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8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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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02년에 있은 타르서스 별궁의 준공식은 그와 동시에 열린 황제와 바니샤드 플레렌 대공과의 결혼식으로 큰 축제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다른 제후들을 배신하고 황제와 전격적으로 손잡아버린 서부제후연합 대표의 결혼식에 남부와 북부는 당연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비교적 중립을 지키고 있던 ‘동부’ 제후쪽에서는 대표인 암바카이 슈트란이 맏아들인 쿠툴라와 차남인 샤자한까지 함께 데리고 그 자리를 축하해주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래 프라임 지역을 탈환하는 대로 가지려 했던 혼례식이 이렇게 앞당겨진 건 바니샤드 대공의 재촉 때문이었다. 황제에 오른 세나우스 2세는 그 추하던 외모를 바로잡고 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색에 빠져들고 있었고, 이 미혼의 황제 주변에는 이미 20명이 넘는 남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인가는 황제가 이미 그 남자들 중 한 명의 아이를 임신중이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황후위를 약속받고 있던 바니샤드로서는 한가롭게 프라임 지역 탈환만을 손가락 빨며 기다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3년 전에 발 가 출신의 부인과 일방적으로 이혼해버렸던 그로서는 자칫 이도저도 모두 놓친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코를 꿰어버리기 위한’ 황제의 주도면밀한 계획의 결과물이라는 것까지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계획’의 결과물은 결혼식 8개월 후, 기원 103년에 황제가 소문대로 첫아들인 로노를 낳으면서 가히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바니샤드 공만 이래저래 바보 됐군요.”
강보에 싸여 유모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베흔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둥글고 선이 굵은 얼굴에 선명한 몽골리안의 이목구비, 그리고 얼굴 골격과는 조금 안 어울리는 듯한 짙푸른 눈동자를 지닌 이 아기는 누가 보기에도 바니샤드의 아들은 아니었다.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저은 베흔이 먼저 와있던 총리 오르마즈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누구 아들이랍니까?”
“황상께서 아이 아버지에 괜한 관심을 두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을 텐데.”
“뭐, 알 사람은 어차피 다 알던데요.”
베흔이 키득거리며 대답을 재촉하자 오르마즈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듣자하니 하렘에 있는 가잔 클라투스 녀석 아들이라는 것 같더군.”
“어쩐지, 암바카이 그놈이 혼례식에 왜왔었나 했더니......서부가 보기 좋게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하나 들고 뛰쳐든 거군요?”
베흔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탈라스의 유목가문인 클라투스 가 출신의 가잔은 1년쯤 전부터 황제에게 꽤나 총애를 받으면서 침소에도 자주 드나들었던 탈라스 출신의 건장하고 남성미 넘치는 사내였다. 묘한 시선으로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오르마즈가 자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건 저 아기는 혼외자(婚外子)라는 거지. 황상께는 이제 바니샤드 대공이라는 정식 남편이 있으시니......”
“무슨 뜻이죠?”
입으로는 묻고 있었지만 베흔은 오르마즈와 마찬가지로 동부 혈통의 아기를 먼저 덜컥 낳아버린 황제의 속셈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후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 뻔한 바니샤드에게 미리 견제역할을 할 아들을 낳아두려는 것이 황제의 속내일 터였다.
“그럼 다음번엔 바니샤드의 아기를 낳으시겠군요. 후훗. 동부 피가 섞인 혼외자 장남과, 서부 피가 섞인 혼생자인 차남과.......누구를 장태자로 삼으실지는 황상 마음이니......동부하고 서부가 그분 입술만 바라보면서 똥줄이 타들어가게 하시겠죠?”
베흔의 수다에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는 황후위를 차지하면서 황실의 가장 큰 후원자로 등장할 서부의 바니샤드에게 순순히 끌려다니지만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현한 셈이었다.
“세상 참 달라졌군.”
오르마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떠안지 않겠다고 도망다니던 ‘제위’가 부족하나마 황실이 부활하면서 이제 모든 야심가들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력한 전제황권을 꿈꾸는 세나우스 2세가 있었다. 이제 황제에게 남은 목표는 오르마즈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빌루이 카파키 공이 아직까지 점령하고 있는 옛 수도, 프라임 지역을 탈환해 권력을 되찾는 것일 터였다.
