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30화 (329/1,132)

< -- 330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

.

.

동부연합군 쪽에서 들려온 심상치 않은 소식을 샤드니가 접한 건 슈카른 계곡 시간으로 16일 아침, 서부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키타이 사막 시간으로는 15일 자정에 가까워진 때였다.

“2제후 트라티누스 가와 4제후 눌레딘 가가 태자가 있는 나지크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배치변경으로 보기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석연치 않다니?”

하지즈 장군의 보고에 샤드니는 물론이고 라바니 경과 사르키스까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동이 있기 직전 숙영지 부근에서 화재와 함께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소동이라는 정보도 있고 크지 않은 교전이 있었다는 소식도 있고......아직은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할 듯 합니다. 게다가 이동과 동시에 두 가문 군대에 ‘가문 지휘관의 명령만 따르라’는 특별한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니 무언가 수상쩍지 않습니까?”

“내분이라도 생겼나.”

라바니 경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자 사르키스가 냉큼 받았다.

“우리로선 다행이군요.”

“다행은 얼어죽을 다행. 놈들이 무너지는 즉시 남부하고 한판 붙어야 하는데?”

라바니 경이 조카의 철없는 대답에 냉큼 쏘아붙이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르키스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자료를 더 뒤적거린 하지즈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더 놀라운 소식인데......슈트란 종가가 있는 요동에서 샤자한 공이 태자를 배신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위는 확인되지 않지만 제네르 하크로딘과 아메스 자이센이 슈트란 종가에서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지금 요동의 민심이 심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종가 앞에서 사실을 밝히라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는 소문도 있고.....”

“뭐라고!”

샤드니의 큰 목소리에 나머지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라바니 경은 이 대담무쌍한 최고제후의 손끝이 무슨 이유엔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고개를 휙 돌린 샤드니가 라바니 경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경은 남부제후군 분위기 파악에 최대한 주력하도록 하시오. 플라칼 가 군대와 맞닿아있는 곳 숙영지 병력을 당장 기지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그쪽 숙영지는 잡비품 창고로 전용하도록 하시오. 사르키스 경은 양측 숙영지 경계초소 검문을 특히 강화하도록 하고. 공무가 없는 남부 병사들의 우리측 숙영지 출입을 봉쇄하도록.”

“알겠습니다.”

느닷없는 명령에 사르키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라바니 경은 그의 명령 역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 불만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냥 소문일 뿐인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아닙니까? 샤자한 공이 카렐 녀석을 배신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래서 득될 게 뭐 있다고.”

눈치빠른 라바니 경은 저 기생오래비같은 꼴보기 싫은 새 최고제후가 한낱 소문 따위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가벼운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런 그가 저런 얼토당토않은 소식에 깜짝 놀랄 정도라면 녀석이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정보를 이미 갖고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경은 쓸데없는 데 사족 달지 말고 요동 쪽 소문의 진위여부를 당장 확인해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지크쪽 분위기는......이쪽 분위기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회의를 끝내고 아랫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샤드니는 사령관실에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샤자한 공이 카렐의 생부를 알게 되는 상황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부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배신할 수 있는 인물임을 잘 알고있었다.

220년 전의 그는 서부가 기습진공의 선두에 설 것이라는, 그리고 오르마즈가 새 북부 최고제후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페 태자를 팔아넘길 것을 종용한 당사자였다. 130년 전에는 근위대에 승전을 거둔 오르마즈가 결국 제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근위대의 공작에 속아 북부에 5만의 기병을 파견하기로 한 세네피스 황후와의 약속을 저버렸던 인물이었다.

샤자한 공은 신중하고 머리가 빠른 인물임에 틀림없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고 의심과 걱정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보니 제국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그의 ‘배신행각’이 빠짐없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이번에 또 한번 그랬다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썩을 근위대 놈들,”

샤자한 공의 배신이 사실이라면 남부는 그 대가로 서부연합군을 공격할 것을 약속했음에 틀림없었다. 막막한 상황에 그로서는 이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현명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런 때 샤드니가 믿고 의지하던 코리온은 지금 모든 정보가 차단당한 채 기지 한쪽의 숙소에 연금상태로 있었다.

“학장님께 여쭤볼 수도 없고.......”

샤드니가 머리털을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갇혀 지내는 코리온이 지금 가질 수 있는 바깥 정보래야 하늘을 보고 그날 당일의 날씨를 짐작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샤드니는 그 이상의 소식을 전해줄 생각조차 전혀 없었다.

“슬슬 일전을 준비하는 밖에.”

