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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45화 (344/1,132)

< -- 345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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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산악병들이 타고 올라왔던 그 케이블을 이용해 계곡 밑으로 내려온 샤드니는 한 손에 칼을 움켜쥐고 방금 확인한 누마의 무리를 쫓아 계곡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슈로 기사단과 북부용병대가 타고 오던 병력수송셔틀을 남부의 것으로 착각해버린 샤드니는 어차피 퇴각셔틀을 착륙시키기도 불가능해진 저 절벽 위에서 승산 없는 저항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즈 장군과 서부기병들이 적병들을 잡아두고 있는 동안 일단 자신의 몸이라도 빼낸 샤드니에겐 이제 ‘코리온의 시체’를 다시 빼앗아 달아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착륙할 위치를 잡지 못하고 선회하고 있던 셔틀 조종사를 불러낸 샤드니가 헐떡이며 지시를 내렸다.

“최고제후다. 절벽 위의 병력은 포기해라. 계곡 출구에서 대기해. 내 곧 그쪽으로 가겠다!”

“예에? 하지만 하지즈 장군님은......”

“당장!”

조종사에게 한바탕 호통을 친 샤드니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누마의 행렬 후미를 발견했다.

“저놈들,”

이를 악문 샤드니가 칼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뒤를 쫓아오는 샤드니와 장갑보병들 발견한 누마 피카르 중랑장 역시 속도를 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20여명의 산악병들 중 15명 정도가 샤드니의 행렬을 향해 무기를 겨누며 뒤로 돌아섰다.

“비키지 못해!”

칼을 치켜든 샤드니가 앞을 가로막는 보병의 방패를 힘껏 후려치며 째져라 고함을 올렸다. 그를 따라온 정예 장갑보병들 역시 할버드를 앞세우고 이 ‘만만한 보병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내달렸다.

“이놈?”

자신의 1격을 방패를 능숙하게 막아내며 하반신을 향해 재빨리 칼을 질러오는 태세가 보통의 보병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적의 손목을 방패로 힘껏 내리친 샤드니는 녀석이 재빨리 물러나며 내던진 방패에 하마터면 머리를 얻어맞을 뻔했다.

“이런 개새끼!”

발끈한 샤드니가 도망치는 병사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 달려가려던 그는 채 3걸음도 딛지 못한 채 눈앞에 나타난 웬 거구의 병사에 딱 가로막혔다.

“안녕하시오.”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묵직한 프레일에 방패를 직격당한 샤드니는 비명을 지르며 한참을 뒤로 밀려나, 아니 거의 튕겨나다시피 흙바닥에 뒹굴렀다.

“뭐야! 뭐 하는 놈이야!”

일격에 산산조각난 방패와 얼얼한 왼팔을 주무르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샤드니는 자신을 후려친 그자가 어쩌면 보통 ‘병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조그만 버클러와 큰 프레일만을 움켜쥔 채 히죽거리고 있는 그 녀석은 몸에 걸치고 있던 거추장스런 갑주를 확 벗어 내던졌다.

“내 웬만하면 생포는 취미가 아닌데.”

짙은 갈색 눈동자를 번득이는 그 장대한 사내는 시민이라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는 소름끼치는 근육질을 뽐내며 샤드니에게 다가왔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샤드니는 녀석의 무지막지하게 발에 가슴을 밟히며 흙바닥에 다시 나동그라졌다.

“대장 명령이니 별수 없지.”

샤드니가 악을 쓰며 그의 굵은 다리를 두들겼지만 마치 무쇠같이 단단한 그 근육덩이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프레일 끝에 달려있는,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소름끼치는 쇠공이 샤드니를 놀리듯 눈앞에서 까딱거리고 흔들렸다. 샤드니의 귀에 꽂은 할룩스로 하지즈 장군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돌아오십시오! 최고제후님! 지금 이쪽 퇴로가 뚫리고 있습니다! 빨리요!”

“이런 얘기 묻기는 좀 미안하지만 말이야, 저 말 등에 얹힌 플라칼 가 보병대 병사놈 시체가 왜 그리 필요한거지?”