첫 태자를 출산한 후, 아직 다 풀리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황제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별궁 한켠에 새로 완공된 황실 유전자 연구소였다. 그는 이곳 신임 실장인 자그룰라 모렌 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연구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차였다. 샤미르 리쿠 시절, X들의 합성을 위해 추진되었던 ‘사에나 프로젝트’의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한 그는 이 젊은 황제가 새로이 재개한 ‘가디언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 겸 연구실장으로 더할나위없는 적임자이기도 했다.
“다행히 구황궁에 보관되어있던 옛 연구샘플을 북부의 손에 빼앗기지 않고 모두 이곳에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X혈통 개량사업 자료부터 시작해서 S혈통의 혼인기록, 수정기록자료들도 모두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황제는 한쪽의 큰 벽을 가득 채운 X-1세대부터 5세대까지의 어마어마한 유전자 샘플들을 죽 둘러보았다.
“X들이 합성되지 않은지는 얼마나 되었지?”
“샤미르 리쿠 님이 돌아가시면서 예산부족으로 X들의 추가합성은 중단되어왔습니다.”
“내 지시사항은 이미 하달되었겠지?”
황제가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묻자 모렌 박사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아버지인 세나우스 1세 시절 중단되었던 새로운 X 개체들의 합성을 그가 비밀리에 모렌 박사에게 지시한 건 장기적으로 황실을 수호할 정예병력자원의 공급을 위한 것이었고 제후군들에 대한 황실근위대의 질적인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산부족으로 오랜 기간 중단되었던 이 사업에 새로이 손대면서 당장 황제가 맞닥뜨린 문제는 ‘돈’에 있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그 사업을 재개할 자금을 들고 비밀리에 찾아온 건 새로 태어난 로노 태자와 연계되어있는 동부제후연합의 암바카이 슈트란이었다. 황제 역시 자신의 이런 ‘핏줄장사’가 먼 미래에 자칫 큰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지만 황실 수입원이라고는 이 가난한 타르서스의 주민들과 서부로부터 들어오는 약간의 돈이 고작인 입장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게 뭔가?”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가 보관실 안쪽의 작은 밀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저기는 역대 황실분들의 세포를 모셔둔 특별보관실입니다.”
모렌 박사의 안내를 받아 그 자그만 방에 들어선 황제는 벽에 순서대로 걸려있는 역대 황실 직계들과 그 배우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훑어 내려갔다. 그러던 황제의 표정은 숙부 샤미르 리쿠와, 그 옆에 걸려있는 오르마즈의 이름에서 순간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저 양반 것도 여기 있었군.”
황제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분께서는 황실 중시조이시고......유전자 개량사업 이후로 탄생하신 유일한 완전발현자이십니다. 그리고 저 분 이후로도 발현자가 아직 한 분도 나오지 않았으니......”
“알아.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지.”
황제가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황족 최초의 ‘발현자’였던 샤미르였지만 많은 S혈통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황제가 언뜻 들은 일은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거의 대부분의 소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진위를 알 수 없는 풍문일 뿐이었다.
당시 TSG의 지도부였던 아케메니안 궁은 몇몇 제한된 사람들 외에는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공포의 성역이었고, 그나마 샤미르 리쿠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를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소수의 선택된 자들 역시 희미한 실루엣 정도만이 구분되는 짙은 베일로 2중으로 또 한번 보호된 그의 그림자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대화 역시 필답으로만 오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핏빛 비수’ 샤미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기나 한 것인지조차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눈으로 본 사람들---운 없이 그를 보고 만 경비병, 혹은 그를 치료했던 의사, 그리고 그의 사후, 시체를 보았던 사람들까지---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당시의 ‘불문율’에 따라, 그 즉시 끌려나가 목이 잘리웠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를 시중들던 시녀와 시종들도 안구가 제거되고 귀머거리로 만들어진 불쌍한 희생물들이었다.
그에 관해 알려진 건 그가 남자라는 것과,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감추기 이전, 아기 시절의 모습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을 세상 유일한 사람인 오르마즈는 ‘고인의 유지’ 라며 아직까지 샤미르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배우자도 아닌 오르마즈 경의 세포가 왜 함께 있나?”
황제가 불쾌한 듯 낯을 찡그리며 묻자 모렌 박사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샤미르 리쿠 님의 유언으로.......”
“망할.”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그 방에서 성큼 나서던 황제는 무언가 머리에 떠오른 듯 뒤를 한 번 휙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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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탈고분까지.....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