마지못해 결정을 내린 샤드니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슈카른 계곡에 주둔하고 있던 동부연합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숙영지에 착륙하는 근위대 셔틀과, 그곳에서 내려선 베흔과 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소동’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장교들과 병사들이 무섭게 술렁이고 있는 가운데 사령부 막사에서 나온 피곤한 얼굴의 샤자한 공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근위대장의 뻣뻣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제롬과 베흔을 동반한 샤자한 공은 연합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집결해있는 큰 막사에 들어서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제 이곳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여러 제장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샤자한 공의 목소리에 지휘관들의 표정은 더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그간 태자를 자칭해온 카렐 카파키 리쿠는 지금 이곳을 공격하고 있는 서부와 비밀협상을 시도해왔다. 동부 최고제후인 나 샤자한 슈트란은 그자가 가증스럽게도 그간 자신을 위해 피흘려 온 동부를 버리고 서부와 손잡으려 함을 알아냈고, 어젯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제 그 자와, 그 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우리 동부의 공적(公敵)으로 선언하며, 이곳에 있는 근위대, 남부제후군과 연합해 서부제후군을 몰아내는 이 신성한 전쟁에 동참할 것을 명령한다. 당장 출전준비를 갖추도록 한다!”

목소리를 높이던 샤자한 공은 카렐이 태자가 아닌, 주페의 사생아라는 그 사실만은 아직 알리지 않았다. 그 사실은 서부를 꺾어 재기불능을 만들어놓은 후에나 밝혀야 할 일이었다. 섣불리 지금 모든 것을 밝혀버린다면, 자칫 서부가 카렐 쪽으로 돌아버리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샤자한 슈트란 각하.”

웅성대기 시작한 지휘관들 앞에서 샤자한 공에게 공손히 감사의 인사를 올린 베흔은 그와 어깨를 마주하고 막사를 나가버렸다.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최고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부의 지휘관들은 더 큰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카렐이 정말로 동부를 배신하려 했는지, 그랬다면 같은 동부인 2제후와 4제후는 왜 도망쳤는지,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이곳 탈라스의 주인인 바툴 가가 아침에 이곳을 감쪽같이 떠버린 이유가 도저히 설명되지를 않았다. 이들 중 생각 있는 몇은 또 한번 밥그릇 싸움이라는 ‘덫’에 걸려든 샤자한 공이 태자를 배신했음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뭣들 하나! 최고제후님의 명령을 듣지 못했나! 당장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출정준비를 갖춰라!”

각 가문 제후들의 재촉에 그들은 허둥지둥 각자의 부대로 흩어지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딜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라는 것인지조차 헛갈리고 있는 이들의 혼란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썩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겠군요.”

함께 걷던 베흔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샤자한 공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셋 중 하나밖에 없애지 못했고......무려 세 개의 가문이 이탈해버렸으니......뭐니뭐니해도 페로 경이 등돌린 것이 가장 치명적인 것 같소이다.”

샤자한 공은 베흔이 ‘페로가 등을 돌렸다’는 말에 특별히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잘 알고있었다. 그의 눈치를 힐끔 살핀 제롬이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협상조건 조정이 필요할 듯 싶은데......”

샤자한 공이 이를 악물었다. 배신 직전까지의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지만. 이제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접어든 이상 칼자루는 베흔의 손에 쥐여있었다. 배신의 그 달콤한 유혹에 걸려든 자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운명임을 너무나 잘 아는 샤자한 공이었지만 이번에 또다시 그 덫에 물려든 셈이었다.

“망할 제네르 그년.....”

샤자한 공은 카렐을 놓친 것보다 베흔과의 거래에서 히든카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아메스를 놓친 것을 지금 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페로마저도 놓쳐버린 이상, 이제 그는 자신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선택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제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로 경을 버리신다면 저희도 꽤 짭짤하게 답례해드리죠.”

“......내 장손자 보벤 녀석을 새 총리로 삼아주시오.”

샤자한 공의 ‘대안’에 베흔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보벤 경도 제법 똘똘한 녀석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감히 페로에 대적할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베흔으로서는 이 기회에 페로와 동부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성과까지 거두어낸 셈이었다.

“관직경력이 일천하여 조금 어려운 듯 한데......”

“한때 타르서스 지방장관 후보로까지 올랐던 녀석이요. 그 정도 자질은 충분할 거요.”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당장 출정을 서두르시죠. 제가 직접 선봉에 서죠. 제롬 공께서도 함께 하실 겁니다. 플라칼 가도 모두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서부와 그 정신병자 학장을 끝장낼 일만 남았습니다.”

피식 웃음지은 베흔은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오랜만에 ‘몸 풀 기회’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아침을 울리는 요란스런 출정나팔소리와 함께 그 유명한 동부기병들이 새로운 동맹과 함께 새로운 적을 향해 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