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3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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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시간에 다급한 표정의 라바니 경이 샤드니에게 가지고 온 정보는 그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요동의 소문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나지크에 주둔하던 카렐의 직속병력들이 트라티누스 가, 눌레딘 가, 바툴 가와 함께 어디론가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부 근위병들 손에 토로 로버넬 녀석이 참살당했고......”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샤드니는 플라칼 가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쪽 숙영지쪽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임에도 휘황한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전군 1급 비상대기 선포한다. 움직일 수 있는 부상병까지 모두 동원하고 수송선도 만일을 대비해 대기상태에 두도록. 그리고.......학장님 숙소 부근에도 셔틀을 대기시켜 둬라. 행여 교전이 벌어지면 그 즉시 이곳을 떠나 수베르 행성계의 우리 가문 별장으로 모시도록 해라.”
“무슨 일이냐.”
읽은 책을 또다시 읽는 데 소일하고 있던 코리온은 갑자기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던 라스가 숙소 문을 열고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군인들이......막 뛰어다니고 있는데요.”
“서쪽 통제소 지붕에 무슨 깃발이 걸려있을 것이다. 무슨 색깔이냐?”
코리온의 물음에 눈을 바싹 찡그린 라스가 그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음......뭐냐......잘 안 보이는데요......빨간색 같습니다.”
“정말이냐!”
코리온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라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코리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앞뒤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1급 비상대기로구나......일이 생긴 모양이다......”
숙소 밖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코리온이 얼른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숙소를 둘러싸고 있는 2중의 철망 사이로 플레렌 가 소속의 스페이스형 셔틀 한 대가 내려서고 있었다. 셔틀 안에서 달려나온 두 명의 용병들이 문을 열어놓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에 코리온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라스. 짐을 싸라.”
“예?”
“이곳에서 나갈 때가 된 것 같구나.”
입고있던 머플러와 무명포를 끌러놓은 코리온은 자신의 소소한 물건들과 옷가지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남부에서 카렐이 사주었던---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검은 비단튜닉으로 갈아입은 코리온은 가방을 닫으려다가 멈칫 했다. 가방 문 한쪽에 지난번 카렐이 자신에게 선물했던 단검이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코리온은 단검을 조심스럽게 집어 허리춤에 깊이 감추었다.
명령대로 아침부터 영내대기중이던 히르직스는 자정이 가까와졌을 시각에야 헤즈 경으로부터 지시를 하달받을 수 있었다. 그의 명령대로 4천여 1기사단을 이끌고 숙영지 남문을 빠져나간 히르직스는 불이 훤하게 켜져있는 양측 숙영지와 서부연합군 기지에서 몰려나오고 있는 꽤 많은 낙타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뭔가 찜찜한데요.”
부장의 말에 히르직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서부 낙타병들의 모습과, ‘이제 더 이상 샤드니의 명령을 듣지 말라’는 헤즈의 지시로 보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렵게 조직된 남-서부 연합군은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단 한번의 전투만을 그 결과로 남긴 채 이대로 와해되어버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토로 로버넬 경이 죽었다는 얘기 들으셨습니까?”
부장의 질문에 히르직스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자신의 배신 이후로 죽일놈 살릴놈 하며 지내온 사이였지만 그 용맹하던 옛 대장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당했다는 건 그로서도 믿고싶지 않을 정도였다. 미운 정도 정인지 그는 자신에게 ‘배신자 놈’하고 악을 쓰며 달려들던 지난 전투에서의 토로 경의 모습이 갑자기 그리워지고 있었다.
“릴라크 경께서는 북문 쪽에서 2기사단을 이끌고 대기중이시랍니다. 3기사단은 서문 쪽에서 예비대로 대기중입니다.”
“알았다.”
언덕배기 하나 없는 키타이 사막 한중간의 넓은 평지에 자리잡은 연합군 기지는 동쪽의 서부연합군, 서쪽의 남부연합군이 각각 자리잡고 있었고, 그 중간에 기껏 2스타디아 정도 폭의 ‘중립지대’가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서부연합군을 마주하고 있는 동문 쪽으로 남부 중장보병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엷은 대오를 형성하고 있었고, 맞은편 서부에서도 최정예 장갑보병들이 이들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비밀을 강조했건만, 서부의 대응은 생각 외로 신속했다.
“이런 싸움에서는 우리가 많이 불리할 텐데.”
