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3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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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거리는 마차에 맥없이 누워있던 코리온은 옆에 웅크려 앉은 라스를 문득 돌아보았다. 말굽에 밟혀 부러져버린 다리에 부목을 댄 라스는 퉁퉁 부어오른 발과 다리를 주물럭거리며 연신 끙끙거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짐짓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워서 부러진 다리를 위로 올리도록 해라. 그렇게 앉아 있으면 며칠가도 부기가 빠지지 않을 거다.”
“제가 어떻게 감히......”
라스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으니까 내 옆에 누워라.”
눈을 가늘게 뜬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잠시 눈치를 보던 라스가 주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조심스럽게 누웠다. 탈진한 기색이 역력한 코리온은 흐릿해진 눈으로 더러운 마차 덮개만을 올려보고 있었다.
“서부로 돌아가거든......널 면천시켜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한참의 침묵 끝에 코리온이 입을 열었다.
“예에?”
눈을 휘둥그레 뜬 라스가 주인을 휙 돌아보았다.
“저, 정말이세요?”
눈을 지그시 감은 코리온은 그 이상 친절하게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노예들의 꿈인 ‘면천’이라는 단어를 귀에 들은 라스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한참 좋아하던 그의 표정은 잠시 후 무슨 이유엔지 조금 시무룩해졌다.
“저어......주, 주인님.....”
“왜.”
코리온이 눈을 감은 채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저어, 그 후에도 제가 계속 주인님 곁에서......몸종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코리온이 라스의 검은빛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주인의 매서운 시선에 화들짝 놀란 라스가 눈동자를 떨구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코리온은 거적 한쪽을 조금 걷고 마차 바깥을 내다보았다. 늦은 오후의 열기가 아직 아지랑이를 피우며 남아있는 사막의 누런 지평선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몸을 일으킨 라스가 코리온이 베고있는 뜨뜻해진 모래 베개를 다시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열이 있네요?”
라스의 걱정 섞인 말에 코리온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간 허약해졌던 몸에 극심한 일사병과 탈수까지 겹쳐버린 코리온은 어젯밤 사막에서의 야영 이후로도 변변한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근을 새카맣게 덮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일 것으로 알았던 남부제후군들과 지금껏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남부 경기병단---카렐에게 집단귀순해 버린---이 수색했어야 할 그 구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코리온은 이 뜻밖의 ‘행운’에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행운이 얼마나 오래 가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죠?”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 소리에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라스가 거적 한쪽을 조금 들쳐보았다.
“주인님......어쩌죠? 군인들인데요?”
라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5기 정도의 기병들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현기증 때문에 아직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는 코리온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갑주가 어떻게 생겼냐? 색깔하고 모양이......”
“은색이고......판으로 뒤덮여서 온몸이 번쩍번쩍하는데요.”
“남부 중장기병이구나.....”
코리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얀 시에 접근하는 캐러밴 루트 한쪽 초소를 지키고 있던 이들 플라칼 가 3기사단 기병들은 2마리의 말이 끌고 가는 이 마차 행렬에 급히 정지신호를 보냈다. 코리온과 라스는 마차에 가득 실린 양가죽더미 속에 몸을 깊이 감추며 숨을 죽이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침략군’인 남부 놈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얘기에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저들 유목민 부부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코리온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유목민인가! 무슨 부족이야!”
행렬을 정지시킨 기병 분대장이 마차를 몰던 남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케레이트 지르긴 씨족입니다.”
남편이 뒤따라오는 말과 양들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이 사막 한중간에서 웬 검문이죠?”
부인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거적 밖으로 삐끔히 눈을 내민 코리온은 더위에 지쳐 잔뜩 짜증이 나 있는 남부 기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더위 속에서 저 무거운 중갑주을 입고 검문을 하려니 꽤나 고역스런 일일 것은 틀림없었다. 마차의 그늘 속에 급히 뛰어든 그들은 투구를 벗으며 얼굴을 연신 손으로 부채질해대는 모습이었다.
