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1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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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이 사막 북동쪽 경계의 계곡 초입에 뒤늦게 도착한 샤드니는 문이 뜯겨진 채 버려진 셔틀과 용병들의 시체에 그만 충격을 받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리온의 실종소식에 당황한 그는 이미 남부의 영향권에 들어간 키타이 사막 북동부 일대에 수백 대의 수색셔틀과 정찰병들을 뿌려놓는 위험까지 감수했지만 코리온의 행방은 도무지 발견되지를 않고 있었다.
“제 잘못입니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전장에서 입던 갑주도 채 벗지 못한 채로 달려온 샤드니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코리온의 짐가방을 부둥켜안은 채 계속 눈물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최고제후님, 위험합니다. 이 일대에 적 정찰병들도 온통 깔려있습니다.”
부장이 걱정스러운 듯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샤드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희 정찰병들도 적 정찰병들과 20차례가 넘게 조우했습니다. 저희가 남부나 동부 놈들보다 정찰능력은 훨씬 우수하니 이곳은 일단 아랫사람들에게 맡겨두십시오. 좋은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관의 거듭된 설득에 샤드니가 마지못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지난밤 전투에서 서부연합군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만이 넘던 낙타병부대에서 거의 2천여의 전사자가 생겼고, 보병대의 손실도 5천이 넘었다. 결사대를 이끌고 들어갔던 사르키스 역시 전사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그 행방조차 묘연했다. 하지만 샤드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손실은 코리온마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핏발선 눈을 부릅뜬 샤드니가 이를 악물며 낮게 말했다.
“3일 내로 학장님을 찾아내지 못하면......정찰대 지휘관놈들 모가지를 다 베어버릴 테다. 알겠나! 앙!”
“그 썅놈의 새끼! 잡히면.......잡히기만 하면......”
응급수술을 끝내고 나온 제롬이 손에 잡히는 린넨을 집어 옆에 무작정 내던지며 아픈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남편의 부상소식에 놀라 남부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은 베흔의 응급조치 덕택에 남편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에 그의 큰 손을 붙들고 말없이 흐느끼고만 있었다. 제롬의 외동딸 세데스를 한 팔에 안고 선 베흔은 차마 울분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어머님은 어디계시죠?”
오르테 부인이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묻자 베흔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 타르서스에서 탈라스에 오긴 하신 모양인데......이곳에는 못 오실 모양입니다. 통신으로만......”
“도움은 못 주실 망정 그 망할 가디언녀석하고 눈이 맞으시다니......”
오르테 부인이 이를 빠드득 갈며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대놓고 드러냈다. 솔을 쫓아내기 위해 잠시나마 손잡았던 이 희한한 고부지간은 카렐 문제로 또다시 원수지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타르서스 지방정부를 통해서 가까스로 네페티 부인에게 아들의 부상소식을 전했던 베흔은 사실 이 기회에 네페티 부인의 모성애를 최대한 자극해 이쪽 병영으로 불러들여서 제대로 ‘붙잡아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페티 부인 역시 베흔의 그런 빤한 수작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부인은 도리어 자신이 와 있는 기르기트로 제롬을 보내주면 어머니로서 안전하게 돌보아주겠다는 역공까지 펼치며 베흔을 힘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부인이 이곳 탈라스에 와 있다면 그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중상을 입은 카렐을 옆에서 돌보아주고 있을 네페티 부인을 머리에 떠올리면 베흔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를 그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수술실에서 갓 나온 아들과 연결된 통신에서 눈물까지 펑펑 흘리던 네페티 부인의 모습은 잔뜩 뒤틀려있는 베흔에게 도무지 위선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손녀 세데스를 제롬의 품에 돌려준 베흔은 자신과의 진짜 관계를 절대 밝혀줄 수 없는 이 귀한 신분의 자손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아쉬움을 절감했다. 신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자신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며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병영 의무실에서 나선 베흔에게 미리 기다리던 누마 피카르 교위가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추락지점에서 반경 300스타디아를 모두 이잡듯이 뒤졌지만 녀석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서부 정찰병 녀석들까지 계속 발견되면서......”
“하긴, 우리보다 더 똥줄이 타는 건 그놈들일테니......근데 그 망할 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베흔이 눈가를 찌푸렸다. 녀석이 하고많은 말 중에 그 빠른 ‘조황비전’을 타고 도망치면서 수색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도 사실 그로서도 감이 오지 않았다.
