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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22화 (321/1,132)

< -- 322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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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할룩스가 울리더군요.”

겔에 돌아온 베아트릭스에게 카라트가 그의 할룩스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발신코드가 토로 경의 것임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반신키를 누르고 잠시 기다렸지만 받지 않고 있었다.

“안 받는군요.”

할룩스를 다시 한쪽에 치워놓은 베아트릭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겔의 플랩을 걷고 들어온 카이두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무기고 옆에 방 꾸며놨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아트릭스와 카라트는 앞장서는 카이두를 따라 종가 한편의 호젓한 겔로 향했다. 멀리 절벽 위를 또다시 올려본 베아트릭스는 방금 전보다 검은 연기가 더 짙어졌음을 발견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이 사막에 산불로 번질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소각을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면 ‘때가되면’ 꺼질 것이 확실했다. 겔 안에 둘을 들여보낸 카이두는 외손녀에게 빙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 잘자라. 베아트릭스.”

“이 무엄한 놈들!”

말을 달려 온 토로 경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건 이미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궁지에 몰린 전사단 가디언과,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근위대 가디언이었다. 아군을 협공하고 있는 슈트란 가 근위보병들을 사방으로 흩어놓은 토로 경은 그 긴 장창을 적 가디언을 향해 겨누고 돌진했다. 그리고 기사단과의 협공에 이미 충분히 훈련된 전사단 가디언 역시 때맞춰 근위대원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죽어!”

토로 경의 창을 피하며 중심을 잃은 적 가디언에게 잔사단 가디언이 큰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기합소리와 함께 내지른 전사단 가디언의 칼끝은 상대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해 뒤로 거세게 빠져나왔다.

“악!”

버둥거리며 물러나는 적의 명치를 발로 걷어차며 동시에 칼을 뽑아낸 가디언은 비틀거리는 적의 머리를 힘껏 후려쳐 바닥에 떨구었다. 적을 쓰러뜨린 전사단 가디언은 탈진한 듯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기랄!”

가디언을 가까스로 쓰러뜨린 토로 경을 향해 창을 든 동부 근위병 몇 명이 다시 달려들어왔다. 그의 할룩스가 울리고 있었지만 그에게 몰려드는 동부 근위병들 때문에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보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악전고투하던 토로 경은 왼팔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몸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보병 하나를 창으로 쓰러뜨린 그는 혼비백산해 도망치던 두 명의 보병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아버렸다. 같은 시각, 막사 바로 앞에서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솔이 다섯 명이나 되는 적들을 상대로 홀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토로 경과 솔이 동부 병사들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는 와중에도 카렐이 갇혀있는 막사의 불길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빙 돌아 또 한번 돌진하는 토로 경을 향해 세 명의 보병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없이 무작정 돌진한 토로 경은 쥐고있던 창을 힘껏 내던져 다시 한 명의 보병을 쓰러뜨렸다.

“아욱!”

목을 창에 찔린 토로 경의 말이 순간 중심을 잃으며 흙먼지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말 등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토로 경은 흑인종 특유의 탄력으로 바닥을 몇 바퀴 구르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아느냐!”

악을 쓰며 으르렁거리는 토로 경의 칼에 보병 한 명의 창이 그 주인의 몸통과 함께 조각나 날아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보병은 슬슬 뒷걸음치더니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녀석을 쫓으려던 토로 경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5기의 동부 근위기병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가 막을 테니 빨리 전하부터 구해 피하십시오!”

다친 몸을 가까스로 일으킨 전사단 가디언이 양손검을 움켜쥐며 그들 기병들의 앞을 홀로 막아섰다.

“썅! 다 죽여주마!”

막사를 향해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던 토로 경의 앞에는 막사에 불을 놓던 오르도와, 솔의 손에 2명으로 줄어버린 동부 병사들이 있었다. 뻗치는 기세에 이 백전노장을 향해 무작정 칼을 내질렀던 이 오르도의 수작은 차라리 만용에 가까웠다. 목을 향해 내질러오는 그의 칼은 토로 경의 장검에 미끄러지며 옆으로 어처구니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죽어! 이 씨발 새끼!”

분노에 찬 토로 경의 참격이 이 젊은이의 목을 내리찍어 상체를 대각선으로 갈라 내려갔다.

“악!”

가문 계승서열 2인자이며 후계자 보벤 경의 적장자인 32세의 이 젊은이는 그 무모함과 욕심의 대가를 이 끔찍한 비명으로 대신 갚을 수밖에 없었다. 두 토막난 그의 시체는 쏟아지는 내장과 함께 마른 사막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바닥에 굴렀다. 그리고 동시에, 솔의 칼에 마지막 한 병사의 목이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전하! 나오십시오! 빨리요!”

불길에 서슴없이 뛰어든 토로 경은 문을 막고있는 굵은 철골을 힘껏 들어내 바닥에 동댕이쳐 버렸다. 뜨거운 불길에 갑옷 밖으로 드러난 머리카락과 얼굴, 목의 피부가 타들어갔지만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전하!”

문을 힘껏 열어젖힌 토로 경이 발견한 건 검은 연기 속에서 질식해 쓰러져있는 카렐의 모습이었다.

“전하! 전하! 일어나십시오!”

