 시간, ‘최고제후의 직접명령 외 절대 이동금지’ 명령이 방송을 통해 떨어졌음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세 개 남은 왼손으로 더듬거리며 할룩스를 집어든 토로 경은 카렐의 코드를 눌렀지만 ‘존재하지 않는 코드’라는, 믿어지지 않는 답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획되어있었음이 확실했다.

잠시 절망에 빠졌던 토로 경은 지금 이 안에서 자신의 명령을 들을 단 한사람, 베아트릭스의 코드를 급히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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