히르직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수성전도 아닌, 보병들이 기지를 놓고 싸울 난전에서는 조직적인 대오를 이루어 싸우도록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둔중한 남부 중장보병들이 빠르고 1대1전투에 능한 저들 베테랑 장갑보병들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할 플라칼 가의 경보병대는 지난 마랄루의 결전에서 네피가 이끌던 에키트 보병대에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터였다.
“낙타병들도 그렇고.....”
히르직스가 쥐고있던 창을 똑똑 두들겼다. 중장기병대와 낙타병부대와의 이런 식의 정면대결은 기병대쪽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중장기병들이 비록 귀족 출신들이기는 했지만 무려 1만 기나 되는 서부 낙타병들은 평민출신 베테랑 보병들 중에서 싸움 잘 하는 놈들만 특별히 추려서 뽑은 용사들이었고, 무장상태 또한 남부 중장기병들보다 월등하게 우수했다. 보병들이 기지 내에서 난전을 벌일 동안 외부에서 기병들이 저 골치 아픈 낙타병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보병보다 먼저 기병대가 작살나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헤즈 저 인간 무슨 생각으로 이러지?”
히르직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기지 안쪽을 바라보았다. 헤즈가 병사들을 엄청나게 아끼는 자애로운 지휘관이 아닌 건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보병 기병 모두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 뻔한 싸움을 하겠다고 생각 없이 덤빌 흡혈귀도 결코 아니었다.
“경기병단이 나오는군요.”
부장의 목소리에 남문쪽을 바라본 히르직스는 4열로 대오를 맞추어 몰려나오고 있는 경기병들의 모습에 시선을 맞추었다.
“보기 영 안좋군.”
한때나마 자신의 부하였던 그들을 바라보며 히르직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전 이래 보이지는 않지만 꽤 많은 전공을 세워온 저들 경기병들은 그 공훈에 걸맞는 대우는 고사하고 매번 ‘소모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번 전투에서 샤드니의 무리한 사수명령으로 적 궁기병대에 거의 전멸의 위기까지 갔던 저들은 부상병까지 모두 합쳐도 고작 2천8백기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베아트릭스의 손에서 몇십년간 정성껏 키워져 동부기병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아니 어떤 면으로는 그보다 더 나은 훌륭한 기량을 보이던 저들은 이제 사기마저도 극도로 침체된 채 또다시 전장에 밀려나오고 있었다.
“녀석들 표정이 별로 안좋은데요?”
경기병들의 선두에서 오고 있는 루코프 플라칼 장군의 표정은 뭣 씹은 듯 잔뜩 굳어 있었다. 오늘도 이전과 다름없이 ‘소모품 노릇’을 지시받은 모양이었다. 일단 경기병들 쪽에서 관심을 끊은 히르직스는 다시 서부 낙타병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 나지크에서 입었던 ‘초’ 중무장을 벗고 평소같은 수준의 무장으로 돌아온 저들은 이번엔 중장기병과의 싸움을 제대로 맘먹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저녀석들......”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는 낙타병들의 머릿수에 히르직스가 얼굴을 다시 찡그렸다. 대강 어림해보아도 지금까지 나온 녀석들만 4천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제대로 저항한번 못해보고 기사단 전체가 산산조각나 버릴 판이었다. 보다못한 히르직스가 헤즈 사령관을 찾았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놈들 머릿수를 보십시오, 저놈들을 어떻게 다 상대합니까. 우리가 무슨 동부기병들도 아니고.......”
히르직스의 볼멘소리에 갑자기 피식 웃음지은 헤즈가 마치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럼 동부기병 한 무더기 보내줄까?”
순간 히르직스의 귀청을 때린 날카로운 경보음은 ‘적’의 공습을 알리는 신호였다. 깜짝 놀란 히르직스는 급히 공중을 올려보았다.
키타이 사막에 상륙한 동부연합군들은 자신들의 선두에 샤자한 공과 나란히 서 있는 두 명의 무사들에게 잔뜩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멀리서도 구분이 확 될 정도로 휘황하게 번쩍이는 금빛 갑주를 차려입은 거구의 무사는 델루지 가의 문장이기도 한 주작이 화려하게 수놓인 보랏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가 이 자리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을 남부 최고제후 제롬 델루지 공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50기의 델루지 가 근위기병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사막의 밤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옆에 있는 다른 무사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전장의 공기를 마시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군.”