“수배령 떨어진 잘난 유학자선생 한 분이 도망치셨다는데 우리야 알 게 뭔가. 이미 잡혔다니 내일부터는 이젠 이런 검문 없을 거야. 제에기랄, 이미 잡혔다면서 도대체 철수령은 언제 떨어지는 거야.”
제대로 검문할 생각도 없는지 마차 안을 건성 들쳐본 분대장이 별것 없다는 뜻으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잡혔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양가죽더미 속에 숨어있던 코리온 역시 자신을 이미 잡았다는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행여 자신이 버려 두고 온 무슨 흔적이라도 발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코리온이 갑자기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저들 5기의 중장기병 분대는 왔던 방향으로 급히 말을 몰아 멀어지고 있었다.
“휴우,”
마차 고삐를 잡고있던 남편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작 구사일생한 코리온은 그들의 믿어지지 않는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채 우두커니 누워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주인님? 잡긴 누굴 잡아요?”
양가죽을 헤치고 나온 라스 역시 꽤나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코리온은 사막 밖으로 다시 머리를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키타이 사막의 기지를 남부 플라칼 가에 빼앗기고 꽤 멀리 떨어진 이르티쉬 사막으로 가까스로 탈출해온 서부연합군은 이틀 전의 패전을 처절하게 곱씹고 있었다. 이들에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타격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코리온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간이에너지장벽 설치는 일단 끝났습니다. 자기와이어 장비는 오늘 저녁에나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부사령관 라바니 경의 보고에 샤드니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 식사조차 거의 거른 채 정찰대에서 들어오는 소식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샤드니는 퀭해진 눈으로 창 밖만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패전 소식에 영지인 푸스타트에서 이곳까지 급히 달려온 4제후 알리 샤디 경 역시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최고제후님!”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사령관 막사 문을 열어젖히며 뛰쳐들어온 하지즈 장군의 얼굴은 이미 흙빛이 되어 있었다. 샤드니가 힘없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뭣 때문에 그러는가.”
“하, 학장님께서......”
‘학장’이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샤드니가 대뜸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꿇어앉은 하지즈 장군이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처절하게 절규하듯 입을 열었다.
“지난번 그 계곡에서......남부 놈들이 학장님 시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지즈 장군의 보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샤드니는 그대로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어라고? 시, 시신이라고?”
“계곡 중간의 막다른 절벽 구석 바위틈에서......동사하신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지난밤을 넘기지 못하고 변고를 당하신 것 같습니다!”
“말도 안돼......말도 안돼......그분이 그렇게 쉽게......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엉금엉금 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샤드니가 급히 갑주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하지즈 장군이 샤드니의 두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지금 남부놈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고 하니 위험합니다! 접근하시면 안됩니다!”
“놓지 못하나! 장갑보병 50명하고 근위기병 50명 당장 대기시켜! 내 직접 나가 확인해야겠다!”
“각하, 제발, 이러시면 안됩니다! 지금 그 일대에 적 기사단과 정찰병들이 온통 깔려있다고 합니다! 차라리 나중에 협상을 해서 찾으심이.....”
“내 직접 나가 학장님이 맞는지 확인하겠다니까!”
“그쪽에 나가있는 아군 정찰병이 이미 확인했습니다, 세작들의 첩보도 일치합니다. 그러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놈들이 뭘 안다고! 남부놈들이 시신을 가져다가 무슨 못된 짓을 할지 아는가!”
흥분한 샤드니가 고함을 버럭 내질렀지만 하지즈 장군이 그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각하께서 가실 일이 아닙니다!
“다 필요 없다, 내가 직접 가야 돼, 내가.”
마치 실성한 듯한 샤드니는 갑주를 챙겨 입기가 무섭게 창과 칼을 움켜쥐고 급히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셔틀을 타고 급히 멀어져 가는 샤드니를 망연하게 바라보던 라바니 경에게 장교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기르기트에서 적 수괴 카렐이 최고제후 각하를 찾습니다.”
카렐이 이쪽에 직접 연락을 해왔다는 말에 라바니 경이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그년이 뭐 하자는 수작이야?”
