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5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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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도 무장이셨수?”
릴라크가 북쪽 낙타병부대와 함께 나와있던 라바니 경에게 들으라는 듯이 놀림을 퍼붓고 있었다. 제국의 손꼽히는 백전노장으로 풋내나는 젊은 무장에게 놀림을 당하고 만 라바니 경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창을 쥐고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기병들의 자살공격으로 시간을 번 히르직스의 남쪽과 달리 이쪽은 2, 3기사단까지 합쳐 무려 7천 5백에 달하는 숫자의 우위를 앞세워 4천여 낙타병부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망할 년! 네년 혀를 뽑아주마!”
“입이 험하시네요? 설마 침실에서 세나우스 2세 폐하께도 그랬던 건 아니겠죠?”
라바니 경을 교묘하게 안쪽으로 끌어들이며 릴라크가 계속 그의 부아를 긁어댔다. 하지만 라바니 경도 그렇게 쉽사리 도발될 정도로 서툰 무장은 결코 아니었다. 양 진영 중앙에서 맞붙은 둘은 날카로운 창 공격을 주고받으며 계속 시간을 끌고 있었다. 라바니 경은 ‘천하의 풋내기’로 여겼던 저 망할 계집의 놀랄만한 빠르기에 놀라고 있었고 릴라크 역시 ‘퇴물 무장’으로 여겼던 라바니 경의 힘있고 노련한 공격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시간은 릴라크의 편이었다.
“제기랄!”
릴라크와의 의미없는 싸움을 급히 접고 돌아온 라바니 경에게 부장이 큰 소리로 알렸다.
“참모장님! 동부기병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중장기병 4천에 경기병 6천이나 됩니다! 그 후방엔 보병 2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썅!”
라바니 경이 이를 악물었다. 퇴각조차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서 동부기병들은 그들에게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각하께서 직접 가신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50명의 결사대 지원자들을 데려온 사르키스가 바닥에 엎드리며 힘있게 말했다.
“내가 안 가면 누가 뒤를 따르겠는가.”
코리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샤드니는 입고있던 중갑주까지 벗어놓고 장갑보병들이 입는 가벼운 갑주로 이미 갈아입으려던 차였다.
“안됩니다. 어떤 식으로 오르셨든, 각하께선 지금 서부 최고제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노려보는 사르키스의 매서운 눈길에 샤드니가 순간 움찔했다.
“저분을 막아라!”
사르키스의 명령과 동시에 그의 양옆을 지키던 장갑보병 두 명이 악 소리와 함께 샤드니에게 달려들여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런 상황에 샤드니의 곁을 지키던 근위보병들이 대뜸 할버드를 치켜들었다. 서부 최고지휘부 내의 이 내분 아닌 내분에 반사적으로 무기를 치켜들었지만 그들도 사르키스가 샤드니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명령이다! 비키지 않고 뭐하나!”
두 명의 병사들에게 짓눌린 채 악을 쓰고 버둥거리는 샤드니를 내려보며 사르키스는 장갑보병 갑주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령관 각하께서 그곳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하신다면 누가 퇴각을 지휘하며 그 뒤의 서부는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제가 가서......적 시설을 파괴하겠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주페 태자 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이번엔 제가 학장님과 서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주페 태자’라는 말에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진 샤드니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칼을 뽑아들고 휙 돌아서며 사르키스가 뒤따라온 결사대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남측 쓰레기장 부근에 빈틈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 움직인다. 동부기병들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칼을 치켜든 사르키스를 따라 위장포를 걸친 50여명의 장갑보병들이 기병들끼리의 싸움이 한창인 적 숙영지 남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양손검, 혹은 할버드 같은 위력적인 중량무기들로 무장한 이들은 기병들의 전장과 보병들의 전장 사이, 군데군데 쓰레기와 보급품 박스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쓰레기장 모래언덕 틈새에 몸을 숨기고 바삐 전진해 들어갔다.
벽에 바싹 달라붙은 이들 정예 결사대원들은 플라칼 가 기지 남동쪽에 있을 자기와이어 발생장치를 향해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히르직스가 이끄는 남부 기사단들과 하지즈 장군이 이끄는 낙타병부대와의 피말리는 난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타병부대와 보병대 모두는 결사대원들이 적들의 관심을 받지 않은 채 적진 내에 침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춰 최대한의 일제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넓지 않은 폭의 ‘완충지대’를 통과해 플라칼 가 기지 남문에 접근해간 사르키스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삼십여명의 적 중장보병들과 5기의 기병을 가리키며 병사들 중 몇에게 지시를 내렸다. 남부 병사들은 멀찍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병들끼리의 대결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시킨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아악!”
사르키스의 명령을 받은 5명의 장갑보병들이 큰 함성과 함께 남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느닷없는 기습에 깜짝 놀란 남부 보병들이 대오를 짜기 위해 문 중앙으로 모여들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머지 40여명의 보병들이 그 틈새로 일제히 돌격해 들어갔다. 사르키스가 바로 뒤의 분대에게 손짓하며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는 기병을 잡아!”