막사 안에 뛰쳐든 토로 경은 희미한 숨을 몰아쉬며 꿈틀대고 있는 카렐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밖으로 끌어냈다.

“카렐 님! 괜찮으세요?”

솔이 헐떡거리고 있는 카렐을 와락 껴안고 일으켜 세웠다. 호흡곤란으로 서 있을 기운조차 없는 카렐은 솔의 어깨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카, 카토는?”

밖으로 빠져나온 카렐이 타들어간 기도를 울려 가까스로 내뱉은 말에 솔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뒤에서 들려온 큰 비명소리에 솔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기병들을 홀로 막고 있던 전사단 가디언이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투창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놈들이 달아난다!”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한 슈트란 가 근위기병들이 토로 경과, 카렐, 솔을 향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미로 거의 수십기의 기병들과 보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달아나야 됩니다! 빨리요!”

비틀거리는 카렐을 함께 부축한 토로 경과 솔은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해 지난번 베아트릭스가 적 장갑보병들의 후미를 기습할 때 올라왔던 바위투성이의 험한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들 뒤를 쫓아온 근위기병들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도보로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헉, 헉......”

비틀거리며 협로에 주저앉은 토로 경이 왼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온몸으로 번져가는 독은 이미 그의 다리 힘까지 빼앗아버린 후였다.

“빨리 따라오세요!”

뒤를 돌아본 솔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토로 경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울림으로만 들어올 뿐이었다. 토로 경은 오른손으로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솔의 목을 붙들고 가까스로 서 있던 카렐이 문득 고개를 돌려 이 충신의 흐려져가는 눈빛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 묻힌 그의 검은빛 얼굴에는 이미 붉게 변해버린 눈과 가늘게 떨리고 있는 유난히 도톰한 입술만이 보일 뿐이었다.

“전하, 가십시오. 빨리......”

“토로 경, 안되네......”

검댕이 투성이가 되어버린 카렐의 얼굴을 타고 검은빛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안돼, 안돼,”

카렐이 더러워진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한 손에 칼을 쥔 토로 경이 뒤로 휙 돌아서며 좁은 샛길을 타고 일행을 쫓아오고 있는 동부 근위병들의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선두에 오던 근위병의 어깨를 단 한 합에 두동강내며 토로 경이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슈로 기사단장이던 토로 경이다! 이놈들아!”

다른 동부 기병이 뒤이어 달려들어 그의 가슴에 창을 푹 꽂아 넣었지만 광기어린 눈을 부릅뜬 토로 경은 가슴을 찌른 창마저도 잘라내 버리며 또 한번 힘껏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눈이 흐려져 가던 그의 칼은 공중을 의미 없이 헛돌았을 뿐이었다.

“내가 기병 4백으로 황궁에 돌진했던 그 토로 로버넬이란 말이다!”

비틀거리며 정신나간 듯 칼을 휘둘러오는 그의 최후의 발악에 동부 근위병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너까짓 것들 무서워할 줄 아느냐!”

순간 휘청거리던 그의 가슴과 배를 또 다른 창이 꿰뚫었지만 그는 창을 한손에 움켜쥐며 힘껏 목청을 높였다.

“난.......황상의 신하란 말이다......”

거친 포효를 토해내던 그의 목을 또 하나의 창이 관통하며 지나갔다. 그와 함께 잠시 부르르 떨리던 이 건장한 북부 전사의 몸은 거친 탈라스의 사막 바위 위에 결국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난.....폐하의 신하란 말이다......”

피로 가득 차버린 그의 목구멍에서는 자신과, 그리고 멀리 있는 카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마지막 신음소리가 얕게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탈라스의 누런 사막모래 사이로 스며들었다.

반쯤 뜬 그의 검은 눈동자는 샛길을 내려가고 있는 카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후와 북부를 구하려다 실패한 130년 전의 결사대는 그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지만 이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전사단 병부대신 토로 로버넬 경은 입가에 품은 미소와 함께 너무도 만족스러운 마지막 호흡을 내쉬었다.

“토......토로 경.......토로 경!”

솔의 어깨에 기대 샛길을 내려가던 카렐이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저, 저놈들을 사지를 저며서 씹어먹어줄 테다! 갈갈이 찢어죽여줄 테다! 내가 네놈들을 고이 살려둘 것 같느냐!”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제발”

솔이 카렐을 꽉 껴안았다. 어두운 하늘을 올려보며 울부짖는 카렐의 눈물젖은 회색빛 눈동자에는 살기를 뛰어넘어 뼛속깊이 쓰며드는 광기마저도 어리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무너질 줄 알았냐......내 반드시 황제가 되어 저놈들을 모조리 갈아 마셔 줄 테다.”

거친 쇳소리 같은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이를 가는 소리에 함께 도망치는 솔의 등골을 타고 순간 차가운 한기가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넘어져 깨진 무릎으로 더듬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카렐의 눈빛은 제정신인 사람의 그것이 결코 아니었다. 검댕이와 눈물로 어느새 범벅이 되어버린 눈을 치켜뜨며 카렐이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내 반드시 황제가 되어......저놈들을......”

바위에 걸쳐진 토로 경의 시체를 짓밟으며 몰려오는 동부 근위병들의 고함소리가 여전히 이 둘의 뒤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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