“우리에게 손잡자는 것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린 알리 경이 물었지만 평소부터 코리온과 샤드니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던 라바니 경은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일축해버렸다.
“미친놈들......안 계시다고 그래.”
라바니 경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난처한 표정의 장교가 한마디 덧붙였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학장님과 관계되었다고......최고제후님과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코리온과 관계되었다는 말에 깜짝 놀란 알리 경이 라바니 경을 올려보았지만 그는 또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집어치라고 그래. 녀석 무리하고 상종하면 무조건 군법회의에 넘긴다는 말도 못 들었나? 끊어버리고 그놈 코드 차단해버려.”
“하지만 학장님 일이라면......”
“됐습니다, 잘난 약혼자님 돌아오시거든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하죠.”
“이걸 어쩌지?”
맘먹고 연락을 취한 서부연합군 쪽에서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자 페로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개인할룩스도 녀석들 사령부에서 통제하고 있을 테니......내가 갈 수도 없고......”
자신의 망가져 버린 몸을 야속하게 바라보던 카렐은 네피와 라손을 손짓해 불렀다.
“북부 보병 200명하고 슈로 기사단 100기만 데리고 당장 그 계곡으로 출동하도록 해라. 아무 일 없으면 상관없지만.......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샤드니 그놈을 반드시 지키도록 해라.”
“뭐, 시키니까 하긴 하겠지만 그 망할 녀석을 왜 우리가 지켜야 되는지 모르겠네.”
네피가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마지못해 밖으로 사라져갔다.
코리온의 칼에 찔린 아들과, 그 코리온을 구하겠다고 달려간 남동생 중간에서 꽤나 어정쩡한 상황이 되어버린 네페티 부인은 병상에 누워있는 카렐의 손을 꼭 붙든 채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카렐도 그런 네페티 부인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내려 주었다.
어둠이 내린 키타이 사막 동북쪽의 깊은 바위계곡에서는 이번에 중랑장으로 승진한 누마와, 그를 따라온 20명의 델루지 가 기동보병들이 바삐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내려!”
누마의 손짓에 절벽 중턱까지 기어오른 병사들이 밧줄로 묶은 시체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큰 키에 검은 튜닉 차림의 이 날씬하고 잘생긴 남자의 시체는 아직 사후경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바싹 웅크린 채 뻣뻣해져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고놈 그럴듯하네,”
바닥에 내려진 시체를 바라보며 누마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수색임무를 맡은 줄로 알고 이곳까지 따라왔을 이 불쌍한 1년차 보병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다 지가 누굴 닮게 생겨먹은 탓이었다. 시체를 내려놓은 병사들은 이 뻣뻣한 시체를 미리 대기시켜 둔 말 등에 실었다. 이 좁고 험한 계곡 밖에는 이놈 시체를 기지로 실어 나를 셔틀이 근사하게 대기중이었다.
베흔이 생각해 낸 이 ‘쇼’는 설사 실패해도 이 불쌍한 희생물 병사 한 명의 목숨을 빼고는 그다지 손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성공만 한다면, 최소한 코리온을 찾겠다며 이곳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는 서부녀석들의 관심을 잠시동안이나마 돌려버리는 효과로는 충분했다.
물론, 이 황당하기까지 한 쇼를 연출하신 근위대장 베흔은 내심 그 이상도 바라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가자!”
작업을 끝낸 병사들에게 큰 소리와 함께 손짓한 누마는 자신의 말에 훌쩍 뛰어올라 앞장서기 시작했다. 저 불쌍한 녀석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 자신이 이끌고 온 병사는 20여명에 불과했다. 물론 계곡 곳곳에 매복한 보병들과, 외곽을 틀어막고 있는 기사단들의 숫자는 그 몇십 배, 아니 몇백 배 이상이었다. 웃긴 것이라면, 시체를 거둔 이 병사들조차 자신이 진짜 리쿠 학장의 시체를 호위하고 있는 것이라 믿고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라는 격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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