선두에서 달려온 결사대원들이 기병의 말굽에 무작정 달려들어 짓밟혀가며 붙드는 새 할버드를 쥔 다른 보병들이 말 위의 기병을 끌어내려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여명의 장갑보병들이 경비병과 기병들을 잡아두는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남부 기지 안으로 뛰쳐든 사르키스와 30여 결사대는 요란스런 경보음이 울리는 남부 숙영지를 가로질러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미 몇달 간을 함께 지내온 이들에게 남부 숙영지의 구조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낙오자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 전우들이 전진할 수 있게 그 자리에서 적을 최대한 붙잡고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죽어라!”
눈앞을 가로막는 중장보병대 하급지휘관의 목을 공중으로 날려버리며 사르키스가 악을 쓰고 소리쳤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경비병들은 그자리에서 쓰러뜨리면서, 한번에 쓰러뜨리기 힘든 무리는 결사대 중 몇 명이 이탈해 ‘담당’하면서 결사대는 조금씩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사르키스가 남부제후군 기지를 목숨을 걸고 돌파하고 있는 동안 서부제후군의 기지 안에도 이쪽을 숨어 들어오고 있는 또 한 무리의 ‘결사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즉석에서 급조되어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고 있는 서부 결사대와는 달리 미리 짜여진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미 어제부터 이곳 서부연합군의 숙영지 내에 잠입해 있었다. 이들 역시 서부 결사대와 마찬가지로 이전 적진이 되어버린 이곳의 내부구조를 마치 안방같이 잘 꿰고 있었다.
“저기 있군,”
델루지 가 기동보병대 소속의 누마 피카르 교위는 지난번 플라칼 가 영지의 고원 눈밭에서 놓쳤던 그 아까운 표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서부 경보병 복장의 두 명의 부하들을 거느린 그는 2중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코리온의 숙소와 셔틀, 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냥 들어가 죽여버리면 안됩니까?”
“닥쳐.”
부하의 철없는 소리를 한마디로 일축해버린 누마는 주변에 누가 없는지부터 조심스레 살폈다. 철조망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는 거칠어 보이는 병사들은 얼핏 보기에도 용병임에 틀림없었고 숙소 주변에 늘어진 초소도 족히 4개는 되어 보였다. 물론 누마가 저것들을 모두 뚫고 들어가 코리온 암살을 시도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해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무기 대신 자그만 스캐너 한 개가 쥐여있었다.
“녀석이 행여라도 셔틀로 달아나면 여지없이 추적당하는 거고.......한번에 차들을 왕창 풀어서 섞여 도망가도 우리가 여기서 집어내 줄텐데 뭘 신경쓰나.”
키득거리던 누마는 안쪽에서 셔틀 엔진을 점검하고 있는 엔지니어가 보내는 비밀스런 눈짓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런 소음에 어깨를 으쓱 한 그는 들고있던 스캐너를 작동시키며 입가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여기서 구경이나 하자구. 녀석이 어떻게 도망치는지 본대에 알려줘야 할 테니.”
코리온이 탈출을 시도할 상황을 대비해 달아나는 차량과 셔틀을 잡을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 이상 그가 골치 아프게 저 안에 뛰어드는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기와이어 제너레이터 앞에 힘겹게 도착한 사르키스 곁에는 겨우 십여 명 정도의 결사대원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쪽의 손가락 세 개와 귀가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은 채 이곳까지 전진해온 사르키스는 믿어지지 않을 돌파를 이루어낸 부하들을 한번씩 돌아보았다. 이미 이곳 주변은 뒤를 쫓아온 수백의 남부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결사대원들이 살아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됐습니다!”
제너레이터를 막고 있는 강화펜스를 녹여내고 안에 기어든 병사는 동력을 공급하는 굵은 케이블을 성공적으로 잘라내고는 성공했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조금 떨어진 예비전원 쪽으로 달려간 녀석들에게서도 방금 전 ‘성공’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왔으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이 남아있었다. 문득 공중을 올려본 사르키스는 하늘높이 솟구친 제너레이터에서 울리던 기분 나쁜 불빛과 소음이 조금씩 사그러드는 모습에 입가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제 놈들이 예비장치를 급히 작동시킨다 해도 최소한 셔틀과 수송선을 띄울 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터였다.
“수고했다.”
이곳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봉쇄한 채 돌진해오고 있는 남부 경비병들을 한번씩 돌아본 사르키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군님.”
씁쓸한 미소를 지은 결사대원들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 못할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이곳까지 달려온 길목 곳곳에는 남은 결사대들의 진격을 위해 최후까지 시간을 끌어준 동지들의 시신이 산산조각난 채 곳곳에 널려있었다. 두 팔을 벌려 보인 사르키스는 적병들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제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르키스 이스마엘 세호. 서부 2제후 세호 가 상급귀족이며 주페 리쿠 태자저하의 사촌동생이며 서부연합군 부사령관이신 라바니 세호 경의 부장이다.”
“썅! 다 죽여!”
분노 어린 함성을 지른 남부 보병들 백여 명이 마지막 남은 서부 결사대를 난도질하며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그들을 바라보며 큰 한숨을 내쉰 사르키스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외아들을 전장에 내보내고 홀로 떨고 계실 어머니 뤼렌 부인, 먼저 간 여동생 마리안과 지금쯤 카렐 곁에 있을 조카 솔을 머리에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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