“무, 무어?”

순간 얼굴이 백짓장이 되어버린 샤드니는 자신의 목을 쥐고 거칠게 들어올린 적의 마치 반쯤 광기에 취한 듯한 기이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황금빛의 가디언 팔찌가 녀석의 브레이서 틈새로 조금 들여다보였다.

“현역 복귀 기념품치고는 너무 재미없는걸.”

녀석이 누군지를 비로소 눈치챈 샤드니는 순간 온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카렐, 베흔에게 뒤지지 않을 어마어마한 키, 열 개가 넘는 상처들로 마치 캔버스같은 새하얀 얼굴을 가득 채워넣은 이 괴물은 세나우스 3세 시절, 휘하 가디언 다섯 명을 멋대로 때려죽이고 그 시체를 병사들에게 먹여버린 죄로 특등급을 박탈당하고 현역에서 쫓겨났던 ‘도살꾼’ 아리엘이었다.

“이, 이놈을 당장......”

따라온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려던 샤드니는 목을 짓누르는 상대의 손아귀 힘에 결국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델루지 가 특수부대 보병 정도면 자네 잘난 장갑보병들도 상대하기 쉽지는 않을거야.”

“이 망할 놈!”

자신이 얼마나 바보짓을 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고 발버둥치던 샤드니는 상대의 매서운 주먹이 관자놀이에 명중하면서 정신을 잃고 자리에 맥없이 늘어져 버렸다.

하지즈 장군의 기병대와 장갑보병들을 자신만만하게 공격해들어가던 남부 기사단은 느닷없이 후방을 기습한 전사단 병력 때문에 사면초가에 처해 있었다. 베흔은 네피에게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었고 히르직스 역시 발리와 라손에게 잡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200기의 남부기사단은 조금씩 그 기세가 꺾여가고 있었다.

“샤드니 공은 도대체 어딨는 거요!”

히르직스를 가까스로 쫓아낸 라손이 절벽 밑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하지즈 장군에게 급히 물었다.

“학장님 시신을 찾으러 간다고 저 밑에 내려가셨소!”

“제길할! 저런 생각 없는 작자가 최고제후라니!”

임무가 실패했음을 깨달은 라손이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그 인간 제정신이요! 그건 학장이 아니란 말이요! 우리 전하께서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당신네 사령부에 연락해도 받아주지도 않고 말이요! 제길!”

라손의 충격적인 말에 잠시 멍 한 얼굴로 서 있던 하지즈 장군은 절벽 밑으로 늘어진 케이블을 허둥지둥 붙들었다.

“최고제후님을 구하러 가야겠소. 기병들과 이곳을 맡아주시오.”

소스라치게 놀란 라손이 하지즈 장군의 망토자락을 급히 붙들었다.

“저 밑에 매복한 보병이 얼마나 되는데 지금 불구덩이에 뛰어들겠다는 거요!”

“댁이라면 당신네 태자가 저 지경에 처했을 때 구경만 할거요?”

잠시 말문이 막혔던 라손은 막 절벽을 내려가려는 그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우리 전하라면 죽어가는 부하들을 버려두고 저따위 바보짓은 안하시오!”

내려가겠다는 하지즈 장군과, 그를 붙들고 악을 쓰던 라손은 절벽 밑에서 들려온 어미어마한 함성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계곡을 꽉 채우고 이쪽 절벽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 건 족히 1천명은 될 남부 보병들이었다. 밑으로 도망간 샤드니를 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은 하지즈 장군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댁의 학장은 아직 어딘가 살아있다니까!”

라손이 하지즈 장군의 뺨을 거칠게 후려치며 대뜸 소리를 질렀다.

“샤드니 공은 어차피 생포당했을테니 나중에 생각하고 빨랑 당신네 학장이나 찾으란 말이요!”

“부단장님! 이제 물러나야 됩니다!”

발리의 고함소리에 라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베흔이 부른 듯한 몇 대의 지원셔틀이 주변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마지못해 다시 기어오른 하지즈 장군이 다시 말에 뛰어오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퇴각! 퇴각한다!”