“5시간 전에는 샤드니 플레렌 녀석까지 셔틀 추락지점에 직접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해 보였다고 합니다.
“후훗, 그러시겠지. 약혼자가 그리됐으니 오죽하시겠어.”
녀석들이 네페티 부인을 사막에 내버렸던 바로 그때를 머리에 떠올린 베흔은 내심 고소함에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자, 잠깐......샤드니 그놈이 직접 나와있기까지 했다고?”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 베흔은 제자리를 맴돌며 턱을 똑똑 두들겼다.
“뭐......별 손해볼일도 없는 듯 하니 장난이나 좀 쳐볼까?”
“예?”
“지원실에 가서 말이야......키 6척 3촌쯤 되고......잘생기고 몸매 날씬하게 잘빠진 남자 몇 놈만 뽑아와 봐.”
키타이 기지 서쪽 주기장에 느닷없이 착륙한 수송선을 보며 기사단 녀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천 명 가까운 경기병대 부상자들이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 중형 수송선에 차례대로 오르고 있었다. 아예 주둔지 자체가 이동되는지, 그들의 말들과 무기들, 장비와 일상용품들까지 모조리 함께 실리면서 주기장 주변은 제법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야? 어디 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2기사단장 릴라크에게 넉살좋게 웃음지은 경기병단장 루코프가 사뭇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기병단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요......수술순위를 기다리기도 힘들게 됐고......그래서 슈카른 계곡의 동부연합군 숙영지에서 일단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재활훈련도 그쪽에서 동부기병들하고 하구요.”
“하긴,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네들 쪽에서는 부상병은 거의 안나온 모양이니까.....”
릴라크는 루코프의 대답이 그럴듯한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루코프가 치료순위 문제 때문에 어제 사령관 헤즈 경과 대판 싸웠다는 소문 정도는 익히 들은 후였다.
“근데, 동부 놈들 남부사람이라고 괜히 텃세부리지나 않을까 걱정되네.”
릴라크의 공연한 걱정에 루코프가 냉큼 대답했다.
“그래봤자 여기서 홀대받는 만큼 하겠습니까.”
그의 다분히 감정 섞인 대답에 릴라크가 조금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부상병들의 탑승이 모두 끝났다는 부장의 손짓에 릴라크에게 가벼운 목례를 올린 루코프가 마지막으로 그곳에 오르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뵙죠.”
피식 웃음지은 루코프가 먼저 탑승한 부상병들을 따라 급히 수송선에 뛰어들었다.
남쪽하늘로 사라져 가는 수송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돌아서던 릴라크는 사령부 쪽에서 허둥지둥 달려온 부장의 모습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나?”
릴라크의 질문에 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30분 전에 키타이 사막 동북부로 학장놈 수색작업을 하라고 경기병단을 보냈는데......그 수송선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른 릴라크가 남쪽 먼 하늘을 휙 돌아보았다. 경기병단 부상병들과 루코프가 탄 수송선은 이미 사막의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린 후였다.
“이, 이런......맙소사......”
동맹군인 동부연합군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나마 안도한 남부 경기병들이 수송선 도크 안에서 모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수술순위가 늦어지면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던 중상자들도 지금껏 그들을 돌보아준 동료들의 손을 붙들고 안도감을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고 채 10분이 되지 않아 어디엔가 착륙하는 듯 한 진동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리고 동시에 도크 주변의 출입문을 일제히 막아서기 시작한 부대 간부들의 모습에 그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출입문을 빈틈없이 봉쇄해.”
누군가의 목소리에 비장과 소대장급의 이들 지휘관들은 손에손에 무기들을 든 채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이들 부상병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계 섞인 모습에 활기가 되살아나던 병사들 사이에 묘한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도크 안의 스크린이 작동된 건 이 긴장된 상황이 벌어지고 3분여가 지난 후였다. 그 스크린에는 피묻은 칼을 쥐고 선 경기병단장 루코프와, 베아트릭스 시절 그를 충실히 따랐던 경기병대 주요 간부들이 수송선 조종사들의 목뒤에 무기를 겨누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는 루코프의 발 밑에는 부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델루지 가 연락관 2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은 308번 수송선과 201번 수송선 모두에서 보고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루코프가 눈을 치켜뜨며 308 수송선의 9백여 부상병들과, 자신들이 사막 북동부로 정찰임무를 떠나는 줄로 알고있던 201수송선의 8백여 ‘성한’ 병사들 모두에게 한번씩 시선을 주었다.