“이젠 최고제후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계시니 전처럼 걸핏하면 선봉에 나서지 마시고......”
“하여간, 잔소리 하나는......어머니가 안 계시니 이번엔 자네가 잔소리인가?”
전투 시작 전부터 제롬에게 한소리 듣고 있는 은빛 경갑주 차림의 날렵한 가디언 전사는 누가 보아도 감탄하고도 남을 훌륭한 외모의 순백색 말에 올라타 있었다.
“그런데, 이 말 정말로 안 팔 텐가? 내 돈은 충분히......”
제롬 공이 그 아름다운 말을 앞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요, 근위대 재산 무단매각은.......”
“하여간, 까탈스럽기는......”
제롬이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에 베흔이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 3대 명마 중에 한 놈인데 제가 어떻게 맘대로 팝니까. 그나마 ‘절영’까지 죽어 없어진 판에.”
눈웃음을 지은 베흔은 겨드랑이에 창을 끼며 이 하얗고 매끈한 말 목을 쓰다듬었다. 샤자한 공과 함께 서 있던 플로브 경 역시 베흔의 이 말을 꽤나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황비전’ 이군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인 베흔은 이 매력적인 암말의 흰 갈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척설오추’와 함께 탈라스산 말 중 가히 최고로 꼽히는 이 백마 비전(飛電)은 그 이름이 뜻하듯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제국에 명성이 자자했다. 지난번 마랄루에서 탈라스 궁기병대를 떨궈내지 못하고 한바탕 곤욕을 치렀던 베흔은 이번에는 ‘제국에서 가장 빠른 말’로 맘먹고 무장하고 나온 차였다. 하지만 한때 아버지가 타던 이 명마를 2차 혼란기 직후 근위대에 빼앗겼던 당사자인 샤자한 공은 뚱한 얼굴로 애써 그쪽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이제 똑똑하신 서부분들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한번 기대해볼까.”
베흔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유명한 동부기병을 결국 자신의 밑에 부리게 된 베흔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중장기병 4천과 경기병 6천, 유목민 경기병 1만, 그리고 그다지 미덥다고 할 수는 없는 동부 보병 2만을 데리고 키타이 사막의 서부연합군 외곽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베흔과 제롬 공, 샤자한 공은 사상 처음으로 3명의 최고제후들이 모두 한자리에---명목상 공석인 북부를 제외하면--- 모이게 된 이번 전투에서 어떤 결과를 낼 수 있을지 잔뜩 기대에 들떠 있었다.
“인접한 플라칼 가에서 자기와이어를 작동할 테니 적군은 셔틀이나 수송선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목민 경기병 1만은 적 후방 일대에 산개해 육로로 달아나는 적병을 잡는다. 특히.....샤드니 그놈이 리쿠 학장을 제일먼저 탈출시키려 할 것이니 그놈을 반드시 잡아내라! 놈을 잡아내는 용사에게는 탈라스 말 50필을, 그 부족에게 100만 골드의 큰 상금이 따를 것이다.”
샤자한 공의 약속에 유목민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며 큰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각 부족장들의 지시에 따라 이들 거친 유목민들은 말을 달려서, 혹은 병력수송셔틀에 실려 공중퇴로가 막혀버린 서부연합군 기지를 에워싸며 흩어져갔다.
“구디엔 경은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돌격하고 플로브 경은 보병대를 이끌고 최대한 빨리 따라오시오.”
동부연합군의 새 기병사령관이 된 5제후 구디엔 카나 경이 돌격깃발을 치켜들며 손짓하자 1만의 그 유명한 동부기병들이 일제히 창을 앞으로 기울이며 사막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남부기병들과는 수준부터 틀린 그들의 살기어린 위용에 제롬이 혀를 내둘렀다.
“저놈들하고 그간 상대해왔다니, 플라칼 가 놈들 제대로 칭찬해줘야겠는걸.”
“돌격!”
사막의 밤공기를 가르며 그 대규모 기병대가 어둠 속에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서부연합군 키타이 기지를 향해 땅을 새카맣게 뒤덮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베흔과 제롬, 그를 따르는 델루지 가 근위기병들 역시 동부기병들과 함께 돌진해 들어가면서 샤드니의 서부연합군은 탈라스 원정 이래 최대의 위기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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