창을 곳추세운 북부보병들과 서부 장갑보병들의 후방엄호를 받으며 슈로 기사단과 서부 기병들도 대기하던 병력수송셔틀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사막의 절벽 위에서 펼쳐진 이 크지 않은 혈전은 서부 최고제후의 생포라는, 전례없이 치명적인 결과만을 남긴 채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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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제국의 장래를 뒤흔들 어마어마한 상소가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주축이 된 서부 유학자연합의 이름으로 올라온 건 바로 이 해의 일이었다. 무려 20만이 넘는 서부 유학자들과 서부제후들의 연판으로 올라온 이번 상소는 그 장수만도 거의 몇 권의 책 분량에 달하고 있었다. 그 상소를 눈앞에 받아든 황제는 그제서야 오르마즈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윰 포고령 2차 추가령에 대한 유학자 제위의 제안’이라는 긴 제목이 붙은 그 상소의 내용은 제국을 근본부터 뒤흔들 충격적인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러니까......지금 계급제를 하자......이건가?”

이를 악문 세나우스 2세가 상소를 들고 온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을 매섭게 째려보며 물었다.

“본디 양과 음이 있고, 하늘과 땅이 그 귀함이 다르듯 인간은 그 출생부터 우열이 있고 혈통에 따른 귀천이 있으니 어찌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사회의 비용과 교육을 낭비하겠사옵니까. 지금부터 모든 제국민을 귀족과 평민, 노예로 나누시옵고 이들에게 차등된 기회를 준다면 폐하의 제국은 도리에 맞게 순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미쳤군!”

황제가 혀를 차며 옥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늘 아래 귀한 자는 황제인 짐 뿐이다! 나머지 인민들은 짐을 따르는 제국민일 따름인데, 누가 멋대로 황제인 짐을 흉내내 다른 이를 발 밑에 두겠다는 수작인가!”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닥쳐라! 네놈이 황제의 면전에서 감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당장 꺼지지 못할까!”

“폐하, 인민을 나누어 관리하심은 제니안의 근본사상을 지키는 길이옵고......”

“네놈이 날 바보로 아는구나! 13선지자중에 계급제 나불거리던 자는 둘 뿐이었다! 그런데 너희 멋대로 제니안을 끌어들여 내 귀를 홀리려 하느냐!”

“다른 11분들도 그에 반대하지는 않으셨으니.......”

“이 미친놈아! 아예 관심도 없었던 걸 반대하지 않았다고 네놈들 멋대로 해석해버리는 심보는 또 어디서 나온 거냐! 근위대! 당장 이 늙은이를 쫓아내 버리지 못하겠냐!”

명령을 받은 근위대 병사들이 버둥거리는 학장을 대전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저 꽉 막힌 유학자와의 말다툼에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황제는 괜한 옥좌를 사정없이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제기랄! 저 망할 새끼들! 지들이 뭐라고 감히 황제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이번 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대전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총리 오르마즈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지만 황제는 듣는 둥 마는 둥 안을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사실 서부의 계급제 주장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는 귀족이 있는 계급제 국가는 자신 외의 특권계급이 생기는 만큼 황권강화를 바라는 황제로서는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특권계급의 힘이 커질수록 최고지도자의 힘은 유명무실해져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옛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정신병자 황제가 아니라면 제국 그 자체, 혹은 그 근간인 평민을 최고가치로 둘 수밖에 없지만 ‘귀족’ 이라는 존재들은 항상 스스로의 탐욕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씨발! 저 원리주의 유학자 새끼들을 어떻게 길들어야 하지!”

옥좌를 또 한번 걷어찬 황제는 테라스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창을 확 열어 젖혔다. 골조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170층의 이 황궁은 30층까지만 일단 마감공사부터 끝내놓고 황궁으로 옹색하게 쓰이고 있었지만 ‘강력한 제국‘을 만들겠다는 황제의 그 야심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는 이미 이 1번 도시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황제의 눈에 유난히 거슬리는 무명포차림의 개미떼같은 귀찮은 것들이 이 황궁을 포위하듯 에워싸고 무어라 호소를 해대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1만 명씩이나.