“지금 이 모습에서 이미 내 결정을 눈치챈 녀석들도 있을 줄로 안다.”
경악하는 부하들을 무섭게 바라보는 루코프의 목소리가 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가늘게 떨렸다.
“우리 경기병단은 장기전이 될 뻔했던 베하라 요새 공략을 단 5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했고, 루사에서는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전멸위험에 처했던 기사단을 살려낸 주역이었다.”
루코프는 많이 긴장한 듯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러나 너희들도 잘 알듯이......우리가 비록 대우를 바라고 군대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으나......5천명이던 우리의 전우들이 3분의 1인 천 7백으로 줄어들 동안 우리에게 충원된 병력은 겨우 49명에 불과했으며, 우리의 말들은 사료조차 제때 먹지 못하고, 기사단의 말들이 쉬는 마구간도 아닌 거적 밑에서 밤을 지새면서 비루먹어가고 있다. 우리는 죽은 전우들의 창을 빌어 쓰고 바닥에 떨어진 투창을 다시 주워 펴서 써야 할 정도로 한심한 지경에 처해 있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아니면 적군에 패해 그렇다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겠으나, 우리는 이 풍요로운 군대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루코프의 말에 동요한 병사들이 사방에서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치료까지 거부당하면서 우리가 충성한 것이 황실자손도 아닌 델루지 가의 멍청이 아들놈들이란 말이다!”
루코프가 이를 빠드득 갈며 수송선 사령실에 걸려있던 델루지 가 문장과 제롬, 수우의 명패를 바닥에 사정없이 동댕이쳐버리자 병사들 사이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제국의 당당한 시민으로서.......난 지금 카렐 태자 전하가 계신 기르기트로 가서 ‘동맹군’의 일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대의 주요간부들 중 절반 이상이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그곳에는 우리의 지휘관이셨던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께서 경기병단장으로 계시며, 우리의 귀순을 환영해주시겠다는 뜻을 방금 전 보내주셨다.”
루코프는 갑자기 침묵 속으로 빠져든 부하들을 빙 둘러보았다.
“너희들 대부분이 플라칼 가 영지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돈 없고, 빽 없고, 출신도 변변찮아서 기사단에 가지 못하고 이곳으로 밀려온 것도 잘 안다. ‘기병대’라는 폼 나는 모습에 홀려 온 녀석들도 많을 것이고,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다른 가문 군대에서 지휘관이 되기 위해 온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너희들의 공통점은 너희들 모두 젊고, 혈기 넘치는 제국 시민이며 명예로운 귀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제해두마. 지금 동맹군은 동부 3개 가문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으며, 그곳이 너희의 마지막 소속부대가 될 수도 있다.”
입술을 굳게 깨문 루코프가 혼란스러운 표정의 병사들에게 낮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영광스런 죽음을 맞고 싶은 용사들은 308수송선에, 플라칼 가로 되돌아가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녀석들은 201수송선에 옮겨 타라. 확신이 없는 녀석들을 데려가 전전긍긍하고싶지는 않다. 201수송선의 무사귀환은 보장한다.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들은 동료들이 옮겨줄 것이다.”
루코프의 손짓에 사막 한중간에 나란히 착륙해 있던 두 대의 수송선 도크가 일제히 열리며 바닥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제발......부탁한다.”
긴장한 루코프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따라 ‘귀순’을 택하는 병사들이 소수라면, 반란을 주도한 지휘관들은 기르기트로는 가 보지도 못한 채 분노한 사병들의 손에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보십시오!”
루코프의 부장이 바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201 수송선에 있던 성한 병사들이 별다른 망설임조차 없이 자신의 말을 이끌고 기르기트로 갈 308수송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 대장님께!”
308수송선의 병사들 역시 자신들의 수송선에 오르는 동료들에게 일제히 환영의 휘파람을 불며 부상병들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의 귀청 따가운 함성으로 도크 안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에 힘을 얻은 루코프는 그 강건한 팔을 번쩍 치켜들며 이 작은 성공을 자축하는 힘있는 함성을 내질렀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201수송선 안에 남아 머뭇거리고 있는 병사들은 기껏해야 100명 남짓이 고작이었다.
“태자 전하께!”
누군가의 선창에 병사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를 올렸다. 그간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학살당하다시피 해 온 이들의 분노는 결국 1,600명이나 되는 기병들의 ‘집단귀순’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플라칼 가 수뇌부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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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상 저녁에 못올리고 조금 앞당겨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