“저 망할 버러지 같은 놈들은 도대체 뭐냐구!”

황제가 마치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학장과 함께 온 원리주의 유학자들입니다.”

황제의 등뒤로 다가온 오르마즈가 대답했다.

“서부로 돌아가 있는 바니샤드 대공이 이 배후에 있을 겁니다.”

“알아.”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황제가 옥좌에 돌아가 앉으며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황제에게 바싹 다가선 오르마즈가 간곡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을 힘으로 상대하려 들지는 마십시오. 유학자들은 같은 유학자들로 상대하도록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젊은 개혁파 유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시고 폐하께서는 뒤로 철저하게 피해 계십시오. 폐하께서 직접 상대하시는 건 정교일치를 바라는 저들의 계략에 결국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원리주의 학자들은 논쟁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약점이 있사오니 학자들끼리 말싸움으로 세월을 허송하게 하시옵고 그 동안에......”

“다 필요 없어.”

황제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저 버러지 같은 몇 놈 대표로 잡아죽이면 돼. 처음에야 도리니 뭐니 생 난리를 치겠지만 결국은 내 발밑에 벌벌 떨며 기게 되겠지.”

끝내 피를 보겠다는 황제의 고집에 오르마즈가 애타는 얼굴로 간했다.

“폐하, 저들을 그렇게 잡을 생각은 버리십시오. 순교를 숭상하는 원리주의자들은 누르면 누를 수록 더 강하게 저항할 것이옵니다. 폐하께선 스스로 제국을 움켜쥘 충분한 힘과 지도력을 지니고 계시옵니다. 왜 굳이......”

오르마즈의 회색빛 눈을 갑자기 매섭게 째려본 황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샤미르 숙부도 그런 식으로 콜로니를 이끌진 않으셨지 아마?”

황제의 심술궂은 한마디에 오르마즈의 입술이 딱 멎었다.

“난 제2의 샤미르 리쿠가 될 테다.”

“......그분께서도 그 때문에 실패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인 오르마즈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성공할 거다. 이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어도 상관없어. 날 따를 정도의 놈들만 남는다면. 그리고.....너하고 말이다.”

황제의 낮은 숨결이 오르마즈의 얼굴에 어느새 바싹 다가와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오르마즈는 황제의 번들거리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16년, 총리 오르마즈의 권고를 끝내 무시한 황제는 젊은 극단주의 개혁파 유학자들을 선동해 원리주의 지도자 40여명을 남극성당에서 집단 살해하는 속칭 ‘1차 학란’을 일으켰다. 계속 심해져만 가면 원리주의 유학자들의 등살을 버티다못한 황제 식의 해결책이었지만 그 결과는 황제의 예상과는 달리 최악의 패착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학란과 동시에 서부와 남부, 황제령에서 30만의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동시에 ‘봉기’수준의 저항을 시작했고, 유학자 살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분개한 10만의 중도파 유학자들과 남부 세력까지 일제히 학란을 비난하며 계급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대세가 조금씩 계급제로 기울면서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은 북-동부의 많지 않은 개혁파 학자들과, 남극성당의 세네피스 카파키 교리와 같은 소수의 비주류 중도파 유학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유학자들의 반대를 핑계삼은 서부제후들이 그간 황실 재건을 위해 지원해주던 특별헌금마저도 일제히 끊어버리면서 아직 재정자립을 이루지 못한 황실의 대규모 토목공사들과 국책사업들이 모두 중단될 위기에까지 봉착하고 말았다. 학란으로 도덕성에까지 치명타를 입은 황제와 황실은 이렇게 즉위이래 최대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에 대항해 내놓은 고집스런 황제의 마지막 해법은 ‘더 많은 피’라는, 더욱 극단적인 방법으로 기울어갔다.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2자 동맹전쟁, 세칭 2차 혼란기의 시작은 이렇게 계급제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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